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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공자의 비유:예식에 쓰이는 신성한 그릇
인간이 금수나 무생물과 구별되는 점은 무엇인가? 인간의 고유한 존엄성과 (능동적인 자기 계발의) 힘은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가? 이와 관련하여 공자는 예를 놀랄 만큼 적절하고 유의미한 이미지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최 근년의 비판적 연구의 경향이 (공자에 의한) <개인의 발견>을 강조하고 있다고 해도, 의례와 예식에는 언뜻 보기에 개인이 강조되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개인의 발견>이라는 이 특별한 어구를 쓴 휴즈는 바로 <인간이란 (더불어 사는) 자기 동료들과 연관을 맺고 그 속에 자신을 융합시키려는 시각에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능력을 가진 존재>라는 의미 있는 구별을 덧붙이고 있다.
진영첩은 유사한 방식으로 <공자 철학 전체는 자아의 실현과 사회 질서의 창출>이라고 요약하고 있다. 휴즈와 진영첩이 <개인>-<사회>라는 두 개의 축을 제시하고 있지만, 유무기는 <개인>이라는 축을 더 강조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어떤 관점에서 보더라도 결구 개인이 우주의 중추이다. 공자께서는 정말 천재적인 멋진 솜씨로 윤리적 개인을 (인간의 본질로) 보게 되었다. 이제 개인은 (공자의 관점에 의해) 바로 사회의 기본 단위가 되는 새로운 처지로 격상된 것이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개인의 존엄성이 주장되기에 이른 것이다. 개인의 계발이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가 된 것이다.> 크릴은 물론 공자의 사회적 관심의 방향을 공들여 논의하고 있지만, 그는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문맥에서 공자 사상에 들어 있는 <개인의 제일 적 중요성이나 가치>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임어당(린위탕)은 사회성을 강조하면서 <도는 참으로 인간 자신 안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요컨대 현대 문필가들의 대표적인 글에서 나온 이러한 구절에서, 우리는 광범위하게 되풀이되는 해석 방식을 보게 된다. 이런 간결한 어구를 인용할 때, 이들 어구의 의미를 본질적으로 밑받침해 주고 풍부하게 해주는 앞뒤 문맥에서 일탈하여 (자의적으로) 의미를 왜곡시키는 일이 종종 있다. 이러한 위험 부담이 있다고 해도, 이런 어구들을 인용하려는 나의 의도는 (그 어구들에 대한 많은) 주석들을 총괄하여 원융무결한 해석을 해내려는 것이 아니다. (공자의 핵심 사상에 대한) 개괄적 도식이 피치 못하게 요구될 경우, 나는 차라리 <사회>와 <개인>이라는
관계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개인>에 우선적인 강조를 두면서 종종 도식화해 왔음을 명기해 두고자 한다. 자아실현, 자기완성, <자아의 완숙한 계발>, <개인의 궁극적 가치> 등 이런 (개괄적인) 말들은 공자가 발견한 아이디어들의 특성을 잘 나타내 주는 것으로 사료된다. 그러나 공자는 <개인>과 <사회>라는 양극적 두 개념에 보다는 차라리 <인간다움>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관심을 기울였다고 생각하는 것이 좀 더 타당하다는 논의가 현재 이 책에서 우리들이 주목해야 할 주제이다. 개인과 사회라는 (상호 대립적) 관계로 논의를 구성하는 것은 오히려 서구인들의 선입관이나 사고 틀들 또는 (본래 공자의 생각과 배치되는) 아마도 도가적, 불교적, 그리고 성리학자들의 관심 사항을 반영한 것에 불과하다고 하겠다.
우리는 이 점을 추상적으로 논의하기보다는 공자 자신이 직접 우리에게 제시한 많은 시사성이 있는 비유 중에서 다음과 같은 하나를 깊이 생각해 봄으로써 보다 구체적으로 터득해 배우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자공이 물었다. <저는 어떻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너는 그릇이다> <어떤 그릇입니까?> <제사에 쓰는 옥 그릇이다>
이 구절은 대개 <논어>에서 다른 구절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와 대비되어 읽혀진다. 주석가들 사이의 일반적인 견해는, 위의 <위정> 2:11에 비추어 볼 때, 공자는 처음에는 그에게 합당한 자리매김을 해준 것이고, 그다음 대답에서는 그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의 노골적인) 충격을 완화시켜 준 것이라고 여겨 왔다. 이러한 해석가들은 아마도 아래의 문단에서 개진될 (내가 생각하기에는 분명히 오류를 범한) 내용으로 (위의 그 짤막한 대화의) 속뜻을 읽어 내려갔을 것으로 생각난다. <선생님! 이상과 연관해서는 제가 어디쯤 서 있는지를 좀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말했을 자공을 우리는 우선 상상할 수 있다. 공자는 대답했다. <너는 여전히 단지 특별한 목적에만 사용되는 그릇에 불과하다. 너는 도덕적으로 자각한 사람이 아니며, 다른 사람들(즉 노동에 종사하는 일반 백성)의 특수한 (기술적인) 능력을 다스리거나 부릴 수 있는 폭넓은 (도덕적)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공자의 이런 뜻밖의 말에 자공은 진정한 군자가 되려는) 그의 열망과 평소의 낙관론이 충격을 받기는 했지만, 자공은 단념하지 않았다. <하지만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은 무슨 뜻입니까? 선생님은 저에게 더 큰 희망을 줄 수 있는 완곡한 말씀을 해주실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 공자는 온정적이며 격려하는 어조로 대답했다. <자공아, 그것에 대해 너무 서운해 하지 말라. 비록 너는 여전히 부림을 받는 사람이 아닐지라도, 적어도 너는 너와 같은 사람들 속에서는 매우 훌륭한 사람이다. 사실 너는 가장 훌륭하고 가치 있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나의 견해로서는, 앞서 지적한 것처럼 이처럼 줄을 따라 읽는 것은 아주 잘못되었다고 본다. 이런 해석으로부터 받아들일 만한 유일한 요소는 공자가 처음으로 자공의 지나친 낙관론에 찬물을 끼얹으려고 했다는 것뿐이다. 공자는 그에게 자신의 부족함을 보게 하고, 그를 동요시키고, 그를 흔들어 놓고, 그를 당황하게 만들기를 원했다. (자기의 수양을 너무나 자만하고 있는) 자공으로 하여금 새로운 통찰을 통해 그의 삶의 방식을 반성해 볼 필요를 느끼게끔 해야만 했다. 공자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자공과 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을 가장 잘 배려한 그런 방식으로 대답을 한 셈이다. 공자의 제자들 가운데에서 자공은 가장 잘 배려한 그런 방식으로 대답을 한 셈이다. 공자의 제자들 가운데에서 자공은 가장 쉽게 성공했으며 상당히 세속적인 면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학식이나 세속적인 성공을 거둔 면에서 자공이 그의 개인적 성취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도 당연하다. 왜냐하면 자공은, 그릇의 비유와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라는 비유에 담긴 의미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공자의 처음 대답은 그가 했던 다른 대답들과 마찬가지로 교육적 효과를 고려한 역설법 중의 첫째가는 요소이다.
그러나 <너는 옥으로 된 제사 그릇이다>라는 공자의 두 번째 진술은 앞의 충격에 대한 단순한 감정적 완화만은 아니다. 이 말은 앞의 역설법을 완결짓고 동시에 문제를 해소하게 한다. 그것은 공자가 구변 좋고 자만에 빠져 있는 자공으로 하여금 분명하게 깨닫게 해야 할 고도의 압축된 이미지 속에 포함된 핵심적인 가르침인 것이다. 무엇이 이런 핵심적인 가르침인가? 제사 그릇을 생각해 보자. <논어> 원문에서 공자는 풍성한 수확을 기원하는 의식과 관련하여 곡식을 담는 데 쓰이는 옥으로 만든 특정 유형의 제사 그릇의 이름(호련)을 언급했다. 그와 같은 그릇은 거룩하며 신성스럽다. 그 그릇의 외형-청동 재료나 조각이나 옥 색깔-은 우아하다. 그것의 내용물인 풍성한 곡식은 풍요를 표현한다.
그러나 그 그릇의 신성함은 청동이라는 귀중한 재료에도, 장식의 아름다움에도, 옥의 희귀성에도, 곡식의 먹음직스러움에도 있지 않다. 어디에서 그 그릇의 신성함은 오는 것일까? 그것은 그 그릇이 예식을 올리는 데에 본질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신성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예라는 거룩한 의식에 참여하는 덕분에 신성한 것이다. 그 그릇을 우리가 예식에서 갖는 역할과 분리하여 생각해 본다면, 그 그릇은 그 안에 곡식만 가득 채워 있는 값만 비싼 항아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 점이 바로 (제사 그릇이) 그릇으로서 가지는 자기모순이다. 왜냐하면 이 그릇은 일반적인 그릇들과는 달이 예식 자체와 무관하게 실용적인 목적으로만 쓰여질 수 없으며, 오로지 예식과 연관되는 기능만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어떤 예식용 항아리는 실용적 가치보다는 차라리 예식적인 가치를 강조하기 위하여 항아리에 실상 여러 개의 구멍이 뚫려 있는 것도 있다) 유비 추리를 해본다면, 개개의 인간 존재 역시 예식이나 의례 즉 예 속에서 그 자신이 수행하는 역할에 의해 궁극적인 존엄성 즉 신성한 존엄성을 갖게 된다는 의미 함축을 공자가 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원래 종교적 의식에만 관련된 예라는 단어의 의미를 공자가 사회 자체를 예의 모델에 바탕을 두고 (새롭게) 그려 보는 방식에까지 확장시켰음을 우리는 이제 상기해야만 한다. 예에 관한 가르침이 이런 식으로 일반화된다면, 자공과 예식용 그릇 사이의 유비를 철저하게 따져 나가 그것을 일반화하는 일이 합당하다고 하겠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앞서 이런 비유적 표현이 인간이나 인간관계에 관한 공자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 이해를 얼마나 심화시켜 주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사회적 예의범절 일반이나, 부자 관계, 형제 관계, 군신 관계, 친구 관계와 부부 관계 등 말하자면 개개 인간들과 그들의 관계들은 궁극적으로 예 안에서 그것들 각각이 차지하는 위치에 의해 정당화되는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사회라는 것이 사람들의 관습이나 도덕적 의무감들에 의해서 규제되고 유지되는 한 공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사회는 (각종의 에식들이 집행되는) 하나의 거대한 예식 수행의 현장이며 또한 사회는 정교하고 치밀한 종교적 의례들이 지니는 온갖 신성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하나의 예식, 말하자면 영감적인 의례의 집행을 우아하게 해주는 장엄성과 동시에 경쾌한 마음이 함께 어우러져 진행되는 예식으로 되어간다. 인간의 궁극적 존엄성을 마련해 주고 그것을 떠받치는 충분한 조건은 단지 개별적 인간 그
자체도 아니며, 또한 라나의 집단 그 자체도 아니다. 그 조건은 바로 예식 집행 과정에서 한몫하는 인물들이나 행위들이나 대상물들을 신성한 것으로 보게끔 해주는 인간 삶의 예식적인 측면이다. 공자는 개인을 (자기 완결적으로 고립된) 궁극적인 원자로 보지 않았고 또한 (자기 밖의 권위에 의해서 다만 피동적으로 움직이는) 동물이나 기계 조작의 유비를 통하여 인간 사회의 특성을 이해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 사회를 (기독교적 관념에서처럼) 영생을 누릴 영혼을 가려낼 시험장이나 또는 개별적 인간들의 쾌락을 극대화하기 위해 고안된 사회 계약적 또는 공리주의적 산물이라고 보지 않았다. 그는 <논어>에서 사회와 개인을 (대립적인 두 개의 독립적인 범주로) 논의하지 않았다. 그가 논의한 것은 사람됨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였다. 공자는 사람이란 예에서 염원하며 그 바탕에 뿌리를 둔 (오직 인간에게만) 독특한 존엄성과 (스스로를 자율적, 능동적으로 규율하는) 힘을 가진 특별한 존재라고 보고 있다. 단지 태어나서 먹고 마시고 배설하고 촉감적 만족을 즐기고 물리적 고통이나 불쾌감을 피한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동물들도 이런 짓은 다 한다. 문명됨이란 단순히 물리적, 생물적 또는 본능적이 아닌 (즉 자연 상태 이상의 고상한) 관계를 확보함을 말한다. 그것은 인간적인 제반 관계, 즉 본질적으로 상징적인, 전통과 인습에 의해 규정을 받으면서도 경외심과 의무감에 뿌리를 박고 있는 그런 제반 관계를 확립하는 일이다.
<부모를 잘 먹이기만 하는 일은> <개나 말들까지도 다 할 줄 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부모를 그저 살아 있게끔 먹이는 일보다 훨씬더 선한 어떤 것이다. 적절하게 배치된 곳에서, 적절한 경의와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적절한 방식으로 음식을 건네 주고 받으며 먹는 일은, (동물도 다하는) 단순한 음식물 섭취 행위를 인간만의 고유한 만찬 의식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회초리가 (무서워 그것에) 복종한다면 그런 사람은 가축들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다. 그러나 올바르게 다스리는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충성을 하고, 그들에게 봉사함으로써 바로 인간 공동체 안에서 봉사하는 일을 (말하자면 결코 폭력이 무서워서 수동적으로 이끌려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마음과 본성이 우러나와서 (자연스럽게 자발적으로) 하게
될 때, 인간은 진정으로 자기 공동체의 참된 성원이 되는 것이다. (예식에 등장되는) 사물들의 존엄성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존엄성이란 인간 개개인이 단순히 생물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에 있다기보다는 차라리 예식 자체에 있는 것이다. 이런 점은 자기의 생물적 존재, 즉 정신적 의미가 아닌 생물적 의미의 <생명>을 만약 <예식>이 그것을 요구할 경우 희생하는 사람을 우리가 이행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희생의식(고삭)의 기본 요소인 양을 죽이는 일에 대한 그의 제자들의 의구심에 다음과 같이 대답함으로써, 공자는 간단명료하게 이 점을 밝혔다. <너는 양을 아까워 하느냐? 나는 예를 사랑한다>
덕은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고 공자는 말한다.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공동체 예식에 참여함으로써 변신하게 된다. 그렇게 변신하게 될 때까지 인간은 진정한 의미의 인간이 아니며 다만 인간으로 계발될-마치 갓 태어난 유아나 원시림의 늑대 소년 또는 <야만인>처럼-잠재성만 있는 것이다. 예식이 어떻게 야만인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사람으로 변환시키는가를 이해하게 될 때 비로소 예식은 정당화된다. 그리고 무엇이 인간의 가장 좋은 상태인지를 한 번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자! 맛있는 음식이나 즐기는 단순한 동물적 생존이라기보다는 거룩한 예식을 누리는 삶이 인강의 최선의 삶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될 때, 최상의 삶(즉 예에 근거하는 삶)이 정당회되는 것이다. 어떤 입장에서 보든지간에, 우리는
인간의 뚜렷한 본성과 존엄성에 대한 우리의 비젼을 환히 밝혀 주고 심화시켜주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하나의 관점을 얻게 된다. 우리가 인간을 (원자들처럼 고립된) 개별적인 자아라기보다는 차라리 (주쥐 사람들과 함께 참여하는) 공동체 예식의 참여자로 보게 될 때, 제사 예식에 쓰이는 그릇처럼, 그 사람은 우리들 눈에 새롭고 신성한 아름다움을 지닌 존재로 보여지는 것이다.
이와같이 <논어>에서는 개별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신성스러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은 결코 <사회>에 부역만 하는 단순한 도구로 생각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예식이 결코 참여자나 신성한 그릇, 제단, 주문들과 무관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일 수 없듯이 인간 사회 도한 하나의 자체 독립적인 단위일 수 없다. 사회란 서로를 사람답게 대접하는 사람들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아니,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사회란 서로의 인간 관계 유지에 요청되는 사랑과 진실과 경의의 마음에서 우러나와 진심으로 예에 규정된 의무들이나 특권들에 따라서 서로를 인간답게 대접하는 사람들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다양한 인간 관계의 형태들은 물리적으로 불가피하게 인간들에게 부여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배워서 익힌 뒤에 자발적으로 동참하는 예식들에 근거하고 있다. 예식들은 사람들 스스로가 옳다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식에 굴종하는 여하한 존재들이나 몸짓들이나 말들도 없는 것이며, 또한 예식이 그것들에 종속하는 것도 아니다. <자기를 극복하여 예에 돌아간다>는 뜻은 동물적 욕구나 부도덕한 격정에 더 이상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것은 결코 (예에의) <굴종>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의 주제는 (원자처럼 자기 완결적으로 고립된) <개인의 발견>이나 개인의 궁극적 중요성의 발견도 아니다. (생생한 삶의 현장에서 맺고 있는 제반 연관 관계로부터 차단되고 추상화되어 버린) 단순한 개인이란 언제나 이렇게도 저렇게도 쓰여질 수 있으며 또한 언제라도 깨어질 수 있는 볼품 없는 그릇, 그러나 인생의 예식에 이바지할 때 비로소 찬란하고 신성스럽게 변모되는 그릇에 비유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이 결코 인간들이나 개개인들의 궁극적 존엄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단지 보다 큰 전체(즉 사회)에 봉사만 하는 개미처럼 무의미한 존재는 아니기 때문이다. 제사 예식 자체가 신성스럽기 때문에 제사 예식에 쓰이는 그릇의 신성스러움이 실제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신성스러움에의 참여 효과 또한 실제적으로 눈에 보인다고 하겠다. 그리고 인간의 거룩함(또는 신성스러움)이 들어 있는 방식이 기독교의 관점괴는 다른 것이다. (기독교의 경우처럼) 인간은 신성, 즉 불멸하는 영혼의 한 <조각>을 다른 사람괴는 전혀 관계없이 오직 자기 자신 안에 절대로 확보하는 것만으로 결코 성스럽게 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사는 다른 사람들과 전혀 관련없는) 개인의 <완숙한 계발>이 핵심적 주제가 아니다. 그와는 달리,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올리는 예식 행위를 통한 인간다움의 완숙한 계발이 핵심적 주제이다 마치 사당에서 쓰이는 예기가 칼로 깎고 끌로 다듬고 옻칠로 광택을 내어서 만들어지듯이, 물론 개인도 자신을 계발해야만 한다. 그렇지만 공자의 관점에서 볼 때, (예식에 쓸) 그릇을 준비하는 것이 (예식 수행의) 핵심이 아니듯이, 이러한 자기 계발이 인간의 존엄성을 (보증하는) 핵심적인 일이 못 되는 것이다. 마련하거나 수련하는 일은 꼭 있어야만 할 일이다. 그러나 핵심은 예식을 올리는 일이다. 예식을 올리는 한에서 일체의 구성요소, 제반 관계들 그리고 각종 몸짓들은 비록 각각이 자기의 특성을 가질지라도 모두 신성스럽게 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예식에 쓰이는 인공물로 개조되지 못한 자연적 대상은 버려져야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거룩함의 옷이란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에까지도, 그리고 젊음과 노래뿐만 아니라 강물과 공기에까지도 드리워져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예식에 맞는 기우제의 이미지를 통해서 보게 된다.
군자란 자아, 이기심, 고집, 자만을 거의 완벽하게 잘라 버리고 물질적 이익이 아니라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말한다. 그와 같은 사람은 인간으로서 완숙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그는 성인이며, 신성스런 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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