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선방
은해사 암자 운부암
편집인 김형근
불이문
미국에는 명상이 일반 사람들 사이에 인기가 있지만 한국의 사찰에는 선방에서 스님들이 동안거 3개월, 하안거 3개월
동안 참선을 하면서 수행을 한다. 수행 법은 화두를 드는 간화선을 주로 하고 있다. 지난 2월초 동안거가 한창인 대구 은해사 말사인 운부암에서 수행중인 법타스님을 만나려고 이곳에 다녀왔다. 필자가 방문하였을 때 9명의 스님이 정진 중이었다. 선원의 선원장은 법타스님의 제자인 불산스님이다. 이곳에 써 있는 안내문을 토대로 소개한다.
운부암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銀海寺)에 딸린 8곳의 산내 암자 중 하나로, 은해사 일주문에서 약 4Km 정도 산길을 따라 오르는 깊은 산속에 있는 작은 암자로서 걸어가려면 족히 3시간 정도 걸리지만 지금은 차로 15분 정도면 닿을 수가 조금 있다. 이곳은 TV 시청이 가능하고 개스로 요리를 하지만 급속하게 변하는 한국사회와는 다르게 최소 100년전의 한국 모습처럼 느껴졌다. 아담하고 낮은 흙토담 모습이 정겹게 느껴진다. 이런 모습 때문에 얼마 전에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TV 연속극의 촬영무대였다고 한다. 겨울이라 얼음이 얼은 연못에 서 있는 돌로 만든 큰 달마상과 3살 아기도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 처럼 아주 작은 불이문은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다.
유서 깊은 참선도량이다. 711년(신라 성덕왕 10)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절을 세울 때 상서로운 구름이 일어났다 하여 운부암(雲浮庵)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다. 고려시대에 화재로 전소되었다가 이후 중건하여 관음기도 도량으로 전승되어 왔다. 1860년(철종 11) 다시 화재로 소실되자 옹허스님과 침운스님이 중건하였고, 1900년에 보화루(寶華樓)를 건립하여 오늘에 이른다.
연꽃모양을 하고 있는 형국이라하여 연화지라고 일커어지는 명당 중 명당이며 옛적에는 팔공산 주인은 이곳에서 난다고 하였을 정도로 지기가 출중한 곳으로 통했다 한다. 성철스님은 입산한 이듬해인 1939년 이곳에서 하안거를 했고 수행이 몰록 깊어져 오도한 도량으로 오도송이 이곳 운부암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다. 그후 향곡선사에게 이곳 적정처를 물려주고 그 다음 장소를 바로 산넘어 동화사 금당으로 옮겨 안거하여 했으니 여의치 않아 마하연 선원으로 두철 안거한 후에 다시 동화사 금당으로 옮겨와 그 해 활연개오의 오도송을 읊었다 하니 공부는 이미 운부선원에서 깊어졌다고 운부암 연혁에 써 있다.
현재의 법당 우측 뒷 편 언덕에는 의상대사께서 창건 당시 짚고 온 지팡이를 땅에 꽂으니 즉시 살아나 푸른 잎이 돋아났다는 일화의 전설이 있는 그때 그 나무가 두 아람이 넘는 멋진 괴목나무로 우뚝선채 최고령의 모습으로 지금도 생명력을 과시하며 기나긴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운부암은 창건 이래 근세 한국의 조사스님들의 근본 수행처로 전해지고 있으며 당시에는 남한의 2대 중심선원을 선산의 도리사와 팔공산 운부암을 꼽았다 한다.
북은 마하연과 상원암을 쳐주었고 남은 도리사와 운부암을 주저없이 꼽았으며 하나씩만 꼽으라면 북 마하와 남 운부라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곳을 거쳐 내려간 조사스님들은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고 근세 도인으로 밝혀진 바는 경허, 해월, 만공대선사로부터 용성, 운봉, 동산대종장은 물론, 경봉, 향곡, 팔봉, 청담, 성철스님등 당대 선 지식이 총 출현한 터이며 무수한 고승 대덕들의 수행처로 그 규모와 위용을 떨쳤던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명맥이 한동안 끊겼다가 역사적인 운부암 중수불사의 원력을 가진 중화 법타스님이 은해사 주지로 부임하면서 48년간의 공백을 깨고 일타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1998년 안거부터 일타스님의 부촉을 받고 선원장인 금모 불산스님이 개원해 철철이 13명의 수선납자가 정진에 몰두하는 도량으로 거듭나고 있다. 법타스님은 미국 로스 엔젤레스에서 1990년대 포교활동을 한 적이 있고 2006년 입적한 LA 관음사 도안스님과 함께 ‘평불협’을 결성하여 북한 사리원에 국수공장을 만들어 국수를 재료를 지원하는 사업을 하였다. 또 최근까지는 동국대학교 정각원장으로 동국대학교 발전을 위해 노력한 스님이다.
현재 운부암에는 신라말에 혜철국사가 인도에서 해금강으로 들어오는 배에 모셔왔다는 전설이 깃든 보물 제514호인 청동보살좌상의 문화재급 성보가 소장된 곳이며 풍수가 워낙 좋고 지기가 출중해서 기도처소로 명성이 자자했으며 어느땐 무수한 고시생이 운집해 합격의 영광을 척척 안았다하여 판검사 도량으로도 유명한 곳이었다.
이를 뒷받침하듯 이곳 뒷주령의 주맥이 팔공산 비로봉 정상에서 약 25km 이상 용트림을 반복하는 형상으로 줄기차게 뻗어 내려와 운부암 법당 뒤편에 쏟아 부어놓은 듯 정맥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좌청룡 우백호는 아주 튼튼하되 유순하며 음양의 조화까지 갖추었고 좌우의 끊임없이 흐르는 계곡물이 합수하여 범종 모양의 연못에 머물다가 태극형으로 유유히 흐르고 있다. 더구나 앞안대는 청룡과 백호 등을 이어주는 일ㅇ명 지혜능선이 불교의 상징인 아기 코끼리 형국을 하고 너무 높아 답답하거나 부담을 주지 않을 만큼 적적히 잘 막아 출중한 지기를 빠짐없이 보존해주고 있어 누구나 수행하면 지기를 즉시 느낄 수 있는 아주 빼어난 수행도량이라 하겠다.
특기할만한 사항은 풍수지리에는 외풍과 내풍이 있는 바 외풍은 눈으로 보아도 잘된 도량임에 의심이 없고 내풍으로도 정확히 땅속의 지기가 부처님의 좌대에 한번 맺혔다가 법당앞 계단 2m 전방 마당에 다시 한번 지기가 뭉친 혈자리로서 그 자리에 지속적으로 앉는다면 속병이 다 낫는다는 정혈이 솟는 혈맥자리라 찬탄하는바 명당 조건을 거의 다 갖춘 길지라 할 수 있겠다.
혈자리 나무 밑둥에 앉아 있는 필자
운부암은 이름 그대로 구름위에 떠 있는 절이라 하여 극락세계 신선이 사는 돌양 등 이름 그대로 로 도솔천 내원궁을 상징할 정도로 빼어난 위치에 당당히 자리하고 있다.
근래 북마하, 남운부설은 경허스님 3대 제자 수월, 혜월, 만공선사 중 수월선사는 만주에서 천수다라니로 교화하셨고, 만공 스님은 북마하연에서, 해월스님은 남운부암에서 양대 산맥을 이루며 전국 선원 수좌를 지도했다고 해서 다시 한번 북만공 남해월의 설이 이어지며 북 마하, 남 운부설을 재 각인시켜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마하연은 남북 분단 전까지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선방이었다. 남북 분단전까지 한국 불교계는 건봉사, 유점사, 장안사, 신계사, 마하연 등 금강산 사찰의 스님들이 주도하였다.
전 은해사 주지 법타스님
운부암에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의
글씨가 두 점 있다. 원통전의 편액과 지금은 스님들의 승방으로 사용되는 건물의 ‘운부난야’이다. ‘癸亥仲冬(계해년, 즉 1864년 한겨울)’라고 적었으니
1863년(철종13년) 임술농민항쟁 때 안핵사로 경상도를 오르내리던 무렵에 쓴 듯하다. 원통전의
편액은 단아정중하고 운부난야는 부드럽고 넉넉하되 묵직한 무게가 담겨있는 글씨다.
난야는 산스크리트어로 ‘아란야’의 줄인
말로 원래의 뜻은 조용한 곳으로 수행하기 좋은 넓은 들녘이나 숲속을 말하며 선원으로 대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