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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신적 성품
제목 : 신적 성품의 특징과 내용(1)
성경 : 벧후 1:5~7
찬송 : 463장
저자 : 이삼규목사
출처 : 20230709 낙양교회 주일 낮 예배
벧후 1:5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벧후 1: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벧후 1: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우리는 하나님을 앎으로 ‘신적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적 성품의 내용은 어떤 것입니까? 우선, 신적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것을 마치 하나님과 내가 하나가 된다는 것 즉 ‘신인합일(神人合一)’의 경지에 이른다는 식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생각은 하나님이 세상 만물과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는, 즉 ‘모든 것이 신적이고, 신도 만물과 다를 바 없는 존재’라고 믿는 ‘범신론(汎神論)’적 발상에서 기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인간은 아무리 최고의 경지에 이른다고 할지라도, 존재적으로 하나님의 수준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인간은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모든 만물은 그분에 의해 지어진 피조물입니다. 이 간극을 넘을 수는 없습니다.
√신적 성품이란 무엇인가?
벧후 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성경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image)으로 지음 받았다고 말하기도 하고(창 1:27),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게’(모르포쎄)하라고 권면합니다(갈 4:19). 이것은 하나님의 인격적이고 성품적인 특징을 반영하라는 것이지, 하나님처럼 되라는 것은 아닙니다. 태양과 그 태양 빛을 반사하는 거울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하지만 빛을 비춘다는 점에는 유사합니다. 그런 차이입니다. 거울은 태양도 빛도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하여 그런 존재입니다. 마치 물을 담은 그릇처럼,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인간은 하나님의 본성을 담아 드러내는 ‘형상’도 될 수 없는 ‘절대 의존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인간이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은 뚜렷한 반역의 징표입니다. 하나님의 본성을 닮지 않은 채, 다만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무모한 교만이고 어리석음이며, 그것이 곧 악한 자 마귀의 거짓되고 헛된 미혹에 속은 마음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창 3:5). 세상은 하나님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처럼 되려 합니다. 스스로 전능자인 것처럼 행세하려고 하고,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통제하며, 무소부재하고, 스스로 창조주인 체 행세합니다. 결국, 자신이 모든 것 속의 모든 것이 되어, 그 지극한 영광의 자리에 영원토록 서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바벨탑입니다(창 11:9).
베드로후서가 가르치는 신적 성품은, 이와 본질적으로 다르며 근본적으로 다른 방향을 하고 있습니다. 4절에서 ‘신적 성품(신성한 성품)’(쎄이아스 푸세오스)에서 ‘성품’으로 번역된 말은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각기 ‘종류대로’ 지으셨다고 할 때 그 ‘종(種)’(푸시스)에 해당하는 용어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개념에는 어떤 존재적이고 본질적으로 다른 본성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확실히 그러합니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을 통해 거듭난 성도는 본질적으로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 갇힌 자연인의 본성과 다른 본성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후서 1:4절 전후 문맥이 가르쳐 주듯이 신적 성품이란, 하나님을 떠나 ‘죄와 죽음’ 아래 갇힌 세상과 함께 변질된 인간 본성 안에서는 전혀 찾을 수 없는, 장차 오는 하나님 나라의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오직 그의 신적 능력으로 말미암아 받은 성도에게만 있는 영적 본질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보석을 담은 보석함이 보석이 아니며, 태양을 반사하는 거울이 태양이 아닌 것처럼, 하늘에 속한 이런 영적 본성이 곧 창조주 하나님 자신의 능력이나 그분의 고유한 하나님만의 본성을 나누어 가진 것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하나님 자신의 본성이 아니라, 단지 ‘신적인’(쎄이아스) 본성을 받은 것이며,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신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 11:14; 벧전 1:16)는 말씀, 혹은 이와 같이 베드로전서에서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5)는 요구를,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아갈 ‘새로운 인류’를 내다보며 그런 새 백성에 합당한 보다 내면적이고 인격적인 자질을 지목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적 성품이란, 인간이 무슨 신비한 종교적 경험을 통해 하나님과 같아지는 비결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인간의 본성에 영적이고 본질적인 생명의 변화가 없이도 가능하다고 믿는 윤리-도덕적인 성품 함양의 수준을 가리키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원래 의도하신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람을 회복하고자 하시는 복음의 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언약의 성취를 따라 종말에 주신 복음, 곧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을 통해, 믿는 이에게 죄와 죽음을 이긴 ‘생명과 경건’의 본성을 주시고, 그를 그 하늘의 생명과 경건을 받아 누리는 신적 성품의 사람, 새 하늘과 새 땅의 사람, 하나님께서 원래 의도하신 사람다운 사람으로 만들어 가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신적 성품은 소극적으로는 거짓 교사들의 공략을 예비하는 전략이며, 적극적으로는 교회로 하여금 장차 임할 새 하늘과 새 땅, 그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백성으로 준비시키는 결정적인 방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새 하늘과 새 땅, 그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백성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이 곧 신적 성품을 가지는 것입니다.
√‘유기적이고 점진적인’ 성품의 성장
√벧후 1:5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벧후 1: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벧후 1: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오늘 본문에 나타난 신적 성품의 덕목들은 서로 유기적이라 할 수 있습니까? 즉, 믿음과 덕, 지식과 절제, 인내와 경건, 그리고 형제 우애와 사랑은 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모두가 하나로 묶일 수 있는 어떤 통합적인 본질이 있는 덕들입니까? 아니면 따로따로 떨어져 서로 본질적 관계를 설명할 필요가 없는 덕목들입니까?
혹자는 이런 여덟 가지 덕목들이 당시 헬라 문화에서 인구에 회자되던 산발적인 덕목들을 모아 놓은 것이라 보기도 하지만, 베드로후서의 문맥에서 신적 성품이, 생명과 경건에 이르게 하는 모든 신적 능력을 통해 성도의 인격 안에서 함께 자라는 것이라고 이해할 때, 그 여덟 가지 덕목들은 서로 깊은 연관성이 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더 명확히 말하면, 믿음에서 시작해서 사랑에 이르는 이 여덟 가지 덕목들은 본질상 모두 사랑(아가페)에서 시작하고 사랑에 근거하며 사랑을 통하여 격려받는, 본질상 사랑으로 향하고 결국 사랑에 이르는 덕목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도 주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와 평강, 생명과 경건의 모든 능력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근거한 것이요, 그 사랑의 결과이며 그 사랑은 자신에게로 나아가게 하는 모든 신적 능력을 공급받는 통로입니다. 덕(德) 역시, 사랑으로 촉발되지 않는다면 행할 수 없는 믿음의 능력입니다. 지식은 어떠합니까? 사랑할 때,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고자 할 때 적절한 덕을 세울 수 있는 지식을 찾게 됩니다. 인내도 사랑 없이는 불가능하며(참조, 유 1, 21절), 경건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참된 표현입니다. 형제 우애 역시 사랑으로 공급되며, 제한 없는 원수 사랑에 이르는 교회 공동체의 중요한 덕목인 셈입니다.
이처럼 신적 성품의 여덟 가지 덕들의 근본적 뿌리요, 추진하는 동인이요, 결국 거기에 이르는 최종적인 열매는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적 성품으로 열거된 여덟 가지 덕은, 믿음에서 시작하여 사랑에 이르는 연속적 성장 단계를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신적 성품의 목록에서 ‘사랑’은 맨 끝에 위치합니다. 마치 믿음으로부터 시작하는 신적 성품의 최종적인 열매가 사랑이라고 역설하는 듯합니다.
√믿음, 덕(德)
√벧후 1:5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신적 성품은 ‘믿음’(피스티스)에서 출발합니다. 이런 점에서 믿음은 이후에 열거되는 다른 덕들 가운에 하나라기보다는, 이 덕들의 기초가 되는 중심적 요소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은 신적 성품의 기초가 되는 반석이며, 또한 ‘생명과 경건’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모든 신적 능력이 샘물처럼 솟아나는 반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생명과 경건에 이르게 할 그 모든 신적 능력이 ‘이미 주어져 있는’(1:3) 저장 창고와 같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믿음의 창고에서 그 신적 능력들을 꺼내다가 지속적으로 자신의 신적 성품의 성장을 위한 자양분으로 삼는 것입니다. 신적 성품에서 이토록 믿음이 중요한 기초가 되는 이유는, 믿음 자체보다 믿음의 대상 때문입니다. 즉, 믿음은 그 대상이신 ‘하나님과 주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분을 앎으로써, 그 모든 신적 능력을 ‘지속적으로’ 자신의 것으로 삼아 자신의 신적 성품의 성장을 도모하게 하는 방편이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통상 ‘믿음이 크다’든지 ‘믿음이 세다’든지 하는 것은, 그 성도의 믿음이 겉으로 드러나는 왕성한 활동이라기보다,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그의 주되심, 그의 구주 되심, 그의 부르심과 택하심, 그 보배로운 약속, 이미 주어진 생명과 경건의 모든 능력 등, 그 믿음의 대상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능력과 성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것, 주고 계신 것, 주실 것을 온전히, 충만히, 받아들이고 누리는 능력이 믿음의 참된 능력입니다. 그 받아들인 것을 발현하는 것, 드러내는 것, 기억하고 활용하는 것이 또한 믿음의 능력이지만, 우선적으로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과 그가 주신 은혜를 받고, 알고, 누림으로써, 그를 아는 지식에서 열매 맺는 신적 성품에 필요한 모든 자양분에 있어 부족함이 없게 하는 것, 그것이 믿음의 효력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덕(德)’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덕’(아레테)은 비교적 사람 사이의 관계 속에서 발휘되는 어떤 신앙적이고 윤리적인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런 특징은 성경적인 것으로,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고전 8:1; 고전 14:4)라는 말씀의 경우처럼, 덕이란 사랑에 의해 촉발되고 격려받아 상대방을 온전히 세워 주려는 선한 행실입니다.
오늘 본문 5절의 전후 문맥 안에서, 그 좋은 예가 나옵니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부르실 때 그의 영광과 ‘덕으로써’(아레테) 부르신 사실입니다. 여기서 하나님 자신의 덕이란, 그분의 고유한 어떤 탁월한 자질이라기보다, 그가 부르신 자들이 끝까지 그 부르심의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인도하시는 일에 실패함이 없는 그분의 인격적 능력, 곧 그분의 용서와 인내, 온유와 지혜, 그 신실하심까지를 포함하는 사랑의 능력을 의미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적 성품이 말하는 ‘덕’ 역시 하나님께서 부르신 형제들을 대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에게 베푸시고 보여 주신 하나님 ‘자신의 덕’을 따라, 우리도 그렇게 형제를 붙들어 주고 그를 온전히 세우기까지 돕고 견디며 끝까지 기다려 주는 신실한 사랑으로 말미암은, 신성한 덕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주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 그 믿음으로 형제와 이웃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그들을 유익하게 하고 그들을 온전히 세워 주고자 하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와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덕’입니다. 믿음에 더하여 반드시 공급되어야 할 신적 성품의 중요한 자질입니다. 만일 믿음에 덕이 공급되지 않으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요? 그런 믿음은 종종 방향을 잃게 됩니다. 자주, 그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의 말씀과 분리된 자기 자신의 종교적 확신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이렇듯 믿음을 자신이 가진 ‘종교적 확신’에 국한하고 거기서 멈추면, 종종 불행한 결과를 가져오고 맙니다. 통상 ‘종교적 행위나 그 열심’으로 잘못 이해된 믿음은, 특징적으로 ‘덕’을 결여하게 됩니다. 예컨대, 믿음이 크고 세다고 하는데, 그 믿음으로 주변의 사람들을 상처 주며 실족하게 하는 경우입니다. 방언하고 병 고치고 예언하는 등, 모든 은사가 차고 넘치지만, 공동체 안에서 덕을 세우는 일에 미숙하기 짝이 없었던 고린도 교회가 대표적인 예입니다(고전 14:1-19). 그러므로 믿음으로 산을 옮기고,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릴지라도, 그가 하나님과 교회 안에서,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덕을 세우고 끼치지 못한다면, 그는 믿음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성품을 가진 성도가 될 것입니다.
바로 거짓 교사들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형식적으로라도, 이들은 믿음의 고백을 하는 듯합니다. 주께서 자신들을 피로 값 주고 사셨다고 고백하는 듯이 보입니다. 그래서 신앙고백을 하는 믿음의 공동체 안에 들어와서(2:1), 함께 먹고 마시는 자리에 참여하기도 합니다(2:13). 심지어 성도를 가르치는 교사의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2:3,19; 3:3,4,16). 하지만 이들은 덕을 세우는 일에 실패할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덕을 허무는 데 전념합니다.
특히, 교만하여 영적 권위를 무시하는 일을 아무렇게나 하며(2:10-11), 사도들의 가르침을 무시하고(3:3-4), 성경도 계시로서 경외하는 마음으로 겸손히 대하지 못하고 자의적이고 억지로 풀려 합니다(1:20; 3:16). 또한 믿음이 약한 초신자들을 유혹하여 파멸의 길로 들어서게 만들며(2:14), 성도들에게 헛된 자유를 약속하며 그들을 다시 더러운 데로 빠뜨려 죄의 종이 되게 합니다(2:18). 결국, 이들의 탐욕과 정욕의 부패한 행실로 인해 진리의 말씀, 복음의 길이 훼방을 받게 됩니다(2:1-2). 참으로 뼈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직접적으로, 오늘날도 거짓 교사들의 거짓 가르침이 교회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산을 옮기며 기적을 행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몰려들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모으고도, 현저한 부덕(不德)에 떨어질 수 있습니다. 믿음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오해한 경우처럼, 단지 ‘믿는다’는 고백만으로 천국 간다고 확신하고, 덕을 세우는 일에는 너무나 미숙한 성도, 직분자, 목회자라면, 그가 갖고 있는 종교적 지위나 교계에서의 영향력과는 상관없이, 신적 성품에 있어서는 초보자라고 규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믿음은 있다고 고백하지만, 덕을 세우는 일에 미숙한 교회, 성도, 목회자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덕을 세우지 못한다면, 그의 믿음은 아직 미숙한 초보적 믿음입니다. 아무리 큰 기적을 일으키고, 아무리 많은 사람을 모아도, 그는 ‘큰 교회, 큰 목사’일 수 없습니다. 그저 신적 성품에서 성장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첫 단계에서 유급하는 영락없는 초보자인 셈입니다. 한 영혼을 실족시키는 것을 끔찍한 죄악 저지르는 것처럼 두려워해야 합니다. 지극히 작은 형제들이라도, 그들을 실족시킴으로써 ‘목에 두르고 바다에 빠질’ 무거운 연자 맷돌을 ‘수집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다면, 덕을 세우는 일에 적극적으로 성장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덕을 세우는 데 필요한 모든 영적, 인격적, 실제적 능력을 위해, 믿고 간구하고 힘써 실천해야 합니다. 실천하면서 잘 안 되는 부분으로 인하여 기도하고 몸부림쳐야 합니다. 덕을 세우려는 믿음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향한 열망, ‘그의 나라 곧 통치’가 임하기를 바라는 소원, 그리고 ‘그분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지치지 않은 열정으로 뒷받침됩니다. 하나님의 영광만을 바라고 소원하는 교회의 이러한 거룩한 열정은, 그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 사랑에 응답하는 자신의 뜨거운 사랑에서 피어오르는 불꽃입니다. 믿음 사랑으로 타오르는 불꽃이어야 합니다. 믿음에서 덕을 세우는 성숙한 성품으로 나아가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