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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가)
쏟아진 노오란 은행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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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나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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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전하다 → | |
(지난) 여름날의 대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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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 막걸리 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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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쏟아진 노오란 은행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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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나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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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냥 즐겁다 | |
(지난) 여름날의 대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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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 막걸리 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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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의 항은 시인으로 하여금 ‘허전’하게 만드는 보조관념들이다. 이것들은 한결같이 비도시적인 자연물이다. ‘소슬바람에 쏟아진 노오란 은행잎→잎을 다 떨군(은행)나무’로 진행되다가 ‘여름날 대문→주막골 구판장’으로 공간이 이동된다. 뒷부분의 공간은 몇 가지 중층적 함의를 내포하고 있다. 무성한 여름처럼 많은 욕망을 갖고 드나들던 ‘대문’(사립문이 아니다.)이 이제 인적이 끊긴 채 ‘열려’ 있는 것이다. 세속의 한 모습이기도 하고 욕심을 비운 현자의 상징이기도 하다. 비어 있는 공空의 ‘대문’은 ‘주막골 구판장 간이의자’와 오버랩 된다. 거기에는 ‘조각달, 비운 막걸리잔’의 소도구가 배치되어 있다. 그 위로 피로에 지친 가난하고 고독한 한 사람(시인)이 어른거린다. 시인은 이러한 현상들을 싸잡아 ‘허전하다’고 말한다. 허전은 ‘허虛’이며 무엇인가 남아있는 ‘아쉬움’이다. 모든 것을 버리지 못하는 그러한 경계에 있다. 이러한 (가)항은 2.에 가서 백팔십도로 바뀐다. ‘허전’함에다 또 ‘허전함’이 거듭되지만 이제 ‘허전함’은 역설적으로 ‘즐거움’이 된다. 그것은 어린애처럼 ‘툇마루’에 앉아 ‘늦가을 햇빛’과 놀다가 고개를 들어 멀리 ‘삼불봉’을 ‘멍청히’ 쳐다보는 행위로 나타난다. ‘햇빛’이 지닌 무형의 밝음과 그리고 그것과의 천진한 장난, 그건 그렇다 치고 ‘삼불봉’을 주목해야 한다. 간과해서는 안 될 견인력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이 시에 보이는 ‘삼불봉’은 구체적으로 계룡산의 봉우리 이름이다. 계룡산 봉우리 중 제일 높은 봉우리는 아니지만, 어느 풍수에 밝은 노스님은 삼불봉을 일러 계룡산의 중심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을 일컫는 세 봉우리로 된 이 봉우리는 불교의 이상향을 담보하는 궁극의 귀의처이다. 이러한 봉우리를 화자는 무심하게 ‘멍청히’ 쳐다본다. 예사롭지 않은 탈속의 경지이다. 이런 망아忘我속에서 ‘마냥 즐겁다’는 것은 마음 닦는 자만이 가능한 세계다.
(가)항의 허전함-속俗이 (나)항의 즐거움-성聖으로 옮아가는 과정은 <늦가을>에 일어난다. ‘늦가을’은 ‘봄․ 여름’를 거쳐 ‘겨울’로 접어드는 입구의 계절이며 이것은 시인의 ‘적요’한 현세적 시간의 단계와 일치한다.
4.
이 시집에는 ‘술’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앞의 장에서도 인용한 「적요한 날」에서도 산골 구판장 간이의자에 앉아 혼자서 조각달 벗삼아 막걸리잔을 비우는 대목이 나오지만, 여타의 적지 않은 시에도 술 취한 정경이 나타난다.
늦은 밤 술에 취해
아내와 노래 부르며
터덜터덜 걸어서
둬 시간 거리이다
-「희망교」부분
「희망교希望橋」라 제한 시의 중간 부분이다. 그가 사는 상신리 산골 마을의 어구에 있는 다리의 이름이다. “내가 사는 집은/그 다리 건너 개울 따라/외길 십여 리”의 그 다리이다. 술은 그의 좌절한 절망을 다리의 이름대로 ‘희망’으로 바꾸어 준다.
특히 시와 술은 촌수가 아주 가깝다. 동서고금이 마찬가지다. 춤과 노래와 시가 한몸으로 타오르는 축제는 술을 핵심으로 한다. 우리의 무천, 동맹, 영고 등이 그러하며 서구의 많은 패스티발이 또한 그러하다. 술을 빼놓고 포우와 보들레르 또는 이백이나 두보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술은 시의 영감이며 흥의 원천으로 작용하였고 인간의 고뇌를 어루만져 주었다. 물론 그 역작용도 적지 않아 무슬림의 경우, 술을 죄악시하기도 하지만 인간의 낙관적 전망과 상상력의 확대를 위해 크게 기여한 바를 부정하기는 어렵다.
도시 일터를 벗어나 술 몇 잔에 취하여 마중 나온 아내와 함께 산골집을 찾아가는, 흥겨우면서도 조금은 쓸쓸한 내용을 담은 이러한 시는 우리을 따뜻하게 해 준다.
실개천
둑길 따라
지천으로 피었던
할미꽃
오늘밤은
할애비 수염
성성적적惺惺寂寂
찬란한 별밤
밤이 좋아
달밤이 좋아
아내와 나는
비틀비틀
별은 껌뻑껌뻑
-「취중귀가중醉中歸家中」전문
그의「취중귀가중醉中歸家中」의 전문이다.
찬란한 별밤이다. 공기가 맑아 그럴 것이다. 냇물이 흐르는 실개천의 둑길은 지난봄 할미꽃이 지천으로 피어있던 길이다. 그 길을 여름날 중년의 내․ 외가 얼근히 한 잔 술에 하루의 피로를 풀며 흥겹게 집을 찾아 걸어가고 있다. 술에 취한 내외의 ‘비틀비틀’과 별의 ‘껌뻑껌뻑’이 주는 의태어의 묘미가 뛰어나다. 지상의 좁은 길을 걷는 자의 조금은 불확실성의 비틀거림과, 그것을 내려다보는 천상의 별이 돌보아 주듯 껌뻑거리는 눈동자가, 서로 대조적으로 호응한다. 쉽게 보아 넘길 수 있는 이 시에서 우리를 긴장하게 하는 대목은 둘째 연이다. “오늘 밤은 할애비수염”은 무엇이며 “성성적적”은 또한 무슨 말인가. 할미꽃은 그 꽃잎이 모두 떨어진 뒤 하얀 꽃술 가닥이 마치 할머니의 머리칼 같고, 또 피어있을 때의 고개 숙인 것처럼 숙이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술취한 오늘 밤은 “할애비수염”으로 보인다. 아마 아내에 대한 자기 스스로의 희화화일시 분명하다.
그러나 취중진담이라더니 “성성적적”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성성’이라는 문자가 별[星]을 갖고 있어서 무슨 마음[忄]의 별이겠지 해서는 안 된다. 사실 이 네 자의 성어는 선가禪家에서 상용하는 선어禪語이기 때문이다. 전등록이나 선문염송집 등에 이 어휘는 빈번하게 출현한다. 그것은 한 마디로 깨달음[覺]의 경지로서 확철대오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시인이 어떤 깊은 경지를 드러내려고 의도적으로 쓴 말이라고는 확신할 수 없으나 장식藏識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난 빙산의 일각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경허鏡虛에 관한 두 편의 시가 그런 사실을 증거해 준다.「경허의 칼」「경허를 만나면 경허를 죽이고」가 바로 그것이다. 아마 이것은 동학사와 가까운 학봉리, 상신리에서의 삶과 시인의 태어난 고향이 경허가 깨달음을 얻은 서산 고북의 천장사와 가까운 데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 짐작된다.
「경허의 칼」은 단호한 경허의 깨달음을 경책警策으로 삼는 시이다. 날카로운 긴장이 전편에 팽팽하다. 후자의 시는 경허의 깨달음을 드러내줌으로써 그것을 역설적으로 거부하고 있다.
있음有를 버린 곳에 없음無이 나고
없음無를 버린 자리에 빈[空]것이 나고
빈空 것조차 버리니 오직 있음實相뿐이네
아, 하늘소리 장엄하고
하늘빛 오묘하구나
코 없는 소無鼻孔는 자유자유 하고
목사리 없는 개도 자유자유 하더라
소를 몰고 가는 나그네야
그 소 멍에 벗겨 놓아주고
복사꽃비 내리는 주막 뜰에 앉아
탁주나 한 잔 하세나
-「경허를 만나면 경허를 죽이고」전문
경허鏡虛는 전등의 법맥을 이은 그야말로 우리나라 근대 선불교의 중흥조다. 그는 아홉 살에 아버지가 별세하자 어머니를 따라 형(泰虛)과 함께 청계산에 출가, 행자살이로 시작, 그 뒤에는 동학사의 만화강백을 스승으로 삼아 불교 경전을 물론 노․ 장까지 섭렵하였다. 그 결과 스물 셋에 동학사 강원의 강사로 이름을 떨쳤다. 그의 나이 서른을 넘어 청계사를 찾아가던 도중 천안쯤에서 역병이 퍼져 집집마다 시신이 널려 있는 것을 보고 생사의 경계를 깨닫게 되었다. 다시 동학사로 돌아와 강원을 폐쇄하고 용맹정진에 몰입했다. 그때, 한 사미승이 하는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는 말을 우연히 듣고 즉각 크게 깨우쳤다. 그 다음해 형님이 어머니를 모시고 주지로 있는 고북의 천장암을 찾아 전력투구로 보임했다. 때로는 천장암 입구의 너럭바위 제비바위[燕巖]에 앉아 명상에 잠기곤 했다. 마침내 서른셋에 크게 깨쳐 오도송을 지었다. 그 노래는 이렇다.
忍聞人語無鼻孔 頓覺三千是我家
六月燕巖山下路 野人無事太平歌
홀연 콧구멍이 없다는 말 듣고
즉각 세상이 내집임을 깨달았네
유월 연암산 아랫길엔
들사람 맘놓고 태평가를 부르네
경허는 유명사찰을 떠돌며 선을 선양했으며 만공을 법제자로 삼아 예산 덕숭산의 선맥을 키웠다.
경허를 깨닫게 한 기연으로서의 ‘콧구멍 없는 소[無鼻孔]’ 이야기를 이 시에 담고 있다. 시인은 그 깨달음을 ‘자유’라고 파악한다. 사실 불교의 대오大悟는 깨달음의 이치에 따라 대자유를 낳으며, 한편 자유와 사이가 좋지 않은 평등과 전광석화처럼 결합된다. 대자유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여기에서 거침없는 ‘무애’ 无碍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시인 한 수의 어디에도 얽매지 않는 심성이 여기에 닿아 있으며 그것이 자연스럽게 시로 드러나고 있다. 풀어보면 이렇다.
복사꽃비 내리는 화창한 봄날
나그네 쉬었다가는 허름한 시골의 주막 좁은 뜰광에 퍼질러 앉아
지나가는 나그네여(또는 경허여, 친구여)
막걸리 한 잔 목 축이며 껄껄 웃세나
복사꽃 핀 것을 보고 중국의 어느 옛스님은 크게 깨달았다고 하지 않던가. 필자는 이 시인이 깨달음이 아니라, 깨달음으로 가는 그런 진지하고도 아름다운 과정의 서정시를 썼으면 한다.
5.
시도 역시 반영이다. 리트머스 용지다. 물론 서사문학으로서의 소설을 따를 수는 없겠지만 시 역시 시인을 둘러싼 가족이나 이웃, 사회 전체를 담아낸다. 다만 늘어진 산문적 묘사와 서술이 아니라 본질에 직핍하려는 직관의 빛이 날카로울 뿐이다.
한韓시인은 계룡산 기슭이라 해도 상신리와는 전혀 딴판인 동학사 입구의 학봉리에 살면서 자연과 시류(문명)와의 대비를 통해 풍자라든가 아이러니 등의 시를 보여 준다.「나의 정원」,「봄밤에서」등이 그 좋은 예이다.
내 정원은 밤마다 휘황한 불빛이 켜진다
샹그릴라, 발리, 알프스, 칼튼, 프로포즈
구름에 달 가듯이, 이 뭣고
복숭아꽃살구꽃, 내 정원은 연중무휴로
크리스마스 이브 같다
밤마다 나도 들뜬다
-「나의 정원은」부분
시인은 남의 집을 세내어 살고 있다. 손바닥만한 한 뜨락조차 없는 집이다. 이 시의 앞부분을 보면 집(정확히 말하면 방)을 가운데 두고 서쪽과 동쪽이 태극기의 음 ․ 양(적 ․ 청)처럼 대조적이다. 서쪽에는 연꽃봉오리처럼 생긴 계룡의 빼어난 봉우리들로 둘러싸여 있다. 평수로 따지면 어림잡아 이십만 평도 넘는다. 아! 부자다. 이 시대는 뭐니뭐니 해도 돈이 제일이고, 땅은 돈일 걸, 이렇게 속으로 혼자서 만족해한다. 밤이 되면 동쪽은 화려한 환락가다. 못 배운 사람은 어느 나라, 무슨 말인지도 모를 샹그릴라, 발리, 알프스, 또 뭐뭐 러브호텔이 휘황하고 밤새 춤과 술과 노래가 넘치는 술집, 카페 등으로 가득하다. 복숭아꽃살구꽃, 연중무휴다. 이 화려한 공간이 그가 세든 새마을 회관 2층 방에서 환히 내려다보인다. 남의 나라다. 그것을 시인은 자기의 정원이라고 자랑한다. 밤마다 나도 들뜬다. 비록 눈요기만 하는 가난한 시인이지만, 시니컬한 시다. 난데없이 ‘구름에 달 가듯이, 이 뭣고’가 튀어나오는 이유이다.
이런 자본주의의 흔한 세태를 꼬집는 역설(패러독스)과 풍자(새타이어), 반어(아이러니)의 시가 그의 시편에 많이 나타난다.
그의 시의 본바탕이라 할까, 뿌리는 도시에 있지 않다. 짐승보다는 나무에 있고 사람도 잘난 사람이 아니라 사람축에 끼지 못하는 반편이 같은 진국에 있다. 용목이(「용목이」)가 그렇고 산골놀이 학교 권선생(「개사돈」,「산골놀이 학교장 권씨」)도 그렇다.
그의 시가 갖는 고향은 흙이다. 녹색의 생명을 길러내는 씨알의 터전이다. 거기에 ‘어머니’가 존재한다. 진한 젖냄새의 어머니가 그의 시심을 지배한다.
햇살 따스한 봄날
소꿉장난하다가 끌려간 곳이
시집이었다지요, 우리 오메는
오매가 보고 싶어서 날마다 날마다 울었다지요
우리 오매는 내 똥을
먹었다지요
-「애기똥풀꽃」부분
「애기똥풀꽃」의 후반부다. 애기똥풀은 시궁창이나 습한 곳에 나서 자라는 잡풀이다. 다닥다닥 피는 꽃이 노랗기 때문에 애기 똥의 색깔 같아서 그런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의 애기똥풀은 어머니의 대유이며 객관상관물이다. 시인은 어머니나 엄마 또는 어머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오매’라고 부르고 있다. 김영랑의 ‘오매 단풍 들것네’의 ‘오매’가 아니다. 우리를 낳고 기른 핏줄이 켕기는, 가장 친밀한 원초적 정이 그 말에 녹아 있다. ‘오매’는 어린 자식이 배탈이 났을 때 똥맛을 보고 재래식 처방을 찾아낸다. 그런 ‘오매’는 오매의 오매에서 태어났으며 오매의 오매 또한 오매의 오매에서 나왔다. 그리하여 ‘오매’는 강물처럼 영원하다. 이것이 바로 그의 시정신이 굳건하게 서 있는 대지인 것이다.
6.
그의 시는 흙에 뿌리를 둔 불꽃이다. 삶에 대하여, 세계에 대하여 당당하다. 외면하거나 회피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시는 화살이 아니다. 미감과 정감을 가지고 우리의 가슴에 와 닿는다. 까다로운 관념이라거나 암호 같은 기교도 그의 시에는 없다. 시인이 보고 들은 생의 체험이 진솔하게 형상화되어 있을 뿐이다. 그의 시가 우리에게 신뢰를 주는 이유이다.
이번 다섯 번째의 시집은『산을 오르다가』(네 번째 시집) 잠시 쉰 다음 다시 내려와 머문 계룡산 기슭의 그 깊은 지혜를 담고 있다. 활활 타오르는 그의 불꽃은 빛이 되어 세계를 밝고 따뜻하게 감싸준다. 그것은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 돌아온 겨울의 ‘경지’이다. 허虛를 발견하고 무無와 공空을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실상實相을 찾아낸다. 너그럽고 편안한 지점이다.
한韓시인은 다 아다시피 과학도이다. 화학공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까지 취득하고 대학의 겸임교수로 있는 학자이기도 하다. 과학이 진의 세계를 발견하고 추구하는 집중의 진지성과, 문학이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무한한 상상의 날개를 펴는 집중의 치열성을 동궤로 보아, 양자의 동질성 또는 순수성을 강조했던 최재서라든가,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리처즈가 강조해 마지않던 ‘시와 과학’의 접근성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다음과 같은 시편에서 그의 시적 힘을 보면서 새로운 발견의 가능성을 믿는다.
겨울밤 하늘은 북이다
내 마음속 북채로 하늘을 치면
둥둥둥둥
별은 하나 둘 튕겨나가고
온 누리 가득 퍼진다
-「하늘북」부분
‘하늘북’을 줄기차게 치며 그런 속에서, 더러는 “별이 유난히 큰 모항”에 가서 “얼싸안고 숙맥이 되어/거방지게 한판 놀”(「숙맥」)아 보는 것도 좋겠다. 하지만
함박눈 계속 내리고
뒤란엔 새하얀 화폭에 장독대
그 아래 작은 짐승 발자국이
눈에 덮이고 있겠다
음악 속에서도 눈이 내리고 있다
-「엘레지」부분
이런 고요의 아름다움과 지혜를 꾸준히 추구하는 것은 시인의 몫이다. 프로스트의 말마따나 시는 즐거움에서 비롯하여 예지로 끝난다. 보이는 넓이에서 보이지 않는 깊이를 추구하는 작업도 마찬가지다. 시의 언어는 깊은 침묵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 그때 시의 행간은 살아 움직이며 여운을 남긴다. 행간의 심연, 그것은 시의 원천이자 최후다. 채플린은 결코 웃지 않는다는 사실을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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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의 글 ◆
그의 시는 흙에 뿌리를 둔 불꽃이다. 삶에 대하여, 세계에 대하여 당당하다. 외면하거나 회피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시는 화살이 아니다. 미감과 정감을 가지고 우리의 가슴에 와 닿는다. 까다로운 관념이라거나 암호 같은 기교도 그의 시에는 없다. 시인이 보고 들은 생의 체험이 진솔하게 형상화되어 있을 뿐이다. 그의 시가 우리에게 신뢰를 주는 이유이다.
이번 다섯 번째의 시집은『산을 오르다가』(네 번째 시집) 잠시 쉰 다음 다시 내려와 머문 계룡산 기슭의 그 깊은 지혜를 담고 있다. 활활 타오르는 그의 불꽃은 빛이 되어 세계를 밝고 따뜻하게 감싸준다. 그것은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 돌아온 겨울의 ‘경지’이다. 허虛를 발견하고 무無와 공空을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실상實相을 찾아낸다. 너그럽고 편안한 지점이다.
― 조재훈(시인. 공주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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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수 시인∥
∙ 1957년 충남 운산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한종수이다.
∙ 1986년부터 1988년에 걸쳐《시문학》추천완료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 한국문인협회, 현대시인협회, 시문학회회원,《詩圖》주간, 흙빛문학, 호서문학, 푼수同人으로 활동 중이다.
∙ 시집『땅처럼 물처럼 불처럼 바람처럼(1983)』『허무에 돌을 던지고(1990)』『뱀과 무희(1997)』『산을 오르다가(2003)』를 펴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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