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이슬람교의 성립과 이슬람 제국 (4) 이길상
다. 아바스왕조(Abbasid dynasty)의 성립과 이슬람 세계의 분열
(1) 아바스왕조(750 ~ 1258)의 성립
아바스왕조를 일으킨 아부 알아바스 앗사파흐(Abu al-Abbas as-Saffah :722~754)는 예언자 마호메트의 숙부 아바스의 증손에 해당한다.
747년 호라산에서 우마이야왕조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자 아부 무슬림(Abu Muslim)의 지휘를 받으며 쿠파를 점령하고, 749년 이곳의 칼리프 자리에 영입되었다가,
750년 우마이야왕조의 칼리프인 마르완 2세의 대군을 상(上)사브 하반에서 격파하고 결정적 승리를 거둔 다음, 우마이야족을 무자비하게 살해하여 ‘무자비한 유혈자(流血者)’라는 악명을 얻었으나, 아바스왕조를 창건하여 이 후 이슬람세계를 지배하는 아바스왕조의 창업주가되었다.
우마이야(옴미아드)왕조의 뒤를 이어 서기 750년에서 1258년 까지, 동방 이슬람 세계를 지배하였다고는 하나, 아바스가(家)의 칼리프가 종교와 정치 양면에서 최고의 지도자·권력자로서 군림한 것은 945년까지이고, 그 이후는 정치상의 실권이 거의 없었다가, 몽골에게 멸망되었다.
아바스왕조 창업의 최대 공신인 아부 무술림은 그의 이름에서 보이듯이 출신과 성분이 뚜렷하지 않은 미천한 출신이라고 한다. 그가 이란의 동쪽 호라산(Khorasan)의 풍운아(風雲兒)로 등장하여 아바스왕조 창업의 최대 공신이 되었는데, 창업공신은 거기에서 만족해야 된다는 정치적인 논리는 이곳이라고 해서 다를 수는 없었든지 그 역시 압바스왕조의 2대 칼리프인 알 만수르에 의해서 참혹한 죽음을 당했다. 아바스왕조의 창업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당시의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우마이야왕조를 창업한 무야위야는 메카의 유력한 코레이시족 출신이기는 하였으나, 그의 정치적 배경은 시리아였기 때문에, 아라비아를 비롯한 이란의 유력한 계층에서는 이 우마이야왕조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시아파들은 예언자의 가계가 칼리프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이래서 예언자 마호메트의 언행(수니)를 따르고 그것을 정통의 칼리프라고 주장하는 수니파와 갈라지게 된 것이다.
이 시아파는 이란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는데 이란은 페르시아의 고토로서 문화적인 자부심도 대단하였고, 따라서 아라비아의 무식한 무슬렘에 대한 우월감도 가지고 있었다. 무야위야왕조 때 까지만 하여도 아랍족의 우위에서 여러 이민족을 지배하였고, 이민족이라 할지라도 이슬람으로 개종하면 동등한 대우를 하였다고 하나, 이들 개종자(改宗者)들을 마왈리(mayarli)라고 하여, 어떤 형태로든 차별하였다.
그러나 이 마왈리 들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아라비아의 부족으로 편입하여야 하였고, 이래서 아라비아의 부족들은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띄었다. 이래서 아부 무술렘도 아라비아의 부족이 되었으나 그의 혈통에 대해서는 이란계라는 설도 있고 종교적으로 시아파 이슬람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우마이야왕조 말기가 되면서 혼란을 거듭하자, 지금 까지 숨을 죽이고 숨어 살고 있던 아바스가계가 이슬람교단(敎團) 국가의 최고 책임자가 될 수 있는 자는 ‘예언자(마호메트) 가족’ 출신자라야 된다는 사상이 차차 퍼져 있는 것을 이용하여, 그 가족의 일원에 속하는 아바스가는 우마이야(옴미아드)왕조 타도의 지하운동을 일으켰고, 747년 마침내 마르우에서 무장봉기하고, 749년에는 사파흐가 쿠파에서 칼리프임을 선언, 이듬해 우마이야왕조 최후의 칼리프가 피살됨으로써 아바스조가 정식으로 성립되었다(750)
우마이야왕조 체제의 본질은 소수의 지배자인 아랍인이 피정복자인 이민족 위에 군림한다는 것이었으나, 아바스왕조 밑에서는 아랍인의 특권적 지위는 상실되고 대신 비(非)아랍의 개종자가 국가의 요직에 등용되는 놀라운 변화를 초래하였고, 동시에 이들 비아라비아인들이 신학자나 법학자 등 이슬람의 성직자 층과 나란히 관리·상인·지주가 되어 지배계급의 자리를 차지하였는데 그들의 대부분은 이란계로서 옛 페르시아의 후손들이거나 그의 지배하에 있었던 가계의 후손들 이기에 이 아바스조의 이슬람세계는 사실상 이란인들의 주도하에 놓였었다고 볼 수 있다.
(2) 동서 칼리프의 등장과 이슬람의 분열
아바스왕조가 처음 단행한 것은 우마이야왕조의 가계(家系)를 색출(索出)하여 씨를 말리는 일로부터 시작하였다. 그래서 이슬람세계 곳곳을 이 잡듯이 우마이야가계의 사람들을 찾아 살육을 자행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생명을 부지한 우마이야의 후손들이 멀리 도망하여 이베리아반도의 코르도바를 중심으로 후우마이야왕조를 열게 되었고 이래서 이슬람 세계에는 두 개의 칼리프가 등장하여 동서로 분열하게 되었다.
후세에 이르러 편의상 바그다드의 아바스왕조를 동칼리프라하고 코르도바의 후우마이야왕조를 서칼리프라고 한다. 서칼리프인 후우마이야왕조(Umayyad dynasty of Cordova : 756∼1031)는 아바스의 무차별 살육을 피해, 일족(一族)인 아브드 알 라흐만 1세가 에스파냐로 도망가 756년 코르도바를 수도로 하여 우마이야왕조를 다시 일으키고 베르베르인(人)과 슬라브인을 이용하여 토호(土豪)와 제후(諸侯)를 억누름으로써 우마이야가의 에스파냐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그 후 이 왕조는 노르만의 침입을 격퇴하고 프랑크왕국의 압력을 봉쇄하면서 국세(國勢)를 확장하였으나, 무와라드(토착민의 이슬람교도)의 반란으로 시달렸고, 제8대의 아브드 알 라흐만 3세는 분열된 에스파냐를 다시 통일하고 칼리프의 존칭을 쓰며 레온, 카스티야 등의 그리스도교국(敎國)을 복종하게 하고, 코르도바대학을 설립하는 등 이 왕조의 황금시대를 실현하였다.
그가 죽은 후 왕조는 쇠퇴하기 시작하였으나 무인재상(武人宰相) 만수르에 의해 통일이 유지되었다가, 만수르가 죽은 후 군소 군주의 난립시대로 들어가 1016년 이후 모로코의 함무드가(家)가 코르도바를 점령, 1031년 히샴 3세는 왕위에서 쫓겨나고 서칼리프라고 불리던 후우마이야왕조도 멸망하였다.
(3) 바그다드(Baghdad)의 번영
아바스왕조의 초대 칼리프였던 아불 아바스는 재위 5년을 채우지 못하고, 천연두(天然痘)로 세상을 떠나자, 그의 배다른 형제였던 아부 자파르가 2대 칼리프에 즉위하여 스스로를 알 만수르(알라의 도움을 받는 사람)라고 하였는데 그의 치세 20여년간(754 ~775) 왕조의 기초를 반석처럼 닦아 놓은 걸출의 군주였고,
이 후 아바스왕조의 35명의 칼리프가 모두 그의 직계자손이다. 아바스왕조 성립의 최대 공신 아부 무술렘을 비롯한 반대파를 제거하여 칼리프의 권위를 높였고, 하리지파를 비롯하여 라완드파 등의 이단(異端)파들이 반란을 일으키거나 소요(騷擾)를 일으켜 민심을 현혹시키자 이들을 소탕하여 안정을 찾게 될 때 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만수르의 정치 요체는 스파이를 전국 요소에 파견하여, 이른바 정보정치를 함으로서 바그다드의 깊은 궁중에서도 전국을 내다볼 수 있는 천리안(千里眼)을 가졌다고 당시의 사람들은 이야기하였다.
한편 아바스왕조의 수도가 처음 쿠파에서 다시 쿠파의 북동쪽 하시미야로 옮겼는데, 다시 그곳이 정치적으로 시끄러워지자, 칼리프 만수르는 쿠파에서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을 거슬러 올라가 이 두강을 잇는 사라트운하가 있는곳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762)
4년여의 조영기간을 거쳐 완성된 것이 이른바 ‘만수르의 원형 도시’ 또는 ‘알마디나 알사리암(al-Madinah al-Saliam:평화의 도시)’이라고 불렀던 오늘날의 바그다드다. 왕성(王城) 주위의 약 6.4 km, 성벽은 정원형(正圓形)의 삼중(三重) 성벽으로 되어 있으며, 그 바깥쪽에 너비 20.27 m의 깊은 호(濠)를 둘렀고, 성벽에 4개의 문이 등거리로 배치되고, 성내에는 높이 약 36 m의 녹색 돔으로 덮인 왕궁과 예배당을 짓고 주위에 관청을 배치하였다.
일반시민은 왕성 바깥에 살았으나 점차 수크라고 부르는 상점가를 가진 번화한 시가지로 발전하였다. 군대의 절반을 강의 동안에 주둔시켰던 관계로 그 쪽에도 많은 인구가 모여 시가지가 발달하게 되고, 두 시가지는 3개의 주교(舟橋)와 다수의 나룻배에 의해 연결되었다고 하며, 8세기 말~9세기경에는 당(唐)의 장안(長安), 동로마의 콘스탄티노플에 버금가는 세계 최대급의 대도시가 되어, 인구도 200만에 달하였으리라고 추측하고 있다.
왕궁을 출입하기 위해서는 호(濠)를 잇는 나무 다리를 지나 다섯 개의 궁성문을 통과해야 되는데, 이것은 아바스왕조가 사막풍이 짙은 우마이야왕조와는 달리 사산조 페르시아 풍(風)이 강하여, 칼리프는 신성시되고, 신으로 추앙되어 일반인의 접근이 어려워 지게 되었음을 의미하며, 다시 칼리프의 측근에는 하지브라는 시종(侍從)의 관료군이 있었고, 그 관료군 위에는 다시 와지르(Wazir)라는 일종의 재상(宰相)을 두었다. 이것은 메디나 시절에 좁은 예배당에서 칼리프가 일반인과 무릎이 맞 닿을 정도의 거리에서 담소하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라고 볼 수 있다.
아바스왕조의 최대 전성기는 제5대 칼리프인 하룬 알라시드(재위 786∼809)와 그의 아들 7대 칼리프 마문 시대(813 ~833)로서, 하룬 알라시드는 아라비안나이트에 그가 등장하는 것이 50 가지에 달할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아라비안나이트에서는 그를 명군으로 묘사하고 있으나, 하룬 자신은 매우 고독한 군주로서 그의 재세기간 23년 동안, 17년간은 모후인 하이즈란과 바르마크가(家)에서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그 자신은 꼭두각시나 다름없었다고 하니, 비록 시대와 지역은 달랐지만 그 처지가 중국의 남북조시대 북위의 효문제와 비슷한 길을 걸었다고 보여진다.
모후인 하이즈란이 죽고 나서, 와지르(재상)로서 번영을 구가하여 칼리프의 세력을 능가했던 바르마크가를 타도하고, 칼리프의 권위를 다시 세운 하룬의 시대를 기억에서 새롭게 하는 것은 종이에 관한 것으로 이 때부터 정부문서가 종래의 파피루스에서 종이로 바뀌게 되었다.
(4) 탈라스의 전투와 종이의 전파
종이는 중국에서 후한 중기 환관 채륜이 발명하여(105년경) 중국 등 주변에서는 널리 사용하고 있다가, 이 시기에 이슬람에 전해졌는데 그 전파 경위는, 당과 아바스왕조의 이슬람 사이에 중앙아시아의 지배권을 두고 탈라스(Talas)강변 싸움(751)에서 비롯되었다.
이 때 당나라 장수는 고구려출신 고선지(高仙芝/?~755)였는데, 그는 고구려가 망하자 아버지 사계(舍鷄)를 따라 당나라 안서(安西)의 고창으로 이주했고 거기서 음보(蔭補)로 유격장군(遊擊將軍)에 등용되고, 20세 때 장군(將軍)에 올랐으며, 그 후 740년경 톈산산맥(天山山脈) 서쪽의 달해부(達奚部)를 정벌한 공으로 안서 부도호(安西副都護)가 되었다.
747년 토번(吐蕃:티베트)과 이슬람제국이 동맹을 맺고 당을 견제하려고 동진(東進)하자, 다시 군사 1만을 인솔하고, 파미르고원을 넘어 이슬람제국과 동맹을 맺은 72개국의 항복을 받고 이슬람제국의 동진을 저지시켰으며, 750년 제2차 원정에 나가 이슬람과 동맹을 맺으려는 타슈켄트(石國)를 토벌하고 국왕을 잡아 장안(長安)으로 호송하는 공을 세웠다.
그러나 장안의 문신들이 포로가 된 타슈켄트 국왕을 참살했기 때문에 이듬해 서역 각국과 이슬람제국이 분기하여 연합군을 편성, 탈라스의 대평원으로 쳐들어왔다. 이 때는 이슬람제국도 우마이야왕조에서 아바스왕조로 바뀌었고, 이 탈라스 싸움에서 아랍군의 주축은 호라산군이 맡았다. 이들을 지휘한 것은 아바스왕조 건설의 일등공신인 호라산의 호랑이라고 불리던 아부 무술림의 부장(部將) 자아드 이븐 살리프였다고 한다.
고선지는 이를 막기 위해서 7만의 정벌군을 편성하여 제3차 원정에 나갔으나, 이 호라산군에게 크게 패하여, 7만의 군사 중 5만이 전사하고 2만이 포로가 되었으며, 고선지는 겨우 퇴로를 열고 후퇴하였다.
이를 탈라스 강변의 싸움(751)이라고 하는데, 이 때 붙잡힌 당군(唐軍)의 포로 가운데는 사마르칸드에 제지(製紙) 공장을 세우고 종이 만드는 법을 전했고, 794년에는 아바스조 최고가문인 바르마크家에서 바그다드에 제지공장을 세우고 본격적으로 종이를 생산, 정부의 공식문서도 파피루스에서 종이로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이 후로부터 종이는 양피지(羊皮紙)와 파피루스의 대신으로 쓰였고, 이집트, 북아프리카를 지나, 이베리아반도로 들어 갔고, 거기서 다시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5) 이슬람의 계몽(啓蒙)군주 7대 칼리프 마문
하룬 알라시드의 뒤를 이어 6대 칼리프로 즉위한 것은 그의 적자(嫡子) 아민(al-Amin)이 였는데 그의 모후 주바이다(Zubaydah)는 2대 칼리프 알 만수르의 손녀로서, 하룬 알라시드와는 사촌간이다. 그러나 하룬에게는 이란계 노예와의 사이에서 아민 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난 마문이 있었으나, 아민은 그 형을 제치고 6대 칼리프(809 ~ 813)가 되었다. 하룬 알라시드가 살아 있을 때, 이 두 형제간의 불화를 막기위해 이런 서약서를 작성하였다.
동생 아민이 칼리프가 되는 대신 그 후계자는 마문으로 할 것과, 제국 동반부의 통치를 형 마문에게 일임하라고 맹세시켰고, 형 마문에게는 동생 아민이 칼리프가 되었을 경우 충성을 다하라는 맹세를 시켰다는 것으로 그 문서가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칼리프가 된 아민은 그 후계자를 그의 아들 무사(Musa)로 바꾸자 형제간에 싸움이 시작되었다. 여기에서 칼리프인 동생 아민의 주력군은 아랍계였고, 형 무민의 주력군은 호라산을 근거로 한 이란계였기 때문에 싸움의 성격이 아랍과 이란의 싸움과 같게 되었다. 이 싸움에서 마문의 군대가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아민은 살해되었으며, 마문이 7대 칼리프(813 ~ 833)가 되었으나 바그다드는 폐허가 되고 말았다.
이란계의 피를 받은 마문은, 압스스조 500년을 통하여 가장 교양이 높고, 학문과 예술을 사랑한 칼리프로 알려져 있다.
그는 시를 사랑했고, 그리스 철학이나 수학, 천문학, 의학에도 조예(造詣)가 깊었으며, 그리스 학술을 존중해서 그 문헌을 모으는데 힘 쓰고, 번역도 장려하여 바그다드에 "지혜의 집"을 세워 그리스 문헌 번역의 중심을 삼았으므로, 사방에서 이름 높은 학자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이들 학자들에 의해서 경위도(經緯度)의 측정, 천체운행표 등이 만들어 졌는데, 당시에 계산한 지구상의 땅 면적의 수치는 지금의 계산과 별 차이가 없을 정도로 정확했다.
이 무렵 코란과 마호메트의 언행(순나 : Sunna)을 충실히 지키고, 이지(理智)의 자유스런 활동을 억제하는 경향이 강한 순니파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이 파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고 전부가 알라신이 정한대로 되어갈 뿐이라고 주장했고, 또 코란은 옛부터 있어온 것으로서 알라가 창조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우마이야왕조 말경부터 무우타질라파(派)라는 합리주의적 입장을 취하는 일파가 나타나서 인간의 자유 의지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 코란도 알라가 창조한 것이라 주장했는데, 학문을 좋아한 마문이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아 이지와 인간의 자유를 존중한 이 파의 사상에 동조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으로서, 그가 칙령으로 코란창조설을 지지하고(827) 반대학설을 탄압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다.
(6) 아바스왕조의 쇠퇴(衰頹)
학문적으로 우수한 업적을 남긴 마문은, 한편으로 아바스왕조의 검은 색 대신에, 알리 가문에 초록색 깃발을 세우고,
알리 가문의 정통을 이은 알리 알 리다를 후계자로 발표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아바스의 집안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의 불평을 사게 되었고, 이것을 필두로 도처에서 반란이 잇따라 일어났다. 이런 와중에서 타히르는 호라산을 중심으로 타히를 왕조(822~903)를 열었으며,
그 후에도 사파르왕조(867~930) 사만왕조(874~1005) 등 이란왕조가 잇달아 나타나 사실상 이란 이동은 실제적인 독립국의 행세를 하고 있었다.
이러한 징후는 라시드의 두 아들을 지나 그의 손자 8대 칼리프 무타심(833~842)에 이르러 본격화되었는데, 그는 이러한 정세를 바로잡기 위해서, 투르크 용병(傭兵)들을 군대의 지휘관으로까지 채용하면서부터 더욱 분란을 야기 시키게 되었다.
즉, 투르크계 장군들은 칼리프를 괴뢰(傀儡)로 만들었고, 동시에 변경 제주(諸州)의 반(半)독립화를 획책하였으며, 이런 가운데 이라크에서는 흑인 농노 및 카르마트 교도의 반란이 일어나 더욱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제국의 치안은 그 후 안정을 되찾고 경제적·문화적 발전의 시대를 맞이했는데, 궁정에 있어서의 사치와 지나치게 팽창한 관료기구, 군사비의 증대 등이 겹쳐 국가재정은 만성적인 적자(赤字)에 빠지고 10세기 전반에는 완전히 파탄에 이르게 되었다.
936년에는 대 총독의 지위를 차지한 군사정권이 대두하여 칼리프는 정치적 실권의 대부분을 잃었으며, 945년에 이르러서는 부와이왕조가 수도 바그다드를 점령함으로써 사실상 아바스왕조 국가는 붕괴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아바스왕조는 이 시아파의 부와이왕조를 타도하기 위해서 셀주크 투르크를 바그다드에 불러 들였는데, 이로 인해서 부와이왕조는 타도하였으나 다시 셀주크 투르크에게 주도권을 내 주었고, 이후 13세기 초의 한 시기를 제외하고 칼리프는 종교상의 권위만을 유지하는 데 그쳤으며, 1258년 바그다드가 몽골군에게 유린되면서 칼리프제(制)는 완전히 몰락하였다.
(7) 투르크족의 이슬람화와 셀주크왕조(Seljuk)의 등장
중국의 역사에 자주 등장하는 돌궐이 서진하여 이슬람세계로 들어가, 족장(族長) 셀주크가 같은 투르크계의 이슬람 국가 가즈니왕조의 세력을 몰아내고 호라산을 점유하여 지배권을 아제르바이잔·이라크·시리아·소아시아에까지 세력을 확대시킨 것을 셀주크왕조라고 한다.
물론 셀주크족의 본업도 유목이였고, 때로는 통상로를 장악하여 통행세를 징수하기도 하고, 주변을 약탈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유목의 습성에 따라 여러곳에 분산되어 있었는데, 본가(本家)를 대(大)셀주크왕조(1037~1157)라고 하고, 분가(分家)는 각 소령(所領)에 따라 케르만 셀주크왕조(1041?~1187), 아나돌 셀주크왕조(1077~1307), 시리아 셀주크왕조(1094~1117), 이라크 셀주크왕조(1117?~94) 등으로 불렀다.
대(大)셀주크왕조의 건설자 토그릴베그(재위 1037~63)는 족장 셀주크의 손자라고 한다. 이란을 중심 지역으로 하여 테헤란 근처의 레이를 수도로 하였으며, 아바스왕조 칼리프의 요청으로 바그다드에 들어가, 시아파(派)의 부와이왕조 세력을 일소하여 아바스왕조 칼리프의 보호자로서 술탄의 칭호를 얻었다.
술탄이란 이슬람세계의 정치적 지배자를 가르키는 말로서, 칼리프가 종교와 정치의 우두머리라고 한다면 술탄은 단순히 정치적 지도자만을 의미했다. 제2대 알프 아르슬란과 제3대 말리크 샤의 치세가 황금시대로,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도 가장 번영하였다고 전한다.
융흥(隆興)이 빨랐듯이 쇠퇴와 멸망도 빨라서 수니파(派)에 반항하는 광신적인 암살교단의 공세와 왕족 사이의 격렬한 정쟁(政爭), 그리고 악역(惡疫)의 유행 등으로 국력이 크게 약화된 결과 제8대 산자르시대에 대셀주크는 멸망하였고,
분가된 셀주크 중, 아나돌 셀주크왕조가 유럽 십자군(十字軍)과 대결하면서도 소아시아의 투르크화에 공헌하였다. 그러나 몽골의 침입으로 이에 복속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후에도 유명무실한 존재로 있다가 14세기 초기에 멸망하였다. 우리들이 그 남아 셀주크에 대해서 기억에 남긴 것은 이들이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기독교도의 성지순례를 방해했기 때문에 십자군전쟁의 원인이 되었다고 교과서에서 배웠기 때문이다.
셀주크 문화는 이란의 옛 전통을 살리면서 그것을 이슬람적으로 꽃피운 수니 문화라 할 수 있고, 학술·예술면에서 볼 만한 것이 많으며, 학예진흥을 위한 메데레세(Mederese:學林)·종교희사재단(宗敎喜捨財團)·도서관 등이 개설되어 이슬람 세계의 저명한 학자가 초청되었으며, 또한 구빈시설(救貧施設)·병원·대상(隊商)숙박소 등은 매우 훌륭하며, 공예면에서는 아름다운 견직물, 융단, 정교한 금속세공, 모자이크용 착색 타일이 있었으며 도기류는 아름답고 기술적으로도 우수한 것들이 많았다 |
출처: 이길상의 세계사풀이 원문보기 글쓴이: 이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