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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팔게이마임 원문보기 글쓴이: 시냇물가 사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사순절
2016년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묵상하는 한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올해는 연휴 끝자락에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2월 10일 은 재의 수요일로 지킵니다. 어떻게 보면 한 해를 사순절과 함께 시작하는 것입니다. 참 의미 있는 시간입니다. 잇 사순절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시간이 되길 기도합니다.
사순절은 회개의 절기로 지킵니다. 사순절을 맞아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재위에 앉아 스스로 회개해야 합니다. 교만과 자만 명예와 이기심을 벗어 버리고 예수님의 고난을 바라보며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또한 사순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절기로 지킵니다. 예수님은 성육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낮은 자리로 내려 오셔서 인간을 섬기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신실하게 공생애를 보내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나와 우리를 죄와 죽음의 자리에서 일으켜 세우셔서 온전하게 하시는 능력임을 이 사순절에 확신하고 또 확신해야 합니다.
사순절의 정점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붙들고 살아 가는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오해와 진리가, 왜곡된 현실과 무너진 사랑의 정신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래서 사순절 기간 세상의 지탄과 조롱, 박해애에 십자가만 바라보고, 하루 하루를 묵묵히 기도하여 살아갑니다.
2016년 사순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으로 자기 갱신과 변화를 통해 성숙하고 성장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이 40여일의 기간, 나와 우리의 현재 가운데 임재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사랑안에 온전히 거하시기를 바랍니다. 철저하게 재위에 앉아 자기를 성찰하고. 자기를 묵묵히 십자가에 못박고 그렇게 해서 주님의 손을 붙들고 신앙의 승리를 확신하며,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금번 사순절 묵상은 여주 교회를 섬기시는 이성관 목사님께 집필하셨습니다. 이 묵상이 여러분의 믿음의 여정에 소중한 동반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발행인 김 진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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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력과 사순절 Church year and Lent
초대 교회는 유대인들이 그들의 달력을 중심으로 한 해의 삶을 세웠던 것과 유사하게 예수님의 생애를 중심으로 한 해의 삶을 세웠습니다. 그들은 먼저 예수님께서 죽으신 금요일고 부활하신 주일을 기점으로 하여 안식일을 주일로 바꾸고 주일에 예배와 말씀 나누기, 성찬과 세례의 의식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오셔서 북음을 전하시고 고난당하셔서 죽으신 후 부활하셨다가 승천 후 다시 오실 예수님의 생애를 따라 대강절과 성탄절, 사순절 고난주일 부활절과 오순절 등을 한해의 주기로 배치하였습니다. 이것이 교회력입니다.
특별히 사순절Lent 은 교회력 중에서 예수님의 고난당하심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이 기간은 성회일 늑 재의 수요일 이라 불리는 날부터 시작되어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절에 끝나게 됩니다. 이 기간. 성도는 쾌락적이고 자극적인 삶에서 물러서서 스스로를 삼가고 회개하는 등 경건한 시간을 갖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를 위해 고난 받으시고 죽으신 후 부활하셔서 우리를 참 구원의 길로 인도하신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념합니다.
사순절을 이렇게 묵상하세요
1. 조용한 곳에서 기도와 찬송으로 묵상하기
2. 본문 말씀과 묵상집을 읽고 묵상하기
3. 주어진 기도 제목으로 기도하기
신앙의 동료들과 함께 나누면 더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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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제 1 일 (재의 수요일)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
벧전 2:24-25절 436 나 이제 주님의 새생명 얻은 몸
사순절의 첫 날입니다. 십자가를 생각하며 사십일 동안 주께서 가셨던 길을 따라 갑시다. 십자가는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보여줍니다. 십자가는 죄에 대해 가차 없으신 정의로운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정 반대의 하나님, 무한한 사랑을 가지신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기준에 맞는 의로움, 즉 죄가 하나도 없는 깨끗함을 얻을 수 있는 길이 되어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이라는 길을 통해서 그 어떤 죄도 다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의로운 존재가 되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우리 죄값을 대신 다 치르신 사랑과 은혜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믿고 선포해야 합니다. “나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 라고 말입니다.
비록 죄를 짓도록 유혹 당하고 육신이 약하여 죄의 손길에 넘어갔을지라도 믿고 선포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내 죄가 용서 되었다! 예수님의 보혈로 인해, 죄의 권세가 나를 손대지 못하리라 ! 주님 ! 다시 똑같은 죄를 짖지 않도록 함을 주시옵소서!”
기도 유혹에 빠졌던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이킬 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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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순 절 제 2 일 다시 보게 하옵소서
사도행정 9:17-19 273 나 주를 멀리 떠났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빛으로 오신 부활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눈이 멀게 되었습니다. 이 충격으로 바울은 아무것도 먹거나 마실수 없었습니다. “도대체 내 인생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그는 어두움 속에서 하나님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흘의 시간이 흐른 후 다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바울은 오직 예수님과 그의 십자가만을 바라보는 거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사람 자체가 달라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바울에게 환상으로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와서 자기에게 안수하고 그로 인해 눈이 떠지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대로 되었습니다. 환상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는 일입니다. 믿음음 바라는 것을 아직은 없지만 실제 눈 앞에 보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히11:1)
부활의 주님께서 바울의 눈을 새롭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나에게도 이 사순절 기간동안 하늘 영광을 볼 수 있는 눈을 주옵소서. 주님과 십자가만을 바라보며 앞을 향해 달려가게 하옵소서 .믿음의 눈을 주셔서 이 어두움의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을 품고 하늘의 빛 가운데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기도하는 하루가 됩시다.
하나님의 거룩한 빛으로 나를 쒸우소서 영적인 눈으로 주님을 다시 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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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순 절 제 3 일 알게 하옵소서
누가 19:41.2 절 433 먹보다도 더 검은
예수님께서 우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가시는 마지막 한 주간의 첫 날, 예수님이 보이는 언덕에서 가던 길을 멈추시고 그 예루살렘을 보시며 서럽게 우셨습니다. 사랑하는 예루살렘, 그러나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혀 모른 채 겉칠적인 종교생활에 빠져서 말로만 하나님을 공경하고 마음과 행하는 일에서 이미 완벽하게 파산 상태였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처참한 그 백성들을 보시면서 가슴이 미어지고 아파서 통곡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평화에 관한 일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조금의 관심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이 관계가 평화로워지기를 얼마나 바라고 원하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가 회복되도록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입니다. 평화의 관계를 맺도록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관심이 없습니다. 즉 죄로 인해 하나님의 관계가 깨져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루사렘은 여전히 화려하고 분주합니다. 예수님은 그 무신경한 예루살렘의 백성들을 보면서 답답하고 속상하셨습니다. 그래서 우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우리가 이웃이 화모케 되는 그 길을 만들기 위해 결국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닏. 그 무지 몽매한 예루살렘 때문에 아니 우리를 위해 십작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화목제물이 되신 그리스도를 전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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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순 절 제 4 일 십자가의 길은 기도로 준비 됩니다.
누가 22:39-43 312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마가의 다락방을 나오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습니다.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장엄하고 위대한 십자가에서 죽음믈 맞이하시기 전에 기도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단순히 목에 거는 것이 아닙니다. 내 온 몸으로 지고 가는 것입니다. 나를 멋지게 만드는 장식용이 아니라 내가 죽기 위해 달리게 될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과 십자가에서 죽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준비된 사람만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기도로 준비되어야 합니다.
내 고집, 편안함, 내 주장과 생각 내 이익을 내려 놓는 이리 그냥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억울함, 섭섭함, 분노, 손해됨을 이기는 일입니다. 손해됨을 이기는 일이 물마시듯 쉬운일은 아닐 것입니다. 나의 약점과 피곤함과 가난함 아픔과 외로움을 마다하고 사랑을 베풀고 섬기고 붕사하는 일이 ㅇ동네 마실 가는 것처럼 쉽습니까? 모두 내가 죽어야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내가 죽으려면 기도로 나를 죽여야 합니다. 주님의 뜻대로 되도록 나를 내려 놓고 나를 포기하고 나를 쳐서 주님께 복종 시키고(고전9:27)
피흘리며 내 자신과 싸우기(히12:4) 위해서 예수님처럼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이 기도가 나를 죽이는 결과를 가져 왔습니까? 기도 후에 내가 져야 할 십자가를 기꺼이 내 몸으로 지고 있습니까?
기도로 십자가의 길을 준비하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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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순 절 제 5 일 여기 앉아 있으라
마태 26:36-38 95장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시며
유월절 마지막 성만찬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는 일과 고별 설교 (요14-16장) 고별 중보기도(요 17장)를 마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 가십니다. 겟세마네 동산에 도착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기도할 동한 여기 앉아 있으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잘 보십시오 이 말씀은 11명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8명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는 기도하는 장소 근처까지 데리고 가셔서 “나와 함께 있으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8 명은 제외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냥 앉아 있으면 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기도 요청을 받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3명에게만 당신과 함께 기도해 달라고 요청하셨습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그들에게 당신의 고통과 아픔과 슬픔을 가감없이 다 드러내시고 도움을 청하셨다는 것입니다.
제자라고 다 같지 않습니다. 겟세마네 동산까지 함꼐 갔다고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내 기도가 아니라 교회와 목사님과 성도들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도할 마음일 불일 듯 일어나고 있습니까? 이것이 주님께서 기도를 요청하고 계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니면 혹시 기도 봉사 헌신에 대해 아무런 감동이 없으십니까? 혹시 주님이 나를 제외시키신 것은 아닌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사순절 기간 동안 나를 철저히 돌아봅시다.
나를 아시는 하나님 은밀한 신앙생활을 통해 진정한 자유와 기쁨을 맛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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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일 한 시간이라도 깨어 있어서
마태 39-40 364 내 기도하는 한 시간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리는 기도를 하십니다. 그런데 기도 소리가 들릴만한 거리에 (39절의 조금 나아가사) 세 명의 제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실 일을 위해 특별히 기도를 위탁받은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세 명 다 잠을 잡니다.
이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충격적인 고백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충격을 받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실 정도였으면 졸려서 아무리 피곤대도 잠이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기도하는 소리는 귀를 기울였을 것입니다.
“ 한 시간” 이라는 표현은 정말 한 시간일수도 있고 짧은 한 순간이라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한 시간은커녕 짧은 단 몇 분동안도 깨어 있지 못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마음을 함께 나누고 동참하는 일이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저 자신에게 필요한 잠에만 충실했을 뿐입니다.
나는 주님의 마음에 동참하는 사람입니까? 이 세상의 악함을 슬퍼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기도하는 사람입니까?
나를 향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제자가 되게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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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순 절 제 7 일 마음은 원이로되
마태 26:41 595 나 맡은 본분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향해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말씀 하신적이 있습니다.(행13:22)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정확한 뜻은 무엇입니까? 네 마음의 원함이 육신을 이끌만큼 강하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즉 그들의 마음이 일치되지 않을 뿐 만 아니라 자신의 긴급한 일에만 마음이 가 있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모른다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원하면 잠도 안자고 밤을 새워 놀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결정하어ㅛ으면 아무리 피곤해도 지쳤으도 밤새워 일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분명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약했습니다.
그리고 몸이 잠에 약해져서 잠에 지고 말았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강했으면 치곤한 몸을 이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내 마음이 원함은 어느 정도 입니까 주님의 마음을 알기에 거기에 따라 육신의 일을 그만 두고 영의일을 할 만큼 내 마음이 확정 되었습니까? 혹시 정욕이나 미움이나 옳지 못한 일에 내 마음이 불길같이 타오로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내 몸이 불의한 일에 쓰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리라
예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강하게 일어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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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순 절 제 8 일 이제는 자고 쉬어라
마태 26:42-45 342 너 시험을 당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면서 두 번이나 제자들에게 왔다 가셨습니다. 그런데 잘 보면 첫 번째 오셨을 때는 베드로만 깨우십니다. 두 명은 내 버려두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만 한 시간, 아니 잠시라도 깨어서 당신의 기도에 동참해 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기도에 동참하도록 요청 받는 일, 이 얼마나 큰 영광이며 대단한 일입니까? 감히 나 같은 사람을 당신의 기도의 반열에 세워 주신다면 그것은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처음에는 세 명만 초청받았습니다. 나머지 8 명의 제자는 이니었습니다. 예수님은 8 명에게는 기도하는 부탁조차 안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두 명을 탈락 시키고 베드로만 부르십니다. 베드로는 끝까지 선택됩니다. 하지만 참으로 안타깝게도 베드로도 주님의 이 요청을 들어드리지 못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두 번째로 오신 주님은 이제 세 명 모두에게 쉬시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세 명 다 푁하ㅣㅅ고 더 이상 요처앟시지 않습니다.
주님꼐저 잠 자려고 하고, 놀고 싶으면 놀도록 해라. 너 하고 싶은 데로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순간 부터 심각한 일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아무런 신앙적 감동이나 주님의 일과 교회이 일에 봉사할 생각이나 소망이 없다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깨달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쉬지 않고 날마다 기도하는 제자의 삶을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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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순 절 제 9 일 다 각각 제 곳으로
요한 16: 32 300 장 내 맘이 낙심되어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다 도망갈 것을 이미 아셨습니다.자기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제자들은 어떤 생각을 했습니까?
정말 제자들은 제 각각 도망을 갔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생각하기에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곳으로 피신했습니다. 그리고 군인들의 위세에 눌렸습니다.그들의 창과 검에 겁을 먹었습니다. 두려움이 그들을 장악했습니다. 사탄은 오늘도 으르릉거리는 사자가 되어 삼킬 자를 찾아다니고 있습니다(벧전5:8) 사자도 무섭지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이미 겁을 집어 먹게 만듭니다. 두려움의 포로가 되면 바로 사탄에게 삼켜진 바 됩니다.
두려움에 빠지면 영이 죽어갑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깨어집니다. 걱정과 근심, 욕심과 이기심, 질투와 시기심 등 두려움의 부하들이 총출동해서 내 삶을 완전히 망가뜨리기 위해 무차별 공격을 할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이 아닌 나의 판단과 소견대로 살면서 영적부도상태에 빠져 살게 될 것입니다.
나는 무엇이 두렵습니까? 무엇에 겁을 집어 먹고 불안해하고 있습니까? 내가 피할 곳은 예수님 뿐입니다. 그 십자가 보혈이 나이 요새시며 방패입니다. 다른 곳을 찾지 말고 다른 곳에 가려하지 맙시다.
오늘 하루 나의 요새이시자 방패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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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순 절 제 10 일 예수님의 부활이 있기 전에는
마가 9:9 259 예수 십자가에 흘린 피로써서ㅂ
변화산에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놀라운 광경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영적인 모습으로 변화된것을 목격한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께서 입으신 옷을 갈색 계통일 텐데 예수님에서 나오는 빛이 얼마나 밝은시 더 이상 희어질 수 없을 정도로 하얗게0 변해 있었습니다. (마가 9:3)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물론 제자들은 두 사람이 누군지 몰랐습니다. 졸다가 깨어보니 그런 광경이 눈에 들어왔고 그래서 우연히 본 것입니다. 나서기 좋아하는 베드로가 역시나 엉뚱한 소리를 했다가 경고를 듣기도 했습니다.(누가 9:34-35)
예수님께서도 3 명의 제자들에게 입단속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기 전까지는 오늘 본 것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나에게 적용해보면 낵 부활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나의 어떤 간증이나 고백도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에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과해야 진짜 신앙입니다. 나는 삶 속에서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이루어놓으신 그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까? 부활하심의 능력이 내 삶에 역사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나는 예수님을 세상에 얘기하고 증거할 자격이 있습니까?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부활의 삶을 증거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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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순 절 제 11 일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기
로마 6:6 287 예수 앞에 나오면
옛 사람이란 예수님 만나기 이 전의 나를 뜻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내가 살아가는 방식과 내용이 예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내 중심의 삶이었습니다. 육신을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면서 옛 사람이 죽기 않으면 종교생활을 할 뿐,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전혀 없습니다. 경건의 능력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옛 사람이 계속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죽은 줄 알았는데 내 성질, 내 욕심, 내 방탕한 습성과 기질이 살아 있음을 보게 됩니다.
도대체 이렇게 살아야할지 막막합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날마다 예수님 안에서 죽는다고 했습니니다. (고전 15:31)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아 기도하면서 "나를 죽여 주옵소서" 내가 살아 있지 않게 하옵소서. 오직 내 안에 주님만 살아계시옵소서.
주님께서 내 생각 내 취미생활 내 행동 모두를 다스리고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나를 살려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죽여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도 마찬가지 입니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
예수님은 이 고백이 나오도록 피땀 흘리며 오래도록 기도하시었습니다.
기도로 자신을 죽이셨습니다.
사순절 기간동안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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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순 절 제 12 일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 입니다.
고후 2:15- 60장 영혼의 햇빛 예수님
내가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죽었느냐 아니 죽었느냐 , 날마다 십자가에 자신을 못박고 살고 있느냐 아니냐는
나의 말과 행동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기도하고 찬송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보여주는 거룩하고 경건한 모습이 전부가 아닙니다. 진짜 내 모습은 교회 밖에서 드러납니다.
만일 정말 예수님처럼 십자가에서 죽었다면 나의 본성과 기질에서 나오던 것들이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대신 예수님의 기질과 성품이 나타날 것입니다.
즉 향기가 나는 삶이 되는데, 내 향기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지신 향기가 나를 통해 흘러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요 나란 사람이 무슨 향기를 가지고 있겠어요? 악취가 나는데 그것에 익숙해져서 몰랐지요?" " 사람들이 코 막고 다니면서 속으로 혀를 찼지요. "
" 예수 믿는다면서 사람이 왜 저래?"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우서 피하지." 하면서 말을 안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나의 지식이나 능력이나 지혜로는 안됩니다. 그런 것들을 사용해서 예수님의 향기 모조품을 만들어서 여기저기 뿌리고는 뽐내는 참으로 어리석고 교만한 것을 버려야 합니다.
내가 죽고 주님이 내 안에 살아계셔야 합니다. 그래서 말과 행동에서 예수님의 향기가 흘러 나와야 진짜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하루를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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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순 절 제 13 일 부활의 능력이 내 삶에
로마 6:5 270 변찮는 주님의 사랑과
신앙 생활은 내가 죽은 일입니다. 나를 내려 놓는 일입니다. 그래야 다시 삽니다.
부활의 능력은 내가 죽을 때에 나타납니다. 내가 죽지 않았는데 어떻게 부활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죽는 방법은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로 당신을 내려 놓으시는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내 뜻, 내 생각, 내 꿈과 소망을 내려 놓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이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예수님께서는 피 땀 흘리시는 기도를 통해 우리에게 시범을 보이셨습니다. 과연 우리으니 이런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새벽마다 교회에 나가 어떵 기도를 어떻게 하고 오는지 자신을 살펴 봅시다.
주님께서 살고자 하는 자는 먼저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2:24. 마태 16:25) 손해보고 양보하고 베풀기만하고 나만 일하고 져 주고 섬기고 섭섭하고 화나고 억울하고 소리치고 싶 은 것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사랑안에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행하고 참으면서 사는 것이 바로 죽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부활의 능력이 내 삶에 흘러 넘칠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평안과 기쁨이 주어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안다. 다 안다고 하시면 위로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 시험과 유혹을 말쓰으로 승리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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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순 절 제 14 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마태 16:24-25 457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당신을 따라 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이 죽을 십자가를 당신 손후 지고 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고통이자 고난이며 죽음입니다. 주님 따라 가려면 이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반드시 내가 말입니다.
그런데 편하고 쉬운 것을 좋아하는 우리에게 있어서 에수님의 이 말씀이 영 불편합니다. 예수님 따라가는 것이 아닌 여기 이 자리에서 복을 받고 그냥 살고 싶습니다.
예수님 따라 갈 사람은 선교사나 일생을 헌신한 목회자들이 아닌가 라고 구별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저마다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 어려움이 있습니다. 구역, 전도회 부서에서 일할 때에 각가지 힘든 일 어려운 순간이 다가옵니다.
나의 약점과 단점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헌신하고 봉사하며 예배 드리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일입니다.
고난의 시간을 통해 힘 있게 나이 믿음을 증명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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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순 절 제 15 일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
누가 24:5 86 장 내가 늘 의지하는 예수
예수님이 계시던 무덤은 비어 있습니다.무덤은 죽은 자들이 있는 곳이니 부활하신 예수님이 계실리가 없습니다.
새벽녁 여러 여인들이 예수님을 찾아 무덥으로 왔습니다. 죽으신 예수님의 몸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서였습니다.
천사가 이 여인들에게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라고 꾸짖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의 땅에 계시지 않습니다. 내가 죽어 있는 자의 땅에 있으면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염려, 근심, 미움, 두려움, 부례함, 욕심에 있으면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곳을 벗어나서 감ㅂ사 기쁨, 용서 평화, 섬김이 있는 곳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다윗은 "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영호와의 선하십ㅁ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
라고 시편 27편 13절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처철한 상황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사27:2-3)
"나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결코 죽지 않고 살아서 하나님의 집에서 내 하나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라고 선포하며 낙심하거나 절망하거나 삶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영이 살아있는 사람들, 나를 살리시고 세우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바로 그곳에 주님이 부활하여 계십니다
정의를 위해서 부정적인 얘기를 하고 험담 불만과 불평, 비판과 정죄를 하는 장소는 내게 유익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 역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산장들의 땅으로 가십시오
빛이신 예수님 내 안에 있는 모든 죄의 어두움을 빛으로 밝히시며 사라지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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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순 절 제 16 일 살아 나셨느니라
누가 24:6 마태28:6 390 장 예수가 거느리시니
부활의 새벽에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에게서 천사가 말합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신대로 살아나셨느니라 (마26:6)
오늘 물상의 말씀에서는 "갈릴리에 계실 때에 (즉 평소에 너희들과 함께 계시면서)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고 "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수차례 당신께서 죽으실 것과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일하셨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암 3:7)
예수님은 성경에 말씀된 그대로 일하셨고 행하셨습니다. 요한 19장 28 에 보면 예수님꼐서 일부로 말이 마르다고 말씀하시는 것처럽ㅁ 보입니다 구약 성경에 그렇게 되도록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시 69:21)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일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함을 모범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말씀 묵상을 쉬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말씀을 기억하고 마음에 새기면서 살아야 합니다.
내 기억력은 상관없습니다. 진리를 위해 일하시는 성령님께서 도와주실것입니다. 기억하게해 주시고 생각나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말씀대로 하지 않으면 방자하게 됩니다. (잠 29:18) 자기 소견대로 행동하면서 잘 하는 줄 알고 착각하다가 (삿21:25) 망하게 됩니다 (호4:6)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삶으로 순조앟여 참 믿음을 소유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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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순 절 제 17 일 말씀을 기억하고
누가 24: 7-8 / 190 성령이여 강림하사
사람은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귀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때에는 뚝 잘라서 한 부분만 기억하기도 합니다. 또 분명히 들어 놓고도 자기 임의로 해석하거나 생각해서 머리 속에 저장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엉뚱하게 대답하고 엉뚱하게 반응합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참으로 부족하기만 한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라고 하시며 말씀을 가르치셨는지 이해가 됩니다.
귀라고 해서 다 귀가 아닌 것입니다. 들었다 해서 다 제대로 들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천사가 전에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을 기억해 보라고 무덤에 찾아온 여인들에게 말하였을 때에 놀랍게도 여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냅니다. 죽으셨다 다시 살아나리라 하셨던 말씀이 기억난 것입닏. 그들은 자기들이 만난 지금의 상황 그대로 적용했습니다.
그랬더니 바윗돌이 굴러져 있고 무덤이 비어 있는 상황이 이해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된 것입니다. 또 말씀은 언제나 사실이 된다는 것 알게 되었습니다.
기억해 낼 말씀이 있습니까? 성령께서 꺼집어 내어 주실 말씀이 내 안에 있습니까? 매울묵상함으로 내 안에 저장되어 있는 말씀이 있습니까?
성령께서 나를 도와 주시려는데 내 안에 저장해 놓은 말씀이 없어서 기억해 낼 말씀이 없어서 도와주지 못한다면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을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암송하여 그것으로 고난 가운데 등불 삼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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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순 절 제 18 일 허탄한 듯 들려
누가 24:9-11 390 아 하나님의 은혜로
무덤에 갔다 온 여인들이 부활한 주님을 만났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났음을 확인하였습니다. 이 여인들은 그 부활의 아침에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가장 대단한 경험을 하고 엄청난 은혜를 입은, 온 세계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최고로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감히' 라는 단어를 여기에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여인들이 열한 명의 제자들에게 와서 사실을 전했는데 '감히' 아침부터 허튼 소리를 한다며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넌센스로 여겼던 것입니다. "남대문에 문턱이 있다고 문에 어찌 문턱이 없을소냐?" 며 강가본 사람이 가서 직접 가 본 사람을 이긴다는 우리 옛말처럼 기껏 다락방에나 숨어 있던 사람들이 큰 소리를 친 것입니다.
듣지 않았으면서 들은 것처럼 말하고 모르면서 아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 거짓 사람들에게 진노하시는 모슴이 예레미아 23 장에 자세히 나옵니다. 과연 오늘 내가 말하고 주장하고 논쟁하고 싸우기까지 하면서 맞고 옳다고 목소리 높이고 있는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 틀림없는 것일까요?
만약 하나님의 생각 뜻에 맞지 않는 것입며 어떻게 하려고 나는 그렇게 배짱 좋게 매일 큰 소리치며 사람들과 다투고 얼굴을 붉혔을까요?
그리고 왜 그가 틀렸다고 하며 그를 미워하고 외면했을까요?
오직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진리의 말씀으로 살도록 인도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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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순 절 제 19 일 아직 알지 못하더라
요한 20:9,10 366 어두운 내눈 밝히사
무덤에 갔다 온 여인들이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고 증언하였을 때 열한 명의 제자들의 반응은 아침부터 헛 소리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베드로와 요한은 그냥 있을 수 없어서 무덤까지 직접 가 보기로 했습니다.
두 사람이 달음박질하여 무덤을 둘러 보고 난 후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놀랐을 뿐이었습니다. 돌이 옮겨져 있고 무덤이 비어 있었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깨닫지도 알지도 못한 채 그냥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오늘 말씀은 다시 살아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말씀이 내 마음 안에 없으면 하나님께서 행하신 신비한 일과 기적이 눈 앞에 있어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합니다.
신앙생활의 햇수나 직분, 교회에서의 이런 일 저런 봉사를 했다는 연륜이 나이 믿음과 신앙을 증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내 마음 안에 살아 있고 그 말씀이 일상의 삶 속에 드러나야 합니다. 밥 먹고 돈 벌기 위해 일하고 놀고 사람 만나 대화하고 특히 교회에서 봉사하고 예배드리는 모든 것들이 말씀 안에 이루어지고 말씀에 따라 살고 말씀이 삶을 통제하고 있다면
(이런 상황을 사도행전 12:24 -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였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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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순 절 제 20 일 꾸짖으시니라
마가 16:14 461 십자가를 질 수 있나
11명의 제자가 밥을 맛있게 먹고 있습니다. 하루 중에 가장 행복한 시간, 이것은 바로 먹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옛 말에 먹을 때에는 개도 건드리지 않는다고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기 밥 먹고 사는 일에 돌보시고 후원해주시는 분이십니다. 다윗의 경우에는 원수가 앞에 있는 상황에서도 밥상 차려 주시벼 먹고 힘 내라고 서비스해 주셨습니다.
" 나 살고 싶지 않아요" 라면서 큰 낙심 중에 있던 엘리야에게 따뜻하게 구운 떡과 시원한 물을 갖다 주시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 하필이면 밥 먹고 있을 때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는 심히 꾸짖으시고 야단치셨습니다. 밥 먹다가 모두 얼었습니다.
믿음이 없다고, 더 낭가 마음이 전부 완악하다고 야단치시는데 밥을 먹을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아는 것도 없으면서 예수님과 함께 한 제자라는 자부심만으로 고집만 센 제자들에게 지금까지 사용한 적이 엇는 단어들을 쓰면서 꾸짖으셨습니다.
나는 지금 어떤 상태입니까?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의 상태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차려주시는 밥을 써비스로 받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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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순 절 제 21 일 듣지 아니하면
누가 16:29-31 절 258 샘물과 같은 보혈
나사로가 죽어서 각각 낙원과 음부로 갔습니다. 거리가 좀 멀기는 해도 서로 간에 얼굴이 보이는가 봅니다.
대화도 할 수 있습니다. 부자가 고통중에 아브라함에 한가지 요청을 합니다. 그는 나사로가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 자기 다섯 형제들에게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하여 증언할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자신이 겪어 보니 절대 와서는 안되는 곳인데 보나마나 자기 형제들과 그 가족드이 다 음부로 오게 될 것 같아서 그랬을 것입니다.
그는 그제야 깨달은 것입니다. 세상에서 그렇게 살면 자기처럼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지옥에 와서야 세상에서의 삷이 무엇인가를 비로소 알게 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잚못 살았고 그렇게 살면 안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거절합니다. 그는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깨닫지 않으며 길이 없다고 하였습니다.(모세와 선지자들은 성경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생각해보십시요. 간단하고 쉬운 일 같으나 천국의 삶이 걸려 있는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들을 수 있는 귀와 듣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듣고 깨달을 수 있는 영적 자각력,
그리고 실천하려는 의지 등등 나의 전 인격적 전 존재적 열심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말씀을 통해 변화하기 어려울 것이고, 변화가 없는 형식적인 신앙은 천국의 삶을 보장받기 어려울 것입니다.
내개 주신 말씀으로 천국에 대한 소망을 기대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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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순 절 제 22 일 말씀하신 그 때에
요한 4:46-53 393 오 신실하신 주
왕의 신하가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갈릴리 지역 분봉왕이었던 헤롯의 신하로서 고위 관리였습니다.
그는 아들이 병으로 죽어 가는 고통을 안고 예수님을 찾아와서 예수님께 자기 집으로 오시도록 간청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의 신하에게 도로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들이 살아 있기 때문에 당신이 그의 집으로 갈 필요가 업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신하가 예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오늘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 고치실 수 있다는 것을 믿는 믿는 것과 그 냥 말씀하시는 것을 믿는 것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하가 두 번째 한 요청을 보면 그는 자기 아들이 죽기 전에 오셔셔 고쳐 달라고 말합니다. 처은 그의 믿음을 이런 수준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도 작은 믿음이 아닙니다. 죽어가는 상황을 해결하실 수 있다고 믿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 네 아들이 살아났다."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곧 바로 돌아갑니다. 순식간에 그의 믿음이 업그레이드 되었습니다. 과연 우리는 말씀을 듣고 들은 그 말씀이 내 믿음을 성장시켜서 큰 믿음이 되게 역사할수 있도록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말씀을 믿고 의지하며 삶 속에서 치유의 능력을 체험하는 삶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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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순 절 제 23 일 살아 있는 떡
요한 6:48-51 135 어저께나 오늘이나
음식은 우리의 생명을 유지시켜 줍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생명의 떡, 즉 음식이라고 하셨습니다. 음식은 육체적인 생명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육체적인 생명을 포함한 영적인 생명을 위한 떡입니다. 아무리 잘 먹고,좋은 것을 먹어도 음식으로 인해 영적인 건강이 유지되거나 좋아지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2 장에 나오는 부자는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 부자를 행해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먹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로 예수님과 함께 살고 예수님을 붙들고 사는 삶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빼먹을수 없는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먹어야 하는 밥으로 예수님을 비유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러온 살아있는 떡입니다. 땅에 속한 음식들과 같지 않습니다. 땅의 음식을 많이 먹으면 몸에 병이 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이라는 떡은 많이 먹을수록 자주 먹을수록 건강해집니다. 하늘의 유기농 식품이요 각종 미네랄이 양분이 살아있는 얃식입니다
예수님을 내 생명의 필수와 핵심으로 믿고, 섬기고 순종하며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먹는 일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죄사함 받은 자유와 기쁨을 누리면서 사는 것도 그렇습니다. 내 생각 취미생활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에서 예수님께서 힘과 양분을 공급해 주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날이 갈수록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더욱 더 갈망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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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제 24 일 레아가 부른 찬송
창세기 29:31-35 147 거기 너 있는가
레아는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실만큼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했습니다. 하니님께서 레아를 위로해주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녀에게 자녀를 낳은 복을 주셨고 동생 라헬의 태를 닫아버리셨습니다. 레아는 첫 아들을 낳은 후 "하나님께서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라며 기쁨과 감격에 찬 노래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노래를 계속 들어보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라는 내용입니다. 그녀는 두 번째 세 번째 아들을 낳고 그 때마다 노래를 부릅니다. 그런데 그 때마다 남편과 관련된 일을 언급합니다.
레아는 둘째를 낳고도 여전히 사랑을 받지 못했는지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라도 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야곱은 레아가 계속 아들을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사랑을 주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넷 째를 낳았을 때에 레아의 노래가 달라졌습니다. 그녀는 이제 아들을 낳은 일에 대해 그 어떤 인간적인 조건이나 이유를 마라지 않습니다.
단지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라고만 노래합니다. 드리어 완벽한 찬송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찬송을 들으신 휴 기다리셨다는 듯 레아의 태를 잠시 닫으셨습니다.
"이제야 드리어 나를 온전히 찬송하는구나 그래 되었다 조금 쉬어라" 하시는 분 같습니다.
최고의 선물인 십자가의 사랑을 받은 나는 지금 어떤 찬송을 드리고 있습니까? 하나님만 높이고 영광을 돌리는 나의 찬송이 사순절에 드려야 하는 가장 귀한 예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의 찬송을 드리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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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순 절 제 25 일 심은대로 거둡니다.
창세기 21:9-16 375 나는 갈길 모르니
하갈이 임신한 후 자기 주인 사라를 우습게 여겼습니다. 멸시했다고 창세기 16: 4 절에 나옵니다. 그녀는 이제 자기 세상이 온 줄 안 것입니다. 겸손과 사랑(사라의 아픔을 이해하고, 임신해서 미안해 하는 )이 없는 것입니다.
사라의 학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참고 있을 리 있겠습니까? 하갈은 그대로 있다가는 자신은 물론 뱃 속의 아이까지 온전치 못할 것을 느꼈습니다. 아브라함도 도움이 안되었습니다. 그녀는 결국 정처없이 도망길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노예가 더구나 임신한 몸을 가지고 어디로 도망갈 수 있었겠습니까? 자기가 스스로 만든 인생길이니 누구를 탓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다신 집으로 돌아오게 된 하갈의 인새에 다시 먹구름이 낍니다. 17세 쯤 된 이스마엘에 3살 쯤 된 이삭을 조롱하고 멸시하는 모습을 사라가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정말로 쫓겨납니다.
떡 조금과 물 담은 가죽부대만 가진 채로 말입니다.
어머니의 성정이 그대로 아들에게 이어지고 그로 인해 고생길로 스스로 걸어들어가는 인간의 어리석은 모듭이 오늘 내 인생길에도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베푸신 사랑이 우리를 살렸습니니다. 사랑을 베푸는 것이 최고의 복된 삶입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사랑을 베풀며 살고 있는지 이 사순절에 십자가 앞에서 겸손하게 살펴 봅시다.
남은 사순절기간동안 사랑을 전하며 사는 주님의 제자가 되게하여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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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순 절 제 26 일 찬송을 부르고 그 찬송을 듣고
행전 16:23-25 85 구주를 생각만해도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기절할 정도로 심하게 구타당하고 지하 감방에 수감되었습니다. 온 몸이 찢기고 피가 계속 흘렀지만 두 사람은 마음을 모아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어떤 기도를 드렸을까요? 기도 후에 그들이 무엇을 했는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기도 후에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슬픈 노래, 눈물짜는 신세한탄을 하는 노래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위대하시고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 사랑 밖에 없으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얼마나 당당하게 불렀는지 감옥에 있던 죄수들이 다 들었습니다. 절망과 한숨과 탄식의 어둠이 가득한 감옥에 찬송이 울려 퍼진 것입니다. 단 한 명의 죄수도 시끄럽다 말하지 않고 다 들었습니다.
그야 말로 심금을 울리는 찬송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 찬송에 감동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영광을 보러 오셨습니다.
그 제대로 된 찬송, 그 온전한 찬송이 하나님의 임재의 길을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시니 감옥 터가 진동되었고 감방 문이 열렸습니다. 쇠사슬이 풀려 버렸습니다.하나님이 오셨는데 그 어떤 구록과 억압이 남아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장벽과 철문이 닫힌 채로 있겠습니까? 견고한 진이 다 무너져버리는 것입니다. 찬송이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합니다. 오늘 우리의 찬송은 어떻습니까?
노래방에서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듯 선곡하고 하나님은 귀 막고 계시는 그런 노래를 부르듯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찬송을 돌려 드리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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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순 절 27 일 사람들을 데려 온 한 여인
요한 4:36 303 날 위하여 십자가에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 라는 마을에 에수님이 등장하셨습니다. 때는 한 낮, 뜨거운 태양이 이글거리며 자기의 존재감을 강력하게 발산하고 있을 때, 한 여인이 예수님이 계신 우물가로 나타났습니다. 두연한 만남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만나기 위해 그 때,
그 곳에 가셨습니다. 이 여인의 남편 5명이 있었고 지금은 한 남자와 그냥 동거 중에 있습니다. 방황하는 인생. 불쌍해서 만나러 가셨을까요?
아닙니다. 이 여인은 외형상으로는 즈극히 타락하고 망가진 사람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 마음 속에 예배에 대한 갈망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녀와 대화하면서 에배에 대한 갈증을 풀어 주시고
그녀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랬더니 그녀는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어 양동이를 던져 버리고는 마을로 뛰어가서 "그리스도가 오셨다."라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이 부분에서 바울과 실라의 찬송이 떠오릅니다.)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등고 등은 사람들이 다 우물가로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게 되는 감동적인 일이 일어납니다.
어떤 준비된 여인을 예수님이 그냥 두시겠습니까? 다 제쳐 놓고 만나러 오십니다. 내가 아무리 부르고 외쳐도 예수님께서 침묵중이시라면 이 여인의 이 이야기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자가 되게하여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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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순 절 제 28 일 빚진자가 되시요 채무자가 되시오
로마 13:8 274 나 행한 것 죄뿐이니
주는 사람이 받는 사람보다 복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행전 20:35) 그리고 빚지고 사는 것은 행복한 일이 아닙니다. 복 받고 살아가는 사람에대하여 꾸어 줄지언정 꾸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도(신명 28:12)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채무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빚진 자로 살라고 명령하십니다. 단, 돈이나 다른 그 어떤것이 아닌 한 가지, 사랑에 대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남에게 베풀고 나면 바로 채권자가 됩니다. 감사하다. 고맙다는 말을 듣지 못하면 섭섭해 하고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투덜거리며 속상해 합니다. 이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랑에 빚진 자의 마음과 자세로 봉사하는 베푸는 나누어 주는 것을 실천하라는 말입니다. 사랑에 빚졌다는 마음 외에는 갚아주고 싶은 그 어떤 다른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갚아 주려고 꼭꼭 쌓아놓은 상처, 원한. 분노, 와 시기 질투 등이 내 마음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사순절 누군가럴 향한 채권자의 마음을 십자가에 다 내려 놓고 예수님의 한 없는 그 사랑에 빚진 사람이 되어 사랑을 베풀고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되도록 기도하고 결단합시다.
사랑에 빚진 자가 되어 이려운 환경에 처한 주변의 지체를 돌아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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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순 절 제 29 일 최고의 칭찬과 최고의 책망
마태 16:16-23 379 내 갈길 멀고 밤은 깊은 데
베드로는 예수님의 질문에 아무도 하지 못한 최고의 대답을 하였습니다. 당연히 최고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곧 바로 마무도 하지 못한 최악의 말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 했습니다. 당연히 최고의 책망을 들어야 했습니다.
최고의 칭찬을 받은 때는 하나님께서 진리를 가르쳐 주시고 알려 주셔서 그렇게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악의 상태가 되었을 때에는 사탕이 베드로에게 알려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런데 두가지 일이 많은 시간을 두고 생긴 일이 아닙니다. 곧 바로 연이어 일어났기에 충격적입니다. 하나님께 가르침을 받다가 곧바로 사탕에 연결되는 일이 나의 일과 같지 않습니다. 바로 나에게 일어날수 있고, 분명 그런 수간들이 내 신앙생활중에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한 순간도 방심하거나 분별력이 없이 신앙생활을 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어리석고 위허한 일입니다. 늘 깨어 무시로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말씀 묵상하면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신앙의 길을 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알려 주시는 것으로 하늘이 일을 생각하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사탕리 공급하는 것으로는 사람의 일, 곧 육신적인 것을 생각하고 말할 뿐입니다. 십자가를 단단히 붙잡고 살아갑시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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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순 절 제 30 일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요한 1:16-17 314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특성입니다.
그냥 주시고, 또 주는 사랑입니다. 분에 넘치게 주시고 잔이 넘치게 주십니다. 망가지고 형편없게 된 나를 퇴출시키지도 않고 추방하지도 않으시고 오히려 은혜를 베푸십니다. 은혜를 헛된 데 다 써버리고 비틀거릴 때에도 다시 은혜를 베푸십니다.
계속 베푸십니다. 내 은혜를 왜 헛되게 하느냐고 형편없고 쓸모없는 녀석이라고 야다ㅑㄴ치거나 화내지도 않으시고ㅡ은혜위에 은혜를 주십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만약 하나님께서 가시신 은혜가 한정되어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무한정 계속 퍼 주시다고 어느 순간 바닥이 나서 더 이상 줄 수 없는 상황이 올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도 바닥 나 가는 당신의 은혜의 창고를 보시면서 더 이상 베풀기만 할 수 없다고 특단의 조치를 내리실 것입니다.
그러난 하나님은 충만한 가운데서 은혜를 베푸십니다. 아무리 주셔도 비워지거나 줄어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온전한 사랑이요 영원한 사랑입니다.
아! 나는 은혜를 끊임없이 탕진하고 소비하기만 하는 참으로 어리석고 우둔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은혜가 아니고서는 오늘 이 자리에 있을 수 없는 참으로 죄인의 괴수 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여 은혜 가운데 성령 충만한 삶을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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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순 절 제 31 일 은혜가 왕 노릇하는 나라
로마 5:20 21. 321 날 대속하신 구구께
율법은 우리를 절망하게 만듭니다. 그 법을 어떻게 다 지킬 수 있겠습니까? 하나라도 어기면 정의의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세상 재판정에서는 정상 참작, 재판장의 재량 등이 있고 또 다른 어떤 방법으로 빼 올 수 있는 길이 있겠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율법을 알면 알수록 죄가 늘어갑니다. 몰랐는데 알고 보니 죄였습니다. 아닌 줄 알았는데 바로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성경말씀을 먼저 율법적인 지식으로 알아가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어쨏든 알고 보니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는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때분에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칩니다. 더욱 은혜를 넘치게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죄가 더해지만 더해질 수록 그 죄를 덮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더 부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 충격적인 사랑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율법의 권세 죄의 권세 사망의 권세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다 파괴되고 힘을 잃었습니다. 은혜가 왕노릇하는 나라 그 곳이 바로 예수님의 보혈로 용서받고 의로움을 선물호 받아 감사와 겸손과 자유함과 기쁨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율법을 지키면서 살고, 더 나아가 율법의 완성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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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순 절 제 32 일 문좀 열어다오
계시 3:20 380 나의 생명되신 주
"너에게 가느라고 얼굴에 침 뱉음 당하고 뺨 맞고 주먹질과 발길질을 당하고 채찍질을 당하였구나 비난고 조롱과 욕설을 들으변서 그래도 너에게 가는데, 너는 나를 피하여 달아나는구나 내 사랑 주고 싶어 너를 찾아가다가 십자가에 못박혀 매달렸단다 이래도 나를 안만나주려느냐?!"
굳게 닫힌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주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옵니다. 바로 내가 그런 일을 벌이고 있는 장본인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몰랐습니다. 주님께서 문 두드리고 계심을 아니 번개와 천동같은 호령소리로 이 무지하고 완악한 자를 꾸짖지 아니하시고 그렇게 문만 두드리고 계셨단말입니까?
나는 주님을 밖에 세워놓고 따뜻한 집 안에서 빈둥거리고 여유작작하였음을 압니다. 내 영혼의 빈곤함에는 관심도 없었고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만 걱정하며 사알의 주님이라면서 왜 미리미리 알아서 채워주지 않는 거냐고 불평하고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보니 진짜 좋으신 나의 친구임을 비로서 깨달았습니다. 이제 나도 예수님과 더불어 먹을 것입니다. 돈, 건강, 시간, 어떤 계획, 습관, 취미, 생활, 내 습관과 기질, 마음 깊은 곳에서 숨겨져 있는 상처와 은밀한 것들까지 다 문을 열어 주님께서 들어오시게 합시다.
놀라운 은혜와 사랑의 대화가 사작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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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순 절 제 33 일 무엇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갈까?
요한 11:32-35 484 내 맘의 주여 소망되소서
나사로가 죽어 4일째 되는 날, 예수님께서 베다니로 오셨습니다. 문상을 하러 오신걸까요? 이미 장례는 다 끝났는데, 뒤늦은 조문이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요? 예수님꼐서 오실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마르다가 마을 바깥까지 나가 예수님을 맞이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왜 이제야 오셨느냐고 아픈 마음을 드러냅니다. 일찍 오셨으면 오라비가 안 죽었을것이라는 등, 이런 저런 이야기를 늘어 놓는데 예수님께서 일일이 답해 주십니다. 마을 입구에 서서 그러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왔습니다. 올다가 왔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만나서 한 예기는 마르다와 같지만 그녀는 눈불로 예수님 앞에 섰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그 우는 모습을 보고 비통해 하시고 불쌍해 하셨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나사로를 어디에 두었느냐고 말씀하십니다.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혹시 지금 시퍼론 논리 어줍지 않은 지식, 또는 불평과 불만으로 주 앞에 서 있습니까? 예수님도 논리와 이론으로 대하실 것입니다. 그러지 말고 눈물로 누님앞에 나아가십시오. 가난한 심령이 되시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생각하십시요(누가 18:9-14)
주님께 드릴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오늘 하루 그걸을 드리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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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순 절 제 34 일 누는 사람이 없더라
누가 15:13-16 412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둘째 아들이 돈을 챙긴 다음, 자유를 찾아 외국으로 떠났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공통적으로 같은 의미를 가진 단어들이 나옵니다. "허랑방탕(13)""허비하더니(14)""주는 자가 없더라(16)" 허랑반탕은 그의 기질이고 그가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이런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질서와 영적 품위를 지키는 단정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자기는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하늘나라의 고상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허비하는 삶이 됩니다. 자기는 쓸 데 쓰고 할 일이 한고 할 말 한다 할지 모르지만, 결국 자기에게 돌아오느 유익이 없습니다. 거둘 것이 없는 삶입니다. 자신은 여기 저기 밚이 베풀고 뿌리고 십었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헛된 곳에, 즉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한 것이 아닌 자기 생각을 따라 살아온 허비하는 삶이었습니다. 궁핍하게 될 것입이다 타서 재가 될 것입입니다. 그토록 헌신과 봉사를 많이 하는 사람이 낙심하여 쓰러지고 안티 기독교인이 되고 교회를 대적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는 손길이 없습니다. 다 떠나갔습니다 그간 빈궁해진 것을 보고 말입니다. 허비하는 삶이었으니 진실한 교제와 마음을 내 놓는 사귐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탕자의 삶입니다. 나느 지금 어떤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주님께 돌아오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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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순 절 제 35 일 사랑하기 쉬운 것이 아닙니다
누가 22: 39-44 438 내 영혼이 은총입어
고난 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순절 마지막 주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사셨던 사랑의 길 그 눈물의 길을 경건한 마음으로 따라갑시다.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웃이란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 내가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내가 모르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그 대상입니다.
그들 중에 나와 연결되어 사랑을 베풀 일이 생기면, 내 몸을 사랑하든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은 선택 사항이 아닌 필수 사항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쉽습니까?
물론 쉬운 사랑도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내 마음에 맞는 사람, 나에게 잘해준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리런 정도의 사랑을 당신에게 말씀하시는 사랑에 낄 자격에 없는 사랑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음 핏방울같은 땀을 흘리시면서 사랑의 길을 가기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슬프고 고민되고 죽을지경(마26:38: 얼마나 충격적인 말입니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도 전에 앞을 해야할 일 때문에 고민되어 죽을 지경이라니 말입니다. )
리라고 어리석은 제자들에게 하소연까지 하셨습니다. 사상을 행하는 것은 이렇게 어려운 일입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기도로 나를 죽이지 않으면 갈 수 없는 외곱고 고통스럽고, 아프고 아픈 길입니다.
고난의 길을 가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길을 따라가는 제자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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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순 절 제 36 일 앞에 있는 기쁨을 볼 수 있습니까?
히브 12: 1-3 315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일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참아주고, 양보해 주고 예의를 지키고, 험담하지 않고, 나의 유익을 바라지 않고, 성내지 않고,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는 길을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고전 13;4-7)
예수님께서 사랑의 길을 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겟세마네에서의기도로 보여 주셨습니니다. 십자가 지고 가신 골고다 언덕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아니, 공생애 3 년동안의 삶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여유 만만하게, 웃으면서 주님께서 그 길을 가셨다면 ' 우리와 상관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신 일이구나! 생각하면 될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모든 야간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 주신 까닭은 사랑의 길을 가는 것이 절대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가르쳐주셨습니다. 옆에 있는 기쁨을 보면서 현재의 고난과 수치와 모욕을 다 감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떤 기쁨입니까? 죄로 인해 사탕릐 손아귀에서 죽어가는 영혼들이 살아날 것을 생각하시면서 하나님도 기뻐하셨고 예수님도 기뻐하셨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살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뻐게 해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길이자 첫 번째 길이고 예배와 예물을 드리기 전에 우리가 먼저 행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자 소망입니다.
오래 참고 인내하는 하루게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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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순 절 제 37 일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주신 복
로마 5:9-11 254 내 주의 보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제 누구든지 이 볼혈의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은 어떤 죄를 지었든지 정죄함을 받지 않는 놀라운 기적이 시작되었습니다. 율법을 안지키고 못지켰는데도 다 지킨 것처럼 인정해 주시는 즉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기적이 펼쳐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시기에 율법을 단 하나남 어겨도 그것을 용납하실 수 없습니다. 충격적인 사실은 모든 율법을 다 지켜도 마지막 하나를 어길 경우 율법을 다 안 지킨 것으로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오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 2:10)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이 무서운 율법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평케 되는 일이 가능해졌습니다. 이 일은 우리의 그 어떤 신앙적 행위나 노력으로도 될 수 없습니다.
"죄를 짖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요1 3:8) 라고 했습니다. 죄는 이렇게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지 값이 다 치러지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이 죄의 권세가 깨어졌습니다.
생명을 주는 은혜의 법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 은혜이 세계를 모르고 여전히 거짓된 죄와 사말의 권세에 속아 신음하고 절망하며 사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 8:32)
의로운 일을 실천하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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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순 절 제 38 일 하나님이 못하시는 일
이사 59:1 - 2 308 내 평생 살아온 길
우리가 힘들고 어려워서 하나님께 부르짖고 간구하여도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하나님도 어쩔 수 없다고하십니다. 손이 짧아서 (능력이 부족해서) 우리를 못 도와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귀가 둔하거나 우리의 기도소리가 약히서 우리으 울부짖음을 듣지 못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 놓았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버렸다고 합니다. 우리의 간구 소리가 차단되었다는 것입니다.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죄의 권세가 이렇게 대단합니다.
정의의 하나님이시므로 죄를 회개하지 않는 사람의 255 들어주시거나 그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죄 문제가 해결되려면 죄값을 치러야 합니다.
영적 세계에서 죄값은 사망입니다.(로마 6:23)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는 영적 사망입니다. 영이 죽었으니 몸이 살았다고 할지라도 그 몸도 사망권세를 가진 사탄에게 휘둘려서 어둠 속에서 병들고 신음합니다. 불의의 도구로 쓰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문제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깨끗하게 해결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 은혜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죄와 사망의 권세가 힘을 쓰지 못합니다. 믿음으로 이 은혜안에 들어옵시다.
예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일을 믿을 때에 담대하게 하나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십시오 그러면 됩니다 (로마 10:10)
나의 죄를 회개하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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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순 절 제 39 일 예수님의 그 눈길
누가 22: 60-62 255 너의 죄 흉악하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성 금요일입니다.
베드로는 그 날, 대 제사잘 가야바의 집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자 일찍 따라오다가 거기까지 왔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되나 궁긍해서 따라온 것일 것입니다.
'멀찍이는' 여차하면 도망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안전선 안에 있는 것이지요. 오늘 우리의 신앙이 이렇제 않습니까? 자신이 그어 놓은 선 밖으로 절대 움직이지 앟는 것 말입니다.
베드로가 세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마지막에는 내가 예수를 알면 내가 저주를 받을 것이요 나는 절대로 모르는 사람이라고 맹세까지 하면서 부인했습니다. (막14:71)
차라리 다른 제자들 처음 도망가는 것이 나았을까요? 그 때 닭이 울었습니다. 그 순간, 저 앞에서 종교지도자들에게 모욕과 조롱을 받고 계시던 주닙이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겁먹은 베드로를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의 조용한 눈길, 사랑이 가득 담긴 그 말없는 눈길이 베드로의 가름을 강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고하셨던 말씀이 그으 온 몸을 흔들었습니다.
그 거대한 사니아ㅣ가 가슴을 찢으며 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이제야 무너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나의 온 존재 자체가 부끄럽고 죄송스러워서 어찔 할 바를 모르게 만들고 그럼에도 그냥 쏟아부어 주신 십자가 그 사랑이 나를 통곡하게 하고 주님께 항복하게 만들고 있습니까?
온전하게 회개하는 하루게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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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순 절 제 40 일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하여
로마 14: 8-9 494 만세반석 열리니
사순절 마지막 날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바라보면서 경건하게 40일을 지내 왔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이 예수니의 부활로 인해 승리가 되고 영광이 되었습니다. 생명이 되었습니다.
헛된 일이 아니고 패배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위해 살리고 했습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십시요. 무슨 공헌, 도움을 드리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감히 그렇게 살 자격과 능력이 있습니까? 내가 예수님의 소유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 엄청안 죄를 다 그냥 용서해주시고 나를 안아주신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살겠다는 것입니다.
죽어도 예수님을 위해 죽기로 했습니다. 또 오해하지 맙시다. 무슨 순교하겠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내 죽음까지도 주님의 소유라는 것입니다. 누짐 오라고 하실 때에 내 생명 거두어 가실 때 "알았어요. 주님 이제 부르시는 군요 감사합니다. " 하면서 늘 이 땅의 삶을 떠날 준비를 하겠다는 얘기입니다.
사순절을 지나오면서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오늘 묵상하는 구절들이 나의마지막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부활의 아침을 준비하는 성도가 되게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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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활 주 일 살아 나셨느니라
로마 4: 2505:2 182 강물같이 흐르른 기쁨
부활의 아침입니다. 저의 권세와 사망의 권세가 다 깨지고 무능력하게 된 예수님의 부활을 감사하고 찬양하고 영광드리는 날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값을 치르시고(속량 대속) 이라고 합니다.) 우리를 죄의 권세에서 건져 내기 위해 (구원)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죄 값은 사망으로 지불됩니다)
그리고 사흘 후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옭아매고 있던 죄의 권세와사망의 권세가 이 순간 다 박살났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이제 누구든지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은 이 권세들이 손을 대지 못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님 안에 있는 것입니까? 그 보혈의 공로를 믿으면 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라는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이제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원래는 죄잉이 관계)로마 5:8) 원수의 관계(로마 5:10)이었는데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할사심ㅂ으로 화평한 관계로 회복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비로서 하나님께서 내 아버지가 되시는 놀라운 관계를 경험하게 되니 것입니다. 무서운 정의의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5장 2절의 말씀처럼 이제 즐거워하며 살아갑시다.
하나님이 정황을 볼수 있는 멋진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부활의 예수님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영원히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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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사랑마루 2016 사순절 묵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