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시생이었던 신재하(김민성)는 불우한 환경 때문에 더욱더 열심히 살았지만 돌아오는 건 언제나 실패 뿐이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교통 사고까지 벌어졌는데, 사장은 책임을 회피하려 거짓 진술을 하고 그렇게 교도소 신세를 지게 된 민성, 가석방 심사에서도 한 점 차로 떨어진다. 그는 자해 행위를 하여서 의무실에 실려온다. 교도소장에게 신임받는 김재혁은 의무실에서 하룻밤 자고 싶다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청하여서 신재하 옆에 눕는다.
신재하는 자신이 감빵생활을 하게 된 자초지종을 이야기한다.
신재하:
“근데 형, 저도 진짜 열심히 살았거든요. 남들이 하는 거, 나 다하고 싶은 거, 그거 다 참고 저 공부만 하면서 진짜 열심히 살았어요. 진짜 미친듯이 일만 했는데 왜 이래요?”
김재혁:
“더 노력했었어야지. 네가 더 최선을 했었어야지. 새벽부터 일하고 아르바이트도 5개씩 했었어야지. 밥도 먹지 말고 밥은 왜먹어. 잠도 5시간 자지 말고 3시간만 잤었어야지. 밥도 안 먹고 잠도 안자고 1년 365일 일만하고 공부만 했었어야지.”
(사이)
“어떻게 지금보다 더 열심히 사냐. 여기서 어떻게 더 허리띠를 졸라매. 어떻게 더 화이팅을 해. 최선을 다했는데, 기회가 없었던 거야. 그러니까 세상을 탓해. 세상에 더 노력하고 애를 썼어야지. 자리를 그렇게 밖에 못 만든 세상이 문제인거고 세상에 더 최선을 다해야지. 욕을 하든 펑펑 울든 다 해도 네 탓은 하지 마.”
이중 구속이 전위 되는 예. 그러니까 순응의 이중 구속이 저항의 이중 구속으로, 광증의 이중 구속이 치료적 이중 구속으로 주제변이(metabasis)를 이루는 예로 다음 드라마 장면이 있다.
신재하에게 있던 원초적 이중 구속은 세 가지의 선택지로 구성된다. 모든 생명체가 자기를 보존하듯 어떻게든 자진을 선택하지 않아야 한다는 기본 선택지. 그리고 모든 과거가 자기의 잘못이라면 자신이 그 모든 잘못을 짊어지고 자진을 선택해야 한다는 선택지, 모든 과거가 자기의 잘못이 아니라 세상의 탓이라면 자기가 손쓸 수 있는 일이 없으므로 역시 자진을 선택해야 한다는 선택지. 둘이 강세인 가운데 그는 셋 중의 어떤 것도 선택할 수 없었고, 그래서 광증에 빠져서 약을 삼키되, 죽지 않는 약을 죽지 않을 만큼 삼켰다. 선택함도 선택하지 않음도 할 수 없는 그의 영혼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이 기껏 이러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 최초의 이중 구속은 순응의 이중 구속이다. 순응의 이중 구속 속에서 자기는 일단 잘못 자체를 순응하여 받아들이면서 자기에게 얼마만큼 잘못했는지 끝없이 묻게 된다. ‘끝없이’라는 말은 이중 구속의 특성 상 아무것도 선택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재하가 이 순응의 이중 구속에 참여하여, 이 이중 구속을 저항의 이중 구속으로 전환한다. 특유의 극적인 효과를 내는 이 모순어법은 사실, 그 저항 혹은 반박 자체의 도식을 신재하에게 제공하는 몫을 충분히 해내고 있다(신재하의 등장은 여기서는 길게 논하지 않겠지만, 즉자와 자기자신을 벗어나 나를 다르게 보는 타자의 등장으로도 고찰해 볼 수 있다. 또 이와 관련된 치료 개념의 특성에 대해서도 뒤로 미루자).
신재하가 자신의 최선을 의심하는 김재혁에게 저항을 한다면, 그때 그는 이 김재혁의 위로에 동의를 표하는 것이 되어 치료를 시작하게 될 것이다. 반면에, 신재하가 이 말에 수긍한다면, 그는 자신의 추억들을 돌이켜 세워서, 잘못은 세상에 있는 것이었다고 교정하게 될 것이다. 그것 또한 치료를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치료가 김재혁이나 혹은 누군가를 통해 개시될 있다는 것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치료될 수 있는 상태가 마련된다는 것 자체를 주목해야 한다.
결국 신재하는 자기과거에게-저항하기를 선택하는 것도, 자기과거에게-저항하지-않기를 선택하는 것도 하지 못하는 이중 구속에 빠지게 된다. 이렇게 저항 자체의 개념이 부각된다. 그는 한동안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할 수밖에 없다. 이극에서 이 공황은 울음 같은 것들로 표현된다. 이렇게 김재혁이 시동을 건 이중구속은 신재하가 이 잔혹했던 과거에서 빠져나와서 자신을 재정립할 수 있는 일종의 심리 공백을 형성할 것이고, 그것이 잘 전개된다면, 그는 자신이 이 과거 자체에 매몰되어 있는 이상, 반박하거나 위로 받는 것도, 반박하지 않거나 위로 받지 않는 것도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일이 된다는 것을 자성하게 될 것이다(일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나는 이 이중구속은 사르트르의 실존, 어쩌면 까뮈의 실존과 깊은 연관이 있을 것만 같다. 역시 뒤로 미룬다).
그러니까 신재하는 현재라는 항과의 연결을 끊어야 하는 과거의 어떤 항이 있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나쁜 쪽으로는 물론이고 심지어 좋은 쪽으로도 그 과거와의 연관을 의도적으로 보수할 필요는 없다. 인생에는 그러한 일도 있는 것이다, 그렇고 말고, 모든 과거를 이런 식으로 넘겨야 한다고는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런데 그가 이것을 배울 수 있었던 것도 그것을 자기가 몰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아무런 촉매도 없는 나는 아직도 신재하 식의 고통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그의 고통이 없을 수도 있었던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만큼 어리석은 생각이 어디있겠는가. 여기서 끝나는 것도 아니다. 어떤 반갑지 않은 과거를 이겨내고, 또다시 어떠한 일들이 과거로 웅크리고 또다시 이겨내고...... 하는 일의 연속이 인생이다. 반가운 과거는 지금 이글의 논외이다. 반가운 과거도 있기는 있겠지?
이런 이중 구속 자체의 이중 구속이랄까. 이러한 끝없이 반복되는 이중 구속의 주제변이들에 대한 조금 더 깊이 있는 고찰은, 우리에게 인간 존재가 지속에서 행위들을 선별해내서 우리 삶을 구성하는, 그러니까 우리 삶을 기호화하는(signification, 의미작용) 도식 하나를 더 알 수 있게 할 것이다.
물론 그것이 앞으로의 삶을 더 잘 살게 만들지는 않는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 신재하에게 어떤 말을 하여야 할 것인가? 뒤쪽 길은 없앴고, 앞쪽 길은 없는데. "오, 주여, 은총을"이라고 쓰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