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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한달 전쯤 어느 토요일로 기억된다.
그날은 아침부터 가을비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후 한 두시 무렵 내가 알고 있는
은마상가 떡집 아주머님으로부터 경기여고에 떡 한상자 배달좀 부탁하는
내용이였는 데...
비가 오긴 해도 거리가 1킬로 정도 가까운 거리라서 해주마 하고 배달한적이 있었다..
장소가 경기여고 정문입구 옆에 100주년 기념관이였는데 아마 여고 개교 100주년을 맞아
동문들이 건립한 다목적 건물로 보이는 데,
우리 무장초등학교도 개교 100주년 행사를 한지가 몇 년 전인 것 같은데
이 학교도 그러고 보면 역사가 상당히 오래된 것 같다.
그런데 그날 가서 보니 리라 초등학교 몇회인지는 기억이 안나지만, 그날 이곳에서 동창회를
하는 행사였던 것이다.
나이 지긋한 중년의 상당히 세련된 아줌마 아저씨들이 지하 강당에 모여 다과를 하며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비가 오기 때문에 우비를 입고 들어가 전해 주고 바로 나올려고 할때쯤, 이들 일행중
신사 한분이 비도 오고 하는 데 비좀 그칠 때 까지 좀 쉬었다 가라 하면서 따끈한 국물
한그릇과 소주 한잔만 하시라고 하지 않은가.........
날씨도 으슬으슬 춥기도 하고 해서 잠깐 소주한잔하면서 이 당시 이야기를 나누었던 내용이다.
서울 리라 초등학교하면 한국사람들은 어떤 학교인지는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1년 학비만 해도 연 2천만원이 넘는 그야말로 사립중 최고 명문 사립초등학교라는 사실 말이다.
이러다 보니 한국 최고 부유층 자녀들만이 다닐 수 있는 초등학교인 것이다.
이 신사 양반은 집이 마포인데 초등학교 2학년때 이 학교로 전학을 했다고 한다.
당시 꼬마적 여자친구가 이 학교에 다니면서 바이올린을 하도 잘쳐,
자기도 바이올린 치고 싶다고 해 부모에게 졸라대어 이 학교로 많은 돈을 들여 전학했다고 한다.
물론 사설 학원에서 배울 수도 있지만 학교에서 친구들과 하는 것이 더 좋아서 그랬다고 한다.
지금은 뉴욕 맨하탄에서 사업을 하고 있고 오랜만에 동창회한다고 해서 단순에 달려 왔다며
자랑을 하는 것 같았다.
이 학교는 6년동안 학교 다니면서 누구나 취미로 악기 한 두가지는 마스터 한다고 나도 알고는
있다.
내가 “선생님 지금도 바이올린 잘 하시겠네요 ? ” 하고 묻자 중학교 때부터 손을 놓았고
사회생활 하면서 바빠 안하다 보니 지금은 조금이라고 한다.
그리고 친구들이 강남에 사는 사람이 많고 이곳이 교통과 주차장이 좋아 이 곳을 하루
전세 냈다고 하면서 말이다.
내가 그러면 오늘 하루종일 동창회를 이곳에서 하느냐고 묻자, 오전 10부터 오라고 했느데
개인 시간상 편리한데로 하나둘씩 이곳에 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저녁에 모 호텔 뷔페식당으로
옮겨 식사나 하고 헤어 질 스케쥴이란다.
언뜻보면 보통 일반 보통 동창모임과 별반 다름이 없어 보이지만, 나에겐 이들 이야말로 정말
고향이 없는 불쌍한 사람들이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옆에서 이야기 나누는 것을 보면 고향이나 보통 학창시절 이야기가 아닌 대부분 사업 이야기이고,
본래 부유층 이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명품관련 내용이나 외국생활 내용이 좀 많은 것 같았다.
물론 자기들 친구 이야기도 있었지만.....
우리 인간에게는 자기가 자기 의지대로 할 수 없는 것 정확히 세가지가 있다고 한다.
우리는 이것을 우리말로 운명이 아닌 숙명이라고 부른다.
첫째가 부모를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것이다.
나 자신이 대기업 회장 아들이나 딸로 태어 났더라면 또는 갑부의 아들로 태어 났으면 좋았으리만
바래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듯이 말이다.
내가 명문가문의 김씨 이씨 집안의 자녀로 태어 났더라면 하고 바래보았자 또한 마찬가지다.
두 번째가 고향이라고 한다.
내가 세상에서 살기좋은 스위스나 미국 노르웨이등 생활상 아무 문제가 없는 나라에서 태어
났더라면 하고 바램도 가져도 보지만 아무의미가 없듯이 말이다.\
왜 하필 먹고 살기 어려운 시골구석 무장땅 바닥에 부모님 나를 낳아 주셨냐고 하소연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
하지만 지금도 먹고 살기 힘든 아프리카나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태어나지 않은 것만도 얼마나 행운이 아닌가 한다.
마지막 세 번째가 시대인 것이다.
내가 왜 먹고살기 힘든 그것도 한국전쟁 직후에 이 세상에 나왔냐 하고 원망해 보았자 이것역시
아무 의미가 없다.
생활이 더 나은 2050년에 태어나지 그렇지는 못해도 지금쯤 태어났으면 하고 바래 보았자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리가 출생과 관련된 부모,고향 그리고 시대는 나 자신하고는 아무 관련없이 이 세상에
무작위로 내 던져진 존재라서 인간 누구나가 자기의지대로 바꿀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것을 숙명이라고 하지 않느냐 말이다..
인간이 이런 숙명적 존재로 태어 났지만 사회생활을 하면서 결혼이나 직업선택은 사실 내
자의지대로 한다고 했으나 더 낳은 길을 선택 했더라면 하고 후회아닌 후회도 누구나가 한번쯤은
해 보았을 것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우리는 운명이라 부르고 있다.
흔히 지금의 배우자를 택하지 않고 그당시 다른 사람을 물론 택할 수도 있었지만 못난 내 마누라
내 신랑을 지금까지 데리고 사는 것이 내 팔자니 내 운명이니 하면서 말이다...
직업도 마찬가지이고...
사람들은 운명도 자기 뜻대로 자기 의지대로 바꿀 수가 있다고는 하지만 이것역시 쉽지않은
세상사 질문임에는 틀림이 없다..
나 자신도 아무런 세상에 잘못이 없이 원만히 살았건만 이상하게 나 외적요인이 얽히고 설키고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되어 버리고 만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하면 언제 어디서부터 무엇이 문제였던가를 혼자 자문해 보기도 하지만
이미 지나버린 것이라서 역시 운명이니 팔자려니 하면서 그냥 스스로를 위로하고 마는 편이다.
내 시대에 태어난 우리 무장친구들 만남역시 나는 숙명이라 생각한다.
방금 위에서 말한 리라초등학교 졸업한 신사분은 자기 의지대로 초등학교도 바꾸었다지만,
우리 옛시절 그 당시는 불가능한 일이고 보면 우리 무장초등학교를 같은해 졸업한 친구들 모두
만남자체가 또한 나는 숙명이라 생각된다.
다시말해 어쩔 수 없이 우리들은 필연적으로 만나야만 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불교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전생에 아주 깊은 인연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란다.
내가 리라초등학교 동창회를 보면서 어린시절의 극과 극을 보는 것 같아 우리들하고는 많이
다른 느낌을 지울 수 없어 이 글을 쓰지만,
이분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당시로서는 첨단 세상을 살았던 사람들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전화나 텔레비전 드라마,그리고 영화 이야기가 이분에게는 당시 우리들 고향이야기와 비슷한 것
같다.
우리가 태어나서 자라던 곳은 맑은 냇가도 있었고, 푸른 들판 보리밭 너머 두메산골에는 뻐꾸기도
울었고, 학교 갔다 오면서 붕어 송사리도 많이 잡았고, 방학이면 매미 잠자리 잡고,
겨울엔 눈사람도 만들고, 물얼음 위에서 썰매도 탔고 말이다.
이런 기억이 우리들에게는 생생하니 좋은 고향을 두었다는 것이 정말 다행이라 생각이 든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같은 시골도 전화 텔레비젼이 들어오긴 했었지만,
우리들 그당시 시대는 아주 귀한 것이라서 호기심의 대상이었던 것을 당시 서울 리라학생들은
일상생활의 물건이었던 것 같다..
우리가 사는 오늘날은 인간성 자체도 자본에 메몰리다 보니 사회 부유층을 보는 시각은 곱지만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난 이분들(리라학교 졸업생)도 한국사회의 일원이고 우리들 보다는
좋은 교육을 많이 받은 만큼 사회에 더 좋은 일을 하길 바랄 뿐이다...
리라 초등학교 동창회와 우리 무장초등학교 61회 동창회를 비교해 보면서 말이다..
첫댓글 맘이 찡 하다 그리고 친구가 고맙다하는 생각이 든다 나도 그리워할수있는 친구들과 고향. 학창시절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