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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9월27일(수)
Ⅰ-6. <불교는 왜 어려운가?>
앞에서 두 가지를 역설했다. 불교는 철학이 아니고 종교이다. 철학적 요소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건 불교의 일부분일 뿐이다. 불교는 지성적인 면과 다정한 면을 지닌 강력한 종교이다. 불교는 미신이 아니다. 고통을 일시적으로 회피하게 해주는데 그치면 미신이요, 고통을 근원적으로 해결하는 데까지 나아가도록 이끌어주면 종교이다. 그런 면에서 불교는 고통을 완전히 극복하여 지극한 즐거움으로 안내해주는 희망과 행복의 종교라 할 수 있다. 흔히 사찰에서 불상과 전통적 민속신앙에서 유래한 사천왕과 十王시왕, 산신과 칠성을 모신 것을 보고 우상숭배라 비난하는 것은 종교문화를 이해하지 못한 천박한 견해가 아닐 수 없다. 이제 불교에 대해 남아있는 세 가지 오해 가운데 불교는 어렵다는 통념을 시정하고자 한다.
종교는 성스러운 님과의 만남이다. 신을 믿는 종교에서 님은 창조주, 유일신일 것이요, 불교에서는 고통의 소멸로서 누리게 되는 절대적 평안의 경지, 진리와 가르침 그 자체를 의미할 것이다. 그런데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종교와의 만남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감동과 감화가 없다면 종교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불교는 어려워요.’라고 이야기 한다. 불교가 생활인에게 어렵게 느껴진다면 문제가 된다. 정말 불교는 어려운 종교인가?
불교를 어렵다고 하는 데는 네 가지 이유가 있다.
①언어상의 난관
②경전의 방대함
③인생과 우주의 난해함
④수행과 깨달음의 어려움
→①언어상의 난관: 부처님만 살아계신다면 직접 만나서 각자가 갖고 있는 의문을 물으면 될 것이다. ‘부처님, 사는 게 무엇입니까? 부처님, 죽는 게 무엇입니까? 공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으면 부처님께서는 묻는 사람 수준에 맞게 가장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실행할 수 있는 답을 주실 것이다. 그리고는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해보라(諦聽善思체청선사)고 하실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 자리에서 깨닫거나 아니면 잘 기억하여 곰곰이 생각하다가 ‘아하, 그렇지. 그렇구나.’라고 의문이 풀리면서 환희용약하거나 평화로워질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제일 쉽고 정확한 답을 제시함으로써 민중의 호응을 얻었기에 당신의 가르침이 6사외도와 여러 종교를 압도하면서 삽시간에 인도전역을 휩쓸었다. 그러나 이제 부처님이 가신 지 오래니 누구를 의지하여 불교를 공부할 것인가? 불교를 만나려면 이제는 경전 밖에 남은 것이 없다. “내가 열반한 이후에 어느 한 비구를 지정하여 그 비구에게 너희들로 하여금 귀의하라고 하지 않겠다. 내가 열반한 뒤에는 나의 말이 너희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내가 설한 법과 율이 너희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여기서 언급된 법과 율을 기록한 자료가 經藏경장이며 律藏율장이다. 그밖에 論藏논장이란 게 더 있다. 이 세 가지를 통틀어 三藏삼장이라 한다. 이것이 불교의 三寶삼보(佛法僧) 가운데 法寶법보이다.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법보이다. 그중에서 재가신도가 공부할 때 의지할 수 있는 것은 경장과 논장인데, 편의상 경장과 논장을 합쳐서 경전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초심자가 처음 경전을 대했을 때 한자가 빽빽하게 들어찬 것을 보고 꽉 막히면서 위화감이 들거나 저항감이 들 수 있다. 한글로 번역된 경전조차도 시간이 없어 보기 힘든 판에 한자로 된 경전을 읽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불교를 전해주는 언어가 한자어로 되어있다는 것은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물론 동국대학교 역경원을 중심으로 한자로 된 대장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이 완성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한글로 된 경전을 보면 되지 않겠느냐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번역은 반역이란 말이 있듯이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는 데는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겨나는 걸 어쩔 수 없다. 아시다시피 부처님이 쓰신 언어는 당시 인도를 통치했다고 볼 수 있는 마가다Maghada국의 토속어 마가디 쁘라끄리뜨Maghadi Prakrit였다. 마가다국의 토속어라 할지라도 결국 산쓰끄리뜨 곧 범어라고 하는 언어와 뿌리는 같다. 그런데 우리가 한글로 번역할 자료로 삼는 것은 한역경전이다. 그런데 한역경전은 중국의 역경사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범어에서 중국어로 옮긴 것이다. 애초 산쓰끄리뜨에서 중국어로 옮길 때부터 원전과 차이가 났던 것이, 한역경전을 다시 한글로 번역하게 되니(重譯중역이라 한다) 벌어졌던 차이가 더 벌어져 귤이 탱자가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래서 한글대장경만 읽으면 된다고 말하는 데는 문제점이 있다.
범어와 중국어는 태생자체부터 언어의 성격이 다르다. 범어는 철학적인데 비해 중국어는 문학적이다. 범어는 논리적 사고에 상응하고, 중국어는 직관적 사유에 상응한다. 그래서 두 언어는 차이가 많아 그 뉘앙스를 그대로 살리면서 번역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꾸마라지바(Kumarajiva,344~413)라는 위대한 역경사가 있다. 그분은 쿠차국의 왕의 사촌으로 태어나 어머니와 함께 출가하여 대승과 소승을 망라한 불교경전을 공부한 다음 역경에 종사하여 그때까지 중국불교의 한계였던 格義佛敎격의불교의 폐단을 극복하게 해준 불세출의 역경사이다. “나는 어둡고 둔한 사람인데도 어쩌다 잘못 역경을 맡았다. 모두 3백여 권의 경과 논을 역출하였다. 아무쪼록 번역한 모든 경전들이 후세까지 흘러가서 다 같이 널리 퍼지기를 발원한다. 지금 대중 앞에서 성실하게 맹서한다. 만약 내가 번역하여 옮긴 것에 잘못이 없다면, 화장한 후에도 내 혀만은 불에 타지 않을 것이다.” 이런 분이 범어를 중국어로 번역할 때의 어려움이 얼마나 심했던지 다음과 같은 말을 토로했다. “부처님 나라의 풍속은 문장의 체제를 대단히 중시한다. 그 오음(五音)의 운율(韻律)이 현악기와 어울리듯이, 문체와 운율도 아름다워야 한다. 그러므로 범문(梵文)을 중국어로 바꾸면 그 아름다운 문채(文彩)를 잃게 된다. 아무리 큰 뜻을 터득하더라도 문장의 양식이 아주 동떨어지기 때문에 마치 밥을 씹어서 남에게 주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다만 맛을 잃어버릴 뿐만이 아니라, 남으로 하여금 구역질이 나게 만든다.” 역경이 얼마나 어려우면 이런 말을 남겼겠는가? 그만큼 제대로 번역하기가 힘든 부분이 많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반야심경을 외울 때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이란 말이 나온다. 이 말의 범어 원전을 살펴보면 상당히 중요한 말이 빠진 채 번역되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범어 반야심경에 ‘빤짜스깐다 땅슈차 스바바와슌얀 빠샤띠 스마(Panca skhandah, tamsca svabhavasunyan pasyati sma)’, 곧 ‘오온이 있는데 그들의 自性자성이 공함을 보았다.’라고 되어있다. ‘오온이 공하다.’라는 것과 ‘오온의 자성이 공하다.’는 것과의 차이는 천양지차이다. 현장(玄奘, 602~664)스님이 그렇게 번역했을 때 이런 줄 몰랐을까? 아니면 알고도 그렇게 번역할 수밖에 없었을까? 나아가서 ‘조견오온개공’에서 말하는 ‘空’과 ‘색즉시공, 공즉시색’에 나오는 ‘空’은 같은 空일까, 다른 空일까? 범어로 된 반야심경과 대조해보면 조견오온개공의 공은 sunya(비었다, 없다)라는 형용사로 쓰인 것이며, 색즉시공의 공은 sunyata라는 명사(空性공성)로 쓰인 것이다. 슌야와 수냐타의 차이는 크다. 슌야는 과정으로서 공이며 수냐타는 결과로서의 공이다. 슌야는 부정으로서의 공이고 수냐타는 부정을 통하여 얻는 긍정으로서의 공이다. 그밖에도 음미해야할 것이 더 있다. 순야( शून्य)와 수냐타(शून्यता)는 글자 자체가 다르다. 그런데도 한역된 반야심경에서는 그 차이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글만 읽어서는 무슨 뜻인지 알기 어렵다. 그 원전을 보았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을 한문으로 번역된 경전을 봄으로써 이런 문제에 생긴 것이다. 이런 것이 대승경전에서만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초기경전에서는 문제가 더 심각해진다. 초기경전 가운데 증일아함경이란 것이 있다. 거기에 보면 인생이 직면하는 四苦와 八苦를 나열해놓고 있다. 그 가운데 ‘五陰盛苦오음성고’라는 게 있다. 한자말을 그대로 해석하면 오온을 가지고 태어난 그 자체가 치성한 번뇌덩어리라는 말이 된다. 그런데 빠알리어 어원을 보면 ‘panca upadana khanda dukkha빤짜 우빠다나 칸다 둑카’이다. ‘집착된 다섯 가지 온 즉, 五取蘊오취온은 苦고이다’란 뜻이다. 중국 역경사가 번역할 때 upadana를 取로 번역해야 했어야 했는데 盛으로 번역하여 오해가 빚어졌다. 니까야의 한역에 해당하는 아함경에 이러한 예가 더러 나온다. 한역된 경전이나, 한역된 경전을 한글로 번역한 경전을 읽는 데는 이런 문제점이 항상 있게 된다.
그러면 우리가 산쓰끄리뜨와 빠알리어 원전으로 공부하면 될까?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최선의 방법이 겠지만 일반인은 그럴 수 없다. 이런 언어적 난관이 불교는 어렵게 만드는 요인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면 산쓰끄리뜨와 빠알리어 원전을 공부한 사람들이 한글로 번역하여 불교를 새롭게 시작하면 어떨까? 그런 흐름이 1990년대부터 벌써 형성되어가고 있다. 인도나 스리랑카와 미얀마와 태국에서 원전을 공부하고 돌아온 스님들과 불교학자들이 부처님 나라 말을 우리말로 깔끔하게 번역한 경전이 보급되고 있는 중이다. 몇몇 스님과 불교학자에 의해 한글로 번역되어진 경전이 아직까지 보편적으로 공인된 단계는 아니지만 상당히 파급력이 높게 보급되는 중이다. 앞으로 훌륭한 역경 전문가가 더 나올 것이기 때문에 언어적 난관은 극복될 수 있으리라 기대해본다.
→②경전의 방대함: 한마디로 부처님의 말씀이 너무 많다. 팔만사천법문이라거나 팔만대장경이란 말이 그걸 말해준다. 물론 대장경에 수록된 것들이 모두 부처님이 설법하신 것은 아니다. 경, 율, 논을 모은 것을 三藏삼장(Tripitaka트리삐따카)이라 한다. 깨달음과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 관련된 부처님 말씀을 모은 것을 經藏경장이라하고, 교단의 조직과 규율에 관련된 부처님의 말씀을 모은 것을 律藏율장이라한다. 論藏논장이란 경과 율에 대한 제자들의 주석이자 논문을 모은 것이다. 경장과 율장을 부처님이 직접 설하신 말씀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량이 여간 많은 게 아니다. 우리나라에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고려대장경이 있긴 하지만, 학술적으로 인용되는 것은 일본의 신수대장경이다. 신수대장경 가운데 부처님 말씀 부분을 뽑아보면 24권 정도이다. 24권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가 한자로 빽빽하게 들어있다. 한 권당 천 페이지 가량이다. 이것을 한글로 번역하여 책으로 만든다고 해보자. 사륙배판 보통 활자 양식으로 해서 500페이지 책으로 펴낸다면, 신수대장경 한 권은 500페이지 책으로 6권이 된다. 24권을 전부 한글로 번역하면 24✕6=144권에 이른다. 불교경전의 양이 어마어마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방대한 분량의 경전이 우리로 하여금 불교라는 종교에 다가가기를 어렵게 만든다. 인생문제를 해결하려고 종교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은 이왕이면 쉽게 답을 얻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하다. 기독교는 바이블 한 권이면 족하다. 신, 구약 성경을 합치면 1,754페이지, 500페이지 책으로 3권 정도의 분량이다. 기독교신자들은 3권 분량의 바이블 한 권만 읽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데, 불교신도들은 144권을 읽어야 답을 얻는다고 한다면 어느 종교가 더 경쟁력이 있을까? 당연히 기독교가 접근하기 쉽고 이해하기 쉬운 종교라 할 것이다. 그리고 144권을 읽어 모두 이해한다는 것은 전문가들이나 할 일이지, 일반인들은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할 일이다. 1년에 한두 권 책을 읽는 한국 사람들에게 대장경을 다 읽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구나 144권은 소설이 아니고 종교서적이다.
종교서적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종교적 문제에 대한 질문과 해답으로 짜져 있다. 한 문장에 걸려서 하루를 갈 수도 있고, 어느 한 구절에 걸려 한 달 또는 한평생이 갈 수도 있다. 심오한 무게를 가지고 있는 언어와 문장이 종교서적을 채우고 있다. 이런 심각한 내용을 가진 불교경전이란 종교서적이 어마어마하게 쌓여있기에 마치 설산을 마주한 듯 우러러볼 뿐 올라가지는 못한다. 그런데 여기에 어떤 한사람이 한 권씩 차례로 평생 읽는다 치자. 그렇게 해서 과연 불교를 알 수 있을까? 대장경은 한권 한권이 내용적으로 이어지며 순서대로 써진 것이 아니어서 전체적 조망이 없으면 한권씩 낱권으로 읽어서는 도저히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 금강경 한권만, 법화경 한권만 읽으면 불교를 다 알 수 있다는 말은 너무 단순한 발상이며, 그렇게 될 수는 없다.
그런데 요즘 불교학자들의 연구 결과 방대한 경전의 문제점을 어느 정도 해결하였다. 부처님 말씀을 담고 있는 正典정전(Cannon)은 근본경전과 응용경전 두 가지로 분류한다. 부처님 말씀은 대화체로 써져있다. 여기서 질문하는 사람은 그 당시의 문제의식을 표현한 것이므로 오늘날 우리가 부처님께 질문하고 싶은 내용과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2,600년 전의 인도라는 상황에서 그 때 사람들이 고민했던 문제는 오늘 우리들이 고민하는 문제와 같은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을 것이다. 당시 사람들이 제일 고민했던 문제는 사성계급, 카스트caste제도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오늘 우리들은 민주평등사회가 되었으므로 그런 문제로 고민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갑, 을 관계에 매이는 경제적, 사회적 약자의 고통은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여기에서 시대의 변천과 관계없이 인간이 공통적으로 당면하는 문제를 질문하였고 이에 대해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을 모은 경전을 <근본경전>이라하고, 이에 비해 시대가 바뀜에 따라 역사의 순간순간에 특별히 필요로 하여 부처님 말씀을 각색하거나 창작된 것을 <응용경전>이라 할 수 있다. 다행한 것은 <근본경전>은 지금까지 완전한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 그것은 산쓰끄리뜨와 빠알리어로 전해지는 경전이다. 소위 ‘빠알리 경전’, ‘5부 니까야Nikaya’이다. 한국에도 1970년대부터 전해져 한글로 번역되고 있다. 그것은 500페이지 책으로 치면 약 6권정도, 3,000페이지 가량 된다. 기독교의 바이블에 비교하면 바이블의 두 배정도 된다. 이정도의 분량의 경전이라면 팔만대장경보다는 훨씬 수월하고 편하게 볼 수 있겠다. 근본경전은 한역된 것에 아예 의지하지 않고 바로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한글로 번역하였기에 모든 사람들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 앞으로는 근본경전의 내용을 가려 뽑아 손에 잡힐 만한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가지고 다니게 될 날이 올 것이다. 경전들의 한글화를 기대하면서 경전의 방대함이란 문제는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으리라고 낙관할 수 있다.
→③인생과 우주의 난해함: 종교는 오묘한 인생의 문제와 광활한 우주의 생성과 전개와 소멸이라는 심오하고도 거대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렇듯 거대하고 심오한 문제를 다루기 심지 않고 난해할 것은 자명하다. 그러므로 이런 문제를 정면으로 파고들어 해답을 제시하는 불교가 쉬울 리가 있겠는가? 불교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불교가 다루는 문제가 어려운 것이다. 종교학자들은 종교가 무엇이냐는 정의에 대하여 ‘성스러운 것과의 만남’이라고 한다. 그러면 ‘성스러운 것’이란 무엇인가? 불교에서는 죽음을 극복한 경지를 수행의 결정체로서 성스러운 과위(聖果)를 말한다. 그 성스러운 결과는 다름 아닌 열반(nibbana닙바나)이다. 그러면 열반만 얻으면 모든 인생문제가 다 해결된 것인가? 죽음을 극복했다고 우리 인생문제가 다 해결됐다고 할 수 있는가? 세상만사가 그렇게 단순했으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나는 열반을 얻어 죽음 초월하고 모든 고통에서 자유로워졌지만 다른 사람들은 고통 속에 있지 않은가? 모든 생명이 서로 한 몸이면서, 일체가 서로 관련되어있다는 연기를 깨달은 사람이 저 혼자 열반의 평화에 잠겨 있을 수 있는가? 열반을 얻은 성자는 고통 받는 중생을 보고 연민과 자비심으로 말미암아 중생의 고통에 참여한다. 나는 내 문제로부터 완전히 벗어났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스스로의 문제는 다 해결했지만 고통 속에 빠져있는 남 때문에 다시 내가 괴로워지는 상황에 빠지게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완전하고도 궁극적인 평화를 얻을 수 있다. 열반을 彼岸피안이라 한다면 윤회는 此岸차안이다. 내가 중생이었을 때는 나의 번뇌를 정화함으로써 열반(彼岸)을 지향했지만, 이제 성인의 경지에 들었기에 뒤돌아서 중생(此岸)에게 돌아가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여 함께 궁극적인 평화로 나아가야 한다. 열반을 얻은 사람이 차안으로 돌아와야 한다. 왜냐하면 차안의 중생이 피안으로 올 수 없기 때문이다. 천신만고 끝에 피안에 도달하여 성취한 청정한 생활을 접어두고 차안으로 되돌아와서 그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심리적 부담과 고통을 느끼게 된다. 돌아가서 그들과 함께 머물며 그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고 이왕이면 효율적으로 건져주려고 하는 마음을 일으킨다. 그래서 수행자는 피안에 머물지 않고 차안으로 돌아오나니 이것을 回向회향이라 부른다. 이 때 또 다른 문제가 생겨난다. 하나는 어떻게 중생을 건질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자기가 자기를 건질 때와 남을 건질 때의 문제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하나의 문제는 어떻게 해야 진흙 속에 묻히되 물들지 않으면서 연꽃을 피울 수 있을까 라는 문제이다. 청정한 곳에서 청정하게 살기는 쉽다. 피안에서는 모든 욕심 벗어놓고 물처럼 바람처럼 살 수 있다. 깨끗한 물에서 살던 고기가 더러운 물속으로 들어왔을 때 과연 살 수 있을까? 피안의 수행자가 차안의 진흙으로 들어와서 그 더러움에 물들어 질식하여 죽는다면 자기도 고통이고 중생에게도 고통일 것이다. 고따마 부처님은 이 두 가지를 해결하여 성취하셨다. 피안에서의 절대적인 청정함을 고스란히 지닌 채 차안의 혼탁함 속에서 그 혼탁함을 맑히는 삶을 사셨다. 妙法蓮花묘법연화, 부처님의 법이 한 떨기 하얀 연꽃이라고 말할 때 바로 그런 뜻이다.
중생이 발심하여 피안을 향하기도 어려운데, 거기서 한발 나아가 차안으로 다시 돌아와 욕망에 젖은 중생을 제도하려고 하니 불교수행자가 감당할 일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우리 인생이 갖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인 죽음을 극복하고 열반에 이르면 자신을 괴롭게 했던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 그러면 관심을 중생에게로 돌리어 한 떨기 하얀 연꽃으로 피어나 이웃을 교화하기에 여념이 없이 살아감으로써 완결되는 대하드라마가 참다운 삶이라는 부처님의 이야기를 들으면 ‘원력으로 살아가는 인생이란 정말 대단한 것이구나.’라고 느끼게 된다. 자기의 삶이 사사로운 욕망을 추구하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끝나지 아니하고 우주적인 의미를 지닌 영원의 가치를 실현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이런 담론을 이야기하고 실천하도록 독려하는 불교가 중생에게는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할 것이다.
→④수행과 깨달음의 어려움: 불교가 감당하려는 문제가 어려우므로 불교가 어렵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종교의 목적은 사람에게 安息안식을 주는 것이다. 안식이란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자세라 할 수 있다. 완전하고 절대적인 신앙을 말한다. 신을 믿는 종교에서는 절대자에 대한 신앙이 제일 중요하여, 나머지 덕목은 신앙만 있으면 따라오는 것으로 간주한다. 기독교와 카톨릭에서 구원받는 조건으로 신앙이 먼저인가, 善行선행이 먼저인가라는 신학적인 논쟁이 있었는데 1999년 신앙 하나면 충분하다고 바티칸에서 결론지었다.
불교에서도 信心신심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삼보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면서 信根신근, 믿음의 기능과 信力신력, 믿음의 힘을 얻으라 한다. 그러나 오직 믿음 하나면 족하다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부처님은 ‘앎과 깨달음을 통해서 신앙에 접근하라.’고 하셨다. 불교라는 종교는 들은 것을 그냥 받아드리라고 하지 않는다. 먼저 법문을 자주 많이 듣고, 들은 것을 이해하고, 이해한 것을 실천해보면 스스로 믿는 바가 생긴다고 가르친다. ‘보고 알고, 알고 본다(知見)’는 과정을 거쳐야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신앙에 대한 이런 접근방식은 지극히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보통 사람에게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
불교도 다른 종교처럼 그냥 믿으면 된다고 하면 좋았을 텐데 왜 ‘앎과 깨달음’을 강조할까? 부처님은 인간이란 존재를 잘 알기 때문이다. 사람이 그냥 믿으라하면 처음에는 믿는 것처럼 보이지만 스스로 사유하여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결국은 회의하게 된다. 부처님이 보시기에 인간은 감성적이기도 하지만 지성적이기 때문에 이성적 사유를 통해 스스로의 신앙을 확립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불교를 잘 알게 되고, 깨닫고 나서야 믿음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초심자가 비록 닦은 바가 적어서 불교를 잘 알지 못하여 깨달음은 없을지라도 믿을 만한 스승이나 법사의 설법과 강의를 통하여 부처님과 부처님의 말씀에 대해 신뢰와 감동이 우러나오면 ‘그렇겠지. 그렇고말고.’라는 긍정하는 자세가 된다. 그러면서 ‘이 길을 계속 가기만 하면 차차 알아질 거야. 그래, 나는 불교를 계속 공부할 거야.’라고 결정하는 마음이 생긴다. 이렇게 아는 만큼 받아드리고, 받아드린 만큼 믿음이 쌓여간다. 또 아는 만큼 실천하고, 실천하여 효험을 본 만큼 믿게 된다. 깊이 알면 실천하게 되고, 아는 것을 실천하면 불교가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이렇게 생긴 믿음은 토대가 튼튼하기에 흔들리지 않는다. 불교는 이런 믿음을 얻으라고 권한다.
부처님께서는 인간은 진리를 인지하는 능력을 무한히 계발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은 궁극의 진리를 볼 수 없고, 알 수 없다하더라도 수행을 통하여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이 계발되면 알고, 보고, 깨닫게 된다고 하셨다. 이렇게 수행하여 진리를 체험함으로써 믿음이 일어난다. 이런 믿음을 절대적인 믿음이라 할 것이다. 그래서 불교는 수행의 종교이다. 修行수행이라는 말의 한자를 살펴보면 ‘닦을 수修’가 들어있기에 ‘마음을 닦는 것이 수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상식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수행을 의미하는 Pali빠알리 어원은 <bhavana바와나>로서 ‘되게 하는 것, 바꾸게 하는 것, 계발하는 것’이란 말이다. 진리를 보는 인지능력을 계발하여 바꾸는 것이 수행이다. 이런 수행은 인지적 장애(所知障cognitive defilement)를 극복하게 해준다. 그리고 부정적 감정을 유익한 감정으로 바꾸게 하는 것도 수행이다. 이것은 정서적 장애(煩惱障emotional defilement)를 극복하게 해준다. 인간의 고통은 인지적 장애와 정서적 장애라는 이중적 장애(二障이장)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런 두 가지 장애를 벗어나지 않는 한 무한한 세월을 윤회해야한다. 그렇기에 이런 장애를 한생에 모두 극복하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이런 인간적인 한계상황을 깊이 고민했던 대승불교에서는 四阿僧祗十萬劫사아승지십만겁의 세월토록 波羅蜜바라밀을 닦아서 성불한다고 설한다. 劫겁(깔파kalpa)란 얼마나 긴 시간인가? 가로, 세로, 높이가 백 리나 되는 바위에 백년에 한 번씩 도솔천에서 천녀가 내려와 그 바위를 한 바퀴 돌 때 천녀가 걸친 하늘나라 옷이 스치면서 바위가 다 닳아져 없어지기 까지 걸리는 시간을 일 겁이라 한다. 그런 어마어마한 시간을 십만 배하고 또 네 번의 阿僧祇아승지라는 무한한 시간을 곱한 세월을 거쳐야 불교가 지향하는 궁극의 목표를 달성한다 하니 수행이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 수 있다. 이런 말을 들으면 낙담하면서 불교수행이 그렇게 오랜 세월이 요구되는 어려운 일이라면 차라리 쉬운 종교를 택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수행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쉬워 보이지만 불가능한 이야기를 하는 종교와 어려워 보이지만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는 종교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 불교는 희망을 이야기한다. 윤회가 아무리 길고 험난하지만 그것이 끝나는 날이 반드시 있고, 수행이 아무리 오래 걸리고 힘들더라도 완성되는 날은 꼭 온다고 부처님이 말씀하신다.
그런데 수행이 어렵기만 한 것은 아니다. 수행에서 오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다. 가면수록 심오해지고 깊어지는 수행의 기쁨과 즐거움이 어려움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다. 수행하는 사람은 가슴속에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는 신비한 샘물을 간직한 것과 같으니 그 즐거움은 스스로 알 것이다.
[참고]
수메다 선인(석가모니의 전생)이 발심해서 성불할 때까지 수행에 걸린 시간을 사아승지십만겁이라 한다. ‘아승지’는 산스크리트 Asamkhya아상키야의 음사로 ‘헤아릴 수 없음不可算불가산’이란 뜻이며, 10의 51乘승이다. 수메다 선인은 상상을 초월하는 어마어마한 세월 동안 처음 일으킨 보리심 한 생각을 잊지 아니하고 견지하여 마침내 불도를 완성하였으니 ‘一念卽時無量劫일념즉시무량겁’-한 생각이 무량한 세월을 꽤 뚫는다는 말이 이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또 겁이란 인도의 우주관에 의하면 범천(梵天)의 하루에 해당하는데 이는 인간계의 4억3천2백만 년이다. 속설에 의하면 선근 인연을 심은 사람끼리의 만남을 겁(劫)이라 하기도 한다.
* 1천겁의 인연으로 같은 나라에 태어난다.
* 2천겁의 인연으로 하루 동안 길을 동행한다.
* 3천겁의 인연으로 하룻밤을 한 집에서 지낸다.
* 4천겁의 인연으로 한 민족으로 태어난다.
* 5천겁의 인연으로 한 동네에 태어난다.
* 6천겁의 인연으로 하룻밤을 같이 잔다.
* 7천겁의 인연으로 부부가 된다.
* 8천겁의 인연으로 부모와 자식이 된다.
* 9천겁의 인연으로 형제자매가 된다.
* 1만겁의 인연으로 스승과 제자가 된다.
이런 설에 따르면 우리가 부처님 집안에서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만겁의 인연을 쌓았기 때문이다. 도반들끼리는 부처님 집안의 형제자매이므로 9천겁의 인연으로 만난 거라 할 수 있다. 실로 귀중하고 희유한 인연이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며 서로 琢磨相成탁마상성 해야겠다.
이상에서 불교가 어렵다는 세상의 편견을 불식시키기 위해 그 이유를 네 가지로 설명했다. 불자들은 불교가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를 잘 알아서 스스로도 분명해지고 이웃들에게도 납득할 수 있게끔 설명할 수 있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