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열된 입시경쟁, 아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학교폭력, 공교육을 대체하다시피 팽창해버린 사교육…등. 가르침과 배움은 사라지고 오로지 '등수 매기기'에만 골몰하는 교실 풍경은 이제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식상할 지경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육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다들 이런 식상한 이야기를 하곤 하지요. 누구나 알고 있는 현실 진단을 기계적으로 읊조리는 정책 당국자, 학자들의 모습에서 진정성을 느끼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런 뻔한 이야기를 주고 받는 풍경, 그 맞은 편에는 학교폭력, 입시 부담, 혹은 어른들이 짐작하지 못하는 그밖의 어떤 이유로 자살을 고민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세상을 떠나고 싶을 만치 심각한 문제 앞에서, 어른들은 왜 '뻔한 이야기'만 반복하는 걸까요. 어쩌면 이런 간극이야말로 우리 교육의 절망스런 현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지금 진짜 필요한 미덕은 '솔직함'일 수 있겠다고 봅니다. 짧은 자기 경험으로 섣부르게 단정짓기보다 교육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아주 하찮은 수준이라는 걸 솔직히 인정하고 시작하는 태도 말입니다. 또 근대적인 학교 모델이 이젠 어떤 구조적인 한계에 부딪혔다는 점, 그리고 그 한계와 모순에 대한 우리의 인식 역시 한계가 있다는 점 역시 솔직히 인정하는 게 필요해 보입니다.
대안교육 격월간지 <민들레>에 주목한 건 그래서입니다. 지난 1999년 창간된 이 잡지의 시선은 '학교 너머'를 향하고 있습니다. "학교가 바뀌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만큼 우리는 학교를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교육 시스템을 만들자"라는 <민들레>의 목소리가 교육에 관한 '뻔한 이야기'들에 갇혀 드러나지 않았던 '학교의 빈 곳'을 살피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편집자>
공간 속에 숨겨진 교육과정은 시간표에 드러나 있는 교과목들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친다. 미셀 푸코가 교도소 구조를 닮았다고 말한 근대학교 건물은 건물 구조 자체가 복종형 인간을 길러내는 훈련관 역할을 해왔다. 복도를 거치지 않으면 바깥으로 나갈 수 없는 구조, 중앙 현관 좌우에 자리 잡은 교무실과 교장실, 교실에 붙어 있는 시간표처럼 똑같은 크기로 칸칸이 나뉜 교실들, 휑한 운동장, 위병소를 닮은 수위실…. 병영 같은 그곳에서 아이들은 근대 한국의 산업전사로 길러졌다.
이제 그 역할을 다한 근대 학교에서 아이들과 교사들은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역할의 혼란을 겪고 있는 중이다. 공간은 옷처럼 쉽게 벗어던질 수 없다. 공간에 길들여진 의식도 하루아침에 바뀌기는 어렵다.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변화의 조짐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새로 지어지는 학교들 중에는 더 이상 중앙 현관과 일자형 복도 구조의 통제 중심 구조가 아닌 건물이 적지 않다. 복도가 일직선 형태로 단순히 지나다니는 곳, 이동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다양한 용도로 활용할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 설계된 학교도 있다.
공립학교의 변화
전북 완주의 삼우초등학교 신축 건물은 도서관을 중심에 두고 공간 설계가 되어 있다. 도서관이라 해도 문이 따로 있지 않고 복도와 이어져 있어서 완전히 열린 공간이다. 오가다가 언제든 책을 꺼내 볼 수 있는 구조다. 미술관인지 학교인지 구분이 안 되는 학교도 있다. 고 정기용 선생이 설계한 지평선학교 신축 건물도 아뜰리에 분위기가 난다.
일본의 효고현 산골에 있는 카미가와(神江) 소학교는 단층 구조로 각 교실에서 운동장으로 바로 나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교실 전면에는 데크가 깔려 있어, 말하자면 방에서 마루를 거쳐 마당으로 이어지는 구조다. 지역의 삼나무목재로 지어 건물 내부와 외관 모두 학교 같지 않은 모양을 띠고 있다. 초등학교의 경우는 특히 단층 구조가 바람직할 것이다. 20세기 초반에 세워진 일본의 자유학원이나 후반에 세워진 키노쿠니어린이마을도 단층 구조다. 아이들은 되도록 땅을 밟고 지낼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자유학원은 안마당을 둘러싸고 건물이 ㅁ자 형태로 배치되어 있고 곳곳에 연못이 어우러져 있어 아름다운교정이 인상적이다. 아름다운 환경은 아이들의 정서를 안정시키고 안목을 높이는 데 어떤 교사보다 큰 역할을 한다.
▲ 카미가와소학교 전경(왼쪽), 삼우초등학교 만남의 도서관 풍경(오른쪽) ⓒ민들레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학교숲 만들기 운동이 일어나면서 아쉬운 대로 운동장 한켠에 작은 동산을 만들고 나무를 심는 학교들이 늘어나고 있다. 콘크리트 건물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비어 있는 운동장을 바꾸는 것은 생각만 바꾸면 그다지 어렵지 않다. 축구를 좋아하는 아이들에게는 섭섭한 일일지 모르지만, 대다수 학교 구성원들에게는 축구 골대보다 나무들이 주는 기쁨이 더 클 것이다. 사실 나무 한 그루 없는 휑한 운동장은 아이들이 운동하기 위한 공간이기보다 전체조례나 운동회 같은 집단 의례를 위한 공간이다. 한 반 아이들의 체육활동을 위해서는 그렇게 넓은 운동장이 필요하지 않다. 전체주의식 교육에서 벗어나면서 휑한 운동장에 대한 미련을 버리는 학교들이 늘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도시형 학교로서 주목할 만한 해외 모델로는 미국의 메트스쿨을 꼽을 수 있다. 미국 공교육의 개혁모델로 주목받고 있는 메트스쿨이 처음 문을 연 프로비던스 시에서는 큰 학교 하나를 만들 돈으로 작은 학교 6개를 만들었다. 새로 지은 교사는 가운데 큰 홀을 중심으로 작은 방(교실)들과 주방이 자리잡고 있다. 홀은 다용도로 쓰인다. 점심시간에는 식당으로, 전체 모임이 있을 때는 강당으로, 평상시에는 휴게실이나 거실처럼 쓰이는 툭 트인 공간이다. 커다란 가정 같은 새로운 개념의 학교 공간을 구현하고 있는 셈이다. 운동장이나 수영장은 지역의 체육관을 활용하고, 전교생이 인턴십 활동을 하도록 하여 지역사회의 물적 인적자원을 교육자원으로 최대한 끌어들이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 전체주의 교육에서 벗어나면서 휭한 운동장에 대한 미련을 버리는 학교들이 늘고 있다. 왼쪽 사진은 프로비던스 시 메트스쿨 전경, 오른쪽 사진은 산마을고등학교 전경. ⓒ민들레
대안적인 교육공간을 만들어가는 새로운 시도들
최근 학교 건물을 신축하는 대안학교들이 늘어나고 있다. 대부분의 학교들이 전교생 100명 미만의 작은 학교들인 만큼 신축 건물은 기존 학교와 많이 다른 형태를 띤다. 금산간디학교, 실상사작은학교, 늦봄학교, 파주자유학교, 고양자유학교, 푸른숲학교, 청계자유발도르프학교, 들꽃피는학교, 성미산학교, 무지개학교, 더불어가는배움터길 등 학사를 신축한 비인가 학교는 십여 군데가 넘는다. 이우학교, 산마을고등학교, 지평선학교, 푸른꿈고등학교 같은 특성화학교들도 교사를 신축하거나 증설하는 곳들이 많다.
대안학교들은 저마다의 철학과 입지조건에 따라 새로운 교육공간을 만들어가고 있는데, 생태주의는 대안학교들의 공통된 철학으로 건축에서도 이를 구현하고자 노력하는 편이다. 태양열을 이용한 발전, 온수 설비를 하거나, 연못을 이용한 하수처리시설을 갖추기도 한다. 처음부터 공교육의 개혁모델을 자임한 이우학교는 비교적 규모가 큰 대안학교에 속한다. 성남시 외곽에 자리잡은 이우학교는 입지조건이나 형태로 볼 때는 전원형 학교와 유사한 모습이다. 큰 건물 대신 세 동의 작은 교사 건물을 회랑으로 잇고, 그 사이 공간에서 축제를 열기도 한다. 벽체 마감을 콘크리트가 아닌 유리와 나무로 했는데, 방음이 잘 안 되고 난방비나 유지보수비가 많이 드는 단점이 있다고 한다.
특성화학교들 가운데는 교장실 풍경이 일반학교와 거의 다를 바 없는 학교가 적지 않다. 관공서에서 볼 수 있는 커다란 가죽소파와 책상 뒤편에 세워져 있는 교기가 빚어내는 권위적인 교장실 풍경 하나만으로도 교육의 대안성은 희석되고 만다. 많은 대안학교에는 교장실이 따로 없이 교무실 한켠에 책상 하나가 놓여 있을 뿐이다. 서무실과 교무실, 교장실이 굳이 따로 있어야 할 까닭이 있을까. 학교를 찾아오는 손님을 위한 응접실 공간만 따로 두고, 내내 손님이 있지도 않으니 이를 교사 휴게 공간으로 겸해도 된다. 아이들의 휴식 공간을 겸한다고 해서 안 될 것도 없다. 교사와 교장의 권위는 아이들의 사랑과 존경 속에서 우러나올 때 교육적인 의미가 있지 제도와 형식으로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 권위적인 교장실 풍경 하나만으로도 교육의 대안성은 희석되고 만다. 왼쪽 사진은 이우학교 축제 모습, 오른쪽 사진은 푸름꿈 고등학교 기숙사 전경 ⓒ민들레
기숙형 특성화학교들의 경우는 대부분 국고 지원으로 기숙사를 새로 지었는데, 아쉽게도 대개는 구태의연한 기숙사들이다. 생활교육, 공동체성을 기르는 데 주력하는 대안학교의 경우 기숙사는 교실보다 더 중요한 교육공간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기숙사가 그에 적합한 구조를 띠고 있지 못한 것은 교육철학과 공간의 연관성에 대한 고민이 부족한 때문일 것이다.
강화에 자리한 산마을고등학교는 전통 서원과 수도원 건축을 참고하여 설계했는데, 가정집 형태의 기숙사와 학사들이 마을 형태를 이루고 있다. 생태건축에 충실하게 다랑이논이었던 원래 지형을 살려 여러 채의 단층 건물을 앉히고, 건축 재료도 주로 흙과 나무, 돌을 사용했다. 5채의 기숙사동은 간단한 취사를 할 수 있게 저마다 간이부엌을 갖추고 있다.
전남 남원의 실상사작은학교의 경우 초기에는 지역의 민가를 빌려 교사 한 명과 아이들 너댓 명이 함께 지내는 작은 가정 형태로 기숙사를 운영하다 산속에 터를 잡아 학교 건물을 신축하면서 기숙사도 마을과 분리되었다. 마을 가까이에는 터를 찾기 어려웠다지만, 학교가 마을과 분리된 것은 아쉬운 일이다. 다른 큰 절처럼 산속에 자리 잡지 않고 마을 가까이 터를 닦은 실상사의 정신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최근에는 다시 작은가정을 부활시켜 일부 아이들과 교사들은 마을로 내려와서 지내고 있다고 한다.
전원형 대안학교들의 경우 아직은 폐교를 활용하는 곳이 많은 편이다. 임대한 경우는 공간을 마음대로 바꾸기 어렵긴 하지만 구태의연한 학교 공간 구조를 그대로 둘 경우 자칫 형식에 내용이 규정당하기 쉽다. 대안학교들이 사립학교처럼 변해가는 데는 공간이 주는 영향도 없지 않을 것이다. 기존 학교 건물이 안고 있는 한계가 있긴 하지만, 폐교를 매입해서 리모델링할 때는 비용이 좀 들더라도 각 교실마다 운동장으로 통하는 문을 내고, 앞에는 마루를 깔아보는 것은 어떨까. 슬라브 지붕에는 옥상정원을 만들어 휴식 공간 겸 야외수업 공간으로 활용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운동장 한 켠에는 밭을 일구고 나무를 심고 오솔길을 만들 수도 있다.
도시형 대안학교는 대부분 비인가 학교로서 통학형이다. 초등 대안학교의 경우 대개 학부모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주택이나 가든 건물을 임대해서 학교로 이용하고 있어 학교시설 면에서는 열악한 편이다. 하지만 집 같이 작은 공간에서 아이들은 편안하게 지낼 수 있고, 긴밀한 관계 맺기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중등 도시형 학교들은 대체로 도심 건물의 작은 공간을 임대해서 빠듯하게 운영되고 있는 실정이다. 서울시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만들어진 하자작업장학교나 학부모의 힘으로 학교를 신축한 성미산학교는 아직은 도시에서 예외적인 공간인 셈이다.
많은 대안학교들은 지역공동체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거나 그런 역할을 지향하고 있다. '벽이 없는 학교'(미국 필라델피아 시, 뉴욕 시를 비롯해 여러 도시의 교육위원회에서 시도한 새로운 공립학교 모델로서, 학교 건물은 최소한 갖추고 시내 모든 시설과 일터를 교육의 장소로 활용하는 시스템이다. '벽이 없는 학교'의 교육방식은 이후 많은 학교에 영향을 미쳐 인턴십 교육을 확산시키고 지역사회와 학교의 경계를 허무는 데 기여했다. <민들레> 12호, 13호 참조) 정신을 살려 학교와 지역사회의 벽을 허물어 교육과정도 학교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을 많이 하는 편이다. 처음부터 지역공동체운동과 결합해서 설립된 학교들도 있고 간디학교처럼 학교 주변에 새롭게 생태마을을 만들어가는 경우도 있다. 금산간디학교는 2만 평의 부지에 교사와 기숙사, 마을과 작업장들을 계획적으로 조성하고 있다.
공동육아어린이집을 중심으로 십여 년 동안 지역운동을 해온 부모들이 힘을 모아 만든 성미산학교는 2백여 평 부지에 연면적 6백여 평의 5층 건물로, 운동장이 없는 대신 지하의 다목적실과 옥상 정원을 다양한 용도로 활용하고 있다. 지역 곳곳에 만들어져 조합 방식으로 운영되는 어린이집과 방과후학교, 두레생협, 반찬가게, 카페와 유기적으로 결합해 마을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도심지 주택가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중정(中庭)을 만드는 식으로 나름 애를 썼지만, 1층을 주방과 도서실을 중심으로 북카페를 겸할 수 있게 설계했더라면 마을학교로서 더 나은 공간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작은 학교를 신축할 때 주방 또는 식당을 중요한 교육공간으로 여기지 않는 경향은 아쉽다. 초등 과정에서는 더욱이 부엌과 식당이 중요한 교육공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슈마허의 뒤를 이어 <소생(resurgence)>(세계적인 격월간 환경 잡지) 편집인이 된 사티쉬 쿠마르는 '교육은 만남'이라는 대전제 아래 '하트랜드 작은학교'를 만들면서 부엌이 학교의 중심이 되게 했다. 따뜻한 불가에 둘러 앉아 음식을 나누고, 책을 읽고, 이야기를 주고받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교육이야말로 아이들의 몸과 영혼을 건강하게 만든다는 뜻이리라. 음식을 나누는 것은 교감과 소통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책을 매개로 한 대화와 토론은 학습력을 기르는데 유효한 방식이다. 교육이 길러주어야 할 것이 결국 이러한 소통 능력과 학습 능력이라고 본다면 거기에 가장 적절한 공간 구성이 어떤 것일지는 저마다의 현장에서 고민해야 할 몫일 것이다.
▲ 교실마다 운동장으로 통하는 문을 내고 앞에는 마루를 깔아보는 것은 어떨까. 왼쪽 사진은 성미산학교 중정, 오른쪽 사진은 북카페 형식의 공간민들레 ⓒ민들레
학교를 지을 때 공간이 복합적인 기능을 하도록 설계하면 건축비도 절감하고 공간 활용도도 높일 수 있지 않을까. 전통 가옥 구조에서는 밥 먹고 공부하고 손님 맞고 잠자는 활동이 한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공간을 굳이 기능적으로 분화시키지 않고 메트스쿨같이 중앙홀이 휴게실이자 식당, 강당 기능을 하게 할 수도 있다. 기숙학교의 경우 잠자리를 침대 식으로 하지 않고 이부자리를 깔게 해서 낮에는 다른 용도로도 활용할 수 있게 하면 활용도뿐만 아니라 생활교육 면에서도 더 나은 환경이 되지 않을까. 일본의 산촌유학센터는 대개 그런 식이어서 아침에 일어나면 잠자리를 정돈하는 습관이 몸에 배게 되어 있다. 다른 생활공간을 좀더 넓혀 저마다 쉬고 싶을 때면 좋아하는 공간에 파묻힐 수 있게 배려한다면 프라이버시도 더 확보될 수 있을 것이다.
삶과 교육을 위한 공간
교육은 결국 사람과 사람의 만남 속에서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장과정에서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만날 수 있다면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다. 대안학교는 무엇보다 그런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는 편이다. 작은 규모를 지향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수천 명이 와글거리는 곳에서도 운이 좋을 경우에는 진실한 친구, 좋은 교사를 만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에게는 그런 운이 따르지 않는다. 깊이 있는 만남이 이루어지면 나머지는 저절로 풀리기 마련이다. 지식 습득도 예외가 아니다. 영어를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보다 왜 영어를 배워야 하는지가 분명해지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학습을 하게 된다. 최첨단 어학실습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사실 교육의 질은 시설이 좌우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교실 안에 첨단 컴퓨터를 들여놓고 온갖 기자재를 동원한다 해도 만남이 없는 교육은 공염불일 따름이다. 진짜 만남이 일어날 수 있도록 공간과 교육과정을 디자인해야 한다. 모든 만남은 결국 자기자신과의 만남으로 통한다. 수업 시간에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는 아이가 있다면 그 순간 아이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과정을 존중할 수 있는 여유와 통찰이 필요하다. 어쩌면 그렇게 멍하니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창이야말로 학교가 그마나 갖추고 있는 가장 훌륭한 교육시설일지도 모른다. 아이가 변화하고 성장하는 진짜 교육은 의도하지 않은 순간에 의도하지 못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십상이다.
* 위의 글은 <민들레> 78호에 실렸던 '민들레 편집실'의 글입니다.(☞ <민들레>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