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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 원문보기 글쓴이: 향기
자유 * 성령 * 사랑
문동학 목사님의 갈라디아서5장 강해설교입니다.
갈라디아서 5:1-15
1. 자유(1절)
2. 성령(2절-6절)
3. 사랑(7절-15절)
2003년 12월 22일 자 미국 시사 주간지 뉴스위크 Newsweek 지에 알리 Ali 라 불리는 이락 남자 이야기가 기사로 실렸습니다. 21세 총각인 그는 한 시간 반 동안 버스를 타고 바그다드로 갑니다. 그가 도착하자마자 가는 곳이 매음굴입니다. 그가 매음을 위한 지불한 비용은 1불 50전입니다. 알리는 기자에게 말합니다. “사담 후세인이 통치할 때는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이제 여자를 사는 것이 쉬워졌습니다. 그리고 값이 아주 싸졌습니다. 아주 좋아진 것이죠.” 후세인은 매춘과 알코홀과 마약 등 사회악을 철저하게 통제했습니다. 후세인 정권이 무너지면서 온갖 타락상들이 부글부글 끓어 올랐습니다. 매춘뿐만 아니고 포로노 영화까지도 공공연하게 상영되는데 하루 종일 관람료는 70 센트입니다. 새롭게 얻게 된 이러한 비도덕적인 일들을 언급하면서 알리는 이를 드러내고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이제 드디어 우리는 자유를 갖게 되었다.”1)
1945년 일제 식민지가 끝났을 때 대한민국 국민은 모두 “자유가 왔다!”고 외쳤습니다. 이것은 정치적 자유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을 자본주로부터 해방시킨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유물론적 자유입니다. 수출입관세가 완화 또는 철폐되었을 때, “자유 무역의 시대가 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경제적 자유입니다. 정치적 구호로부터 시작해서 온갖 홍보물 그리고 인터넷에 이르기까지 자유는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도덕적으로 가장 타락한 장사행위들까지도 자유라는 간판을 밖에 걸어 놓습니다. 그야말로 자유의 홍수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과 2장에서 자기의 사도권에 대해서 논증했고, 3장과 4장에서는 믿음을 통해서 의롭다 인정받는 진리에 대해서 변증했는데, 이제 5장과 6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해서 설명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진리는 그리스도인의 생활로 이어집니다.
‘칭의’ 또는 ‘의인’(justification) - ‘의롭다 인정받음’의 진리는, ‘성화’(sanctification)의 생활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은, ‘자유’, ‘자유’라는 한 마디로 표현됩니다.
Introduction 3
오늘은, 갈라디아서 5:1-15의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살펴 보겠습니다.
우리의 자유를 위하여,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유와 사랑의 관계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무엇인지 알기 위하여,
우리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I. 자유(1절)
첫째,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 그 자유를 살펴 보십시다.
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Explanation
구원은 해방입니다.
구원받기 전 우리는 ‘종’이었습니다.
죄의 종이었습니다.
죄를 범하면, 죄에게 예속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8:34)
죄는 하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한 번 떠나게 되면, 저절로 돌아오지 못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켜 주셔야, 우리가 자유해집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8:36)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자유’입니다.
고후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성부 하나님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눅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성령께서 하시는 일도, 자유케 하시는 일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서로 자유하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방식도 ‘자유’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형식과 내용은 ‘자유’입니다.
Application
성도 여러분, ‘자유’의 반대말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부자유’입니까? ‘예속’입니까? ‘포로’ 또는 ‘투옥’입니까?
일리가 있지만, 본질적으로 ‘자유’의 반대말은 ‘죽음’입니다.
생명은 자유이며, 자유가 생명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것은, 생명을 주신 것이고, 그래서 우리가 자유롭게 사는 것은, 사는 것처럼, 생명처럼, 산다는 것입니다.
율법적으로 사는 것은, 겉으로는 산 것같지만, 속으로는 죽음입니다.
Transition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자유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로 하여금 율법 안에 갇혀 살도록 유혹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은혜와 율법을 섞을 수 없지만, 은혜 위에 율법을 보충하라고 가르치는 자들입니다.
II. 성령(2-6절)
Explanation
2절-6절을 보면, 그들의 운명은 네 가지입니다.
3장과 4장에서 선포된 것인데, 여기에 다시 강조됩니다.
첫째, 2절을 보면,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율법주의자들에게는, 그리스도가 아무 유익이 없읍니다. 그리스도의 삶과 고난과 죽음이, 그들에게는 아무 유익이 없게 됩니다.
둘째, 3절을 보면,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의 한 두 가지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율법 전체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것 자체가 저주입니다. 곧 죽음입니다.
셋째, 4절을 보면,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율법주의자들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지게 됩니다.
넷째,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율법주의자들은, 의의 소망이 없습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Illustration
개 한 마리가 생선 한 토막을 물었습니다.
'야, 신난다!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혼 자 먹어야지.'
그래서, 개천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다리의 중간쯤을 가던 개는 문득 다리 밑을 내려다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요?
다리 밑에도 개 한 마리가 먹음직한 생선을 입에 물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가만히 보니, 물 속에 있는 개의 생선이 자기 생선보다 커 보였습니다.
'옳지, 저것을 빼앗아야겠다!'
개는 물 속에 있는 개를 향해서 큰 소리로 짖었습니다.
"멍! 머엉!"
그 바람에 개가 물고 있던 고기가 개울 속으로 '첨벙!'하고 떨어져 버렸습니다.
그러자 개울 속에 있는 개의 입에도 고기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4절, “은혜에서 떨어진 자”에서 사용된 단어, 헬라어 동사 ekpipto는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갖고 있는 것은 은혜입니다.
개울에 비친 모습은 율법입니다.
그것이 허상인데, 그것이 진짜처럼 보이고, 또 더 큰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은 사람이 율법이라는 허상을 보고 유혹을 받게 되면,
결국 은혜가 떨어져 나갑니다.
결국, 그 사람은 은혜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은혜와 율법은 함께 갈 수 없습니다.
오직 은혜만이 진리이고, 은혜만이 자유이고, 오직 은혜만이 생명입니다.
Application
그러면, 우리 - 그리스도께서 자유케하신 우리, 그래서, 은혜 안에서 자유롭게 사는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성령으로” - 성령에 의해서 through Spirit! - 이 말은, ‘육체로’ 의 반대입니다.
“믿음을 따라” - by faith - 이 말은, ‘행위로’의 반대입니다.
“의의 소망을 기다린다” - 우리가 옳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옳다 인정하신다. 이것은 종말론적으로 궁극적으로 완성되는 ‘구원’(salvation), 궁극적인 ‘성화’(ultimate sanctification), 궁극적인 ‘영화’(ultimate glorification) 입니다.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나,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아무 효력이 없습니다.
율법을 지킨다, 또는 지키지 않는다, 율법 그 자체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바로 그러한 신앙이 문제입니다.
율법은 아무 효과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효과가 있습니까?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Illustration
예를 들어서, 이런 율법이 있습니다.
도둑질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기타 등등....
이 율법이 우리를 변화시킵니까?
이 율법이 우리를 거룩하게 만듭니까?
이 율법이 우리를 살립니까?
이 율법을 위반했을 경우, 받을 형벌이 무서워서, 이 율법을 지키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성품은 변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오직,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물건을 도둑질할 수 없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죽일 수 없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사랑의 힘으로 삽니다. 율법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사랑으로 의롭게 됩니다. 의롭게 행동함으로써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함으로써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Application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의롭게 살려고 노력하시는 것, 그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 동기와 힘이 사랑일 때, 좋은 일입니다.
그 동기와 힘이, 율법적일 때, 그것은 ‘은혜로부터 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헌금을 하고, 봉사를 하시는 것, 참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 동기와 힘이 사랑일 때, 아름답습니다.
그 동기와 힘이 율법적이라면, 그것은 ‘은혜로부터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과 생각과 감정, 그리고 우리의 손과 발이,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는 모든 것,
교회생활 - 가정생활 - 직장생활 - 등 - 모든 것 - 이 모든 것의 힘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사랑’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윤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령께서 주시는 힘으로 사는 삶입니다.
이것은, 갈라디아서 5장 후반부에서 더욱더 상세히 설명됩니다.
Transition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자유’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자유’ 안에서 살 수 있게 하시는 이는,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으로 살게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우리가 사랑이 아니라, 율법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사람이 항상 있습니다.
III. 사랑 (7-15절)
그들은, 6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Explanation
첫째, 7절을 보면,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 그들은, 진리를 방해하는 사람입니다.
둘째, 8절을 보면, “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 - 그들의 가르침, 율법으로 살라는 가르침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닙니다.
셋째, 9절을 보면,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 그들은 교회를 오염시킵니다.
넷째, 10절을 보면,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 그들은 결국 심판을 받게 됩니다.
다섯째, 11절을 보면,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 그들은 은혜와 자유를 가르치는 사람들을 박해합니다.
그들에게는 십자가의 은혜가 걸림돌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를 살리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진리 - 율법주의자들에게는 이것이 걸림돌인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주의자들은 오직 십자가의 은혜를 가르치는 사람을 박해하고,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여섯째, 12절을 보면,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 율법주의자들은, 베어 버림을 당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직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으로 사는 우리는 어떠합니까?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Explanation
우리의 부르심은 여러 가지나, 그 부르심의 목적은 하나, 곧 자유입니다.
그런데,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을 수 있습니다.
바로, 육체적 자유입니다.
이 세상의 자유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인데,
세상적 자유는,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과의 관계"에서 시작됩니다.
세상적 자유는, “나 홀로” 있기 원하는 자유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개인적, 사회적, 심리적 자유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마십시오!
그 자유로 이기적으로 살지 마십시오.
그 자유로 쾌락을 추구하지 마십시오.
그 자유로 죄에게 중독되지 마십시오.
Application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종’의 형태를 입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죄에 대하여 자유를 누리고 있을 때, 우리는 서로와의 관계에서 ‘종’이 됩니다.
이것은 의존적 관계 - 종속관계가 아닙니다.
서로 자유하면서, 서로 종노릇하는 것 - 독립된 인격으로서, 서로 섬기는 것입니다.
성령이 계시는 곳은 자유하고, 자유한 사람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자유하지 못한 사랑 - 이것은 노예적 사랑, 사랑의 학대, 사랑의 남용입니다.
자유하지 못한 사랑 - 이것이 의존적 관계 - 종속적 관계입니다.
자유하지 못한 사랑 - co-dependence 입니다.
한편, 사랑없는 자유 - 이것은 방종입니다.
사랑없는 자유 - 이것은 파괴, 무질서, 폭력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 - inter-dependence
세상적 자유 - in-dependence 이것나 co-dependence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묶여있을 때 진정으로 자유해집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힘에 묶여 있을 때, 우리는 종이 되는 것입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 이 한 말씀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사랑이 율법의 완성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랑없는 정의는 율법주의입니다. Justice without love is legalism.
사랑없는 믿음은 이데올로기입니다. Faith without love is ideology.
사랑없는 희망은 자기중심성입니다. Hope without love is self-centeredness.
사랑없는 용서는 자기 비하입니다. Forgiveness without love is self-abasement.
사랑없는 용기는 무모함입니다. Fortitude without love is recklessness.
사랑없는 구제는 낭비입니다. Generosity without love is extravagance.
사랑없는 돌봄은 단순한 의무입니다. Care without love is mere duty.
사랑없는 충성은 노예의 삶입니다. Fidelity without love is servitude.
그리스도인의 모든 덕목 - 그것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 모든 말씀은 -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 어떤 말씀, 그 어떤 행위도, 그 어떤 덕목도, 사랑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그저 자기 의의 행동이거나, 자기 연민이거나, 자기 비하입니다.
Conclusion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직도, 율법에 대하여 미련을 갖고 계십니까?
율법은 우리의 마음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율법은 우리의 교회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단지 착각입니다.
오직 사랑으로 일하는 믿음 -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실 때, 가능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율법에서 자유할 때, 죄로부터 자유할 때, 시작됩니다.
여러분,
이제 자유를 누리십시오.
우리가 누리는 자유로, 성령의 사람이 되십시오.
우리가 누리는 자유로, 서로 사랑하십시다.
사랑하는 사람은, 참 자유한 사람입니다.
참 자유한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자유 * 성령 * 사랑 - 이 세 가지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이제, 우리가 세상에 복음을 전할 때,
우리가 세상에 참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육체와 성령의 싸움과 그 승리
갈라디아서 5:16-25
I. 육체와 성령의 싸움(16-18절)
II. 육체의 행위와 성령의 열매(19-23절)
III. 육체에 대한 성령의 승리(24-25)
얼마 전 저와 비슷한 연령의 어느 남자 집사님이 저에게 하소연했습니다. “나는 할아버지 때부터 기독교를 믿은 집안에서 자랐어요. 어릴 때부터 교회생활을 철저하고 성실하게 해왔습니다. 우리 집은 교회 가지 않으면 밥도 먹지 못하는 분위기이었으니 제가 달리 어쩔 수 없었습니다. 술과 담배를 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저는 다른 면에 있어서도 도덕적으로 바르게 살아 왔습니다. 한편 아내는 나와 결혼하면서부터 교회생활을 시작했죠. 저는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두고 있는데, 아이들에게도 내가 배운 것과 똑같이 가르쳐 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 회의가 생깁니다.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피곤한 마음만 들어요. 교회생활이 기쁘지가 않아요. 나 자신을 돌아 보니, 이제까지 내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살아왔는지 허탈해져요. 그래서 요즘 와서 하지 않던 술과 담배를 많이 하게 되었어요. 다른 생활도 마찬가지로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는데, 차마 부끄러워서 구체적으로는 말을 못하겠어요. 아내와의 관계도 갈수록 틈이 더 깊게 벌어지는 것 같아요. 아이들도 이제는 더 이상 아빠의 말을 듣지 않아요. 아이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은 지는 꽤 오래 됐어요. 이제 내 말에 권위가 없어졌어요. 호통치고 때려도 이제는 애들이 클만큼 커서 그렇게 하는 것이 소용이 없어요.
“목사님, 저는 이제 어떻게 하면 좋죠?”
당신은 이 집사님께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당신은 이 분께 대답할 것을 하나 얻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생활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서 계속되는 ‘나와 또 다른 나와의 싸움’의 현실을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그 싸움을 끝내기 위해서 우리가 이제까지 애써왔던 방법이 무엇이었는지 연구해 보고, 그리고 그 방법의 결과가 무엇인지 알아 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그 싸움을 궁극적으로 끝낼 수 있는 방법, 어떻게 하면 완전하게 승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함께 듣겠습니다.
1. 육체와 성령의 싸움(16-18절)
바울은 내 안에 있는 두 개의 나의 싸움, 달리 표현하면 나와 또 다른 나의 싸움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16절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절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절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바울은 성령과 육체의 갈등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합니다. 하지만 내 안에 있는 다른 나, 즉 옛모습으로서의 나는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게 합니다. 이렇게 내 안에 있는 나, 즉 성령과 싸우는 나를 바울은 ‘육체’(flesh) 라고 불렀습니다. 이 육체는 팔, 다리 등에 붙은 ‘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뜻과 서로 원수처럼 싸우는 ‘나’를 의미합니다.
성령에 인도되는 삶은 성령과 육체의 갈등이 계속되는 삶입니다. 성령에 인도되지 않는 삶은 갈등도 없습니다. 나를 이끌고 가는 힘이 오직 하나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인도되는 삶은 옛날 방법과 옛날 습관과 옛날 성품과 끊임없이 싸우는 삶입니다. 이 싸움은 쉽게 끝나지 않는 전쟁입니다. 수십년 계속되는 내란입니다.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17절) 바울 사도는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로마서 7장 19절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이러한 갈등과 분열의 삶, 그리고 싸움과 혼돈의 삶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율법’을 만들어 구원받으려 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등. 이러한 율법을 만들고 지키면 살인과 거짓과 도둑질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러한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내 안에 있는 두 개의 나’가 더 심하게 싸우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살인하지 않으려고 노력할수록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는 살인을 부추깁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는 거짓말을 하도록 유혹합니다. 다른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 안에 있으면서 율법으로 구원을 얻으려 하는 노력은 수포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8절의 말씀은 이렇게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율법은 우리를 구원할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율법은 우리를 변화시킬 수도 없습니다. 율법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의롭다 인정을 받는데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한 마디로 율법은 ‘칭의’ 또는 ‘의인’(Justification)에 효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뿐만 아니라 율법은 사람을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능력’도 없습니다. 한 마디로 율법은 그리스도인의 ‘성화’(Sanctification)에도 아무 효력이 없습니다. 즉 율법은 칭의와 성화에 아무 효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칭의(Justification)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성화(Sanctification)을 위해서도 율법과 은혜는 서로 조화될 수 없고, 서로 절충될 수 없고, 서로 혼합될 수 없고, 서로 혼용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께 갈 수도 없거니와,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 수도 없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받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받은 사람답게 살 수도 없는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율법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한 삶의 기준을 말해주면서, 동시에 우리가 이 율법을 지킬 수 없음을 폭로해 줍니다. 그래서 우리의 노력으로는 하나님께 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해 주는 ‘몽학선생’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구원해 주는 것이 아니고 율법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율법 스스로가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구원을 위해서 율법의 역할이 끝났다”는 진리를 인정하면서도 “성화를 위해서는 율법의 역할이 아직 남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성화를 위해서도 율법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율법이 삶의 안내자가 될 수도 없고, 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삶의 안내자는 성령께서 하시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내가 율법의 법칙들과 규칙들을 기준 삼아서 거룩하게 살기 위하여 자신을 다스리고 수양하면서,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나는 성령께서 나를 위하여 하시고자 하는 일을 질식시키고 소멸시키게 됩니다. 그 노력이 아무리 고상하게 표혈될지라도 말입니다. 성경공부, 기도, 새벽기도, 철야기도, 예배, 헌금, 전도, 봉사 등... 교회의 어떤 행동규정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해야 하고, 또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없어서는 안될 요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나! 내가 그러한 교회 활동에 얼마나 자주, 얼마나 열심히 참여하는가? - 이것이 나의 영성과 믿음의 척도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것들 - 성경공부, 기도, 예배, 전도, 헌금, 봉사 - 등을 영성의 척도로 사용한다면 우리는 율법주의의 올무에 빠지게 됩니다. 이러한 행동들은 외적으로, 가시적으로, 인간적으로 측량할 수 있다는 정도의 의미 밖에는 없습니다. 이러한 행동들이 내적으로, 영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방법이나 척도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직 율법을 삶의 기준 삼아 산다는 것은, 자기의(自己義)와 위선 안에서 육체에 의하여 사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성령을 억압합니다. 율법의 열매는 사망입니다. 율법의 열매는 위선입니다. 율법의 열매는 자기 기만과 자기 갈등입니다. 율법의 열매는 육체적 욕망과 교만입니다. 오직 성령만이 내적으로 진정한 의의 열매를 내 안에 생산해 냅니다. 거룩함은 오직 성령으로부터만 옵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행한다고 해서, 그러한 행동들이 거룩한 삶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거룩한 삶은 성령께서 당신 안에서 무엇을 행해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율법의 세트를 지키면서 거룩한 삶을 산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과 무지의 결과입니다. 율법이 아닌 성령이 당신을 거룩하게 만듭니다.
바울은 율법이 사람을 구원할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변화시킬 수도 없다는 것을 선언한 다음, 이것을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육체의 행위와 성령의 열매로 서로 대비시키면서 설명합니다.
육체의 행위와 성령의 열매(19-23절)
바울은 육체의 행위들을 이렇게 열거합니다.
19절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절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절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갈라디아에서는 육체의 행위와 율법의 행위는 같습니다. 따라서 19절부터 21절 까지의 육체의 일은 곧 율법의 일입니다. 달리 말하면 율법적으로 살려고 할 때 결과적으로 발생되는 현상들입니다. 즉, 율법적으로 살려고 할 때 이러한 육체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설명입니다.
여기에 열거된 육체의 일, 즉 율법적 생활의 열매는 네 분야로 나뉘어집니다. 즉, 성 윤리와 종교와 대인관계와 중독현상 - 이렇게 네 분야입니다.
1) 19절의 “음행, 더러운 것, 호색”은 성윤리에 관한 것입니다. 음행과 더러운 것, 호색을 금하라는 율법을 아무리 지키려고 노력해도 그것을 지킬 수 없습니다. 그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율법의 이러한 사슬에 더욱더 얽매이게 됩니다. 참 신기한 현상이죠? 성 윤리적으로 옳지 않은 일을 금지하는 율법을 지키는 것의 열매가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같은 성적 타락이라니요? 그러나 분명합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또 율법을 지켜야한다는 동기가 복과 저주의 공식이라면, 그래서 복을 받기 위하여 율법을 지키고, 화를 피하기 위하여 율법을 지킨다면, 결국은 그 율법의 저주의 사슬에 메이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우리의 성품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의 성품은 오히려 더 율법적이 됩니다. 더 육체적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적인 동기와 목적으로 성 윤리의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그 열매는 처음 동기와는 정반대로 오히려 성적 타락이라는 육체적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2) 20절의, “우상숭배, 주술”은 종교에 관한 것입니다. 우상숭배와 주술도 육체의 열매입니다. 율법으로 금한다고 해서 우상숭배와 주술을 버리지 못합니다. 금기와 율법으로는바른 신앙을 세울 수 없습니다. 한편, 만약 복과 화의 공식인 율법에 의해서 기독교를 믿는다면, 그것은 우상숭배와 주술과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으로 시작하면 율법의 열매를 맺을 수 밖에 없습니다. 율법적인 기독교는 우상숭배와 주술과 같은 육체적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3) 20절 뒤부분과 21절 앞에 나오는,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 짓는 것, 분열함과 이단, 투기" - 이렇게 여덟 가지는 대인관계의 장애를 말합니다. 율법적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대인관계의 장애의 증후들이 나타납니다. 율법적으로 가르치고, 율법적으로 믿고, 율법적으로 사는 사람은 결과적으로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 등등의 육체적 열매를 맺게 됩니다. 자연스럽습니다. 율법적인 사고와 감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비판하기 일수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의와 공로를 자랑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적인 사람들이 육체적인 열매를 맺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듯이, 이러한 육적인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율법적으로 산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4) 술취함, 방탕함, 그와 같은 것들 - 이러한 것들은, 중독현상에 관한 것입니다. 술, 도박, 마약 등 - 그 어떤 물질이나 관계에 대한 중독현상들은 율법적 생활의 결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물론 모든 것은 아니지만... 거식증이나 포식증같은 중독현상이나, 다른 중독 현상이 ‘사랑 결핍증’이라는 보고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사랑 결핍증으로 발발한 중독 현상들은 사랑을 충분히 부어 주어아 치료와 회복이 되는 것이지, 율법적 훈련, 또는 종교적 방법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 마디로, 성적 타락, 종교적 타락, 대인관계의 장애, 그리고 중독현상은 성령이 아닌 육체의 힘으로, 은혜의 힘이 아닌 율법의 힘으로 살아갈 때 생기는 현상과 열매인 것입니다.
육체의 일, 즉 율법의 행위가 이렇다면 성령의 일, 즉 성령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22절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절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2절과 23절에 있는 ‘성령의 열매’는 세 개의 삼화음(three triads)으로 설명됩니다. 첫째 삼화음, 즉 사랑과 기쁨과 화평의 화음은 하나님을 향한 삼화음입니다(Godward triad). 둘째 삼화음, 즉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의 화음은 이웃을 향한 삼화음입니다(Humanward triad). 오래참는 것은 성숙한 성품의 꽃입니다. 양선은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을 말합니다. 그리고 셋째 삼화음, 즉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화음은 자신을 향한 삼화음입니다(Selfward triad). 충성은 성실을 말하고, 온유는 주님께서 보여주신 겸허한 부드러움입니다. 충성과 온유는 절제의 양면입니다.
이러한 열매는 성령의 인도를 받고 사는 그리스도인의 자연스러운 산물입니다.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기능은 제갈 물리고, 제한하고, 통제하고, 억제하는 것인데, 성령에 이끌려 사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율법이 필요없기 때문입니다.
십여년 전에 초등학생의 한 집단이 ‘금연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 교육은 8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결과가 어떠했을까요? 썩 만족스럽지가 않았습니다. 금연 교육을 8년 동안 받은 학생 중 25.4 퍼센트가 현재 상습적으로 흡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컨트롤 그룹(Control Group), 즉, 그 교육에 참여하지 않은 학생 중에서 상습적으로 흡연하고 있는 비율은 25.7 퍼센트입니다. 결과론적으로 8년 간의 철저한 금연교육은 별로 효과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훈련과 교육이 우리 사회 문제의 해결책이라 생각하지만, 그것이 어떤 경우에는 통하지만 대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사회적, 또는 개인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새로운 아이디어나 새로운 테크닉을 도입하려고 하지만, 그것들은 별로 통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새로운 능력을 받아들여야 우리의 옛 성품이 변하고, 또 안팎에서 몰려 오는 유혹들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새로운 능력은 율법으로부터 오지 않습니다. 새로운 능력은 오직 성령으로부터 옵니다.
사랑하는 친구여,
당신이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받아들였을 때, 당신은 새롭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당신은 나의 의로운 생활에 의해서가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 인정해 주신다는 진리를 믿었습니다.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아들과 딸로서 담대하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더욱 성장하고 성숙하고 싶을 때, 즉, 거룩해지고 싶을 때, 성화를 이루고 싶을 때, 그 때, 율법적 방법과 율법적 사고를 도입한다면, 그것은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는 행위입니다.
당신은 이 진리를 당신이 생활하는 모든 곳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첫째, 가정에서 이 진리를 적용할 수 있습니다. 부부 관계와 자녀교육, 그리고 부모 사랑에 있어, 무엇을 하고 가르치든지, 또 무엇을 주고 받든지, 그것이 율법적이라면, 즉 그 동기와 행동이 율법적이라면 거기에는 육체의 결과가 일어납니다.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 짓는 것, 분열함과 이단, 투기 등등의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오직 성령의 힘과 은혜로 해야 합니다. 은혜적 동기와 행동으로 하고, 무엇을 하든지 자유와 복음 안에서 해야, 거기에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둘째, 교회에서 이 진리를 적용할 수 있습니다. 주일예배, 기도, 성경공부, 헌금, 봉사, 기타 등등. 무엇을 하든지, 무엇을 가르치든지, 무슨 말을 하든지, 그것이 율법적이면, 즉 그 동기가 율법적인 생각과 행동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헌신적일지라도, 그것이 아무리 열정적일지라도, 그것이 아무리 큰 정성일지라도, 그것은 육체의 결과만 낳게 됩니다. 기쁨도 없고 화평도 없습니다. 여기에 참 거룩이 없습니다. 오직 성령의 힘으로 해야, 자유와 은혜 안에서 해야,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셋째, 사회와 직장에서 이 진리를 적용할 수 있습니다. 타율적인 사회는 결국 무질서와 혼란을 낳고 맙니다. 자유와 그 책임을 알고, 그 자유와 책임의 개인윤리와 사회윤리를 실천하는 사회가 성숙한 사회입니다. 성숙한 사회가 평화의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는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등, 이 사회의 모든 영역과 분야에서 자유와 책임을 더 많이 강조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율법 논쟁이 격렬했던 조선시대 사색당파를 돌이켜 볼까요? 사색당파의 논쟁도 율법적 문화의 한 현상입니다. 율법적 문화의 결과는 분쟁과 분열로 인한 사회적 몰락입니다. 하인이나 애완동물을 길들이고 훈련시키는 데에는 율법이 효과가 있을 수 있지만 자유인을 성숙하게 변화시키는데에는 율법이 효과가 없습니다. 오직, 자유와 사랑, 그리고 자유와 책임이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이제까지 우리 안에 육체와 성령의 갈등, 율법과 은혜의 싸움이 있는 것을 알아 보았습니다. 그리고 더 구체적으로 육체의 일들 즉 율법의 열매들을 살펴 보았고, 그 후 성령의 열매를 살펴 보았습니다. 이제 남아있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육체의 일들과 성령의 일들 사이의 싸움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하면, “우리는 궁극적으로 어떻게 승리할 수 있는가?” 입니다.
육체에 대한 성령의 승리(24-25절)
24절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절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율법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 입니다. 이 말씀은 ”율법의 종교가 끝났다!“ 는 선언입니다. 율법의 저주가 끝났습니다! 율법의 사슬이 끝어졌습니다! “육체의 정욕과 탐심 - 즉 자기의(self-righteousness)와 교만이 십자가에 못박혔다!” 는 선언입니다. 이제는 자유와 사랑의 길이 열렸습니다! 이제는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받는 길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제는 자유와 성령과 사랑의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이 완전한 승리요 궁극적인 승리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사랑하는 친구여, 우리는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살았고, 또 현재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지 말고, 성령의 인도에 따라 성령의 힘에 의해서 사십시오!
존 번연(John Bunyan)의 천로역정(Piligrim's Progress)에서 순례자가 여행을 계속하다가 천성의 도성에 들어가게 됩니다. 순례자는 거기서 ‘해석자의 집’(Interpreter's House)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 집의 현관이 온통 다 먼지로 뒤덮여 있습니다. 그래서 순례자는 빗자루를 들고 쓸기 시작합니다. 그랬더니 순례자는 물론이고 그 방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기침을 하기 시작합니다. 빗자루질 할 때마다 먼지가 숨이 막힐 정도로 엄청나게 날아오르기 때문입니다. 순례자가 비질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먼지는 더 많이 날아오릅니다. 이제 해석자가 하인에게 명령합니다. “물을 가져와서 그 물로 방을 씻으라!” 하인이 물을 가져와 방을 씻으니, 먼지가 금방 씻겨져 내려갑니다. 방이 깨끗해 졌습니다. 해석자가 순례자에게 이렇게 설명합니다. “집의 현관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마음이고 먼지는 죄이다. 빗자루를 들고 있는 사람은 율법이고 물로 씻는 하인은 복음이다.“ “율법은 죄를 날아 오르게 만들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 죄를 씻어 없애 준다.”
사랑하는 성도여,
얼마전 저를 찾아와서 하소연했던 그 남자 집사님에게 이제 무엇이라 말씀하겠습니까? 제가 그 집사님께 한 말을 지금 당신에게 반복합니다. “이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십시오.”
첫째, 당신이 구원받은 것은 조상들의 믿음이나 선한 생활때문도 아니고, 당신 자신의 선한 생활이나 의로운 생활때문도 아닌 것을 확실하게 믿으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을 부르신 것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은혜입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와 대화할 때에도, 그가 당신의아내와 남편이든지, 자녀들이든지, 이웃 또는 성도이든지, 그들에게 당신 자신의 의로움이나, 당신 자신의 의로운 행위에 대하여 생각하지도 말고 말하지도 마십시오. 단지 하나님의 사랑만 생각하고 말씀하십시오.
둘째,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교회생활 - 예배, 성경공부, 기도, 헌신, 봉사 등 - 그것들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좋은 것입니다. 그러니 계속 하십시오. 하지만 그 교회 생활이 당신의 믿음이나 영성을 증명하지 않음을 명심하십시오. 교회 생활은 믿음과 영성의 외적이며 가시적인 척도일 뿐입니다. 더 본질적인 척도는 당신 마음과 생활 속에 성령의 열매가 얼마나 맛있게, 얼마나 많이 열리는가? 입니다. 당신의 교회생활과 가정생활, 그리고 이웃들과 성도들과의 관계를 율법적 관계로부터 은혜적 관계로 전환시키십시오. 성령의 열매는 ‘관계’라는 나무에 맺히는 열매인 것을 잊지 마십시오.
셋째, 율법적으로 살면서, 즉 율법을 지키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겠다거나 복을 받겠다는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율법을 지키지 않았을 때, 또는 어떤 교회생활의 규칙을 어겼을 때, 어떠한 벌, 어떠한 화, 어떠한 사고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염려와 두려움에서 완전히 자유하십시오.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율법의 열매 즉 육체의 열매가 맺힙니다. 율법으로, 즉 율법을 지킴으로써 당신이 거룩하게 변화될 수 없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은 이제 성령에 따라 사십시다. 성령님을 더 많이 사모하고, 성령님과 더 친하게 지내시고, 성령님의 능력을 더 많이 받고, 성령님의 안내를 계속 더 많이 받으십시오. 이것이 성령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성령에 따라 살면 성령의 열매는 자연스럽게 맺힙니다. 성령의 햇빛과 성령의 물과 성령의 에너지가 공급되면, 성령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것이 율법과 육체를 물리치는 그리스도인의 완전한 승리입니다.
당신의 성품과 생활 가운데 성령의 열매가 많이 열리기를, 성령의 큰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기를 축복합니다.
화살쏘기와 그물깁기
갈5:26-6:1
I. 율법적 윤리(5:26)
II. 윤혜적 윤리(6:1)
처음 시작할 때 갈라디아서는 종교개혁의 마그나카르타이며, 자유의 대헌장인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이제까지 은혜와 복음의 진리에 관해서, 그리고 그 진리 안에서 성령의 인도로 사는 삶에 관해서 말했습니다. 이제부터는 그 삶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의 주제는 “율법적으로 사는 것과 은혜로 사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 입니다. 이제 갈라디아서 5장 26절과 6장 1절 두 절의 말씀과 함께 율법적 삶과 은혜적 삶의 단면을 함께 보겠습니다.
율법적 윤리(5:26)
26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이 구절을 헬라어 문장의 구조를 살피면서 헬라어 단어 순서대로 직역하면, “우리가 헛된 영광을 구하지 맙시다. 서로 노엽게 하면서 그리고 서로 투기하지 않으면서.” 입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포인트가 몇 개 있습니다.
첫째, 이 구절은 “우리가 .... 구하지 맙시다!”라고 권고하는 문장이라는 점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포용하면서 자신을 갈라디아 교인들과 일치시키면서 ‘우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렇게 하지 마십시오!”라고 명령하지 않고, “우리가 이렇게 하지 맙시다!”고 권고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바울이 이렇게 권고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냐하면, “너희들은 .... 이렇게 하지 말라!”는 금지명령으로 사람의 마음과 습관이 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마음과 포용하는 마음과 염려하는 마음으로 ‘권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헛된 영광을 구하지 맙시다”에서 사용된 표현 “구하지 맙시다”는 “우리가 이렇게 되지 맙시다”(Let's not become!)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우리가 이렇지 맙시다”(Let's not be!), 또는 “우리가 이것을 하지 맙시다”(Let's not do!)가 아닌 것이지요. 이렇게 표현한 이유는, “우리가 앞으로 그렇게 되지 맙시다!” 또는 “우리가 앞으로 그렇게 변질되지 맙시다!” 라는 의미를 전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현재는 복음과 은혜를 알고, 그래서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미래에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습니다. 복음으로 시작했다가 율법으로 다시 돌아가기 쉽고,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다시 육체로 돌아가기 쉬운 것처럼, 성령을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걸리기 쉬운 올무가 있으니, 바로 이 ‘헛된 영광’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둘째 포인트는 “헛된 영광”이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참 재미있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로 ‘케노독소스’(κενόδοξοs) 인데, ‘헛된’ 또는 ‘텅빈’을 뜻하는 접두어 ‘케노’(κενο) 와 ‘영광’을 뜻하는 단어 ‘독사’(dóξα)가 결합된 형태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의 함축의미는 ‘속이다’, ‘자랑하다’, ‘큰 소리로 떠든다’ 입니다. 이 단어의 형태와 의미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 단어는 ‘속이는 것’, ‘자랑하는 것’, ‘큰 소리로 떠벌리는 것’ 등이 모두 거짓 영광을 구하는 것, 가짜 멋, 과장된 체면과 헛된 위신을 추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26절의 ‘헛된 영광을 구하지 맙시다’의 의미를 종합적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속이는 자가 되지 맙시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자랑하는 사람들이 되지 맙시다. 이것은 모두 우리 스스로를 미화시키고, 우리 스스로를 높이고, 우리 스스로를 과장하는 행위입니다. 우리 스스로 잘난척하는 사람들로 변하지 맙시다. 우리 이렇게 변질되지 맙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셋째 포인트는 “서로 노엽게 하면서 그리고 서로 투기하지 않으면서” 입니다. 이것은 앞 문장 “우리가 스스로 헛된 영광을 구하지 맙시다” 에 대한 분사구입니다. 즉 헛된 영광을 구하는 행위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 하나는 “서로 노엽게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서로 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번역하면 알기 쉽겠지요. “우리가 서로 노엽게 하면서 그리고 서로 투기하면서 스스로 헛된 영광을 구하지 맙시다!”
“노엽게 한다”는 동사는 ‘앞’을 뜻하는 전치사 ‘프로’(προ)와 ‘부른다’를 뜻하는 동사 ‘칼레오'(καλέω) 가 결합된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의미는 ‘앞에서 누구를 크게 부른다’, ‘누구를 앞으로 나오라고 부른다’ 입니다. 조교 또는 교관이 뒤에 앉아 있는 병사에게 “자네, 이 앞으로 나와!”라고 말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강제적으로 불러낸다’, ‘강요한다’, ‘도전한다’, ‘자극한다’ 를 뜻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여러 면에서 ‘강한’ 사람은 다른 약한 사람을 ‘자극하거나,’ ‘무시하거나’, ‘강요하면서’ 화나게 만들기 쉽습니다. “너는 왜? 이런 것도 못하니?” “너는 이렇게 쉬운 것 이렇게 기본적인 것을 왜 몰라? 너는 이것도 못해?” 이런 식이지요. 그래서 “서로 노엽게 하지 말자!” 는 스스로를 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하는 권고입니다.
한편 ‘서로 투기한다’는 ‘부러워한다’, ‘시기한다’를 뜻하는 동사입니다. 이것은 ‘스스로를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걸리기 쉬운 올무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강하고, 그래서 내가 그보다 약하다고 생각할 때, 그 사람을 부러워하고, 시기하고, 투기하고, 모함하고, 공격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행위는 율법적 신앙, 율법적 사고, 율법적 윤리의 대표적인 단면입니다. 율법적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사람들은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옳거나 강하다고 생각하게 되면 다른 사람을 무시하거나, 비판하거나, 강요하거나, 억압하게 됩니다. 한편 율법적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이 사람들이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약하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을 부러워하고, 시기하고, 그래서, 투기하고, 그래서, 더 비판하고, 그래서 모함하고, 그래서 공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헛된 영광을 구하는 자세’입니다. 스스로를 ‘자랑하고’, 스스로를 ‘떠벌리고’, 그래서 스스로 탐욕이라는 우물에 빠져 있는 현상입니다.
2003년 5월 미국 언론계는 기사의 표절과 날조 때문에 큰 소용돌이가 일어났었습니다. 2003년 5월 3일 자 뉴욕 타임즈 지(New York Times)는 경쟁지 뉴 리퍼블릭 지(New Republic) 신문사에서 5년전 해고된 스티픈 글라스(Stephen Glass)에 대한 칼럼을 기고했습니다. 그가 27개의 기사를 표절하고 날조했다는 비판입니다. 그런데 바로 한 주 후에 바로 자기 신문사의 유망한 기자 제이슨 블레어(Jayson Blair) 가 스티픈 글라스 못지 않게 기사를 표절하고 날조했다는 사실이 폭로되었던 것입니다.
스티픈 글라스에 대한 영화가 “깨어진 유리”(Shattered Glass) 라는 제목으로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또 글라스는 자기 이야기를 소설로 출판했는데 거기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는 기사 표절과 기사날조로 많은 사람들을 비난하고 공격하기를 즐겨하는 이유를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어느날 갑자기 보니 성공한 사람들이 내 주위에 너무 많았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사람들, 존경받는 사람들, 이들은 내가 그렇게 갈망했던 것들을 실제적으로 이룬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다시 끌어내려야 했다. 내가 있는 자리로 끌어내려 그들과 내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이것은 우리가 서로 노엽게 하고 서로 투기하면서 스스로 헛된 영광을 구할 때 이르게 되는 종말입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사랑하는 친구여,
내가 강하다고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을 얏보거나 강요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을 비판하거나 비난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내가 강하고 옳다는 것을 자랑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나를 칭찬해주기를 원하는 욕망때문입니다. 여기에는 나의 의, 즉 자기의(self-righteousness)가 숨어있는 것입니다. 내가 왜? 다른 사람을 비판합니까? 다른 사람들이 나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 주기를 원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내가 왜? 다른 사람을 정죄합니까? 다른 사람이 나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 주기를 원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룹으로 모여서 함께 누군가 그리고 무엇인가를 집단적으로 비판하고, 정죄하고, 공격하는 행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는 모두 ‘자기-의’라는 교만과 탐욕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만약 당신의 믿음이 강하다고 생각한다면 약한 사람을 무시하거나 정죄하거나 그래서 무엇이든지 강요하지 마십시오. 무엇이든지! 그들의 생활, 윤리, 습관, 취미 - 무엇이든지, 그들에게 무엇을 강요하거나 자극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당신이 헛된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또 당신의 믿음이 약하다고 생각하면, 강한 사람을 부러워하거나 시기하지 마십시오. 나보다 강한 사람, 나보다 큰 사람, 나보다 의로운 사람을 부러워하거나 시기하지 마십시오. 그것도 당신이 헛된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5장 26절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이것이 율법적 사고, 율법적 감정, 율법적 언어생활입니다. 한 마디로 이것을 율법적 윤리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적 윤리와 대조되는 은혜적 윤리는 무엇입니까?
은혜적 윤리(6:1)
1절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먼저 우리는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을 “형제들아!” 고 부르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제까지 훈계하고, 경고하고, 가르치고, 권면했던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을 “형제와 자매”로 부릅니다. 그들을 형제와 자매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를 형제와 자매로 여기는 것이 은혜적 윤리의 출발점입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를 모시고 있는 형제 자매들입니다. 그러니 하늘나라에 들어가면 모두가 다 형제자매인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는 계급과 지위를 피할 수 없고, 소유의 유무를 없앨 수 없습니다. 나이의 위아래가 있고, 직책의 상하가 있어, 그것을 무시하면서는 살 수 없는 현실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이후에 일어난 결과입니다. 즉 죄의 결과로 계층과 소외가 발생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후 가장 먼저 한 일이 옷을 만들어 입은 것입니다. 이 옷이 상징하는 것은 바로 계급입니다. 계급은 죄의 결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십자가때문에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자매가 되었습니다. 나 스스로는 나를 구원할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가운데 계급과 지위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형제자매입니다. 이것이 은혜로 사는 삶의 기초이며 출발입니다.
우리 주님의교회 성도들도 서로가 서로를 형제자매로 부르면서 또 그렇게 생각하고 또 그렇게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저를 ‘문동학 목사님’, 또는 ‘당회장 목사님’ 또는 ‘담임목사님’ 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사실 ‘동학 형제’, 또는 그냥 ‘형제’라고 불러 주기를 기대합니다.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
‘만일’(if)이라는 표현은 사람이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러나 범죄 사실이 드러날 때는 여기에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범죄사실이 알려졌을 때, 그 때가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형제자매 관계’에 있는지를 시험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때가 우리가 ‘영적인지? 또는 육적인지?’ 시험을 치루는 시간입니다. 바로 그 때가 우리가 ‘율법적인지? 또는 은혜적인지?’ 시험을 보는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 때는 어떻게 할까요? 다른 사람의 약점 또는 비리, 실수 또는 범죄사실이 드러나거나 포착되었을 때, 바로 그 때가 공격의 기회가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 때 누군가가 옆에 있다면 우리는 흥분하면서 비난하고 열을 내면서 공격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큰 소리를 내면 낼수록 내가 더 의롭게 보이는 것같고, 내가 더 흥분하면서 분노하면 할수록 내가 더 경건하게 보이는 것같지 않으십니까? 이것이 우리의 육체적이며 율법적인 습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아라!”
여기서 “바로 잡다”는 동사를 잘 이해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이 단어는 ‘카타르티조'(καταρτίζω)인데, 이 단어는 “회복시킨다”,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한다”를 뜻합니다. 마태복음 4장21절과 마가복음 1장19절에서 이 단어는 “그물을 손질하다, 찢어진 그물을 깁다”로 번역되었는데, 이 단어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번역입니다. ‘고친다’, ‘회복시킨다’, ‘훈계한다’, ‘경고한다’, ‘교정한다’ 등 이와 관련된 단어들이 아주 많이 있는데, 바울이 바로 이 단어 ‘카타르티조’를 사용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어떤 사람이 실수하거나 실족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그물이 튿어진 것으로 이해하라는 의도때문이지 않겠습니까? 그 사람의 그물이 찢어진 것이지요. 사람은 수 많은 그물들로 만들어졌습니다. 신경의 그물, 혈관의 그물, 근육의 그물, 기의 그물, 뼈의 그물, 마음의 그물 등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실수하거나, 범죄를 했다면, 그 사람의 많은 그물들 중 하나가 찢어진 것입니다. 그 사람이 지탱할 수 있는 무게보다 무거운 무게가 그 사람을 눌렀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버티려고 애쓰다가 견디지 못해서 그물이 찢어진 것입니다. 육체의 질병과 감정의 실수, 그리고 윤리적 실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의 그물이 찢어진 것입니다. 그 사람의 그물이 무게를 버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관점이 참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의 실수와 범죄를 ‘악한’ 행위로 보는 관점과 ‘약한’ 행위로 보는 관점의 차이는 아주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이 악하기 때문에 그 죄를 범했다고 정죄하는 행동의 이면에는, 나는 의롭기 때문에 그러한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자기 의가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약’하기 때문에, 즉 그 사람의 그물망이 약하기 때문에 튿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그 사람보다 그물이 ‘강한’ 것은 ‘주님의 은혜’다고 고백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도 조금만 약했다면 그렇게 찢어질 수 밖에 없는데, 내가 찢어지지 않은 것은 내가 의롭기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를 붙들어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은혜!’다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찢어진 그물을 기울 때는 ‘온유한 심령’으로 해야 합니다. 부드러운 마음으로! 온유한 심정으로! 신령한 친구여, 영적인 성도여! 다른 사람의 찢어진 그물을 치료할 때에는 ‘온유한 마음’으로 하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저는 어릴 때 바닷가에서 살았습니다. 어머니께서 바다 속에 들어가시어 미역 등 해조류 등을 따 올리시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서울에 이사 와서 우리 가족은 광나루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강에서 고기잡이를 마친 이들이 ‘그물 깁는 것’을 참 많이 보았습니다. 그물이 수중식물에 엉겨 있는 것, 심지어 그물에 군화나 깡통이 걸려 있는 것 등을 재미 삼아 구경했습니다. 그 찢어진 그물을 정리하면서 한올한올 손질하고 깁는 것은 참으로 힘들고 때로는 짜증나는 일입니다. 때로는 제가 그물 손질하는 것을 거들어 본적도 있었는데, 거들다가 그물을 더 엉키게 한 일도 참 많았죠. 그물 깁는 일이란 서두르면 실패하는 법입니다. 그물을 깁는데 망치, 도끼, 낫 등을 사용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대나무로 만든 바늘로 정성스럽고 부르럽게 인내를 갖고 해야합니다. 강바람과 바닷바람, 그리고 햇볕에 그을리면서 손이 부르틀 정도로 해야합니다. 그물 깁기는 “온유한 심령으로!” 해야 합니다.
이제 그 다음 구절 “너 자신을 살펴 보아”에 주목하세요. 이것은 분사구입니다. 이 분사구를 고려해서 이 문장을 번역하면, “너 자신을 살펴 보면서 그물을 기워라!” 입니다.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이 말은 “너도 시험받지 않도록 네 자신을 살펴보라!” 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의 실수와 범죄를 나에게 드러나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가 그 사람보다 의롭기 때문이 아닙니다. 내가 그 사람을 정죄할 권리와 책임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내가 그 사람보다 선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보고 나를 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한 자 즉 범죄한 사실이 드러난 사람, 그 사람은 나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그 거울에 내가 있습니다. 나도 그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나도 그 죄를 똑같이 범할 수 있습니다. 나와 그 사람은 다르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다른 사람의 실수를 보게 하신 것은 그 사람에게서 나를 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갈 수도 없고, 우리는 스스로 의롭게 살 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값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의 위한 희생양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또 우리는 스스로 의로와질 수 없고, 스스로 선할 수 없고, 스스로 강해질 수도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사는 것, 내가 이렇게 예배하는 것, 내가 이렇게 찬양하는 것, 내가 이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쓰는 것, 이 모든 것들은 내가 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은혜, 오직 은혜, 오직 은혜! 입니다.
사랑하는 친구여, 우리는 은혜로 사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은 오직 은혜로 살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의 약점을 발견했을 때 그 사람을 정죄하고 비판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화살을 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화살을 쏘든지, 여러 사람이 한 사람에게 쏘든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행동은 화살이 그 사람의 심장에 깊이 박히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화살이 꽃혀 피가 흘려 내리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부르짖는 유대 제사장들이 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로마병정이 하는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지금도 누군가를 향하여 수많은 화살을 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사람을 향하는 쏘는 그 화살은 모두 주님께서 대신 받으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가 쏘는 화살을 계속해서 맞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모든 화살을 다 받으시면서 우리의 찢어진 그물을 기워주십니다. 주님께서 피를 흘리시면서 찢어진 우리를 치료해 주십니다. 주님께서 살을 찢으시면서 깨어진 우리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여러분들은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의 찢어진 그물을 기워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