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시아문의 역사적 의미와 정통성
제가 한국불교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미얀마의 쉐우민 선원에 가니까 그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을 미얀마 사람들은 오히려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이 그곳을 떼로 몰려가서 배우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스승 밑에 가니까 더 깜짝 놀란 것은 그 밑에 제자가 단 한 사람뿐이라는 것입니다. 마음보는 수행을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훌륭한 스승 밑에서 마음보는 수행을 하는 사람이 우 떼쟈니아 한 분입니다. 그러니 마얀마 인들이라고 다 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생활의 일환으로 젖어있을 뿐 깊게 들어가지는 않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오히려 목숨 걸고 수행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큰 스승이 미얀마 수행자들에게 하는 말씀이, “한국에서 법을 다 가져간다. 다 가져간다.” 고 몇 번이고 되풀이 하였습니다. 이 말에 나는 어깨가 으쓱했지만 이것이 그곳의 현실입니다. 한국에서 수행하러 왔는데 그 제자들은 안 한다는 것입니다. 그 좋은 환경에서 무엇을 하는가 하고 작은 사야도에게 물으니, “비구라고 다 수행하지 않는다. 경전공부하는 사람도 있고 절 살림하는 사람도 있고 또 법문하는 사람도 있다. 또 심지어는 머리만 깍아 주는 사람도 있고 후원에서 음식을 작만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소위 이판사판의 역할 분담이 다 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만이 수행에 배고파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처럼 그 아난존자도 부처님 재세시에는 수다원 밖에 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최고로 알아서 꿰뚫은 것 같아도 무르익지 않아서 수행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비구 227계가 전통적으로 지켜져 현존하는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이고 또 “나는 이렇게 들었다”라고 암송되어 온 경전이 초기에 인도에서 스리랑카로 전해져서 융성하질 당시에, 비구 비구니들은 결집結集에 의해서 암송된 경전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서 눈물겨운 노력을 했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반복되어 내려온 것이 경전 외우기입니다. 빨리어로 경전 외우는 것을 들으면 매우 아름답습니다. 장단이 있기 때문에 외울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냥 쭉 같은 리듬으로 가면 외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판소리 다섯마당 중에서 다섯 시간짜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외워서 갈 수 있다는 것은 가락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빨리어가 외워서 전해질 수 있었다는 것은 리듬을 탔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경전이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돌아가시니까 통곡을 하고 우는 비구들이 있었는가 하면 아이구, 이제 살았다. 잔소리 하던 분이 가셔서 한숨 돌렸다고 하는 비구가 있어서,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해서 가섭존자가 결집대회를 열게 되었는데, 이렇게 어느 시대 어느 사람이나 이런 경우에든 꼭 있게 마련인 모습인데, 당시도 현재 우리 모습과 똑 같았습니다. 그런데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의 세계에도 천상에도 이와 똑같은 규범과 원리 하에서 돌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명이 사는 세계는 이런 형태의 부류는 다 있게 마련인데, 그래서 시행된 것이 결집인데 이렇게 암송으로 내려오던 것이 패엽경에 씽알리어로 적혀서 내려오던 것이 영국 사람들에 의해서 로마자로 기록 되어 온 것을 우리가 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패엽경에 기록되기까지는 이런 눈물겨운 과정이 있었습니다. 저도 이 포살 광경을 보고 울었습니다. 이 경전이 전해지지 못할까봐 애를 쓰면서 틈만 나면 머리를 맞대고 외우고 졸면 서로 꼬집고 하는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미얀마는 경전을 외울 때 둥그렇게 쪼그리고 앉아서 따따따따 하면서 외우는데 외우던 사람이 막히면 여기저기서 달려들듯이 이어서 외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모두 다 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전의 모습입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외워서 아는 것이 들어서 아는 것보다 더 기억이 잘 된다는 것입니다. 음률로 하기 때문에 더 잘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워서 아는 것은 더 정확하다고 합니다. 내가 판소리를 해보아서 아는데, 판소리는 리듬으로 외웁니다. 리듬을 타면 계속해서 줄줄 외울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경전을 외운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한문으로 내려온 것이나 산스크리트로 내려오는 것보다 외워서 내려온 것들이 오자誤字도 없고 더 정확하다는 것이 검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중국 경전은 반드시 오자 하나를 만든다고 합니다. 경진스님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한문으로 된 경전은 글자 하나씩을 꼭 틀리게 한다고 합니다.
어쨌든, 당시 스리랑카에는 기근이 왔는데 기근 때문에 탁발을 나가도 밥을 안 주니가 풀뿌리로 연명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경전을 외웠다고 하는데 그 과정에서 비구니는 모두 귀가하여 계단이 끊어졌다고 합니다. 비구, 비구니는 주민들이 주어서 먹어야 하는데 밥을 안 주니까 여자들은 풀뿌리로 연명할 수가 없어서 제 집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상좌불교에서는 비구니 계단이 끊어졌습니다. 끊어진 대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이어져 온 마하사띠빠타나, 대념처경을 우리가 배우려고 합니다. 경전을 펼치면 첫 머리에 우리는 항상 ‘나는 이렇게 들었다’라고 하는 말을 접하게 된다. 여기에는 정통성의 의미와 역사적 의미가 있다는 것, 그리고 진리의 차원에서 이 말이 예사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되새기기 바랍니다.
첫댓글 선생님 고맙 습니다.
감사합니다
∴미얀마의 쉐우민 스승 밑에 가니까 더 깜짝 놀란 것은 그 밑에 제자가 단 한 사람뿐이라는 것입니다. 마음보는 수행을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훌륭한 스승 밑에서 마음보는 수행을 하는 사람이 우 떼쟈니아 한 분입니다. 그러니 미얀마인들이라고 다 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생활의 일환으로 젖어있을 뿐 깊게 들어가지는 않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오히려 목숨 걸고 수행하려고 합니다.이처럼 그 아난존자도 부처님 재세시에는 수다원 밖에 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최고로 알아서 꿰뚫은 것 같아도 무르익지 않아서 수행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감사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