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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내 맞선 상대 - 김수진이 나를 보며 고개를 살짝 꾸벅거렸다.
“죄송해요. 제가 많이 늦었죠?”
“아, 아닙니다. 저도 방금 왔는걸요.”
기실 30분이나 일찍 도착해 있었지만 나는 예의상 그렇게 대꾸했다. 그녀가 치마 뒷자락을 얌전하게 보듬어 내리며 자리에 앉았다. 단지 선을 보는 자리라서 조심스럽게 구는 몸가짐 같지는 않았다. 희창이, 아니 희창이 어머님의 말씀대로 조신함이 몸에 배어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우리는 나란히 커피를 주문했다. 나는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이런 맞선 자리에서는 무슨 화제로 어떻게 말문을 터야 하는지, 내 머릿속은 아무런 생각도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딱딱한 분위기를 깨 준 쪽은 김수진, 그녀였다. 그녀가 싹싹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굉장히 오랜만이죠? 벌써 한 12~13년은 되지 않았나요?”
희창이와 마지막으로 만난 중학교 시절 얘기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엉거주춤 맞장구를 치는 것뿐이었다.
“그, 그렇네요. 그쯤 됐을 거예요.”
“역시 옛날이라 어쩔 수 없나 봐요. 그래도 조금은 얼굴이 생각날까 싶었는데, 이렇게 만나지 않았다면 바로 옆에서 지나가도 못 알아봤을 것 같아요.”
나는 가슴속이 뜨끔하게 찔리면서도, 동시에 가슴속을 쓸어내려야 했다. 결국 희창이의 예상대로였다. 그녀는 내가 녀석이 아닌 딴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게 분명했다.
첫 번째 관문은 무난하게 통과한 셈이다. 너는 한창희가 아니다, 너는 정희창이다…. 나는 주문을 외우듯이 속으로 되뇌었다. 기왕 가짜로 녀석인 척해 주기로 했으니 실수를 해서는 안 되었다. 나 역시 한 마디쯤 꺼내야 할 성싶었다. 일단 나가서 저녁이나 먹자고 할까? 그렇지만 마주앉은 지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았으니….
“어…. 수진 씨 부모님은 다들 건강하시죠?”
“네. 지난번은 아버님만 뵈었는데, 희창 씨 어머님도 안녕하시죠?”
젠장, 말해 놓고 나서야 실수라는 걸 깨달았다. 희창이 부모님을 뵌 것도 한참이나 됐는데, 자칫 집안 얘기가 나왔다가는 나로서는 금세 궁지에 몰릴 게 뻔했다. 어쩔 수 없이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번에도 다행히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갑자기 이런 걸 묻는 게 우습지만, 어떻게 지내셨어요? 아버님 말씀으로는 귀국한 지 얼마 안 되셨다면서요? 계속 외국을 돌아다녔다고 하시던데.”
외국이라, 나는 해외라고는 제주도밖에 못 가 본 놈이었다.
“어…. 네.”
“그럼 혹시 일본에도 다녀오신 적 있으세요?”
희창이가 일본에 갔었던가. 그런 말은 못 들은 것 같다.
“아뇨. 일본은 아직….”
“실은요, 저도 희창 씨가 이사 간 뒤에 얼마 있다가 일본으로 건너가서 학교를 다녔거든요. 저희 아버지께서 그쪽 대학에 교환 교수로 가 계신 동안에요.”
“그, 그러세요? 동시통역사라고 하시더니…. 그래서 일본어를 그렇게 잘하시게 된 건가요?”
“네. 그러다 돌아와서 통역대학원을 졸업했어요. 일한 건 아직 2년도 안 됐지만요.”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약간은 허스키한 비음이 섞여 있었다. 뭐랄까, 외모에 비해 성숙하게 들리는 음성이었다. 하여간 얼추 이야기가 진행된다 싶더니 나는 또다시 밑천이 바닥나 버렸다. 그녀도 그런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후후, 제 기억이랑 조금 다르네요? 전에는 훨씬 더 개구쟁이였던 것 같은데 변하셨나 봐요.”
나는 애꿎은 뒤통수만 긁적였다.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이런 자리는 많이 어색하죠? 솔직히 저도 부모님이 희창 씨를 만나라고 하셨을 때부터 조금 그랬었어요. 서로 얼굴 본 지는 오래됐지만, 옛날 친구나 마찬가지인데 갑자기 둘이서 맞선을 보라고 하시니까요.”
자신도 나처럼 멋쩍은 기분이라는 뜻이었지만, 정작 사근사근한 그녀의 말투에서는 그런 기색은커녕 오히려 익숙함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직업을 새삼 상기했다. 통역사라면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하는 게 낯설지 않아서 그러리라는 추측이 들었다. 그녀가 물었다.
“희창 씨는 이런 거 몇 번이나 해 보셨어요?”
“이런 거요…?”
“맞선이요. 어쨌든 우리는 오늘 선보러 나온 거잖아요.”
“저는…. 처, 처음이에요.”
이런 건 사실대로 말해도 되겠지. 그러나 그녀는 빙글거리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약간 의외네요? 희창 씨 정도라면 여기저기서 맞선 자리가 들어왔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또 한 번 아차 싶었다. 희창이 같은 부잣집 도련님이라면 당연히 그럴 터였다.
“저는요, 두어 번쯤 돼요. 전부 저희 엄마 아빠 성화 때문에 억지로 나간 거긴 하지만요. 그래서 얘기인데…. 우리 오늘은 그냥 서로 편하게 대하면 안 될까요?”
“서로 편하게요…?”
“네. 오랜만에 옛 친구를 만난 것처럼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부모님들 입장은 다르시겠지만, 우리끼리는 그런 부담감 갖지 말구요.”
글쎄다. 가뜩이나 뱃속이 켕기던 나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수진 씨가 그러시다면야…. 그, 그러죠 뭐.”
이제 보니 요조숙녀 같은 겉모습과는 달리 수진은 꽤 활달한 성격인 듯했다. 그러자 그녀는 활짝 핀 표정으로 손뼉까지 치고 있었다.
“휴, 잘됐다. 사실 하루종일 뭘 어째야 하는지 고민했거든요. 희창 씨는 안 그랬어요?”
나는 얼떨결에 머쓱히 웃고 말았다. 덕분에 조금이나마 편해질 수 있었다. 그제야 나는 다시금 그녀의 외모가 눈에 들어왔다. 목소리도 그랬지만 수진의 첫인상은 전체적으로 꽤 조숙해 보이는 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나이 들어 보이거나 하는 얼굴은 전혀 아니었다.
그녀는 통통한 뺨에 도톰한 입술을 지녔어도 계란형의 자그마한 얼굴이었고, 몸집도 그리 크지 않은, 중간 정도의 키였다. 그리고 살결 또한 아주 희거나 짙지도 않게 매끄러운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어느새 패션업계에서 일한다는 직업의식이 생긴 걸까 - 나는 탁자 아래로 넌지시 수진의 옷차림을 살펴보았다. 그녀는 허벅지 위로 적당히 올라간 길이의 치마를 입고 있었다. A라인 스커트 속에 커피색 스타킹을 신은 계란 색 무릎과 종아리가 가지런히 모아진 채 드러나 있었다.
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아무리 수진이 예쁘장한 아가씨라 해도 지금으로서는 내 역할에 충실해야만 했다. 나는 희창이가 미리 시킨 대로 그녀에게 말했다.
“저기…. 수진 씨, 저녁 드시러 가지 않겠어요?”
“아, 맞다. 안 그래도 슬슬 배고프던 참이었어요.”
그녀가 순순히 대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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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여기 말고 딴 데로 가는 건 어떨까요? 이런 곳은 비싸기도 하고, 왠지 불편하잖아요.”
내가 뭘 드시겠어요, 라고 묻자 수진은 그렇게 대답했다. 호텔 안의 레스토랑 따위를 떠올렸던 나로서는 다소 의외였다.
“저는 상관없어요. 수진 씨 편하신 대로 하세요.”
“음…. 실은 제가 좋아하는 데가 한 군데 있어요. 우리 그리로 가요.”
우리는 호텔 입구에서 주차원이 발레 파킹 - 그것도 희창이가 가르쳐 준 방법이었다 - 을 시켜 둔 차에 올라탔다. 수진이 안내한 곳은 인사동에 있는, 전라도 한정식이라는 간판이 달려 있는 음식점이었다. 그 역시 약간은 뜻밖이었다. 그녀의 분위기로는 우아하게 칼질을 하는 쪽이 어울린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식당 안은 한옥집 온돌 같은 구조였고, 일식집처럼 테이블 아래가 파여 의자에 앉듯이 구두를 벗고 발을 내려놓을 수 있게 꾸며져 있었다. 나는 자리에 마주앉은 뒤 그녀에게 말했다.
“저는 처음 와 보니까 수진 씨가 주문해 주세요.”
“그럼 그럴까요?”
수진이 메뉴를 고르자 이윽고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날라져 왔다. 그럼에도 그녀는 어쩐지 아쉬워하고 있는 표정 같았다. 나는 그제야 그날 처음으로 맞선남 다운 눈치를 발휘할 수 있었다.
“괜찮으시면 술 한잔하실래요, 수진 씨?”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될까요? 원래 이 집은 동동주가 유명하거든요. 하지만 희창 씨는 운전해야 할 텐데 저만 마시면 죄송해서….”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정 그러면 한 잔만 받을게요.”
웬만하면 대리운전을 불러도 될 테지만, 남의 벤츠를 빌려 온 판국에 그럴 수는 없었다. 아무튼 수진은 예상보다 훨씬 수더분한 아가씨였다. 서로 맞선이라는 꼬리표를 떼기로 한 덕분인지, 그녀는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를 대하듯 스스럼없이 굴고 있었다.
나는 실제로 조금은 그녀에게 호감이 가는 느낌이었다. 아주 약간은, 내가 진짜 나, 한창희로 그녀를 만났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하지만 한편으로 못내 죄책감이 들었다. 지금이라도 내가 희창이가 아니라고 털어놓는다면 - 물론 상상조차 못할 노릇이었다.
나는 왠지 씁쓸해진 채 술을 한 모금 홀짝였다. 차만 아니라면 수진과 주거니 받거니 하고픈 마음이었다. 수진은 꽤 맛있게 동동주를 들이키고 있었다. 어차피 술을 먹여서 작업을 걸 것도 아니었고, 애초부터 그녀의 집까지 바래다 줄 작정이었으므로 별반 걱정은 하지 않았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뭐가요?”
“희창 씨는 정말로 사귀는 여자친구 없으세요?”
나는 떨떠름히 수진을 쳐다보았다. 동동주를 몇 잔 비운 탓일까. 장난스런 미소를 지은 그녀의 얼굴이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듯했다.
“후후, 있다고 해도 놀라지는 않을게요. 그렇다고 해서 맞선 자리에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잖아요?”
그래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아리송했다. 실제의 나란 놈은…. 무심코 민정이를 떠올려야 했다.
“아뇨. 없는데요. 수진 씨는요?”
“저도 없어요. 아직까지는요.”
글쎄다. 참한 외모에 집안이나 직업도 좋은데 어째서 그녀에게 애인이 없는지 궁금했다. 한데 그때였다. 문득 나는 묘한 감촉을 느끼기 시작했다.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 탁자 아래로 뻗은 내 다리에 갑자기 뭔가가 슬그머니 닿고 있었다.
얼핏 고개를 숙이니 커피색 스타킹에 감싸인 종아리가 보였다. 높다랗게 다리를 꼬고 앉은 수진의 발이 내 무릎께에 닿아 있었다.
“아직 결혼이 급한 것도 아니고, 좀 더 즐기면서 살아도 될 나이니까요. 희창 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수진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지만, 나는 뭐라 대꾸하지 못한 채 의아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마주앉은 사람끼리 탁자 아래에서 서로 다리가 부딪치는 정도야 흔한 일이다. 그리고 그런 경우는 먼저 닿은 사람이 십중팔구 비켜 줘야 하기 마련이다.
한데 수진은 나에게 찰싹 맞붙여 온 자신의 다리를 전혀 떼려 하지 않고 있었다. 뻥 뚫린 탁자 밑인지라 다른 곳에 닿았다고 착각했을 리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심지어 내가 애써 다리를 움직이는데도 덩달아 따라오듯 내 양복 바지춤에 계속 발을 대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발끝으로 내 가랑이 사이를 더듬기라도 할 것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