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22일은 시제날이다. 꼭두새벽부터 목욕재계를 하고 길을 나선다. 오직 조상을
뵈려가는 길이며, 한 치의 착오 없이 제祭를 지내는데 목적이 있다. 뜻깊은 날이다. 11대, 10
대, 9대조代祖 조상님을 진주로 모셔 제사를 지낸다는 것을 생각하면 행복하지만, 역병 때문에
조심스럽다. 빗살이 돋는 아침은 한결 차분하고 착 깔아진 환경 또한 깊은 내면의 세계를 꿰
뚫고 있다. 예나 제나 추계촌 풍정風情은 그대로였다. 나무와 풀들도 겨울의 길목에서 동절기
를 준비하는 가운데 은근히 울려 퍼지는 솔바람이 피부에 와 닿는다.
천헌재. 나지막이 읊조려본다. 언제나 불러도 싫지 않는 이름이다. 연중年中한두 번 찾는
재각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오늘따라 잔뜩 긴장하고 있다. 올 초부터 이어져오는 코로
나의 창궐은 삶을 피폐하게 하고, 제례문화마저 흔드는 혼돈의 연속이다. 그러나 제사는 지내
야하기에 먼 길을 마다않고 찾아오는 혈족들이 하나 둘 모이고 있다. 30년 된 재각은 한 대代
가 지나가면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으며, 담 위에 놓인 기와조각은 파랗게 이끼가 쌓여있고,
솟을대문의 위용은 보면 볼수록 애착이 간다. 선대先代어른들이 노심초사하며 어렵게 힘들게
건립하였기에 더욱 붙잡고 싶다.
충청도 추부종중 묘제墓祭가 코로나 때문에 포기한다는 전언은 야속하지만, 허나 시절 따라
세월 따라 움직이는 종중을 탓하기보다는, 사람들은 새로운 변화보다 익숙한 불행과 불편을
선호할 때가 많으며, 이를 호. 불호까지 애기할 필요는 없다. 다만 우리의 길만 가면된다. 그
렇다면 진주문중에서 선대 조상의 모심은 당연하고, 적어도 효孝를 행함에는 부족함은 없다.
천헌재 마루에는 마스크와 손세정제가 놓여있고 방명록이 준비되어 있다. 찾아오는 일족들은
마스크를 쓰고 내방한다. 얼마나 엄중한지 여실히 보여준다. 허나 백신이 개발되었다지만 우
리에게 언제 접종될지 하세월何歲月이다. 진주문중은 현재까지 90년 이상 된 기록들이 세세히
적어 보관되고 있으며, 전쟁발발 70년이 지난 6.25전쟁에도 시제는 행해졌다. ‘제 나이는 여든
두 살입니다’의 기고문 중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의 상황은 총만 들지 않았을 뿐이지 안타갑
기 그지없는 현실이다.
향을 사른다. 제사의 향기는 멀고 먼 저승까지 닿아 혼백을 불러 온다. 향이란 그저 단순히
어떤 좋은 냄새를 이르는 것이 아니라, 갈 수 없는 먼 곳에 보이지 않는 조상을 간절히 부르
는 소리다. 또한 향기는 부르는 조상이 이리로 오는 대답의 길이이기도하다. 그리고 한낱 종이
에 불과한 지방도 신위대臺에 오르면 조상신이 깃들기 마련이다. 선친께선 제사를 지낼 때 살
아계신다고 생각하면 허투루 지낼 수 없다고 했다.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은 순간이지만 죽어
서 영원하다면, 천헌재에서 아들, 손자, 할아버지를 함께 모셔 제사를 올리는 것은 한편 행복
하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은 자손子孫을 통해 영생할 수 있다는 소박한 신앙심은 절실한 감정으
로 고이기도 하며, 지금 우리들의 어떤 모습, 어떤 생각을 기록으로 남기며, 때론 행복해하고
때론 아쉬움을 걱정하였지만 무엇보다 글 쓰는 순간만이라도 외롭지 않고 한마음 되어 움직이
는 일족들이 든든하게 느끼며, 해마다 시제 날이 오면 힘들지만 기쁜 마음으로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