난 꽃을 그리지 않은 지 어언 20년, 우연히 본성의 참모습을 그렸네. 문 닫고 찾고 또 찾은 곳, 이것이 바로 유마힐의 불이선일세 (不作蘭花二十年, 偶然寫出性中天, 閉門覓覓尋尋處, 此是維摩不二禪)
만일 사람들이 억지로 요구하는 핑계로 삼는다면, 또한 마땅히 비야(*유마거사)의 무언으로 사양하리라. 만향 <秋史> (若有人强要爲口實, 又當以毘耶無言謝之, 曼香)
초서와 예서의 기이한 자법으로 그렸으니, 세상 사람들이 어찌 알겠으며, 어찌 좋아하겠는가? 구경이 또 제하다. <古硯齋> (以草隸奇字之法爲之, 世人那得知, 那得好之也, 漚竟, 又題)
<墨莊> 애초 달준을 위해 아무렇게나 그렸으니 다만 한 번이나 가능하지, 두 번은 불가능하다. 선객노인<金正喜印> (始爲達俊放筆, 只可有一, 不可有二 仙客老人)
소산 오규일이 보고 억지로 빼앗으니 우습구나 <樂交天下士> (吳小山見而豪奪, 可笑) | |
이처럼 그림의 화제가 여럿인 까닭에 그 순서를 헤아려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인데 대략 이런 순서인 듯하다. 우선 이 그림의 경지를 유마힐의 불이선으로 표현한 부분이 가장 먼저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또 그려 달라 하면 유마거사의 무언(無言)으로 사양하겠다는 내용이 아마 다음에 올 것이다. 그 나머지는 초서와 예서의 기자법으로 그렸고 달준을 위해 방필했으며 그리고 그것을 오규일이 달준에게서 억지로 빼앗아갔다는 순으로 이어졌을 것이 일반적으로 보인다. 여기에 찍혀있는 많은 인장 가운데 추사의 인장은 <秋史(추사)> <古硯齋(고연재)> <墨莊(묵장)> <金正喜印(김정희인)> <樂交天下士(낙교천하사)> 등 모두 5과(顆)다.
이 가운데 <낙교천하사> 인장은 소산 오규일(小山 吳圭一)과 관련된 부분에, <김정희인> 은 달준을 위해서 그렸다는 부분에 찍은 인장으로 생각된다. 특히 앞서 3과의 인장은 다른 작품에도 보이지만 <낙교천하사(樂交天下士)> 인장은 유례가 드물다. 있다면 1856년 추사가 치원 황상(梔園 黃裳, 1788-?)의 유고에 쓴 「제치원고후(題梔園稿後」에 찍은 사례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또 <묵장(墨莊)> 역시 「묵법변(墨法辨」을 쓴 작품에서만 현재 그 사용례를 확인할 수 있다. 오규일이 달준에게서 실제로 이 작품을 빼앗아갔는지 어쨌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찍힌 인장을 살펴보면 그후에 명작 『불이선란도』가 세상에 어떻게 전해졌는가 하는 내력을 알 수 있다.
오른쪽 아래에 배접에 맞물려 찍혀 있는 2과의 인장 <奭準私印(석준사인)>과 <小棠(소당)> 은 추사에게 시와 글씨를 인정받은 소당 김석준(小棠 金奭準, 1831-1915)의 것이다. 그리고 그 위쪽으로 보이는 <不二禪室(불이선실)> <茶航書屋書畵金石珍賞(다항서옥서화금석진상, 다항서옥 주인이 서화 금석의 진귀함을 즐김)> <勿落俗眼(물락속안, 속된 사람의 눈에 보이지 마라)> <硏經齋(연경재, 경전을 연구하는 집이란 당호)>를 비롯해 왼쪽 중간에 보이는 <神品(신품)> 인장 등은 모두 당대의 정치가이자 대수장가였던 창랑 장택상(滄浪 張澤相, 1893-1969)이 사용했던 인장이다. 호리병 모양의 <신품> 인장은 논산 갑부로 많은 서화를 수장했던 희당 윤희중(希堂 尹希重) 도 한때 사용했다.
<小桃源僊館主人印(소도원선관주인인, 소도원 신선관의 주인 인장)>은 송우 김재수(松友 金在洙, 1905?-?)가 사용하던 인장이다. 그는 본관이 울산으로 소도원(小桃源)이란 당호를 썼고 소치 작품 등 많은 서화를 수장했으며 무호 이한복(無號 李漢福, 1897-1940)과도 교유했다. 창랑 인장과 소당 인장 사이에 있는 <蓬萊第一僊館(봉래제일선관, 봉래의 제일가는 신선이 사는 집)>과 <素筌鑑藏書畵(소전감장서화)>는 근대 최고로 손꼽히는 서예가이자 감식안이 뛰어났던 소전 손재형(素筌 孫在馨, 1903-1981)의 인장이다. 추사의 명작 『불이선란도』는 이런 소장가를 거처 개성 갑부였던 손세기(孫世基)의 손에 들어갔다. 현재는 그의 아들 손창근(孫昌根)씨가 소장하고 있다.
이 인장을 볼 때 마다 ‘많이 보고,듣고 읽은 벗과 가까이 사귀며 서로 묻고 배우는 것이 진정한 천하의 선비들과 벗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라는 뜻으로 새기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 |
*과(顆) : 인장을 새긴 돌, 나무, 상아, 수정 등 인재 한 덩이 한 덩이를 말한다. *선(僊) : 신선 선(仙)과 같은 글자로 쓰인다. *古硯齋(고연재): 당호로 옛 벼루가 있는 집이란 뜻이다. *墨莊(묵장): 별호(別號)이거나 또는 책이 많다는 뜻이다.
아름답고 좋은 일이 뜻한 대로, <吉祥如意(길상여의)> |
- 추사의 해서《묵서거사자찬》에 찍은 김유근 인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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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지만 사람들은 살면서 복을 기원한다. 예전엔 그것을 오복이라고 했다. 오래 사는 것(수, 壽), 살 만큼의 재물이 있는 것(부, 富), 마음과 몸이 편안한 것(강녕, 康寧), 덕을 좋아하고 베푸는 것(유호덕, 攸好德), 하늘이 준 수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죽는 것(고종명, 考終命)이다. 또는 유호덕과 고종명 대신에 존귀하게 되는 것(귀,貴)과 자손이 번창하는 것(중다, 衆多)를 꼽기도 한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신, 가족 그리고 가까운 사람들이 오복을 누릴 뿐아니라 언제나 '아름답고 좋은 일이 뜻과 같이 이루어지기(길상여의, 吉祥如意)'를 바랐다. 그래서 생활용품 속에 길상의 뜻이 담긴 무늬와 문자를 넣어 사용하면서 이를 기원했다. <길상여의> 인장도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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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근이 사용한 <길상여의> 인장은 추사 김정희가 황산 김유근에게 해서로 써준《묵소거사자찬(墨笑居士自讚)》에 찍혀 있다. 김유근은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의 아들로 세도 정치로 보자면 추사와는 다른 정파에 속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추사는 물론 추사의 벗 권돈인과 더불어 마음을 나누는 단짝 친구였다. 황산은 스스로 세 사람 사이를 세속의 시비를 벗어나 고금의 역사를 논하고 서화를 품평하는 석교(石交)로 비유했다. 석교란 돌처럼 굳게 사귀는 것을 가리킨다. 추사도 김유근을 각별히 생각했는데 추사는 자신의 시에서 ‘십년 동안 지팡이와 나막신으로 함께 했다’고 해 둘 사이의 오랜 우정을 표현했다.(추사의 시《증흥사에서 황산 시를 차운함(中興寺次黃山)》) 또 김유근이 벼루에 새길 글을 써주기 위해 여러 예서체로 연습한 작품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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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소거사자찬(예서)》종이에 먹, 29.2X132.3㎝, 고 조재진 국립중앙박물관 | |
《묵소거사자찬》은 『황산유고(黃山遺藁)』에 실려 있는 글로 묵소거사란 그가 죽기 4년 전에 중풍으로 실어증에 걸리면서 사용한 호이다. 이 작품은 중풍 때문에 목소리를 잃은 벗을 위로하기 위해 추사가 써준 것이다. 추사가 쓴 《묵소거사자찬》은 현재 두 점이 전하고 있다. 하나는 해서체로 쓴 것으로 거기에 이 <길상여의> 인장이 찍혀 있다. 다른 한 점은 예서로 쓴 작품이다. 두 작품은 서체만 다를 뿐 한 줄에 네 자씩 글자를 배치한 점 등이 모두 같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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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 작품에는 <길상여의> 인장 외에도 <默笑居士(묵소거사)> <金逌根印(김유근인)> <불구형사(不求形似)> <흉중성죽(胸中成竹)> <취와일편운(醉臥一片雲)> 등 김유근의 인장 21과가 표구 및 표구와 작품이 잇다는 부분에 빽빽이 찍혀 있다. 예서로 쓴 작품에는 <金正喜印(김정희인)> <阮堂隸古(완당예고)>라는 추사 인장과 <김유근인> <묵소거사> 의 김유근 인장이 찍혀 있다. 추사가 이 작품을 쓴 시기는 황산이 병을 앓기 시작해 세상을 뜰 때까지인 1836에서 1840년 사이로 추정된다. 그래서 이 두 작품은 각각 추사 50대 초반에서 중반에 쓴 해서와 예서의 기준작이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여기서 김유근이 지은 글 내용을 잠깐 살펴보자.
말하지 말아야 할 때 말하지 않으면 시의(時宜)에 가깝고, 웃어야 할 때 웃으면 중용(中庸)에 가깝다. 옳고 그름의 가운데에서 일을 처리하거나 굽히고 펴고 사라지고 자라나는 상황을 맞이할 때. 몸을 움직여서는 하늘의 이치에 어긋나지 않고, 조용히 있으면서는 사람의 정에 거스르지 않는다. 침묵하고 미소를 짓는다는 뜻은 큰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뜻이 전해지는데 어찌 침묵을 상하게 하겠는가! 중용 속에서 나오는 미소인데 어찌 웃음을 걱정하겠는가! 힘써야 한다. 내 정황을 돌아보니 묵소(默笑)로 화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알겠다. 묵소 거사가 스스로 찬미하다.
當默而默, 近乎時, 當笑而笑, 近乎中. 周旋可否之間, 屈伸消長之際. 動而不悖於天理, 靜而不拂乎人情. 默笑之義, 大矣哉. 不言而喩, 何傷乎默. 得中而發, 何患乎笑. 勉之哉. 吾惟自況, 而知其免夫矣. 默笑居士 自讚
추사의 <길상여의> 인장은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테두리를 친 가운데 ‘길상여의관(吉祥如意館)’이라는 글귀를 새긴 것이다. 추사 주변에는 길상여의 글귀를 인장으로 많이 사용하였다. 조희룡, 허련,신헌,한응기, 지운영, 민병석 등이 사용한 것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특히 이들이 사용한 인장은 중국 은주시대 금문(金文)의 테두리처럼 ‘아(亞)’ 자형 안에 글자를 넣고 있어 이 시대 인장의 한 양식을 이루고 있다. 인장의 글자를 새기는 법인 자법(字法)을 살펴보면, 모두 김정희의 <길상여의관> 인장에서 파생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를 통해서도 다시 한 번 인장을 통한 추사 학연과 학맥의 흐름을 엿볼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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吉祥如意館 |
吉祥如意 |
吉祥如意 |
吉祥如意 |
吉祥如意 |
吉祥如意 |
김정희 |
명 문팽(?) 『조선왕실의 인장』 |
김유근 |
조희룡 |
허 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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吉祥如意 |
吉祥如意 |
吉祥如意 |
吉祥如意 |
吉祥如意 |
신 헌 |
한응기 |
『보소당인존』 |
지운영 |
민병석 | |
----------------------- 풍고 김조순(楓皐 金祖淳, 1765-1832) 황산 김유근(黃山 金逌根, 1785-1840) 이재 권돈인(彛齋 權敦仁, 1783-1859) 우봉 조희룡(又峰 趙熙龍, 1789-1866) 순조(純祖, 1790-1834) 소치 허련(小癡 許鍊, 1803-1893) 위당 신헌(威堂 申櫶, 1810-1884) 소정 한응기(小貞 韓應耆, 1821-?) 백련 지운영(白蓮 池運永, 1852-1935) 시남 민병석(詩南 閔丙奭, 1858-19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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