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어린 시절 1990년 이탈리아 대회가 최초의 기억이다.
황보관 선생님의 통쾌한 골, 우루과이 폰세카의 환호, 이회택 감독님이 벤치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디에고 마라도나의 하늘색 유니폼과 크리스 와들의 화려한 드리블에 매료되어 축구를 시작했다. 그 순간부터 모든 축구선수들처럼 월드컵은 내 삶의 특별한 꿈이 되었다.
어른이 되면서 월드컵은 현실이 되었다.
비록 선수로 참여하지 못했지만, 축구인으로서, 산업의 종사자로서, 팬으로서 여전히 월드컵은 꿈의 무대다. 생각해보면 지금 한창 논의되는 플레이 모델, 축구 트렌드에 상관없이 한 골에 감격하고 승점 1점에 환호하던 시절도 있었는데 30년 사이에 참 많은 것이 변했다.
전후무후한 관심과 지원이 함께한 2002년의 성과는 한국축구가 세계로 향하는 문을 열어주었다.
이 때 비로소 우리는 시스템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고, 이를 통해 선진 환경과 제도의 실체를 접하게 되었다. 많은 변화 속에서 어린 선수들은 이전 세대보다 더 나은 환경과 시스템에서 육성되었다. 이에 대한 첫번째 결과물이 2012 런던 올림픽 세대다. 유소년 시절부터 선배 세대보다 나은 방법으로 육성된 이 세대는 올림픽 이후 적극적으로 해외에 진출하며 선진 축구를 경험했다. 그리고 이들은 한국축구의 다사다난했던 2010년대를 지탱했다.
한국축구는 ‘투지’는 있었지만 명확한 철학이 없었다.
벤투 감독이 부임하면서 ‘능동적인 축구’를 한다고 했을 때, 저마다 다르게 해석했다. 자신의 세대에서는 경험하지 못했거나, 실제로 잘 몰랐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 식의 다양한 해석이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볼 소유'와 '능동적'
벤투의 두 가지 핵심 키워드에 의문이 있었다.
나 역시 한국이 세계를 상대로 그렇게 하는 것을 보지 못했고, 그 정도의 축구를 잘 몰랐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게 될까?”라는 의문에도 묵묵히 지지와 응원을 보낸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번째. 4년의 준비 기간
두번째. 선수들의 강한 신뢰
세계 레벨에서 경쟁하려면 우리만의 철학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동안 누구도 한국축구의 스타일을 정의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벤투 감독이 던진 메시지는 원론적이지만 합당했다. 한국축구는 ‘결과’를 떠나 4년을 착실하게 준비하는 ‘과정’을 반드시 경험해야 했기에, 철학 있는 감독이 4년 간 팀을 만든다면 분명 남는 게 있을거라 생각했다.
ㅇ 과거 칼럼: [김태륭의 더에프] 지난 여름에도, 그리고 지금도 스타일을 고수하는 벤투 감독을 지지한다
https://sports.news.naver.com/news.nhn?oid=396&aid=0000599071
요즘 한국 선수들은 축구를 알아가는 것에 대한 열망이 강하다.
그래서 지도자에 대한 기대와 실망의 폭도 큰 편이다. 그런데 선수들은 과거 대표팀의 경기력 나쁠 때도 선수들은 벤투 사단을 신뢰했다. 대표 선수들은 대표팀의 프로세스에 대해 만족해했고 벤투 사단에 대한 ‘축구적 기대’를 갖고 있었다. 시대가 변해도 축구선수, 나아가 축구인의 본질은 축구다. 과정 단계에서 기대한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코칭스텝들의 방법과 소통 그리고 수정이 합리적이고 선진적이라면 선수들은 따라간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선수와 코칭스텝이 함께 발전하면서 팀은 견고하고 끈끈해진다. 이를 통해 나는 벤투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이 이번 월드컵을 통해 한국축구가 세계와 동등한 자세로 대결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줄 것으로 생각했다.
한국 경기를 포함하여 2022 카타르 월드컵 조별리그 10경기를 현장에서 지켜봤다.
전력의 강약 여부를 떠나 자신의 철학, 확고한 플레이모델이 있는 팀들이 세계 수준에 맞는 경쟁력을 선보였다. 공을 소유하는 시간만큼 공을 소유하는 방법이 중요해졌으며, 이것을 해내는 팀들은 전력의 차이를 어느정도 극복하면서 자신의 페이스대로 능동적인 축구를 했다. 사우디가 과거와 달리 강력한 규율에 기반한 전진 수비를 하고, 속도와 효율성이 업그레이드된 일본이 ‘영리한 표범’같은 스타일로 변모한 것처럼 말이다.
한국의 2022 FIFA 카타르 월드컵은 종료되었다.
역대 대표팀 최장수 감독으로 멋진 결과를 달성한 벤투 사단도 이번 대회를 끝으로 한국을 떠난다. 지난 2002년 히딩크 감독이 월드컵 4강 이상의 유산을 한국 축구에 남겨두었듯이, 벤투 사단도 한국 축구에 많은 것을 남겨 놓았다. 세계무대에서 경쟁 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지는데 4년 반이 걸렸다.여기서 더 올라갈 수도 있고, 단기간에 원점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이를 유용하게 활용하는 것은 온전히 한국 축구계의 몫이다.
* 축구인의 축구블로그, '8층 풋살장 아저씨'
https://blog.naver.com/ktrhoy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