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계 4장 1-11절
설교제목 : 열린 하늘의 문
십자가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사순절의 시간을 보내며 종려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생애 마지막, 예루살렘으로의 입성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수많은 군중들은 예수를 환영했지만, 며칠 되지 않아 그들은 예수님을 모욕하고 저주하였습니다. 수백만 명이 구호를 외치며 열광할지라도, 맹목적 군중심리는 그 자체로 0, zero일 뿐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따르고자 하는 수많은 군중들을 언제나 거절하시고 12명의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저 또한 이 사순절 기간을 반성하게 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두 주 동안 두 번, 꿈에는 강단에서 기도하는 장면이 나왔는데, 한번은 큰 소리로, 한번은 울면서 기도하였습니다. 조용히 꿈을 회상하면서 기도에 게으른 제 자신을 반성하였습니다. 한 주간 우리 자신을 겸손히 바라보며 무의식성에서 깨어나 기도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윤동주(1917-1945)의 시, ‘십자가’가 떠오릅니다. 1941년, 그의 나이 24세에 쓴 시입니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 지금 교회당 꼭대기 /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가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시인은 높이 솟은 교회의 첨탑 꼭대기의 십자가를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렸습니다. 나라를 잃고 비탄에 빠져 망연자실하는 자신을 괴로웠던 예수처럼 자신을 괴로운 사나이라고 노래합니다.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처럼 십자가가 허락한다면 꽃처럼 피어나는 피을 기꺼이 희생하겠노라고 노래합니다. 개인적이고 때로는 이기적이고 자신을 소비하며 살기 바쁜 오늘날의 20대 젊은이들과 나라의 운명을 위해 기꺼이 희생의 피를 흘릴 각오를 하는 윤동주는 너무나 다른 온도를 체감하게 합니다. 정치적 선전 구호를 외치며 나라를 위해 일하겠다는 이들의 가슴 속에 십자가 위에서 피흘린 고통 속에서 일하려는 자세가 과연 있을까! 권력의 욕망의 눈먼 이들의 가슴에는 이런 십자가가 있을 리 만무합니다. 시대도 환경도 달라졌기에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에게 이런 십자가의 희생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럼에도 괴로웠지만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중적 삶의 정서를 느끼며 사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넘어서 누군가에게 생명의 길을 안내할 수 있는 자가 될 것입니다.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는 일은 괴롭지만 행복한 길입니다. 소명의 길, 자신만의 여정을 뚜벅뚜벅 걸어가기 때문입니다.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조용히 흘리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런 삶이 괴롭지만 행복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묵상하는 우리의 고난주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열린 하늘의 문
밧모섬에 유배 중인 요한은 본격적으로 환상의 서막을 경험합니다. 그가 본 첫 번째 장면은 하늘에 문이 하나 있고, 그 문이 열려있었습니다. 그리고 나팔소리같은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리로 올라오너라. 이 뒤에 일어나야 할 일들을 너에게 보여주겠다(4:1)”
요한은 열린 하늘의 문을 목격합니다. 문은 일종의 이 세계와 저 세계, 이 공간과 저 공간의 경계를 표상합니다. 문은 일종의 다리와 비슷한 상징성을 지니며 전환과 이행의 상징입니다. 하늘의 문이 열려있다는 것은 천상적이고 영적인 영역으로부터 지상적인 영역으로 무언가 침투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예술이나 문학, 혹은 꿈에서 문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열쇠를 반드시 가지고 있거나, 그 문을 지키는 자의 시험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이 열린 하늘의 문을 보고 있는 이미지는 오늘 우리 시대에 중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열린 하늘의 문을 더 이상 바라보지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좁은 의식의 한계 안에서 오직 땅과 현실의 영역만을 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주를 관광하는 시대를 꿈꾸며 우주의 공간으로 로켓을 쏘아 올리고 있지만, 우리의 시선은 좁은 담벼랑 사이를 걷는 것처럼 마음의 옹졸함과 답답함, 불안이 가시지 않고 있습니다. 열린 하늘의 문은 현실의 세계, 의식의 세계, 땅의 세계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세계, 저편의 영원한 세계, 더 광대한 무의식의 세계가 열려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 열린 하늘의 문을 보고 경험하는 자는 하늘의 세계에서 펼쳐지고, 제공되는 무한한 자원과 접촉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하늘을 향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내면 깊은 곳을 보아야 합니다.
현대인은 또한 하늘의 열린 문으로부터 들려오는 계시, 혹은 무의식의 음성에 진정으로 귀기울이기보다 집단의식에서 들려지는 미디어와 각종 광고, 성공과 성과에 대한 소리에만 골몰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현대인은 열심히 살고 있지만, 하늘에서 들려지는 소리, 내면의 소리에 관심을 기울일 여백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20대의 후반의 내담자는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였습니다. 중학교 때 게임에 빠져서 방에서 나오지 않고 있을 때 부모님은 그를 비난하면서 컴퓨터를 때려 부수고 자신을 때렸다고 했습니다. 늘 위축감을 경험하였고, 학교에서도 집안에서도 자신의 자리가 없었고, 자신의 존재가 유일하게 인정받는 곳이 게임공간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사춘기라 생각했지만, 우울증의 상태였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부모와 상담하면서 한번이라도 자녀의 눈을 보며 그 내면의 심적 고통을 들으려 했다면 지금의 병리적 상태까지는 도달하지 않았을 것이고, 이제라도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나팔소리와 같은 음성으로 “이리로 올라오너라” 말씀하십니다. 올라가야 합니다. 높은 곳으로 오르면(다른 말로 깊이로 내려가면) 우리 인생의 길을 보다 넓은 시선을 보다 높은 관점으로 조망하고 우리가 가야할 길을 알아차릴 것입니다.
질서를 불러오는 보좌의 형상
요한은 성령에 사로잡혀 하늘의 보좌를 보게 되었고, 그 보좌 위에 한 분이 앉아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이 경험은 누미노제, 신성력 있는 체험으로 두렵고 떨림, 매혹적인 현상을 야기합니다. 하늘의 보좌는 왕적 권위, 신성한 힘이자 가장 내적 중심의 핵임을 표현합니다. 그 모습은 벽옥, 홍옥 같고 보좌 둘레에는 비취옥 같은 무지개가 있었습니다. 이는 가장 빛나고 단단한 고귀한 형상임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 보좌 둘레는 24 장로가 흰옷을 입고 머리에는 면류관을 쓰고 앉아 있었습니다. 보좌 주위의 흰옷입은 24 장로는 내적 중심을 둘러싼 만다라의 형태를 표상합니다. 흰옷 입은 24명은 순수하고 정결한, 정화된, 모든 다양한 빛을 함께 모을 수 있는 포용적 태도를 지닌 천상적 존재들이라 할 수 있다. 또한 6절부터 8절까지를 보면 보좌 가운데와 둘레에 네 생물의 모습이 있습니다. 첫째는 사자형상, 둘째는 소형상, 셋째는 사람형상, 넷째는 독수리 형상입니다. 이는 그발강가에서 본 에스겔의 환상과 유사합니다. 하나님의 이미지 속에 담긴 사위의 특성으로 동물적 충동에서 이제 인간적 특성으로 분화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런 네 형상에 둘러싸인 보좌는 만다라의 전형적인 상태를 표상합니다. 보좌 주위에 네 형상과 그 주위에 24 장로의 형상은 분화된 형태로 뻗어나가는 만다라의 이미지입니다. 환상의 목격자인 요한의 고통과 불균형 가운데 질서와 균형을 가져오는 전체성의 이미지입니다. 이런 형태는 우리가 의식의 불균형과 무질서한 심적 불안 속에서 있을 때 출현하는 무의식적 심상과 흡사합니다.
보좌로부터 번개, 천둥, 일곱 개의 횃불 곧 일곱 영은 보좌에 앉은 하나님의 상은 남성적이고 정신적 원리임을 드러냅니다. 번개, 천둥, 횃불은 모두 의식성을 불러오는 통찰과 인식, 영적 특성을 잘 대변합니다. 또한 보좌 앞으로 펼쳐진 장면은 마치 유리 바다처럼 수정을 깔아놓은 듯한 형국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유리 바다와 같은 천상의 바다는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유리 바다는 보좌에 앉은 하나님 자신의 형상을 비추는 역할을 합니다. 주님은 보좌 앞에 있는 천상의 바다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숙고하십니다. 또한 하늘의 바다는 약간 나중에 발산되는 매개체임을 시사합니다. 반사되는 유리처럼 먼 지역까지 그 반사가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유리는 아마도 기원전 16세기에 이집트에서 발견되었고, 이후에 이집트인들은 유리제조에 매우 능숙했습니다. 히브리성서에서는 딱 한번 등장하는데 욥은 지혜에 대해 “금이나 유리도 비교할 수 없다(욥 28:17)”고 언급합니다. 유리는 고대 근동에서 매우 귀중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집트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유리에 대한 언급은 전혀 찾을 수 없고, 마찬가지로 그리스의 합리주의에 대한 반감도 있었습니다. 유리는 그런 류의 의식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고도로 결정화된 의식과 연결됩니다. 유리는 투명하고 유리를 통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영구적이고 파괴할 수 없는 특징을 가리킵니다. 깨질 수 있지만 분해되지 않고 무한하게 지속됩니다. 이것이 유리체로서 파괴할 수 없는 연금술의 현자의 돌과 유사한 이유입니다. 유리는 보는 능력을 촉진하는 도구를 만드는 재료로 활용됩니다. 꿈에서 유리로 만들어진 창이나 볼 수 있는 도구는 개인적 차원에서 자신의 세계관이 포함되어 있는 합리적 의식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유리창의 깨짐은 큰 세계관을 만들기 위해 작은 세계관을 깨뜨리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면류관 벗기
환상 중에 그 생물들은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드리고 노래합니다. 그리고 24 장로들도 보좌에 앉은 하나님을 향하여 노래합니다. 그런데 24 장로들이 노래하기 직전 그들은 엎드리고 자신의 면류관을 벗어서 보좌 앞에 내 높으면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 장면을 떠올리면 참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엎드리면서 자신의 영광과 권위의 상징인 면류관을 벗고서 노래 부릅니다. 더 높은 곳에 올라가고 영광의 면류관을 쓰기 위해 한껏 폼잡는 시대에 자신의 면류관을 내려놓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를 따르며 지향해야할 모습처럼 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영광을 버리고 인간으로 낮아져 수치스런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시면서 가시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금빛나는 화려한 영광의 면류관이 아니었습니다. 아름답지만 도전이 되는 장면입니다. 면류관은 이미 어떤 노력 끝에 주어지는 개성화의 과정이라고 이전에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니 이 면류관을 우리는 어쩌면 반드시 써야할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궁극에는 그 면류관조차도 벗어내려 놓을 수 있을 수 있어야 합니다.
천상의 환영의 서막은 바로 면류관을 벗어 내려놓는 장면으로 마무리 됩니다. 2024년 고난주간을 앞에 두고 내가 쓰고 있는, 쓰려고 하는 면류관이 무엇인지 살피고, 그 면류관조차도 내려놓고 엎드려 주님께 노래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