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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6/월. 공유지의 비극의 비극
참당귀 이야기
오늘 눈을 뜨며 돌아가신 백남기 선생에 대한 글을 쓸까 아니면 참당귀에 대한 글을 쓸까 망설였다. 백남기 선생에 대한 글은 모두와 관계된 일이니 여러 사람들이 쓰겠지만, 참당귀는 내가 새밝산-나는 이제부터 천성산을 원래 이름이었던 원효산의 원래 이름이었던 새밝산이라 부르겠다-에서 겪은 일이기에 비록 사람들의 관심은 덜할지라도 무의미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히 보름 전 나는 원효암 가는 숲길에 참당귀를 만났다. 등산로에서 7~8미터 벗어난 곳인데 내 키만큼 컸으며 이파리도 배추잎보다 크게 너펄거렸다. 나는 여름 당귀잎의 독특한 향미가 너무나 좋다. 당귀잎 쌈은 제일 좋아하는 것 중 하나다. 그런데 일반 당귀에 비교하면 산골짜기에 자라는 참당귀는 5배 10배 크다. 자주빛 야생의 건강함이 느껴져서 몹시 흥분됐다. 그래 열심히 사진을 찍고 참당귀의 무사를 바라며 길을 떠났다. 혹시나 손 탈까 염려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주와 어제 다시 그곳을 지나며 참당귀를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 캐간 것이다. 한눈에 봐도 약초인지라, 산야초 동호회나 등산객에게 발견되면 즉시 없어질 상황이었다. 그러지 이제 등산로 변에서 참당귀 만나는 일이 불가능해졌다. 범우골 등산로 변에는 참당귀처럼 투구꽃, 눈개승마, 모싯대 같이 축축한 골짜기에 잘 자라는 식물들이 자라는데 그들을 만났을 때도 그랬다. 산길에 가깝기에 반갑지만 늘 조마조마하다. 산야초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혹 캐가지 않을까 해서다. 또 무심코 꺾여 버려진 것을 보면 안타깝기도 하다. 그렇게 사라진 종이 한 둘이 아닐 것이다. 고작 두해 산을 관찰한 내 눈에 몇 사례가 보이니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계절을 대표하는 꽃들이 그렇게 하나 둘 사라지고 숲이 삭막해져도 사람들은 눈치 채지 못한다. 그저 신록의 푸름에 감탄을 할 뿐이다. 안타깝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몇 종류가 길가에서 사라지는 걸 보았다. 그런데 마침 올봄 방금 말한 지역이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치하하고 부탁도 할 겸 국유림관리소에 전화를 걸었다. 마침 보존할 가치가 있는 지역을 잘 지정해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그리고 이곳이 천성산의 주된 등산로인지라 입구마다 보호구역 내 채취금지 안내판을 세울 것을 건의했다. 그리고 공부하는 중인데 어떤 식생들이 자라는지 조사한 자료를 좀 보여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일반시민에게 너무 자세하게 알려주면 오히려 채취의 위험이 있어 정보를 쉽게 공개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와 예산이 부족해 안내판을 올해는 못 세운다는 답변을 들었다. 사실 꼭 필요한 안내판을 간단하게 제작해 설치하는 일은 돈이 그렇게 들지 않는다. 더구나 이른 봄에 예산이 그렇게 부족할까? 결국 보호지를 지정은 했지만 내버려두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보호구역을 정하면 그것을 제대로 알리고 지키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최대한 해야 할 텐데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맥이 빠졌다. 하기야 보이지 않으니 어떻게 알겠는가?
그런데 이런 사고가 관에서만 있는 게 아니었다. 새밝산에 대해서 내원사 스님과 이야기를 나눌 때도 비슷한 점이 있었다. 산을 너무 자세하게 알리고 또 그렇게 알려지면 산이 훼손되기 쉽고 보존이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 견해는 달랐다. 정상이든 새밝산 어느 곳이든 거기 사는 것들의 가치와 중요성을 아는 대로 기회 닿는 대로 자세히 알려주고 같이 보호할 수 있도록 협조를 요청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비밀주의나 정보 독점의 형태라면 잠깐은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오히려 무지를 유포하고 장기적으로 무지한 행동을 초래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 나는 나무이름도 부지런히 달아야 하고, 숲 곳곳에 생태에 대한 설명도 있어야 하고, 각종 안내판을 세워 다양한 차원에서 산을 더 많이 알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한 도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숲인문학, 숲해설 등도 다양해지면서 숲을 다양하게 다차원적으로 만나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개인의 행동은 물론 지역의 문화도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이런 앎이야말로 산을 제대로 보존할 수 있게 하는 힘이 된다고 믿는다.
그런데 이런 식의 인식은 공무원이나 내원사 스님만이 아니라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쉽게 접하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믿지 못한다. 사람에 대한 희망보다 불신이 느껴진다. 그렇다 우리의 상식은 소위 공유지의 비극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다.
공유지의 비극
1968년 개럿 하딘이 말한 ‘공유지의 비극’은 경제학에서 공유에 의해 초래되는 생태파괴의 예로 곧잘 인용된다. 즉 공유지인 숲이 있으면 사람들은 최대한 자기 소를 풀어놓거나, 돈을 벌기 위해 채취와 벌목 등으로 숲을 황패화시킨다는 것이다. 어장도 그렇다. 우선 많이 잡아가는 것이 좋기 때문에 씨가 마르도록 물고기를 잡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래의 멸종 같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우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공유지의 비극을 찾아볼 수 있는 예는 비일비재 하다. 석유를 마음껏 뽑아 쓰고, 핵시설과 폐기장을 만든다. 수많은 동식물들이 인간의 남획 남벌에 의해 멸종되고 멸종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4대문명의 발생지 중 사막화를 면한 곳이 별로 없다. 이렇듯 문명 자체가 어느 정도 공유지의 비극을 연상케 하는 일을 벌여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만이 유일의 길도 아니었다.
오히려 공유지이기 때문에 훌륭하게 보존된 경우도 많다. 이 점은 여성 최초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엘리노어 오스트롬의 연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오스트롬은 『공유의 비극을 넘어』에서 세계 각 곳의 숲과 어장 등 공유재가 공동체에 의해 얼마나 효율적이고 지속가능하게 관리되어 왔는지 사례를 보여주고 그 원리까지 밝히고 있다. 대개 토착사회는 지속가능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지역생태계의 한계를 넘지 않는 범위에서 활용하고 유지하려 공동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새끼를 배거나 알을 밴 동물은 잡지 않는다는 금기, 공유지에서 채취할 경우 일정한 기간과 양을 정하거나 공동작업 공동분배 하는 경우들이 그렇다. 그런 경우 공유지의 비극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공유지의 비극이 법칙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은연중 공유지의 비극을 받아들이며 살고 있을까? 무한경쟁 약육강식의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공유나 공동체가 아니라, 오직 개인의 사익추구를 삶의 목적으로 삼는 사회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 인류사에서 보면 지극히 비정상적이고 천박하며 전염성 강한 서구의 자본주의에 의해 정당화되고 있는 현실을 묵과한다.
공유지 비극의 비극
칼 폴라니는 자본주의가 인류사의 보편적 법칙이 아니라 예외적 성취였음을 『거대한 전환』에서 날카롭게 통찰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어떤 사회도 사익과 시장이 도덕과 정치를 압도하며 사회를 지배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다양한 상호적 호혜경제와 선물경제가 발달하였고, 부의 집중과 지배를 견제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어느 사회도 고리대금업과 상업에 의한 과도한 이익을 용인하지 않았다. 과도한 부의 집중이 공동체의 유대와 안정을 깨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럽은 지정학적 특성상 다양한 소도시와 상업이 번창하고, 해양시대에 돌입하면서 주식회사, 은행 등의 몇 가지 자본의 기관과 원리를 만든 뒤, 다시 식민지의 플랜테이션 농업과 자원약탈, 노예무역 등을 이용해 하나의 세계체제로 확립해 갔다. 소위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지구적 분업과 산업자본주의 단계에 돌입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를 지배한 인간관이 합리적 이기주의자로서 홉스 식의 만인 대 만인이 투쟁이라는 자연상태에서 살아가는 자이다. 일종의 성악설인 홉스의 인간규정에 의해 악행은 본성의 반영일뿐이라는 식으로 합리화되고, 권력의 지배는 악의 규제와 방지를 빌미로 합리화되게 되었다. 즉 홉스식의 인간관을 토대로 자본주의와 국가주의가 융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누차 강조하지만 공유지와 공동체의 파괴를 통해 근대인 곧 합리적 이기주의자인 경제인(개인)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렇게 우리가 이미 사적 소유의 경제인으로 태어나 길어지는 탓에 공유지의 비극 같은 비극적 이론이 만들어지기도 했던 것이다. 소위 서양의 심리학과 사회학의 기본가정은 철저히 합리적 이기주의자인 개인들이다. 프로이트로부터 시작하는 정신분석학은 개인심리학이었는데, 그것이 부르주아적 개인의 성과 권력 관계 탐색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공동체와 공유재가 파괴되고, 공통감각과 공유인의 소실한 상황에서 개인의 내면을 결정하는 가장 강한 동인이 바로 성욕과 권력욕이기 때문이다. 즉 시공간으로부터 초월한 객관적 인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지역적 조건에 의해 형성된 개인이 있는 것이다.
한편 2차 대전을 경험하고 현대인들은 합리적 정신에 대해 회의에 직면하게 되었다. 아우슈비츠의 야만을 가장 교육을 잘 받은 독일인들이 저질렀기 때문이다. 더구나 핵무기까지 보유하게 되면서 인간이 인간에 의해 멸망할 수 있다는 불안이 유포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이론들 중 하나가 밀그램의 권위복종 실험이고 소위 죄수의 딜레마 이론도 있다.
밀그램의 권위복종 실험은 인간이 권력자의 부당한 명령에 항거할 만큼 자각적이거나 강한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입증했다. 권력에 복종한 대신 무책임과 무사유한 행동을 기꺼이 감행하며 수많은 야만을 저지르고 스스로 그것을 합리화한다는 것이다. 백남기 선생에게 직사 물대포를 쏜 경사가 책임의식과 죄책감을 못 느끼고, 경찰청도 합법성만 강변하며 오히려 그를 특진시킨 것 따위는 아우슈비츠가 권력이 있는 어느 사회에서나 벌어질 수 있는 사건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예이다. 하지만 서로 민주적으로 대화하는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다면 고립된 상태에서의 권위복종의 위험도 줄어들 것이다. 사실 권위복종 실험은 개인을 상의할 수 없는 고립 속에 놓고 실험을 하였다.
죄수의 딜레마는 2명의 죄수가 각각 고립된 상황에서 취조자에 의해 감형을 미끼로 자백을 권유받는 상황을 가정한다. 만약 둘 모두 범죄 사실을 부인하면 6개월이 언도되고, 둘 중 한 명이 자백하면 그는 석방되지만 자백하지 않은 사람은 10년 형을 받고, 둘 모두가 자백하면 모두 5년 형을 받게 된다. 그럴 경우 사람들은 최대한 자기이익을 위해 선택한다는 것이다. 즉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공범을 불신하고 자백해 석방되는 길을 택한다는 것이다. 특히나 죄수의 딜레마는 미소냉전 시기 군비확산경쟁의 심리를 설명하는 이론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아무튼 죄수의 딜레마도 기본가정은 합리적 이기주의자이다.
만약 우리가 인간을 합리적 이기주의자가 아니라 상호 협력하는 공동체적 동물로서 공유인으로 생각하고 그에 적합한 실험을 한다면 결과 또한 달라질 것이다. 우리는 협력이 가능한 협력을 한다. 협력이 상황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그런 조건을 만들거나 허용하지 않을 뿐이다. 보라. 일반적으로 공범들은 모두 공동체적 관계로서 미리 말을 맞추며 같이 살 방법을 찾으려 노력한다. 협력할 수 있는데 애 협력하지 않겠는가? 협력할 가능성이 차단당했기 때문에 배신게임을 하게 되는 것이다. 대화와 협력이 원래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대화하고 협력하는 존재를 감옥이라는 인위적 공간에 가두고 실험을 한 뒤 그것을 인간의 본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차라리 우리는 실험실의 상황이 권력에 의한 감옥과 유사했음을 주목해야 한다. 권력은 지배하기 위해 공동체의 협동과 민주적 소통을 차단하려는 경향이 있다.
인간에 대한 가정 자체가 잘못이었다.
결론
내 주장은 간단하다. 인간을 합리적 이기주의자 개인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 공유인으로 규정하고 개인과 사회를 바라보고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피그말리온 효과가 여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는 보고 싶은 대로 보고 기대한 대로 결과를 얻게 마련이다.
참당귀 이야기로 돌아와서 등산로에 그 지역의 중요성을 알리고 채취를 하지 말아달라고 안내판을 세운다고 생각해보자. 당장 표지판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이 비록 말에 기호에 불과할 지라도 우리의 무의식은 말의 위력으로 인격을 은영중 인식하기 시작한다. 때문에 단지 글자로 씌어진 것이지만 우리 마음은 그 메시지를 하나의 영향력 있는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스스로 절제하는 힘이 생기는 근거다. 양심과 도덕의 목소리는 사실 내 안에 있는 타자 혹은 공동체의 목소리다. 하지만 그런 주의문구가 없을 때는 마음의 거리낌 또한 사라지게 된다. 당연히 행위도 거리낌이 없어지게 된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관계적 존재이고 타인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며 웬만하면 거기에 부합하는 행동을 하려고 한다. 그것은 우리가 공동체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이 멀 듯 합리적 이기주의가 너무 강화된 상태에서는 더욱 뻔뻔스러워질 수도 있다. 남이 보지 않는 곳이라면 자기의 이익을 서슴지 않고 추구하는 일은 당연할 것이다. 사회 자체가 약육강식의 경쟁사회라면 공유지의 비극은 절대적 진리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행위이다. 비록 그럴지라도 우리가 안내판을 마주하면 일단 조심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역시 우리의 기본 바탕에 사회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알 것을 알려주고 서로 이야기하고 협력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최고다. 사람의 비행을 탓할 게 아니라, 사람과 지식을 나누지 못함을 탓해야 한다. 알고 서로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공통감각을 회복하고 점점 나아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