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안저우 4 - 서호를 구경하면서 주자학에 맞선 양먕학자 이지를 생각하다!
2025년 3월 9일 취안저우 시지에 (西街 서가) 에 카이위안쓰 开元寺 (개원사) 절에서
대웅보전 (大雄宝殿) 과 자운쌍탑 (紫云双塔)을 구경하고는 시지에
거리를 걸어서 시계탑을 보고 북쪽으로 30분간 걸어서 북문을 지나 서호에 도착합니다.
아열대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서호 공원 입구에는 앞뒤로 ‘온릉장춘 (溫陵長春)’ 과 ‘두산탁절
(斗山卓絶)’ 이라 쓴 회색의 시원한 패방 (牌坊) 이 양명학자였던 ‘이지 광장’ 으로 안내
하는데 취안저우시의 중심 도로명이나 음식점 이름에도 그의 호이기도 한 온릉이 자주 보입니다.
엄청 넓은 푸른 호수에 붉은 꽃이 피었는데.... 이건 매화는 아니고 그럼 무슨 꽃인지
모르겠습니다. 호수를 걸어 들어가니 난데없이 도중에 다리가 나타나는데....
홍예교로 그 높이가 엄청 높으니 계단을 조심스레 올라서 위에 서서 풍경을 구경합니다.
그런데 여기 취안저우 서호에는 이탁오의 석상이 서 있으니 긴 도포에 양손으로 문서를 잡고
깊이 사색하는 학자의 모습인데...... 주자학에 도전장을 내민 양명학 최대의
이단적 사상가로 모두를 포용하면서도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은 ‘자유인’ 의 초상인가 합니다.
앞으로는 시원한 호수, 배경은 푸른 숲인 광장에서 이지의 흰색 석상을 만나니....
머리에 관을 쓰지 않은채, 긴 도포에 양손으로 문서를 잡고 깊이 사색
하는 학자의 모습으로 세상을 부끄러워 하는 선비 처럼 아주 조용한 모습 입니다.
그는 공자를 성인이 아닌 역사적 인물로 환원시키며 유불선의 통합적 지식을 추구했는데 그의 좌절은
동아시아의 자생적 근대화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으니, 2014년 가을 이탁오 학술대회
참석차 그의 고향인 취안저우 (泉州) 를 방문한 신용철 교수가 탁오 사상의 뿌리를 찾았다고 합니다.
쇠약해진 노인이 널빤지 위에 누운채 베이징 퉁저우 감옥으로 잡혀 들어왔으니, 탄핵을 받은 노인의 죄상은 “감히
어지러운 도를 주창하여 세상을 현혹하고 백성들을 속였다” 는 것으로, “왜 그렇게 못된 책을 많이 썼는가?”
라는 심문에 대해 노인은 “내가 많은 책을 썼지만 모두 성인의 뜻에 합당하여 잘못된 것은 없다” 고 대답했습니다.
옥중에서 몇차례 혼절을 거듭하던 76세의 노인은 안정을 찾아 시를 쓰며 지내다가, 1602년 3월 15일 옥리에게 머리
를 깎아달라고 했다가 그의 칼을 빼앗아 목을 찔러 자결했으니, 그가 썼던 ‘다섯가지 죽음에 관한 글
(五死篇)’ 에서, “나를 알아주지 않는 사람들에게 죽음으로서 나의 분노를 씻어낼 것” 이라 예언한 그대로 입니다.
이 노인이 16세기 동아시아 최고의 사상가로 꼽히는 탁오(卓吾) 이지(李贄) 이니 조정은 그를 바로 처벌하지
않고 고향에 돌려보내 죄를 다스리게 할 예정이었으나 이를 알아차린 노인은 마지막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이지는 공자의 가르침에 대한 해석 (주자학) 에 도전장을 내밀며, 개개인의 내면적 깨우침이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한 양명학 최대의 이단적 사상가였으니
그는 공자를 ‘구(丘) 라는 이름을 가진 일개인’ 이라는 뜻으로 구을기 (丘乙己) 라고 불렀습니다.
공자를 역사적인 한 인물로 환원시키며 유불선의 통합적 지식을 꿈꿨는데..... 결국에는
이 때문에 이단으로 몰려 감옥에 갇혔고 자신의 사상을 꺾지 않으려 자결한 것입니다.
그의 책은 20세기초 중국의 근대화를 위해 유교적 전통에서 해방돼야 한다며 ‘공자의 상점을 타도하자
(打孔家店)’ 를 외쳤던 5· 4 신문화운동 때 주목받기 시작했으며, 문화혁명 기간에
‘린뱌오 (林彪· 임표) 와 공자를 비판하자’ 는 비림비공 (批林批孔) 운동의 상징적 존재로 부각었습니다.
이지는 이후 중국뿐 아니라 일본과 서구에서도 아시아 근대사상의 시원 (始原)
으로 연구되었는데..... 그가 사상의 자유와 남녀평등의 주창자
였기 때문이니 그를 탄핵한 글의 3분의 2는 그의 여성관을 공격한 것이었습니다.
이지의 사상을 하나로 포괄할 수 있는 개념은 무엇일까? 모두를 포용하면서도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은
‘자유인’ 의 초상이니..... 그가 유불선의 사상을 포용하고 긍정했음에도 당대의
사상가들로 부터 배격된 것은 오로지 개인과 사상의 자유에 장애가 되는 것을 맹렬히 미워했기 때문입니다.
세계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지는 동양의 마르틴 루터였으니... 신앙의 자유를 주창했던 루터의 종교개혁이 성공한
것이 서양 근대화의 토대가 됐지만 불행히도 이탁오의 사상혁명이 좌절된 동양에서는 자생적 근대화의
이념 형성이 지연됐던 것으로, 우리의 근대화 문제를 천착하기 위해 이지에 대한 투철한 이해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지의 고향 취안저우(泉州) 는 타이완의 맞은 편, 중국 동남해안에 위치한 유서 깊은 역사와
문화의 도시로 인구 800만인데 시민들은 ‘해상 실크로드의 출발지’ 라는 자긍심이 크니,
동남아 화교와 타이완 주민들의 고향이기도 한 취안저우에는 화교대학과 화교호텔 도 있습니다.
화교 호텔의 그림과 조각은 이 도시의 역사를 표상하니, 왼쪽 위에는 서북 신장지역의
사막에서 회교 사원을 향해 낙타가 다니는 ‘실크로드’ 그림이 보이고 아래는
중국에서 가장 오랜 회교사원 청정사가 있고 우측에 관우의 사당인 관제묘가 보입니다.
유명한 개원사의 동서 쌍탑이 우뚝한데 문묘의 경전들이 여기 저기 흩어져 보이며, 그 우측
위에는 실크로드와 대칭으로 푸른 파도를 헤치며 나가는 선박의 그림이 부조돼
있으니.... ‘해상 실크 로드의 옛 운치(海絲古韻)’ 라는 시적(詩的) 제목이 인상적입니다.
10세기 부터 15세기 명나라 초기까지 상하이와 홍콩의 근· 현대 항구가 없던 시대에 취안저우는
중국 최대의 항구였으니.... 13세기 원(元) 에 와서 살던 이탈리아인 마르코 폴로와 14세기
아랍 여행가 이븐 바투타는 여행기에서 취안저우를 ‘세계 최대의 무역항’ 이라고 평한 바 있습니다.
이지가 출생하기 직전 서양에서는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항로 발견으로
세계의 지평이 넓어졌는데..... 그가 30세가 되던 1557년 포르투갈이 마카오를 점거했고,
1581년 이태리 신부 마테오 리치(1552∼1610) 가 마카오에 도착해 서양의 종교와 문화가 중국에 밀려듭니다.
취안저우 해안에 설치한 외국인 거류지에서 출생한 이지는 조부와 부모 및 7남매의 대가족
중 장남이었는데...... 아버지는 서당의 선생이었지만, 선조들은 아랍 등을
무대로 해외무역에 종사했고 할머니 중에는 아랍인도 있어 이슬람 문화와 관계가 깊다고 합니다.
이지의 성(姓) 은 이슬람교와의 관계로 원래의 임(林)씨에서 이(李)씨로 바뀌고, 이름도 재지(載贄) 에서 목종
황제의 ‘재 (載)’ 자를 피해 ‘이지 (李贄)’ 가 되었는데..... 그가 후일 차를 읊은 시에서, “너의 성이 원래
끓는 국의 ‘탕 (湯)’ 씨가 아니듯, 나의 성도 역시 ‘이 (李)’ 가 아니었다” 는 해학적인 회고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의 호는 이름보다 더 잘 알려진 탁오(卓吾) 이니..... 고향의 지명을 딴 온릉(溫陵), 아버지를 사모하여 붙인
사재(思齋), 호북성의 지불원에 부르는 용호 (龍湖), 스스로는 이노자 (李老子) 라고도 칭했다고 합니다.
12세 때 아버지의 서당에서 ‘노농노포론 (老農老圃論)’ 이란 글을 썼는데, “논어” 중에 공자가 농사를
묻는 제자 번지를 ‘소인’ 이라 칭하며 농사를 경시한 말을 비웃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합니다.
후일 마오쩌둥도 옌안에서 인민해방군에게 이를 인용해, “공자는 농사짓는 법을 묻는 제자의 질문에 답을
못했는데..... 여러분은 모두 농사에 능해 공자의 제자들 보다 훌륭하다” 고 칭찬한 바 있다고 합니다.
취안저우 이지 생가 근처에는 외래 선객이 머물렀다는 비석이 서 있는 내원역(來遠驛)이 있으니..... 송(宋)대 이래
선박과 사람의 왕래를 관리하던 해외교류 창구 시박사 (市舶司) 주변에는 진강으로 급히 흐르는 수로가 있습니다.
이지 후대의 임씨족보‘ 에 의하면, 1599년에 “천주교가 비로소 중국에 들어왔다” 는 기록이 나오니 천주교가 그의
가족에게도 영향을 주었음을 말해주는 증거이며, 이지가 남경에서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 리치를
세번 이상 만나 교류하고 서로 기록을 남긴 것도 고향의 이 같은 ‘종교 포용적 배경’ 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취안저우는 국무원이 정한 24개의 역사문화도시 가운데 하나이다. 해상실크로드 출발점으로 널리 알려진데다 천년에
달하는 역사 문화가 축적되었으니 많은 사람들이 취안저우에서 자손을 퍼뜨렸는데 아시아, 아프리카인들이
나일강의 종교, 문명과 친선을 가지고 취안저우에 모여들었으며 귀중한 역사종교 유적지와 다양한 건축을 남겼습니다.
이곳은 불교(佛敎), 도교(道敎), 기독교(基督敎), 천주교(天主敎), 이슬람교(伊斯蘭敎), 바라문교(婆羅門敎)
마니교(摩尼敎) 등 7개 종교가 공존하고 있는데 이는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일이다. 그래서
취안저우를 세계의 종교박물관이라고도 하며 또 해안가의 추 (鄒) 나라, 노 (魯) 나라 라고 부를 정도입니다.
문화적 자원을 가진 탓에 취안저우는 2012년 중국내 문화도시 경쟁력 평가에서 20위권 안에 진입했으며 구도시와
신도시로 구분할 수 있는데, 구도시가 이슬람과 유럽식의 고건축이 많이 남아 있으니 붉은 색 벽돌로
지어진 건물들은 조명에 비친 야경과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붉은 색과 오묘하게 이루어져 황홀감을 느끼게 만듭니다.
해양교역로의 출발지이자 도착지인 취안저우에는 일찍부터 여러 지역 사람들의 빈번한
왕래로 인해 문화 공존의 특징을 보여주는 다양한 종교건축들이 남아 있으며
먼저, 당나라 때의 불교사찰로 세워진 지가 1,300년이 넘은 개원사 (開元寺) 가 있습니다.
40 미터가 넘는 거대한 쌍탑 으로도 유명하지만 힌두신 비슈누의 이야기인
‘사자인간’ 과 동식물을 표현한 돌기둥 부조가 있어 인도- 중국
문화요소의 이채로운 조합과 공간을 초월한 교역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