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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인천사태 시위현장의 여익구(사진 왼쪽)와 박계동(사진 오른쪽). 1986년 명동성당 |
남다른 친화력과 조직역량
그렇게 대불련 사무총장이 된 여익구는 먼저 대불련 본부조직부터 재정비하고자 최연을 간사로 임명하고 필자에게 조직부장을 맡을 것을 요구했다. 이후 여익구는 대불련의 전체 현황을 파악해가며 큰 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는데, 공개조직일 수밖에 없는 대불련의 내실화와 승가사회의 조직화가 일차적인 목표였다.
여기서 대불련의 내실화란 전국조직이고 산하에 다수의 지회가 있는 만큼 낱낱의 단위조직을 상대로 직접 지도하고 구체적 방향을 제시하기보다 전체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주력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더욱 의식화된 회원들은 사원화팀이나 노동운동 같은 실천적인 현장으로 가도록 뒤에서 후원했다. 말하자면 몇몇 학생들을 상대로 직접 스터디그룹을 만들어 가르치기보다 각 지회가 자발적으로 그럴 필요성을 깨닫게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었다. 그런 활동에는 탈춤을 비롯한 민중문화를 대불련에 접목시킨 것이 효과적이었다. 일례로 여익구가 사무총장으로 취임하자마자 한 일 중의 하나가 당시 병신춤으로 알려지기 시작하던 공옥진을 초청해 조계사 뒤뜰에서 공연한 것이다. 그리고 본부 문화부 안에 탈춤반을 조직해서 교육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장구며 꽹과리를 짧은 시간 내에 익히면서 흥미를 느낀 반원들은 기예만이 아니라 거기에 깃든 민중 정서를 이해하게 되고 시중의 소비적인 문화와는 다른 주체적 삶의 방향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역과 전국행사에서 몇 차례 공연을 선보이자 당장 부산지부 등도 탈춤반을 스스로 조직했는데, 본부 탈춤반이 봉산탈춤을 전수받은 데 비해 부산지부는 지역 특색을 갖춘 양산탈춤을 배웠다.
그런 식으로 각 지회에서 같이 읽고 토론할 도서목록은 물론 당시 유행하던 운동가요와 더불어 잘 알려진 민요에 불교가사를 붙이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새로 발굴된 민요를 채보해 불교가사를 단 노래집을 만들어 배포하기도 했고, 회보 《진리의 벗》을 발간하기도 했다. 그리고 대불련 전국조직을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이전에는 정부 행정조직을 본받아 서울 · 부산과 각 도청소재지에 지부를 두고 그 산하에 지회들을 소속시켰는데, 본부의 전달사항을 지부가 지회들에 연락하고 다시 그 결과를 수거해 본부에 보고하기에는 학생조직으로서 능력에 넘치는 일이었다. 그래서 대학이 3개 이상 있는 도시들은 모두 지부로 승격시키고 2개인 도시는 준지부, 1개인 도시는 특별지회로 지정하여 지부보다 상대적으로 행정력을 늘리기 용이한 본부에서 직접 관장했다. 다만 도청소재지들은 기득권을 인정하여 경기, 충남, 충북 등 기존의 도 단위 명칭을 그대로 쓰도록 했다. 말하자면 은행 조직을 모방해 효율성을 고려한 조직개편이었는데, 각 지역 내 원활한 연대활동을 염두에 둔 조치였다.
그러자 당시 도시 간 구분이 무의미해지기 시작한 마산 · 진해 ·창원의 경우 도시명의 뒷글자를 딴 산해원이란 이름으로 한 지부로 묶어줄 것을 본인들이 요구해 와 그대로 승인했다. 또한 장차 사원화운동이 활성화될 때를 염두에 두고 사찰 단위 대학생회도 지회로 가입할 수 있도록 했는데, 이런 조직구성은 현재의 대불련 헌장에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그런데 그 모든 일을 사무총장이 직접 한 것이 아니라 큰 틀의 방향만 제시하고 본부임원들이 알아서 능동적으로 수행하도록 한 것이 조직의 귀재였던 여익구의 착안이었다.
그리고 승가를 조직하는 일은 ‘대불련 지도법사단’을 구성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자신의 승려 시절 만났던 젊고 의욕 있는 스님들을 모아 처음 50여 명으로 지도법사단을 결성했다. 효당가에서 인연을 맺은 여연 스님과 월정사 시절 도반이었던 현각 · 현기 및 도수 · 현응 · 현담 · 성문 · 원혜 · 묘주 스님 등이 참여했고, 지도법사단장은 혜산 스님이 맡아주었다. 이렇게 조직된 지도법사단은 잘 알려진 것처럼 곧바로 1981년 7월 11일~16일 중앙승가대에서 승가 사상 최초로 경제나 사회사상 등 사회과학 분야도 함께 토론한 ‘전국청년승가육화대회’를 개최하도록 이끌었다. 그리고 1982년 6월에는 동국대, 중앙승가대, 해인사, 통도사, 범어사, 운문사, 봉녕사 등 전국 강원에서 500명이 참여한 ‘전국학인승가연맹’을 발족하는 등 청년 승가조직을 활성화시키는 동력이 되었다. 당시 필자도 스님들과의 준비모임에 배석할 기회가 있었는데, “대한민국에서 저만큼 젊은 스님들 많이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라고 말하던 여익구의 발언이 기억난다.
그렇지만 모든 일이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사무총장을 맡고 처음 여름대회를 준비하던 중, 필자에게 자료집 견적을 받아오라는 임무가 주어졌는데, 거의 열 군데 가까운 인쇄소의 대동소이한 견적에도 쉽게 결정이 나지 않았다. 그때 ‘아, 예산에 자신이 없구나’ 하고 깨달은 필자가 조계사 근처 인쇄소에서 대회가 끝난 후 지급하는 조건으로 조금 비싼 견적을 올리자 그제야 허락이 떨어졌다. 사실 어디에서도 정기적인 재정후원이 없던 당시, 대불련을 관장하는 일이 여익구에게 큰 부담이었음을 짐작하는 학생들은 거의 없었다.
그렇게 ‘조국과 민중을 불타의 품으로’라는 주제로 법주사 인근 국민학교에서 열린 화랑대회를 700명이 참석한 가운데 무사히 마치고 2학기를 맞았을 때, 원주 상지대 지회장이 개신교 부흥회장 앞에서 할복자살을 기도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당시 개종선교회라는 이름으로 승려 출신임을 내세워 불교를 함부로 폄훼하고 다니는 명진홍 목사라는 자의 만행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를 알게 된 대불련 본부에서는 조계사에서 대대적인 규탄대회를 열었고, 집회 도중 절 안에 들어와 있던 사복형사들까지도 정당한 종교행사를 사찰한다고 절 밖으로 쫓아냈다. 광신적 기독교도들의 폭거가 횡행하던 시절 대불련의 이런 규탄대회는 조계사 주변 스님들이나 불자들에게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다. 우선 대외적으로는 여익구라는 사람이 불자임에 틀림없다는 믿음을 심어줬고, 대내적으로는 ‘자비문중’이라는 막연한 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대다수 대불련 회원들에게 정당하게 분노하는 법을 가르쳐준 것이다. 그런 집회는 이후에도 서울과 지방에서 개종선교회가 부흥회를 여는 곳마다 찾아가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그런 가운데 12월 ‘사원화 사건’이 벌어졌다. 사건의 주범이 된 법우 스님은 동국대 불교학과 기숙사인 기원학사에서 생활하다 2학년 말 인도철학과인 관계로 퇴사해 천호동 어느 포교당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그곳 지하에 있던 야학이 주지 스님과의 불화로 쫓겨나는 것을 보고 스스로 야학을 떠맡았다. 당시 야학은 가정형편 때문에 정규학력을 채우지 못하고 사회로 나온 아이들을 검정고시를 통해 학교에 복귀시키는 검정야학과 노동자들의 의식을 고양시켜 보다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노동야학이 있었는데, 그곳은 검정야학이었다.
법우 스님은 직접 아이들과 부대끼며 그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검정고시가 아니라는 현실에 눈뜨기 시작했다. 급격한 의식의 변화를 보인 법우 스님은 문화총림 여래사 팀의 조력을 받으며 묘각사에서 청계천과 동대문 일대 봉제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여래사 야학을 운영했다. 그리고 대불련 지부나 지회들이 서울, 전주, 부산, 인천, 청주 등지에서 운영하고 있거나 준비하고 있는 야학들을 연합해 ‘불교야학연합회’를 결성하려다가 벌어진 사건이 ‘사원화 사건’이다. 이후 전국적인 검거 선풍이 야학들은 물론 문화총림 여래사와 법련사에서 이전한 칠보사 사원화팀 그리고 관련된 대불련 지회 등으로 번져나갔다. 결국 150여 명이 검거돼 조사받은 끝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법우 스님 3년, 최연 2년, 서울대생 신상진은 1년의 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대불련은 1982년 여름대회 이름을 ‘한국불교 1,600년 대회’로 바꿔 해인사 인근 국민학교에서 7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치렀다. 그해에는 학생들 행사와 별도로 해인사에 지도법사단 스님들이 상당수 모였는데, 사복경찰이 교사로 위장해 대회장에 상주하는 등 삼엄한 감시를 펼쳤다. 그런 상황에서도 예민한 주제를 다루면서 특별한 빌미를 제공하지 않고 대중들을 통제하는 여익구의 지도력은 해인사 경내에서도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당시 총무원 총무국장이던 지형 스님과 가깝게 교류하게 되면서 종단 종책연구소 산하에 11월 30일 동국대 한상범 교수가 소장, 정승석이 간사로 참여한 ‘불교사회문화연구소(불사연)’ 출범을 돕게 되었다.
그렇게 민중불교라는 이름으로 대중들을 의식화시키고 조직화하는 작업을 숨 가쁘게 진행하던 가운데 1983년 초 여익구는 대불련 사무총장직을 사임했다. 당시 그는 자료수집을 위해 일본여행을 원했는데, 안기부에서 여권발부를 미끼로 사퇴를 요구하자 그에 응했던 것이다. 그래서 여행 후 여익구는 조계사 정화회관 2층에 있던 불사연 연구위원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대불련은 후임 사무총장을 추대하지 않고 필자 혼자 간사직을 수행했다.
그리고 7월 17일 범어사에서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딛고 일어나라’는 주제로 중앙승가대와 동국대 석림회, 전국 강원과 선방 스님들, 대불련, 대한불교청년회 1,700여 명이 모여 출 · 재가 연합조직인 ‘청년불교도연합회(청불련)’를 출범시켰다. 그날 배포된 《청년불교도백서》는 그때까지 불교계 분규의 실상을 다루고 그에 관한 개선방안을 엮은 것으로 불사연에서 수개월의 작업을 거쳐 발간한 것이었다. 따라서 출 · 재가의 결속, 불교혁신, 민족불교 구현, 불국정토 건설을 표방하며 교단개혁을 외쳤지만, 대회의 어떤 자료에도 민중불교라는 단어는 넣지 않았다. 불교의 자주화를 우선 과제로 생각한 출 · 재가 연합조직이라는 점을 배려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불과 20일 만인 8월 6일 신흥사 신임주지 부임을 둘러싸고 불미스러운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자 청불련 소속 스님과 청년불자들은 곧바로 개혁종단수립을 목표로, 종단의 자율정화와 총무원장 사퇴, 종회 해산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호법구종법회’를 개최하여 많은 스님이 단식에 돌입했다.
불교계 안팎에서 비판여론이 들끓자 조계종 원로회의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총무원과 종회 해산, 전국승려대회 개최를 결의했다. 그리고 9월 5일 조계사에서 열린 전국승려대회를 통해 비상종단을 출범시켰지만, 기획위원장을 맡은 여익구에 대한 공안당국의 압박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여익구만 배제하면 불교계를 대표하는 비상종단의 정통성을 인정하겠다는 압력이 거듭되자 비상종단 기획실장을 맡았던 지형 스님과 사무처장 성문 스님이 결국 사퇴를 권했다. 그러자 여익구는 물러나 칩거하며 집필에 몰두했는데, 그때 쓴 것이 1985년 1월 도서출판 풀빛에서 발간된 《민중불교입문》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비상종단은 1984년 7월, 당시로는 파격적일 만큼 혁신적인 제도개혁안을 마련했다. 하지만, 제도개혁안과 종헌개정안을 둘러싼 진통 끝에 1984년 8월 1일 기득권 스님들이 성철 종정 등 원로스님을 등에 업고 소집한 승려대표자회의에서 새 종헌을 무효화시키고 비상종단 해체를 선언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이후 여익구는 종단 내 무용지물이 되어 있는 불사연을 인사동으로 옮겨 ‘불교사회문화연구원’으로 개칭하고 원장에 취임했다. 당시 연구원에서는 기관지 《불교와 사회》를 3호까지 발간하고 민중불교를 보다 뿌리 깊은 신행 형태로 성숙시키기 위한 실험적인 법회도 꾸준히 열었다. 법회에서는 삼귀의를 정확한 본뜻을 살리기 위해 남방불교에서 행하는 팔리어 게송으로 불렀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한편 비상종단을 와해시키고 총무원장이 된 녹원 스님 측으로부터 초파일 봉축행사에 대한 개혁방안을 기획해보라는 일종의 유화책이 제안되기도 했다. 여익구는 제등행렬을 초파일 당일보다 며칠 앞당겨 각 사찰의 당일 봉축행사에도 도움을 주고 출발장소도 여의도광장보다 서울운동장같이 사전법회에 참가자의 집중력을 높일 수 있는 장소를 제안했다. 이런 기획은 그 즉시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몇 년 후부터는 제안대로 시행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독일의 국제자선단체 TDH(Terre des Hommes)의 지원을 받아 구로동에 ‘민중법당’을 설립하고 빈민아동교육사업을 벌이기도 했으나, 불교사회문화연구원 시기 여익구가 집중한 것은 민중불교운동연합 설립을 위한 기초작업이었다.
민중불교운동의 대부로 우뚝 서다
이어지는 1985년의 정치 상황은 2·12 총선에서 김대중과 김영삼이 지휘하는 신민당이 예상외의 선전으로 제1야당으로 등장했다. 그러자 재야운동권은 3월 29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을 건립, 야당 정치권과의 연대도 가능한 대중운동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5월 4일 ‘민중불교운동연합(민불련)’도 반독재 민주화를 기치로 창립되었다. 창립대회에서 경찰의 방해로 작지 않은 피해도 있었지만, 고문으로 경우 · 월운 스님과 용태영, 지도위원에 고은, 김지하, 황석영, 장기표와 성열 · 지선 스님 등을 모시고 의장에 여익구, 부의장에 진관 스님과 김래동, 집행위원장에 서동석, 기획위원장에 현기 스님 등으로 초대 임원진을 구성했다. 마침내 불교계 최초의 재야 대중운동단체이자 청불련의 뒤를 잇는 출 · 재가 연합조직이 탄생한 것이다. 말하자면 그때까지의 대불련 인맥을 비롯한 출가와 재가의 방계조직과 재야운동권의 불교 신자들까지 총망라한 본격적인 민중불교 실현을 위한 조직체였다.
민불련은 창립하자마자 재야민주세력의 결집체인 민통련에 가입해 사회민주화운동에 적극 나섰고, 기관지 《민중법당》을 발행해 광주학살의 진상, 10 · 27법난의 실상, 안기부의 고문 실태 등을 알렸다. 그리고 불교전통의 현대적 재해석도 시도했다. 일례로 1985년 8월 31일 화계사에서 선망부모를 천도하는 불교의 우란분절이자 민중들이 농사일을 하루 쉬던 전통명절인 백중을 ‘생명해방 대축제’로 개최하려다가 공안당국의 제지로 불발되기도 했다. 그밖에도 1985년 구로공단의 대우어패럴 파업을 계기로 촉발된 ‘구로동맹파업’에 대한 지원 활동과 농성, 1986년 초 민통련을 중심으로 전개된 개헌투쟁에 이르기까지 각종 집회 · 시위 · 농성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다 5 · 3 인천민주항쟁을 총괄 지휘한 지도부의 한 사람으로 의장 여익구가 수배를 받게 되었다. 5 · 3항쟁은 1986년 5월 3일 인천 주안역 인근 시민회관 일대에서 수도권 지역 시민단체, 대학생, 노동자 등 5만여 명이 운집하여 군부독재 타도와 직선제 개헌 등을 요구한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였다. 당시의 안기부는 점점 더 거세지는 국민의 개헌요구를 잠재우고자 이 시위를 좌경용공 세력에 의한 조직적 체제전복 기도로 조작하여 소요죄로 129명을 구속하고 60명을 지명수배했다. 이 사건으로 여익구는 이후 공개활동을 못 하고 오랜 도피생활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민불련은 민통련 해산명령에 맞선 농성투쟁으로 고광진 2기 의장이 수배되기도 하고, 김근태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이 고문당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11월 4일 재야, 종교계, 야권의 연대기구인 ‘고문 및 용공조작저지공동대책위원회’가 만들어질 때 불교계 대표로 참여하기도 했다.
1986년 5월 9일에는 민불련뿐만 아니라 지선, 청화, 진관, 명진, 성문 등 152명의 스님이 조계사에서 시국선언문을 발표하여 민주적 개헌을 주장했다. 그리고 6월 5일에는 218명의 스님이 ‘불교정토구현전국승가회(정토승가회)’를 창립했다. 동국대학교 정각원 불상 앞에서 진행된 창립총회를 통해 스님들만으로 구성된 사회운동단체가 탄생한 것이다. 이어서 9월 7일에는 승려 2천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9 · 7 해인사 전국승려대회’를 열어 불교자주화와 사회의 민주화를 천명하면서 불교 관련 악법 즉각 철폐, 사찰 관광유원지화 중지, 불교탄압 전면거부, 10 · 27 법난 해명 등을 요구했다. 또한 10월 26~27일에는 봉은사에서 정토승가회, 민불련, 대불련, 중앙승가대, 동국대 석림회 등이 연합해서 25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10 · 27 법난규탄 및 불교자주쟁취대회’가 개최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7년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발생과 은폐조작, 4 · 13 호헌조치, 6월항쟁과 이한열 사망 그리고 6 · 29선언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한 해였다. 불교단체들은 ‘박종철군 49재봉행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조계사는 물론 전국 각 사찰에서 49재를 지낼 것을 결의했다. 그러자 민주진영은 불교계가 추진하는 49재일인 3월 3일을 ‘3 · 3 고문추방민주화대행진’으로 명명하고 전국적인 추모의 분위기 속에 대행진을 준비했다. 그리고 당일 지선 스님을 비롯한 20여 명의 스님과 민불련, 대불련 소속 학생, 신도 수백 명이 조계사로 들어가려다 경찰의 저지에 막히자 사찰 앞 노상에서 천도재를 지냈다. 또한 5월 16일에는 청화, 지선, 성연, 명진 등 조계종 스님 751명이 시국성명서 〈민주화를 위한 우리의 견해-4 · 13조치 철회와 민주개헌을 촉구하며〉를 발표했다.
한편 5월 18일 광주 원각사에서 원각사 불일청년회와 대불련 회원 100여 명이 ‘5 · 18 광주희생민주영령추모법회’를 개최했는데, 법회 도중 경찰이 난입해 무차별 폭력을 자행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격분한 출 · 재가 불자 5천여 명 등 1만여 명이 5월 27일 원각사 앞 가두와 금남로 일대를 가득 메우고 ‘원각사 경찰난입 및 불교탄압규탄대회’를 열었다. 그리고 같은 날, 민주당과 종교계, 재야단체 등이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발족하여 4 · 13 호헌조치 철회 및 직선제 개헌 공동쟁취를 선언했다. 이 선언에는 함석헌, 문익환, 김대중, 김영삼 등과 함께 석주 스님이 고문으로 참여했고 박형규, 계훈제, 송건호, 고은 등과 함께 지선 스님이 상임공동대표로 참여했으며 청화, 지선 스님이 지역 · 부문 공동대표로 참여했다. 또한 성연, 진관 스님이 상임집행위원으로 참여했고, 고광진 의장을 비롯한 민불련 2기 집행부가 실무진으로 참여해 불교계의 연대활동을 이끌었다.
그런데 이 모든 움직임은 여익구라는 한 인물이 불교계에 제시한 사회참여와 자주권 회복이라는 당위성에 대중들이 호응한 결과로서, 지금도 그를 일컬어 민중불교의 대부라고 부르는 데 이견이 없다. 그러나 3년 반의 긴 수배 기간 동안 참으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6월항쟁에 따른 직선제 개헌과 이후 대선정국에서 김대중계와 김영삼계가 분열함으로써 군부독재를 종식시키지 못한 탓에 재야운동권에 이어 불교계마저 이합집산을 거듭했다. 이에 따라 민중불교 운동도 상당 기간 갈피를 못 잡고 원활한 연대활동에 지장을 초래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수배 중 집필한 《민중불교철학》을 1988년 11월 민족사에서 출판한 여익구는 1989년 7월 체포되어 3개월여의 구속 기간을 거쳐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도피 기간 중 1987년 6 · 10 대회의 명동성당 농성현장에서 가족을 상봉하여 아빠 얼굴도 기억 못 하는 어린 아들과 스티로폼 바닥에서 며칠 함께 지낸 일과, 역시 수배 중이던 전태열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에게 은신처를 제공했던 일들이 나중에 알려지기도 했다. 이후 민통련의 뒤를 이은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에서 민주쟁취위원장을 맡았으나 업무 중 다시 구속되었다가 4개월 만에 집행유예로 석방되기도 했다.
이후 1989년부터 진행되기 시작한 동구권 몰락과 1991년의 소련 해체는 재야운동권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1990년의 3당합당은 김영삼을 대통령으로 당선시켰지만 곧바로 부산 · 경남지역 재야운동권의 절멸을 초래했다. 당시에는 재야 출신 인사들이 적지 않게 국회의원으로 진출해 있어, 그런 저변의 사정이 여익구를 정계 도전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그가 광명에서 준비한 1992년 총선은 사면복권이 안 되어 포기해야 했고, 이후에도 몇 차례 도전이 있었으나 끝내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의 이력에 몽양 여운형 선생 추모사업회 부회장, 역삼노인복지관 관장,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 후보 정책특보, 한국남동발전 감사, 한국지도자 육성장학재단 이사장 등이 부가되었지만, 2012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파란만장했던 세상과 하직하고 말았다.
불편하지만 넘어서야 할 진실
여익구가 품었던 민중불교의 기본개념은 그가 펴낸 《불교의 사회사상》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다음의 문장으로 잘 대변된다.
‘삶’의 현장에서 역사나 사회의 구조를 도외시하고 인간이나 사회를 말한다면 그것은 추상과 관념이 되어 구체적인 현실을 도피하게 된다. 그런 ‘종교’는 생동하는 종교가 아니라 이미 죽은 종교다. 존재의 본질을 정견(正見)한 데서 출발한 불타의 가르침은 오늘날 이데올로기화된 모든 개념, 이상, 주의들을 좀 더 근원적인 입장에서 비판할 수 있는 힘을 준다. 따라서 불교는 ‘근본주의(Radicalism)’이다. 아니 주의(主義)라는 말 자체까지도 하나의 절대개념으로 보아 그것을 초월한다.
이것은 일찍이 만해가 ‘마르크스주의가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고 한다면 마르크스주의도 종교’라고 설파한 것만큼이나 깊은 종교적 통찰력을 내비친 것으로, 불교의 반야공관을 사회운동의 논리로 풀이한 것이라 하겠다. 민중불교에 대해 많은 염려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면 폭력의 문제, 계급투쟁적 성격의 문제 같은. 그러나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폭력이든 계급이든 정의(正義)의 문제만큼이나 쉽게 판가름하기 어려운 과제이다. 그래서 불가의 계(戒)는 개차법(開遮法)을 허용하지 않는가. 단하(丹霞) 선사를 예로 들겠다. 불상을 불살라버린 단하의 죄는 절도죄인가 아니면 기물파손죄인가?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
이영근
불교출판인. 동국대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대불련 18대 대의원회 의장과 총무간사를 거쳐 불교사회문화연구원 연구간사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