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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에 대하여
-몸과 병듦에 대한 성찰-
헤르베르트 플뤼게 Herbert Plugge. 1906~1972
「독일의 의사, 교수.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1943년 다름슈타트 시립병원의 원장이 되었다. 나치당에 입당한 전력으로 제2차 대전이 끝나고 당국의 심사를 받았으나 의료행위를 계속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판명되었다. 1952년부터 1969년까지 하이델베르크 대학병원의 원장으로 일했다.
프랑스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심장 질환을 깊이 있게 연구하면서, 심장병 환자들의 병듦의 양상을 현상학적으로 분석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병원은 의학과 철학을 융합하여 독보적인 업적을 남긴 그를 기려 병동 하나에 플뤼게의 이름을 부여했다. 전후에 작가 장 아메리 <늙어감에 대하여>와 활발하게 서신 교류를 하기도 했으며, 의학적 인간학으로서 전인미답의 경지를 개척한 사유와 성찰은 20세기 후반 유럽의 지식계에 높은 평가를 받았다.」
[서문] 의학적 인간학에서 이해한 행복과 불행의 의미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인간이 처한 상태와 그 무수한 변형이라는, 자연과학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사태를 현상학의 방법론으로 접근해 보려는 시도다. 나는 개별적인 질병 사례를 거듭 처음부터 되짚어 살피면서 현상, 곧 몸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의 연구가 인생 이해에 어떤 기여를 해줄 수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내과의이면서 임상학자인 나는 현상학 연구에 요구되는 방법을 독학으로 깨우쳤다. 그래서 나는 늘 모범으로 여겨온 인물, 곧 볼노브, 보이텐디크, 겝자텔, 메를로-퐁티, 사르트르와 살라지의 연구를 참고해가며 방향을 잡았다.
의사인 필자가 의학에서는 보기 힘든, 지금껏 상당 부분이 알려지지 않은 현상 해석에, 종종 결함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렇게 설명된다. 이 책에 수록된 개별 글들은 언젠가 한 권으로 묶어야겠다는 의도로 쓰인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 전체의 면모는 인간학의 입장에서 접근한 ‘행복과 불행의 이론’을 위한 전혀 새로운 시도임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나에게는 이 글들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시도들, 곧 ‘상태’와 ‘태도’를 각기 상반된 방향에서 해석하려는 시도들이 중요해 보인다.
오랜 세월에 걸친 집필로, 다양한 걱정과 염려로 늘 미뤄지며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간헐적으로 글을 쓴 탓에 이따금 내용이 겹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이런 부족함을 통찰하고도 지금 종합 판을 내면서 결함을 제거하지는 않았다. 독자들이 곧 확인할 것이듯, 그런 결함은 생각이 다듬어지는 발전적 방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의사뿐만 아니라 철학자와 심리학자와 교육학자, 요컨대 분과의 경계를 아우르는 철학적 인간학에 관심을 가진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원래 의학 서적에 쓰는 전문용어는 일반인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표현으로 바꾸었다. 의사이거나 의학 교육을 받은 독자에게는 양해를 구한다.
하이델베르크. 1962년 5월
헤르베르트 플뤼게
Ⅰ허무와 무한
[우리는 왜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는가]
• 팡세, 인간의 조건을 묻다
파스칼은 인간이 가진 모든 본성을 충실히 살피려 노력했다. 이상적으로 그려진 인간이 아니라, 언제나 모순에 가득 찬 구체적인 인간 존재에 주목했다. 파스칼이 펼치는 생각이 겉보기로 체계적이지 않은 것은 모순에 가득 찬 인간 존재와 본질의 구체성을 다루기 위한 피할 수 없는 선택이다. 비체계적인 성격은 다루는 문제의 특성 탓에 생겨난 것일 뿐이다.~~~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요소는, 파스칼의 표현을 그대로 빌려온다면, 인간의 조건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절히 구하는 것이다.
팡세를 펼치고, 특히 앞부분이 다룬 주제를 살피면 실제 심리학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책은 상상, 허영, 자만, 자기사랑, 근심, 두려움, 기쁜, 분노, 충동, 습관, 유혹, 악덕, 착각, 거짓말, 감각 기관의 비판, 우울함, 행복, 증오, 사랑, 열정, 법정 심리학과 언어 심리학의 착상 등 자연스럽게 심리학으로 정리할 수 있으며, 심리학으로 정의해야 마땅할 주제들을 다루고 있기는 하다.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믿었음을 기꺼이 인정한다. 그러나 이내 나는 이게 잘못된 생각이었음을 깨달았다. <팡세>는 심리학이 아니라, 인간학이다. 인간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과 그 동기를 다루는 이론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을 이루는 근본적인 요소를 명징하게 묘사하려는 인간학이다. <팡세>가 실존철학을 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도 잘못된 생각이다. <팡세>는 어디까지나 인간 존재의 본질을 구성하는 궁극적인 요소의 묘사이다.
• 인간의 불행은 어디에서 오는가
단편 139번에서 파스칼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홀로 조용히 방 안에 머무르지 못하는 탓에 생겨난다.” 단편 131번을 참고로 한다면 그 뜻이 명확해진다. “인간은 완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 열정(격정)이나 분주함(사건) 혹은 산만함(오락)이나 열심히 노력함(열중함)이 없는 상태를 견디지 못한다.”
파스칼은 이로써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한다. 일거리, 열정에 찬 활동, 직업, 혹은 취미생활이 없다면, 인간은 불행하다. 그리고 이 불행함은 지루함이라는 특징을 가진다(물론 아무런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우울함에 사로잡혀 있음을 뜻하는 파스칼의 ‘앙뉘‘ennui를 지루함으로 옮기는 게 마땅한지 하는 물음은 논란의 여지를 남긴다). 그리고 단편 171번은 마침내 이렇게 확인해준다. “이런 궁색함에서 우리를 위로해주는 유일한 것은 오락이다. 그러나 오락이야말로 우리가 당하는 최고의 궁색함이자 비참함이다.”
이제 우리는 ‘지루함’과 ‘오락’이라는 두 개의 대비되는 인간 상황과 마주한다. 한편에는 지루함으로 느끼는 불행함과, 다른 편에는 오락, 곧 지루함이라는 불행으로부터 우리를 구해주는 활동인 오락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를 모면하는 것이 대비를 이룬다.
지루함이라는 개념은 인간이 가지는 근본 성정 가운데 하나로 보아야 한다. 그러니까 겉으로 드러난 기분이 아니라, 뭔가 대단히 뿌리 깊은 성정이 지루함이다. 파스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인간의 지루함은 대단히 빠르게 불행함으로 바뀌어 결국 불안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주목했다. 지루함과 불행과 불안은 분명 하나의 공통된 뿌리를 가진다.
우리는 흔히 “지루해 죽겠다”고 말한다. 이런 표현은 지루함과 죽음이 맞물린 연결 고리를 무의식적으로나 반쯤 의식적으로 아주 정확하게 짚어낸다. ~~~~동물은 지루함이라는 것을 모른다.
• 만날 것이냐, 도피할 것이냐
오락이라는 번역은 너무 궁색하다. 파스칼은 이렇게 말했다(137번). “모든 개별적인 활동을 자세히 살피지 않아도. ‘디베흐티스망’divertissement이라는 단어로 뭉뚱그려 이해하면 충분하다.”
디베흐티스망(기분전환, 오락으로 축자 번역될 수 있다)이라는 개념으로 포괄하는 모든 종류의 활동이란 인간이 자기 자신에 향해졌던 관심을 바깥으로 돌리게 하는 일체의 것을 뜻한다. ~~~~그러니까 할 일이 없어 나는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가 하는 물음에 사로잡히는 지루함이나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바깥으로 관심을 돌리게 만드는 것이 ‘디베흐티스망’이다. 이 디베흐티흐는 우연하거나 자의적이거나 그저 경우에 따라 생겨나지 않으며, 본능적으로, 곧 법칙에 따라 일어난다(139번).
“평안을 구한다고 하는 것은 바로 할 일을 찾는 것이다. 뭔가 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내밀한 본능이다.”
단편 글 139번에는 이런 말이 등장한다. “자기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잘 아는 사람일지라도 홀로 있는 적막함만큼은 간절히 피하고 싶어 한다” 인간이 적막함에서, 우울한 기분의 쌓아둠에서, 자기 자신과의 만남에서 마주치는 것을 파스칼은 ‘조건’이라고 불렀다. 이는 곧 인간의 본성 또는 우리가 흔히 말하듯 근본 구조 혹은 실존이다. 적막함 속에서 인간을 사로잡는 것은 바로 인간의 실존적 본질이다. 인간이 본능적으로 기피하고자 하는 것은 주루함이라는 상황에서 이뤄지는 자신과의 만남이다. 이 자기와의 만남은 자신의 참모습, 실존의 조건을 숨김없이 드러나게 한다.
그러나 이제 무엇을 구하는지, 정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인간에게 물어보면, 대개 이런 답이 돌아온다. 평안함 혹은 한가로움. 정말 그럴까? 인간의 인생과 그가 하는 일을 지켜보면, 오히려 정반대가 사실임 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말과 실제 행동 사이의 이런 불일치는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파스칼은 이렇게 설명한다(139번). “그 밖에도 인간은 은밀한 본능을 가진다. 우리의 근원적 본성으로 남은 이 본능은 인간으로 하여금 행복은 실제로 오로지 평안함에서만 구할 수 잇을 뿐, 분주한 활동에서는 찾을 수 없음을 깨닫게 한다. 서로 상반되게 작용하는 이 두 본능 탓에 인간은 자신의 영혼 깊숙이 혼란스러운 계획을 세운다. 이 계획은 인간으로 하여금 평안함을 분주히 활동하는 가운데 찾게 한다.”
우리는 인간 본성의 근원적 모순과 맞닥뜨린다. 파스칼은 이 모순을 인간의 두 가지 본성이라는 이론으로 설명한다. 인간은 원죄 이전에 1차 본성을 가지며, 이 본성은 원죄 탓에 산산 조각이 나서 인간의 2차 본성, 곧 무기력한 타협인 2차 본성을 만들어낸다. 오늘날 우리는 아쉽게도 이 두 가지 본성 이론을 전래된 자료가 없는 탓에 자세히 살펴볼 수 없다. 그러니까 지루함이라는 상황에서 놀라 기피하게 되는 것이 자신과의 만남이다. 지루함의 상황에서 밝혀지는 자아의 측면은 부정적이다. 부정적이라는 말은 인간이 본능적으로 이 측면을 숨기거나 회피하려 한다는 뜻이다. 자아의 이런 측면은 불편하고 부담스러울 뿐만 아니라,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측면이 드러나지 않도록 가리고 숨길 수만 있다면 어떤 수단도 허용된다. 자기와의 만남의 부정적인 성격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묻는다면, 파스칼의 단편 164번이 그 답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오락을 앗아버리면 인간은 지루함으로 말라비틀어진다. 그럼 인간은 자신을 올바로 살피지도 않고 자신은 아묵서도 아님을 경험한다.”
자아의 바탕에서 끓어오르며 발언권을 차지하는 것은 허무함, 끝 모를 심연 그리고 지루함과 슬픔과 불안함에서 겪는 공허함이다. 다시금 우리는 지루함과 우울함과 불안 사이의 기괴한 유사함을 확인한다. 오로지 자기 자신과 대면한 인간, 자신에게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인간(오락이 없는)은 기묘하게도 자신의 자아를 긍정적이 아닌 부정적인 측면에서 발견한다. 그리고 이 발견은 공개적으로 투명하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지루함으로 위장된 채 이뤄진다.
• 지루함의 장막 뒤에 숨은 허무함
지루함은 허무함을 감춘 장막이다. 그 안에서, 그곳으로부터 자기와의 만남을 통해 솟아오르는 심연의 얼굴이 지루함이다. ~~~이 장막이 찢어지면 인간은 고스란히 드러나는 허무함에 직면한다. 그럼 헐벗은 불안이 인간을 엄습한다.
인간은 자기와의 만남을 통해 자아의 부정적인 측면,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히는 측면을 바라보는 안목을 얻는다. 자기와의 만남은 이처럼 파괴적으로 무화시키는 자아의 측면을 드러낸다. ~~~부정적인 측면이 자아 안에 포함 되어 있기에, 바로 자아의 본질 가운데 하나이기에, 그처럼 자기와의 만남은 두려움을 불러 일으킨다. 자아를 함께 구성하는 바로 그것이 자아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지루함은 “인간 본성 안에 뿌리를 가진다”(단편139)는 파스칼의 말은 바로 이런 사정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 읽어야 한다.
허무함은 인간 본성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다. 허무함은 인간 존재에 내재하는 한계의 가능성이다. 시간과 더불어 현세에서 살다가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한스 쿤츠는 그의 위대한 상상력의 인간학에서 허무함을 ‘잠재적 죽음’이라 불렀다. 신학자라면 허무함이란 인간 존재의 유한함이라고 말하지 않을까. 파스칼은 이를 단적으로 자신의 방식대로 표현한다(139번). “곰곰히 생각을 더듬어가며 우리 불행의 원인을 알아내려 했을 때(......) 그 원인은 죽음을 맞이랗 수밖에 없는 우리의 허약한 존재(조건)라는 자연적인 곤궁함이다.”
파스칼의 팡세를 거듭 음미할수록 ~~~우리는 거듭 인간이 무한함과 허무함 사이에 위치한 존재라는 언급과 마주친다. 이런 어중간한 위치에서 확실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존재가 곧 인간이다. ~~~~무한함과 허무함은 그 근본적인 다름으로 인간이 개념으로 파악할 수 없는 힘이다. 무어라 말하기 힘든 이 힘들은 그러나 인간을 장악하고, 말하자면 인간에 침투해 들어와 인간 존재를 지배하고 규정하며 정의한다. 인간 존재는 바로 이 무한함과 허무함이라는 힘들로 구성된 존재다. 아무것도 없음이라는 허무함은 일종의 심연이다.
“모든 사물은 비밀을 숨기고 있다. 모든 사물은 신을 가린 장막이다.” 파스칼이 1656년 드 루이네 양에게 보낸 편지에 쓴 글이다. 인간에게 허무함을 숨기는 장막은 지루함이라는 장막이다. “허무함을 직면할 능력이 없다”고 말하며 파스칼은 인간을 정의했다(72번). 다시 말해서 인간은 허무함 그 자체를 파악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허무함의 작용을, 인간 존재를 ‘잠재적 죽음’으로 지배하는 유한함이라는 특별한 특징을 알아볼 수는 있다. 유한한 존재, 한계, 죽음, 죽을 수밖에 없음이 지루함이라는 장막 뒤에서 찾아지는 허무함이다.
모든 인생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것, 모든 인생에 언젠가는 종지부가 찍힌다는 것만 이야기 하고자 함이 아니다. 이 유한함은 인생의 끝에서만 새겨지지 않는다. 그저 단순한 마침, 끝냄에 불과한 게 유한함은 아니다. 지극히 구체적인 의미에서 죽음은 생명에 내재한다. 다시 말해서 인생을 사는 내내 우리는 죽음과 더불어 산다. 인생이 죽음을 향해 흘러가지 않고서는 발전한다는 것,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생각될 수 없다. 존재의 풍성함은 오로지 인생이 계속 죽어가기 때문에만 얻어진다. 다시 말해서 죽어감에서, 죽어감을 통해 인생은 새로워진다. 지극히 단순한 일상에 이르기까지 생명에 내재하는 , 생명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며 새롭게 창조하는 죽음은 끊임없는 일과 활동이다.
우리는 매 순간 살아진 인생을 죽어가며 새로운 인생으로 얻어내야만 시간과 공간 안에서 움직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끊임없이 새로운 것과 마주하고 이 새로운 일을 처리하고 처리된 것으로 흘러 보내야 새로운 공간과 시간을 맞이할 수 있다. 죽음이야말로 생성과 앞을 보며 살아감의 보증이다. 죽음이 없다면 인생은 정체에 빠진다. 폰 겝자텔은 아주 설득력 있게 이 정체야말로 우울증과 강박증의 중요한 요인이라고 확인했다. 정체는 인간의 존재와 생성을 공허함이 사로잡는 것이다. 이제 앞서 말했던 것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지루함에서 자기와의 만남이 일어난다! 이 만남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측면을,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보여주는 측면을,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측면을 발견한다. 물론 이 발견은 부정적이다. 우리는 허무함을, 잠재적 죽음을, 인생에 내재하는 죽음을 지루함이라는 것을 통해 만난다. 물론 죽음은 계속 새로움을 만들어주는 생성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죽음이며, 끝이며, 심연이다.
• 무관심, 피로감, 무력감 그리고 공허한 기다림
앎은 자신의 존재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현실이 된다. 이런 사실을 파스칼 보다 더 진지하게 생각한 사람은 없다.
피상적으로 보면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으며, 특정하기 힘든 ‘신경질환’을 앓는 사람이 많이 있다. 부분적으로는 심혈관계 이상이나 자율신경계 장애를 일으키는 질환이다. 사람들은 피로감, 무기력, 집중력 저하, 무관심 증상을 호소한다. 상대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비정상적인 수면 욕구를 보이기도 한다. 하루를 시작하려면 12시간에서 13시간 정도는 잠을 자야만 하며, 그래도 깨어날 때 피곤하기만 하다고 환자는 호소한다. 요컨대, 통상적인 진료대로 한다면 모든 환자가 신경쇠약증을 앓는 것만 같다. 그러나 정확한 의미에서 노이로제는 분명 아니다. 이런 환자는 대개 정신과적으로 보아도 정확한 진단을 내리기 힘들다.
면담을 해보면 모든 환자가 공통으로 보이는 특징이 있다. 어떤 것에도 관심을 가지지 못하는 무관심이 그 특징이다. 이들은 뭔가 마음을 사로잡거나 사랑스러운 것을 보지 못한다. 모든 것이 심드렁하기만 하다. 어떤 구체적인 내용은 조금도 알고 싶지 않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 빠지는 과정은 돌연 그런 게 아니라 점차적으로 아주 완만하게 이뤄진다. 이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일이 전혀 없다. 오히려 반대로 매우 뱌ㅏ쁜 나날을 보낸다. 대개 고되고 오래 걸리는 일로 밥벌이를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일을 하면서도, 간신이 낸 여가에도 내면의 만족이라고는 전혀 모른다. 고통스럽다거나 특별히 아프다고 느끼지도 않는다. 그러나 신경질적이고 지친 나머지 휴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면담을 하다보면 언젠가 이 환자는 무언가 기다린다는 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어떤 여성 환자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실종된 남편을 5년 혹은 6년 째 기다린다. 또는 피난민으로 국경을 넘어와 마침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기회를 기다린다. 벌써 오래전부터 지금 하는 일이 품위 있는 직업으로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 환자도 있다. 실제로 희망이 실현되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환자는 대개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을 회피한다. ~~~~마침내 목표는 의식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남는 것은 오로지 기다림일 뿐이다. 공허한 기다림으로 환자는 애만 태운다.
기다림은 환자마다 근본적으로 다르다. 목표가 그냥 동기에 그치지 않고 얼마나 실질적인 내용을 가지는지, 그 내용이 현실감을 가지고 채워질 수 있는지 하는 것이 이 기다림을 다르게 만드는 결정적 차이다. 결혼식을 기다리는 신부와 메시아를 기다리는 유대 민족은 분명 다르게 평가해야 하는 존재 형식이다. 간절히 추구하는 목표가 실현될 수 있는 것이라면, 이 목표는 풍요한 내용으로 인생을 채워준다. 심장을 채우는 진정한 갈망으로 기대하는 목표는 우리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성이 없는 목표는 가슴을 짓누르는 부담이며 고통의 대상으로 경험될 뿐이다. 언젠가 목표가 도달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이는 순간, 당사자는 그대로 무너져버린다.
바로 우리의 신경쇠약증 환자가 그렇다. ~~~~진정한 갈망이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 따뜻한 온기라고는 사라진 지 오래다. 현재를 채워주는 미래의 희망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환자의 상태는 불안에 사로잡히는 지루함과 비슷하다. 충족을 기대하며 간절한 희망을 품는 사람이 생동감을 보여주는 반면, 이 환자는 공허하며 움직임이라고는 없는 단조로운 인간이라는 인상을 준다. 환자는 무너져 내리는 일이 결코 없다. 의식적으로 실망하고 괴로워하지도 않는다. 그냥 지루해할 뿐이다. 이런 환자는 살아낸 시간을 척박하고 곤궁한 것으로 바라볼 따름이다.
• 허무라는 병
이런 환자는 분명 파스칼이 앙뉘, 즉 지루함이라고 부른 것에 시달린다. 지루함, 이것은 되는 것이 없는 무료한 시간이며, 진정한 목적이 없는 기다림, 미래가 사라진 허망함이다. 이런 환자에게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점은 지루함으로부터 한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은 지척에 절망이 있다는 사실이다. 거의 의식되지 않는 이런 절망을 두고 키르케고르는 가장 심오한 불안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쳤다.
싸워보지도 않고 손을 털며 인생을 던져버리려 한다. ~~~~별 것도 아닌 짜증, 웃기지도 않은 질투, 근거라고는 없는 모욕 등등. 고작해야 하루 정도 기분 나빠하면 털어버릴 수 있는 일에 목숨을 걸어버리는 이런 행태는 절망 말고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인생에서 충족의 기대가 사라져버렸다는 이유로 손을 뻗치는 심연에 자신을 맡겨버리는 것이 절망이다.
기다림이 공허함에 빠지며 인간의 모습에 결정적인 변화를 불러오는 것이 근본적으로 병리학적인 상태가 아니며, 건강한 사람에게서 숨겨져 있다가 드러나는 정상적인 상태라는 점은 우리가 해명해야 하는 문제다. 그러니까 이런 공허한 기다림은 질병이 아니라 병적인 상태다. 자기와의 만남에서 자아의 측면, 부정적인 것으로 밝혀지는 측면, 유한함, 곧 잠재적 죽음이라는 측면을 발견하는 것은 인간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이 부정적 측면만이 인생을, 또는 이 부정적 측면이 주로 인생을 규정한다는 사실, 곧 부정적 측면의 지배는 몸의 장기가 이상을 일으키는 질병은 아니지만, 심신에 깊은 타격을 준다는 점에서 분명 병적이다. 이런 현상을 프로이트는 죽음 충동이라는 법칙으로 묘사한다.
• 삶은 상상력으로 꾸며낸 연극일 뿐
파스칼은 인간이 오락, 곧 주의를 돌리려는 행동에 빠진다고 말했다. 또한 파스칼은 다른 대목에서 인간은 지루함을 피하려 일을 부풀려가며 꾸며내고 선동하기도 한다고 말한다.
단편 183번에서 파스칼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심연을 볼 수 없게 방해하는 무엇인가 만들어놓고 아무런 근심 없이 심연을 향해 나아간다.“ 이처럼 시야를 가리는 무엇인가 꾸며내는 행동을 파스칼은 ‘상상력’이라고 부른다. 성급하게 ‘망상’이나 ‘공상’이라고 옮겨 놓으면 파스칼이 염두에 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는 있다.
파괴적인 힘을 시야에서 가려버리는 인간은 무엇인가 떠올린다. 그러나 떠올림은 무해하게 들리기는 하지만, 우리가 앞서 살펴 본 인간본질의 의미를 곡해하는 속임수를 쓴다. ‘떠올림’이란 다름 아닌 동기의 탄생, 개인의 심리적인 기초인 동기의 탄생을 뜻하기 때문이다. 파괴적인 자기와의 만남, 허무함의 엄습을 피하려고 ‘떠올림’을 통해 심리적인 것을 만들어 낸다.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도피, 허무함의 엄습으로부터의 회피를 위해 ‘떠올림’은 동기라는 심리적 사실을 만들어 낸다. 그러니까 동기부여는 엄밀하게 표현하자면, 변조하고 위조하는 속임수의 과정에서 일어난다.
~~~인간은 이 현상이 없이 살 수 없으며, 원한다고 피할 수도 없다. 말하자면 인간으로 살아감의 근본이랄까, 인간이 영혼을 가진 존재인 한에서, 상상과 동기는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카프카는 인간이 원죄를 지은 이래, 또 바로 그 원죄로, 선과 악을 구별할 줄 알게 되었다고 썼다. 그러나 선과 악이 무엇인지 깨닫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 깨달음은 인간에게 그에 걸맞게 행동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이런 행동은 자기 파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이 두려워하는 것이다. 카프카의 메모는 계속된다. “차라리 선과 악의 깨달음을 없었던 것으로 되돌리고 싶다.(.....) 그러나 일단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는 없으며, 단지 흐릿하게 만들 수 잇을 뿐이다. 이처럼 흐릿하게 만들어 속이려는 목적으로 생겨나는 게 동기 부여다. 세상은 온통 이런 동기 부여로 가득 차 있다. 아니, 눈으로 보는 모든 세상은 한 순간이나마 평안을 누리기 원하는 인간의 동기 부여와 다르지 않다.
모든 심리적 동기의 본질은 이런 기만적인 힘이다. 이런 기만적인 힘을 판단하여 알아볼 때 우리는 특히 실존의 근본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나 사태를 자연이라는 옷을 입힌 것처럼 감추는 심리적 재료의 비유적인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자살, 개인의 문제인가 인간 본연의 문제인가]
• 자살의 원인
1949년과 1950년에 자살을 시도했다가 병원으로 실려 온 환자들을 치료하고 연구하며 얻은 몇 가지 경험이다.
10 환자의 연령: 50%는 아직 30세에 채 이르지ㅐ 못했다. 그리고 45세 미만의 호나자가 80%에 달했다.
2) 물질적 조건: 자살 시도로 내모는 것이 사회적 곤궁이 아니다.
3) 질병의 고통: 자살 시도를 한 사람은 건강하고 젊은 환자였다.
• 자살의 심리적 동기는 무엇인가
• 관계 결손, 냉소, 불신으로 공허함만 남아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의심이 무척 강하다는 사실이다. ~~~모든 것이 이들의 눈에 거짓말이었으며~~~딱할 정도로 진짜 우정이라는 것을 몰랐으며 진지한 사랑도 해보지 못했고, 모든 관계를 그저 즐기고 흘려보내는 사건 정도로만 여겼다. ~~~어른이 나쁘다고 타이르는 것은 그저 절반 정도만 이해했으며, 좋다는 것도 그저 4분의 1정도만 받아들였다. ~~~아무 생각 없이 결혼을 하고 그저 닥치는 대로 직업을 골랐으며, 무작정 임신을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낙태를 저질렀다. ~~~인생을 막 살아가는 방식 그대로 죽음을 다루었다. ~~~~한마디로 이들은 외로웠다.
여기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앙뉘, 곧 지루함이다. 그밖에 중독성이나 변태 성향으로 보이는 것도 위장한 지루함일 뿐이다. 나는 자살 시도를 설명해줄 만한 개인의 그 어떤 심리적 갈등을 찾아내지 못했다.
공허함에 사로잡히지 않게 막아주는 힘은 무한함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이 무한함이란 무엇인가? 파스칼은 무한함 그 자체를 알 수는 없지만, 그 작용은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인간은 자신을 구성하는 것인 동시에 파괴시킬 수도 있는 공허함(허무함)뿐만 아니라, 마찬가지로 자신을 이루는 무한함과도 관계한다. 공허함 그 자체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공허함은 말 그대로 없음이니까), 그 강력함을 피할 수 없이 겪어야만 하듯, 무한함도 마찬가지다. 우리 인간은 무한함 그 자체를 파악할 수 없으며, 오로지 그 힘의 작용만 확인한다. 공허함은 물론이고 무한함의 힘 역시 가면을 쓰고, 베일을 드리운 채 나타난다. 지루함은 공허함이 작용하는 위장된 방식의 표현이다.
• 세속적 희망과 근원적 희망
우리는 무한함을 가리고 있는 가면이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무한함의 힘을 숨기고 있는 것은 어떤 단 하나의 형상만은 아니다. 이런 무수한 가면 가운데에는 희망도 있다. 우리의 고찰에서 희망이라는 개념을 끌어들이면 피할 수 없이 오해가 빚어질 수 있다는 위험을 나도 잘 안다. 심리학 이론과 체계에 희망을 다루는 자리가 없다는 사실도 나는 조심스럽게 인정한다. 도대체 이 희망이라는 것은 어떤 분야로 다루어야 하는지 알 수 없어 아리송하기만 한 대단히 어려운 문제다. 희망은 감정인가? 의도? 어떤 환상? 희망은 이를테면 일종의 상상일까?
내가 염두에 두는 희망은 우리 존재를 초월하는 것, 우리 존재를 넘어서는 관계의 표현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희망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내용을 가진다. 세상 안에서, 곧 존재를 넘어서지 않고 가지는 희망은 미래에 찾아올 세속적인 것의 선취다. 이런 희망은 우리 힘으로는 어쩔 수 없지만 찾아와주기만 간절히 원하는 일이나 사건이다. 희망의 내용은 필연적으로 찾아와주지 않으며, 지극히 우연적일 뿐이다. 반면 근원적 희망은 그 안에 내재하는 절대 바뀌지 않는 내실을 품는다. 자아를 실현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활동, 자아를 완성하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덕행이 근원적 희망이다. 자아를 긍정하고 그 실현을 온전히 이뤄내고자 하는 오롯한 신뢰감의 표현이 근원적 희망이다. 이 희망의 미래는 자아실현이 이뤄내는 미래다. 자아실현을 꿈꾼다는 점에서 이 희망은 개인의 생활영역을 초월한다. 반대로 세속의 희망이 그리는 미래는 획득을 기대하는 속세의 미래다. 세속의 희망은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우연과 우발로 이뤄지는 세계를 전제한다. 반면 근원적 희망은 인간이 자아를 실현하는 미래 시간을 염원한다. 근원적 희망은 자아를 끊임없이 바로잡아가는 발전을 추구하며, 진리를 향해 나아간다. 반대로 세속의 희망은 환상을 좇는다. 바로 그래서 세속적 희망은 언제나 정말 이루어질까 하는 의심과 불안을 품는다. 세속적 희망의 특징적인 기다림은 초조함이다. 반면 근원적 희망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린다.
세속의 희망이 허무한 것, 충족될 수 없는 것으로 밝혀질 때 우리는 환멸에 사로잡힌다. 반대로 근원적 희망의 무너짐은 존재 전반을 회의하게 만들어 개인의 존재 기반을 송두리째 무너뜨린다. 세속적 희망의 무너짐인 환멸은 쓰라리기는 하지만, 모든 환상적인 희망을 깨끗이 청소해주는 특별한 기회이기도 하다. 세속적 희망이 무너질 때 속세와 개인을 초월하는 근원적 희망이 빛을 밝힌다. 근원적 희망과 세속적 희망은 이처럼 매우 역설적인 관계를 맺는다.
근원적 희망은 심리학이 다룰 수 없는 문제다. 근원적 희망은 심리학이 아닌 인간학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근원적 희망은, 앞서 말한 것처럼, 세속적 희망이 깨끗이 무너졌을 때에 가장 확실하게 경험할 수 있다.
먹고사는 일이 완전히 부조리하다는 경험, 세상에서 살아가는 실존이 불안으로 얼룩져 있다는 경험, 이대로는 죽을 수밖에 없겠다는 극단적인 위협에 노출되는 경험, 혹은 세상을 살며 중요하다고 여겨온 물질적 가치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확인으로 우리 인간은 자살을 시도하지 않는다. 이것이 내가 자살을 시도한 사람들을 관찰하고 얻은 결론이다. 어째서 그럴까? 이를 설명할 논리를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 내가 이 글을 쓴 목적이다.
인간이 얼마나 간절하게 근원적 희망을 품는지는 최근에 페기가 그리고 특히 프란츠 카프카가 명확히 증언해 주었다. 카프카의 모든 작품은 막판까지 내몰린 불안과 좌절 속에서 겪는 부조리함의 경험을 통해서만 근원적 희망을 경험할 수 있다는 위대한 신앙 고백으로 읽어야 마땅하다.
이로써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실은 희망이란 우리가 먹고사는 일에 필요로 하는 것을 원하는 자세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가 오랫동안 의식하지 못했던 근원적 희망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카프카는 근원적 희망의 존재를 그의 그림 같은 언어로 탁월하게 포착해냈다. “다음 날에도 감옥 생활은 변함이 없으리라는 것, 혹은 더 심해지거나 심지어 절대 끝나지 않는다고 명확히 말해준다는 것이 궁극적 해방의 예감을 깨뜨리는 부정은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오히려 궁극적 해방의 필수조건이다.” “인간은 자신 안에 파괴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지속적인 믿음, 비록 이 파괴될 수 없는 것과 이 믿음이 알아 볼 수 없게 숨겨져 있다 할지라도, 이런 믿음이 없이는 살 수가 없다.”
우리 몸은 바로 우리의 고향인 동시에 감옥이다. 우리 몸은 자아를 가둔 감옥인 동시에, 진정한 인간으로 거듭나는 육화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더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는 심신(자아와 육화)인 동시에 몸통(감옥)을 가진다. ~~~바꿔 말해서 우리를 초월해 있는 이 어떤 것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확신, 대개 무의식에 남아 있기는 하지만 이따금 의식이라는 수면 위로 떠오르는 확신이 곧 근원적 희망이다. 우리를 부르는 이 존재를 우리가 의식하느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그저 몸통이라는 감옥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정신의 육화인 심신이기도 하다는 표현이 바로 근원적 희망이다. “정신은 시간 속의 몸으로 들어와 있다”
이렇게 볼 때 카뮈의 시지프 신화는 단면적이다. 카뮈는 감옥, 절망만 보았을 뿐, 근원적 희망을 놓쳤기 때문이다. 카뮈는 세속과 근원의 희망이 보이는 역설을 살피지 못한 탓에 분명 우리 인간이 감옥에 갇혀 살기는 하지만, 그래도 자아실현의 간절한 표현인 희망을 품는 존재임을 간과했다. 카프카는 인간이 쇠창살로 가로막힌 감옥 안에 갇혀 있기는 하지만, 쇠창살이 넓게 구부러져 그 사이로 인간의 참다운 생명이 넘나든다고 언어의 그림을 그려냈다. 그렇다, 카프카는 인간이 쇠창살을 통해 감방을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몸에 사로잡혀 있지 않은 존재가 될 수도 있다. (만리장성의 건설, 203쪽).
카프카의 일기장에서 이런 구절도 인용되었다. “참된 인식의 첫 조짐은 죽고 싶다는 생각이다. 이 삶은 참을 수가 없으며, 다른 삶에 이를 길은 없어 보인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더는 부끄럽지 않다. 싫기만 한 낡은 감방에서 새 감방으로 옮겨달라고 부탁한다. 새 감방은 보자마자 싫어지기 시작한다. 그래도 남은 믿음으로 감방을 옮겨 가는 동안 주님이 복도에 나타나 지켜보며 이렇게 말해주리라 상상해본다. ‘이 사람은 다시 가두지 말라, 그는 나와 함께 가리라.’”(만리장성의 건설, 215쪽)
인간은 자신의 실존이라는 감옥 안에 갇혔다. 그러나 감옥인 그의 심신은 동시에 정신이 육화하는 토대다. 다시 말해서 정신에 참여를 보장해주는 이 심신의 힘으로 인간은 다시금 속세안의 실존을 초월한다. 이 초월을 이루어주는 근본 행위의 하나가 희망이다.
인간 안에 자리 잡은 희망은 분명 졸아든다. 우리가 믿듯 완전히 졸아들지는 않을지라도, 희망은 계속해서 쪼그라든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지만 이 쪼그라듦은 절망이라는 상태로 이르지 않는다. 인간이 나는 희망이라고 없어 하고 말한다고 해서 근원적인 희망을 잃은 것은 아니다. 절망도 마찬가지다. 내면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절망은 개인의 절망이 아니다. 가장 심오한 절망은 개인의 주관적 절망이 아니라, 공허함이라는 상태, 정체된 기다림, 음울하기 짝이 없는 지루함으로 규명된다.
이 기다림은 세속화된 근원적 희망이다. 실존을 초월하며 무한함을 갈망하던 근원적 희망은 세속화되면서 인내심이 아니라 목적 없는 기다림이 된다. 이 지루한 기다림에서 시간은 사라진다. 기다림은 생장이 멈춰버린 정체다. 근본적으로 이 기다림은 창조를 되돌리는 행위, 곧 시간 속에서 항상 진행되던 생장을 거꾸로 되돌리는 행위다. 파스칼은 단편 글 72번에서 창조를 아름답게 묘사했다. “모든 사물은 아무것도 없음에서 생겨나 무한함에 이른다.” 창조는 이처럼 늘 진행형이다. 공허함에서 출발해 실존을 거쳐 무한함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지루함, 근원적 희망의 상실, 공허함으로 빠져드는 기다림에서 실존은 해체되어 없음으로 되돌아간다. ~~~~애 누구는 이런 지루함에 사로잡히는지,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은지 하는 본래의 물음은 답을 찾지 못하고 유예된 채 남을 뿐이다.
• 자기 파괴와 자아실현이라는 역설
• 먹고살 만해졌을 때 인생은 왜 무료하게 느껴질까
나는 대부분의 자살 시도에서 결정적인 것은 허무함이 작용하는 양식인 지루함이라고 했다. 그러나 지루함이라는 상태는 내가 보기에 자살의 일반적인 정황일 뿐, 지금 여기서 개인이 결행되는 자살 시도의 원인이 개인의 인생 전력에서 찾아지리라 짐작했다. 그러나 개인의 이 인생 전력이라는 것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바로 곤궁함, 활력 넘쳤던 삶의 결여, 즉 공허함이다.
①개인의 심리적 곤궁함, 관계를 이루고 갈등을 겪으며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의 부족, 한마디로 관계 능력의 결손.
②허무함이 작용하는 표현인 지루함, 공허함에 사로잡힘, 쪼그라드는 희망.
첫 번째 부분은 개인의 심리에 해당한다, 곧 심리학의 차원. 두 번째는 인간학이 알려주는 사실이다. 인격체로서의 인간이 지닌 면모를 말해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두 가지를 포괄하는 답이다. 그러나 이 답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두 영역을 결합해주는 관계가 어떤 것인지 분명해져야 한다. 심리학 차원에서 관찰하는 정황은 인간이 세계와 씨름하는 과정에서 겪는 사실과 과정이다. 과제, 직업, 타이틀, 규범, 집단 등과 씨름하며 자아실현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인생 전력은 심리학으로 풀어볼 수 있다. 인간학 분야의 정황은 인격의 성장, 경우에 따라서는 성장 장애를 보여준다. 인간학은 인간의 만남 능력, 신과 독대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해준다. 인간은 신의 부름을 받는 존재, 곧 세계 안의 살아감을 초월하는 존재다. 인간을 인격체로 만들어주는 정신의 힘은 심리학이 다룰 수 없는 것이다.
심리학과 인간학 영역은 서로 어떤 관계를 이룰까? 심리학과 인간학은 어떻게 결합할까? 어느 것이 우선하는 과정일까? 인격적 영역의 사건이 심리적 정황을 결정할까, 아니면 거꾸로 심리가 인격을 지배할까? 우리의 구체적 주제에 걸맞게 표현하자면, 개인 심리 생활의 곤궁함이 제1원인일까, 아니면 공허함의 작용으로 지루함과 희망의 퇴색으로 빚어지는 인격의 위축이 제1원인일까?
심리와 인격은 근본적으로 두 개의 서로 다른 작용이 아니라, 인간이 가지는 두 가지 측면일 뿐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심리적 사실과 인격적 사실은 별개의 영역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심리적 측면과 인격적 측면을 함께 가진다.
(예) 18년째 매우 심한 관절통으로 고생하는 사장. 난관을 이기고 성공했다. 통증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몰라 낙심한 나머지 자살을 시도. 언제부터 자살을 생각했느냐는 물음에 최근 한 두해 정도였다고 대답. 먹고 살 걱정을 털어버린 지금, 도대체 이런 인생을 살아야 할 이유가 뭔지 하는 회의가 갈수록 커졌다고 했다. 그리고 실존의 문제에 눈을 뜨는 순간, “인생은 더 살아야 할 가치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
~~~고민, 실존적 깨달음, 인생이 지닌 부조리의 인식으로 이어지는 생각의 흐름은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에게서 자주 보이는 현상이다.
외부의 조건이 유리한 쪽으로 인생을 만들어주면, 인간은 이제 어떻게 살아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되묻는다. 이런 정황은 인간에게만 볼 수 있는 특수함이다. 자신의 인생을 의문시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정신적 존재가 보여주는 특징이다.
생물적 존재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안정적 조건이 확보되면, 인간은 오히려 무료함과 의미의 갈증을 느낀다. 그저 먹고사는 생물적 존재일 뿐, 정신적 의미로 충만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인간은 자살의 충동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생물적 삶과 의미 있는 인생을 따로 떼어놓는 분열이 자살을 부른다.
• 심리학의 문제인가, 인간학의 문제인가
실존적 깨달음의 이런 과정에서 인식되는 것은 존재의 부조리함, 모든 행위의 부질없음이다. 다시 말해서 인생을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인간은 깨닫는다. 인간으로 맺어온 모든 관계는 불확실하기만 하며, 아예 허황된 꿈처럼 스러진다. 인간은 더는 새로운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는다. 그렇다. 아예 관계를 추구 하지 않는다. 해야 할 일이 전혀 없다고 본다. 예전에 인생의 표준이자 내용이 되어주었던 가치와 규범은 허망해 보이기만 한다.
내가 경험한 환자들은 ~~~시간, 곧 살아낸 시간과 예전에는 사건과 사고로 넘쳐 나는 시간이 환자를 떠받들어줬다. 이제는 환자 자신이 이 시간을 떠벋들어야 한다. 곧 시간에 내용을 채워줘야 하는 쪽은 본인이다.
나는 타자와의 만남 능력 상실, 대인 관계를 꾸려갈 능력의 상실이야말로 특히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 환자들은 타인을 믿을 줄 모르며, 헌신하려 하지 않는다. 환자의 고독함은 피할 수 없다. 이 고독함이 너무도 싫은 나머지 환자는 이미 누렸거나 거부당했거나 혹은 적어도 갈망했던 만남을 떠올려가며 그 상대와 갈등을 일으키려 든다. 그러나 과거의 만남이 이런 욕구를 만족시켜줄 수는 없다. 바로 그래서 인간과의 결속은 더욱 궁핍해진다. 너와의 싸움이라는 것이 아예 성립하지 않는다. 이런 정황은 개인의 심리 차원에서 설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환자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지루함, 고독, 단조로움, 정체다. 곧, 모두 가면을 쓴 공허함이다. 다시금 지적하자면 이 공허함은 개인의 차원이 아닌 인간 일반의 문제, 심리학이 다룰 수 없는 인간학의 문제이다. 더불어 나눌 인간관계가 지극히 궁핍하다면, 지루함이 개인 체험의 곤궁함을 꿰뚫어 버린다면, 당사자는 공허함에 사로잡힌다. 공허함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체험의 빈곤이 자살이라는 파국을 부른다.
내가 연구한 환자들 사례는 심리학만으로 설명되지 않으며, 인간학을 함께 고려해야 그 원인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런 원인은 1차적으로 지루함, 단조로움이다. 공허함에 강력하게 사로잡힌 나머지 생겨나는 고독, 무한함과 관련해 쪼그라드는 희망이 인간학적 장애다. 다시 말해서 신의 부름을 받고 요구받는 자로 살아갈 능력의 상실이 인간학적 장애다.
[희망에 대하여]
• 살아가게 하는 힘인가, 위험한 상황인가
누구나 이 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계속 살아간다는 단순한 사실, 지금 이 순간 우리 자신을 파괴 하지 않는다는 단순한 사실은 허무함에 맞서 작용하는 어떤 긍정적인 힘이 존재한다는 증명이다. 이 힘의 원천은 마찬가지로 우리 바깥에 있으며, 우리 인간을 구성해 준다. ~~~우리는 흔히 이 원칙을 생명력 혹은 생동감이라고 부른다. ~~~이 힘은 작용으로만 파악된다.
허무함의 작용을 그 몇몇 위장과 변장해서 감지할 수 있었듯, 우리는 생명을 가능하게 해주는 이 힘도 그 특별한 위장 속에서 발견해야 한다. ~~~~걷으로 드러난 모습 가운데 하나가 희망이라고 짐작한다.
희망이라는 현상은 실제로 개념 정의가 어렵다. 현실로 드러난 희망의 효과, 구체적인 물질로 나타난 희망만이 그런 개념 정의를 가능하게 만들어 준다.
• 미래의 시간이 지속되리라는 믿음
44세의 여인 M은 1949년 왼쪽 가슴에 결절이 생긴 것을 발견했다. 의사는 당장 종양 판정을 내리고 환자는 왼쪽 가슴을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방사선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처방은 거부했다. 그녀는 방사선 치료가 지나치게 해를 입힐 것이며 자신이 훙측한 모습이 될까 두려워했다. ~~~1년 뒤 척추에 심한 통증을 느낀 여인은 곧장 이 통증이 척수 전이의 결과가 아닌지 짐작했다. 절망에 빠진 그녀가 다시 찾아왔다. ~~~나는 암이 아니라고 부인하면서, 다만 뼈에 미네랄 성분이 부족해서 일어나는 골다공증으로 보인다고 하면서 오래 걸리지만 치료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5개월 동안 치료를 받으면서 환자는 진단을 거의 확신했다.
여인은 완치되지는 않고 약간 나아졌지만 그런대로 호전되었고 퇴원했다. 1년 뒤 그녀가 다시 방문했다. 환자는 이제 사색이 완연했다. 암이 척수 전체로 전이되어 뇌까지 퍼졌다.
• 세속적 희망의 환멸 뒤에 찾아오는 새 희망
불치병 환자에게서 확인하는 희망은 도대체 어떤 것인가? 자신이 처한 현실을 냉철한 이성으로 받아들이지 않게 만드는 희망은 어디에서 비롯될까? ~~~나는 앞서 이야기에서 불치병 환자의 희망이 일상의 희망과 확연히 다른 특징을 보인다고 생각한다. 막다른 지경에 이른 사람의 희망은 분명 희망 없음에서 생겨나는 희망이다. 그리고 이 희망은 상황이 절박할수록 더욱 더 강해진다. 환자는 이 희망에 모든 힘을 쏟아 붓는다. 환자는 이 희망으로 비판과 의심과 합리적인 걱정을 버린다. 그렇다. 불치병 환자의 희망은, 일상의 희망이 무너지는 바로 그 순간에 생겨난다. 일상의 희망을 잃어버려야 진정한 희망이 생겨난다.
두 번째 특징도 나타난다. 일상의 희망, 우리가 흔히 입에 올리는 희망은 이런저런 것이 나타나리라고, 이런저런 것이 우리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뤄지리라고, 세상의 이런저런 것이 우리 몫이 되리라고 여기게 한다. 일상의 희망은 세속적인 것, 필연적이지 않은 것, 외부에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건을 겨눈 희망이다. 이 희망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목표를 가진다. 그러나 이 목표는 언제나 하나의 목표, 윤곽이 분명하고 말로 정의할 수 있는 목표다. 일상의 희망은 언제나 대상과 관계된다. 그리고 바로 그래서 일상의 희망은 피할 수 없이 허망한 성격을 지닌다. 이런 저런 것이 실제로 나타날지 의심스럽다. 그리고 허망한 환상이 그러하듯 일상의 희망은 환멸을 안겨준다. 희망은 항상 세계를, 심지어 대개 그 본질상 우연이자 우발일 수밖에 없는 소원의 세계를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이 환멸에서, 세속의 허망한 희망이 완전히 무너져버려 맛보는 쓰라린 환멸에서 신비롭게도 다른 희망이 생겨난다. 세속의 희망이 가져다주는 환멸은 분명 그 자체 안에 세속적인 것으로 이끌리는 환상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주는 가능성을 품는다. 세속적 희망의 완전한 무너짐에서 역설적이게도 하나의 새 희망이 경험된다. 이 희망의 특징은, 우리의 환자 이야기에서 보았듯, 무형이며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환자의 인격과 관계한다. 이 규정되지 않은 것은, 이 미래가 규정될 수 없는 것일지라도, 환자의 미래인 것이다. 이 희망은 세속적인 것과 이 세상에 속하는 대상을 원하지 않으며, 환자가 잃어버렸던 의미와 무너짐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미래를 확보해주는 의미를 지닌다. 이 미래는 이러저러하게- 꾸며진 미래가 아니며, 미래 일반이다. 규정될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이 희망은 내실, 이 희망 안에 내재하는 내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내실을 가진다. 이 희망은 인격체의 분명한 존립을 우너한다. 미래에 자아실현을 이루는, 무어라 규정할 수 없지만, 어떤 식으로든 확보해야 하는 새로움을 원한다.
이 희망은 결코 질병의 사라짐, 회복이라는 목표에 국한되지 않는다. 물론 회복은 희망된 것 안에 포함되기는 한다. 그러나 이 희망은 아픔을, 허약함을, 증상을 털어버리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건강의 회복을 얼마든지 말할 수 있었음에도 이 환자들은 실제로 기이할 정도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환자들은 더 포괄적인 것을 원한다. 환자는 이 포괄적인 것을 항상 무의식에 무형의 것으로, 그러나 신중하게 놓아둔다. 볼노브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마도 구원받음 혹은 다시 구원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세속의 희망이 무너지면서 얻어진 새로운 희망의 힘은 환자에게 근본적인 변화, 말하자면 ‘승화’라 부를 수 있는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이 희망은 지금까지 아집에 사로잡혔던 태도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시각으로 인생을 바라보는 안목과 의무감을 설정해준다. 희망은 내적인 자립성과 증상으로부터의 해방, 질병이라는 감옥으로부터 풀려나는 자유를 선물한다. 이런 자유는 무너짐 이전에 맛보지 못한 것이다. 승화는 인내심으로 분명해진다. 희망이 가져다 준 인내심은 이제 극복된 두려움의 자리를 차지한다.
• 우리는 희망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은 자살로 자신을 없애버리려는 게 아니라, 무엇인가 이루려 했다는 말을 흔히 한다. ~~~이들은 한사코 절망이나 존재의 부조리함을 깨닫고 내면 세계에 붙들려 있음에서 벗어나고자 그 마지막 수단으로, 그러나 미래에 무엇인가를 바라보며, 인생이라는 현실에서는 볼 수 없던 의미를 알아보게 해줄 현실을 바라며 자살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비틀린 희망이라 할지라도 이것은 분명 희망이다. ~~~~자살을 시도 시도하기는 했지만 이 사람의 희망은 미래를 향해 열려 있다. 보들레르가 1845년 6월 30일. 그러니까 자살을 시도하기 전날 저녁에 쓴 편지도 같은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내가 나를 죽이는 것은 나는 죽지 않을 거라고 믿기에, 그렇게 희망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재는 그 본질상 무엇으로 향해 나아감이다. ~~~진정한 희망은 인간이 본성으로 타고나는 것이다. ~~~진정한 희망의 근본 구조가 그리스도교의 희망의 그것과 딱 맞아떨어진다는 점은 <롬 8장 24~25>가 증명해준다.
Ⅱ 몸의 병듦 그리고 행복과 불행
[몸과 병듦은 어떻게 내면의 의미와 관련되는가]
• 병을 몰랐을 때와 알았을 때
45세의 사업가가 진료를 받으러 와서 왼쪽 어깨에 통증이 심하다고 호소했다. 통증은 때때로 왼팔 그리고 왼쪽 가슴으로도 번진다고 했다. ~~~~환자는 일단 자신의 통증이 류머티즘의 특성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 몇 주 전부터 조금만 흥분해도 통증이 나타나는 것이 묘하다고 했다.
진단을 해본 결과, 그가 느끼는 통증은 류머티즘 때문이 아니라, 분명한 협심증 증상이었다. ~~~그가 느끼는 어깨 통증은 그리 심각하지 않은 류머티즘이 아니라, 심장 근육의 심각한 손상을 암시하는 협심증 증상이다. ~~~~사업가는 그 순간부터 심장병 환자가 되었다. 두 주 뒤에 다시 찾아온 그는 확연히 늙어버렸다.
• 통증은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비롯된다
• 서로 다른 의미가 부여되는 신체 부위
• 소유 또는 존재로서의 몸
환자가 자신의 존재를 병든 신체 부위와 연결시키는 관계는 그 병의 진원지를 어디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 지배하고 지배당하는 나와 몸의 변증법
• 몸의 체험이 증상에 부여하는 의미
[환자의 침묵]
• 중병 환자의 몸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 환자는 병든 몸과 관계를 맺는다
• 병, 세계로부터 소외되는 몸
• 침묵의 의미
환자와 관련해 말하자면, 가장 먼저 두드러지는 점은 그가 병상에서 보여준 침묵이다. 이 침묵이 어떤 성격을 지닌 것인지 알아보는 일은 매우 어렵다. ~~~~환자가 보여준 모습에는 슬픔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건강하거나 가벼운 병에 걸린 사람은 외부로 향해 행동하고 지각하면서 존재한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거나 부딪치면서 세계를 향해 끊임없이 자신을 표현한다. 심지어 많은 중환자도 외부를 향해 살아간다. 아프다고 호소하며 주변에 자신의 병을 알리려 한다.
~~~~외부를 향한 이런 당연한 관심과 운동이 우리의 환자에게서는 사라졌다. 이 사라짐의 결과가 그가 보이는 침묵이다. ~~~이런 환자는 묻는 법이 없다. 어떤 진단이 나왔는지 놀라울 정도로 묻지 않는다. 앞으로 어찌되느냐고 물어보지도 않는다. 얼마나 오래 입원해야 하는지도, 심지어 가족도 궁금해 하지 않는다. 묻지 않으며 더는 근심하지도 않는 현상이 그 침묵의 의미를 해석하게 해준다. 이런 환자는 점차적으로 그가 알던 옛 세계를 떠난다. 세계는 무의미해진 통에 물음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옛 세계는 더는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로써 세계와 접촉하려는 노력, 외부와 소통하며 관심을 가지려는 노력이 사라진다.
우리는 이런 경우에서 몸과 세계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아주 인상적으로 확인한다. 세계와의 관계가 졸아들면서 환자는 자신의 몸으로부터 서서히 빠져나간다. 세계의 운명은 언제나 자기 몸의 운명이다. 세계는 몸을, 몸은 세계를 표현한다.
몸과 세계의 이런 관계가 지니는 독특함을 니추케는 젖먹이와 아동에게서도 확인했다. “엄마 품, 말하자면 ‘고향’의 상실은 심각한 발육 이상을 초래하며, 결국 죽음에 이른다는 것이 니추케의 확인이다. 엄마 품을 맛보지 못하고(말하자면 고향을 잃고) 고아원에서 자란 아이는 위생 상 나무랄 데 없는 환경에서도 발육 이상을 보인다. 아이의 발달은 정체되어 극단적인 경우에는 성장, 올바른 자세 취하기, 언어 습득에 현저하게 문제가 생긴다.
우리 환자에게서도 특정한 의미에서 같은 일이 일어났다. 환자는 점차, 진행과정이 느려 잘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몸을 떠나 내면으로 들어갔다. 자신을 추슬러 세상으로부터 물러섰다. 이런 과정에서 그의 몸은 말하자면 ‘껍데기’가 되었다. 환자는 옛 세계를 포기하면서, 마찬가지로 옛 집인 몸을 포기했다. 그래서 자기표현을 하는 것을 하찮게 여겼다. 세계를, 자신의 몸을 물어보는 일을 시들하게 생각했다.
이 환자의 속내를 명확하게 표현해보자. 환자는 세계가 자신에게 더는 아무 의미가 없기에, 몸에 관심을 잃고 말았다. 물론 몸은 계속 그를 괴롭힐 것이다. 그러나 몸은 그에게 거의 언제나 짐이었을 뿐이다. 정확히 이제 막 벗어던지려 하는 껍데기라는 의미에서 몸은 부담이자 화근이고 고통이었다. 이런 현상을 좀 더 면밀하게 살펴보면, 죽을병에 걸린 환자의 몸은 오래 입어 남루해진 옷과 같다. 이제 우리는 비로소 죽음의 그늘이 드리운 몸의 형태와 기능을 올바른 틀 안에서 본다. 피부의 광택이 사라진 것은 몸이 점차 껍데기로 변해가고 있음을 확인해준다. 탄력을 잃은 근육은 인간이 갈수록 외부로 향한 운동과 거리를 두고 있다는 표시다. 자세의 흐트러짐은 세계가 환자에게 자세를 갖추라고 요구하는 일이 사라지기 때문에 생겨난다. 초점을 잃은 흐릿한 눈빛은 세상에 거리를 두고 그만큼 무심해졌음을 의미한다. 이런 모든 변화는 환자와 세계 사이에서 벌어지는 중립화 과정이라는 틀 안에서 이해된다. 지금 묘사한 몸의 변화를 우리는 암 환자에게서 가장 확연하게 볼 수 있다. 많은 암 환자는 경우에 따라 몇 년 정도 수명을 더 연장해주고 그럭저럭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성공적인 수술 이후에 이 죽을병에 걸린 몸을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
고령의 노인에게서도 우리는 비슷한 변화를 관찰한다. 이 경우에도 외부 세계로의 관심은 포기되며, 몸은 껍데기가 된다. 노인도 불치병 환자와 마찬가지로 몸을 떠나 내면으로 침참한다. 세상과 완전히 등지고 명상에만 몰두하거나 오랜 감옥 생활을 한 사람에게서도 비슷한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 세계의 상실, 그리고 세계에 대한 새로운 태도
우리의 주제는 중병 환자가 보이는 몸의 변화를 현상학으로 기술하는 것이다. 이 주제는 병의 원인을 다뤄야 한다는 의무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준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우리의 고찰은 적어도 하나의 방향에서 보충되어야 한다. ~~~~이런 침묵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저 곤궁해지는 것에 지나지 않을까? 그냥 죽어가는 것일까? 존재의 망가짐? 앞서 우리는 자발성의 상실, 긴장의 상실, 세계의 상실 등을 이야기했다. 이런 확인으로 충분할까? 상실의 현상에는 뭔가 다른 것이 대비되지 않을까? 이 환자는 아마도 세계에 던지는 물음이 불필요해진 상황에 도달한 것이 아닐까?
나는 그렇다고 짐작한다. 우리는 이 단계에서 다른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이 현상은 우리로 하여금 환자가 ‘희망’이라고 여겼던 것의 변화가 일어났다는 가정을 하게 한다. ~~~~물음과 걱정을 그만두는 것과 동시에 환자는 그 환상에 가까운, 세속을 겨눈 희망을 포기하며, 자아실현, 내면의 존재를 갈망하는 진정한 희망을 얻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앞서 연구에서 희망이 심리학적 현상이 아니라, 인간학의 근본 사실, 곧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근본 사실이며, 몸과 영혼을 분리하는 태도로는 이런 사실을 고찰할 수 없다는 많은 준거를 살핀 바 있다.
진정한 희망은 환상적이니 하는 모든 것을 버리며, 절망의 경험, 존재의 결정적인 위협인 죽을병이라는 절망의 경험에서 세속적인 모든 것을 깨끗이 씻어낸다. 이 절망의 경험은 중환자와 불치병 환자에게 물음의 대상이 사라지게 한다. 이런 경험에서 우리의 일상 세계는 무의미하다.
어떤 환자는 놀라울 정도로 활ㄷ오적이며, 겉보기로는 세계를 향한 관심도 여전히 뜨겁다. 이런 환자는 더는 물어보지 않지만 행동은 한다. 유서를 쓰고 가족을 위해 이런저런 일을 처리하며, 직업 문제도 신경 쓰면서 책상을 깨끗이 정리한다.
[당연하던 몸이 더 이상 당연하게 느껴지지 않을 때]
• 환자의 주관적 상태를 파악하는 일이 왜 중요한가
우리 의사는 기이하게도 상태의 이론, 즉 당연히 몸 체험의 이론인 상태의 이론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상태 뒤에 숨은 원인을 찾아 서둘러 진단을 내리려 하기 때문이다. ~~~몸 체험의 영역에서 얻어진 지각을 암묵적으로 끌어들이지 않는 의학은 그 물리적인 작업만으로 결코 환자를 치료할 수 없다.
• 기분 좋은 상태와 나쁜 상태
나의 상태는 위궤양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내가 위궤양으로 느끼는 통증은 가까운 사람과 담소를 나누면서, 곧 주의가 다른 곳으로 쏠리면서 잊힐 수 있다. 상태를 규정하는 상황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가변적인 요소를 지닌다. 서로 분리해서 확인할 수 있는 요소는 세 가지다.
①자아. 주체. 구체적 인간, 환자, 곧 몸과 영혼과 느낌을 가지는 인간.
②몸(자연과학적인 몸이 아니다!). 곧 내가 가지는 몸이지만 곧 나와 하나이기도 해서 나 자신과 결코 떼어서 생각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나와 완전히 동일시할 수는 없는 것이 바로 몸이다.
③세계. 곧 내가 다른 사람, 특정한 사물, 나의 일과 생활영역과 맺는 관계.
• 심장을 가졌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살았는데 이제는 알아요
겉보기로 내 상태가 장애를 일으키는 가장 간단한 양상은 내부 장기의 ‘있음’을 의식하는 것이다. ~~~환자는 아무 의식이 없이 직접 쓸개나 위장을 체험하지 않기 때문이다. 환자는 고작해야 윗배, 오른쪽이나 중심부, 혹은 가슴 안에서 두근거리며 뛰는 어떤 것, 아 이게 심장이지 하는 식으로 자신의 몸을 체험할 따름이다.
내부 장기의 있음을 의식하는 순간, 나의 상태는 상당한, 매우 혼란스러운 장애를 일으킨다. 심장과 혈관 질환이 있는 많은 환자는 의사를 찾아와 이렇게 불평한다. 심장을 가졌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살았는데, 이제는 알아요. ~~~아픔이나 중압감이나 무슨 경련 같은 게 아니라, 그냥 심장이 있다는 느낌이 불편합니다. 그러니까 장기의 있음이라는 자각만으로도 환자는 이미 불편해한다. 있음 그 자체가 환자를 사로잡아 계속해서 있음을 확인하고 그 생각에 몰두하도록 몰아붙인다. 마치 숨겨둔 파트너가 돌연 나타나 평소 일을 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로써 평소 잊고 있던 몸이 의식의 전면으로 불거져 나온다(depasser:메를로-퐁티). ~~~이제 돌연 있는 것으로 불거져 나온 파트너는 엄밀히 말해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심장은 어디까지나 나의 심장, 나의 고유한 심장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한편 단순하게 그냥 나의 고유한 심장이 아니라,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나에게서 거리를 두고 떨어져나간 것, 말하자면 내 앞에 있는 것이다. 나의 단순하게 있음으로부터 빠져나와 나에게 거리를 둠으로써, 이 심장은 나에게 새삼 낯선 것으로 소외되었다. 나의 고유한 것인 동시에 이 심장은 상대적인 자율성을 가졌다.
이제 나는 앞서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이 자율성을 의식한다. 예전에 장기는 내 단순한 인생 존재의 일부였으며, 그 존재는 나에게 숨겨져 있었다. 이제 장기는 그 상대적인 고유한 존재를 신고하며, 내 생명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암시를 흘리며 자신을 주목해주기를 요구한다. 말하자면 내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는 으름장이 암시다. 이처럼 갑작스럽게 부각되는 장기의 존재로 나의 자유가 제한되는 결과가 생겨난다. 심장의 존재를 의식하며 늘 압박감을 느끼는 환자는 이 심장을 주목하며 염려하는 통에 사회생활이 위축되는 상황을 맞이한다. 심장은 환자에게 자신을 주목해달라고, 몸을 염려해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니까 기분 좋음은, 지금 우리가 확인하듯, 나의 장기가 그 존재를 주목하게 만들지 않는 것이다. 장기 존재의 의식에 압박이나 중압의 요소가 덧붙여지게 되면 환자가 자유를 제한당하는 체험의 밀도는 높아지는 동시에 변화한다. 예를 들어 신장병을 앓는 사람은 뱃속에서 신장이 무겁게 짓누르는 것 만 같다고 불평한다. 이런 무게감이 환자를 주저앉힌다.
• 몸의 한계, 자유의 가능성
• 영원한 우울증 환자
영원한 우울증 환자의 특징은 한시라도 자기 몸을 잊지 못한다는 점이다. 머리가 지끈거리며, 가슴이 답답하고, 손이 간지럽다 위장과 대장이 활동하는 것이 느껴지며, 심장이 두근거린다. ~~~~몸은 환자로 하여금 다른 의도에 충실하지 못하게 한다.
• 통증 또는 몸의 한계
통증의 두드러진 특징은 해당 부위가 몸 전체라는 닫힌 체계로부터 빠져 나온다는 것이다.
• 메스꺼움, 벗어던질 수 없는 몸의 부담
• 몸과 세계의 경계에서
행복이 몸에서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는 상태라는 가설은 몸이 편안해할 때 느끼는 쾌적함도 행복의 한 가지 양상이라는 논리에 의해 반박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행복과 불행]
•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뭐가 대체 문제인지 잘 모르겠어요
어느 날 63세의 할머니 환자가 진찰을 받으러 왔다. 이 환자는 주치의가 1948년에 갑상선 수술을 하고 나타난 파상풍 증세로 나에게 이관되었다. ~~~~오래전부터 기운을 차릴 수가 없어요. 이런 말 외에 그 어떤 이상함도 발견할 수 없었다. ~~~~환자에게 직접 손과 발이 저린 현상이 있는지 묻자, 그녀는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감자를 깎거나 바느질 혹은 뜨개질을 할 때마다 손이 저린 바람에 이내 일을 멈추어야 했다고 말했다. ~~~환자는 다만 일반적인 쇠약함, 일상의 요구를 감당할 수 없는 무기력함만 자각할 뿐이다.
• 세상의 모든 물건이 내 기분에 물든다
• 행복과 불행의 현상학
우리는 행복이라는 게 무엇인지, 그러니까 건강한 사람의 정상적인 기분 좋음이 어떤 특징을 지니는지 물었다. ~~~불행함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못할수록 그만큼 더 일반적으로 기분 좋은 느낌을 확인했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행복이란 내가 내 몸을 전혀 느끼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몸이 침묵하면서 그저 눈치채지 못하게 당연한 것으로 있으면서 나를 자유롭게 놓아둘수록, 그만큼 나는 세상의 그 무엇과 더욱 완벽하게 소통하며, 분명한 행복감을 맛본다. ~~~~이런 상태는 오로지 전적으로 내면의 평온함일 따름이다. ~~~ 단순하게 살아가는 행복이라는 우리의 묘사가 맞는다면, 이는 곧 인간 존재라는 사실이 근본적으로 두 가지 양상으로 고찰될 수 있음을 뜻한다.
그 하나는 바로 행복의 양상이다. 그저 떠받들어짐, 자유로운 존재, 할 수 있다와 해도 됨으로서의 양상이 그것이다. 두 번째 양상은 몸이라는 부담, 정상치를 넘어서는 과도함, 메스꺼움, 곧 불행이라는 양상이다. 사르트로는 독특하게도 오로지 두 번째 양상만 주목했다. 그가 보기에는 주체가 몸으로 실존하는 방식에는 오로지 하나, 곧 인간의 참여 의식의 활동 없이 몸으로 실존하는 방식만 있을 뿐이다. 이 방식은 메스꺼움이다.
그러나 나는 실존하는 우연으로서의 몸이 다른 방식도 가진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그것은 우리가 초월성의 지평으로 경험하며, 신선함의 체험에서 주목하는 안정감이다.
상태에서 우리는 항상 어떤 것을 향해 나아간다. 그래서 상태는 항상 내 주변 환경이라는 특징도 가진다. 행복한 상태에서 모든 것은 유혹적인 광채를 자랑한다. 그럼 나는 다른 때보다 사물이 더 관심을 가져달라고 요구하는 것을 느낀다. 이렇게 해서 나에게 주어지는 소통의 기회는 반갑기만 하며 쉽사리 수행할 수 있다. 나는 어떤 유보도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소통에 참여하며, 이런 일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반대로 기분이 좋지 않으면 내 세계는 무너가 다르게 보인다. 읽고 싶은 책이 어렵다거나 지루해 보인다. 이런 날 하고자 하는 모든 일은 이런 부정적인 성격을 지닌다. 다시 말해서 이런 상태에서 맞닥뜨리는 모든 것은 기묘하게도 다르다. 지루하며, 어렵거나, 부담스럽다. 상태의 양상, 기쁨이나 부담은 세계 내 존재의 지평임(하이데커)이 입증된다. ~~~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대개 자신의 상태를 생각하기보다는 세계 안의 다른 어떤 것, 대상이 문제를 일으킨다고 믿는다. 그러나 경험의 이런 일반화에서 공통된 것은 언제나 바로 우리 자신이다.
• 환자의 주관적 상태가 병의 객관화를 방해한다.
환자는 자기 몸의 병듦을 “이제 더는 예전과 같지 않아”라고 경험 한다. ~~~왜 환자가 자신이 느끼는 불편을 세분화해서 설명하지 못할까? ~~~자신에게 정확히 어떤 증상이 일어나는지 환자 자신은 파악할 수 없다. 그럼에도 환자는 자신의 상태가 좋지 않음을 느낀다. ~~~이중으로 아픔에 시달린다. 자신의 몸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환자는 알 수 없어 괴로우며, 이로써 일상생활에 필요한 일을 더는 할 수 없다는 아픔에 노출된다.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는 이런 탈 중심적인 입장에서 보아야 비로소 두통을 일으키는 것은 머리이며, 포만감은 뱃속의 현상임을 우리는 알아본다.
• 인생 기획
환자 B는 전쟁이 나가 유탄이 가슴을 스치는 비교적 가벼운 총상을 입었으며, 비교적 무해한 기관지염을 앓고 있음에도 자신은 폐에 심각한 손상을 입어 중병을 앓고 있다고 여겼다. ~~~~무시 못할 정도로 많은 질병은 그 특성 탓에 인간을 오랫동안 불행함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한다. ~~~~질병의 종류가 무엇이든 인간은 일단 오로지 하나의 가능성, 곧 자신이 일반적으로 병들었다고 느낄 가능성만 가진다. ~~~
인간은 자신의 몸(사실)으로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을 수행한다. 인간은 이 과정에서 자신이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 스스로 그림을 그린다(기획한다).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도 그렇게 봐주었으면 하는 그림이다. 자신의 존재 기반인 몸이라는 사실성을 넘어서서 세계로 자신을 던질 때(기투), 인간은 다른 사람과 어깨를 나란히 할 자격을 얻는다. ~~~
우리는 운명과 비약의 통일체다(메를로-퐁티). 다시 말해서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을 새롭게 기획하고 기투해야 한다. 늘 거듭 시도되는 기투 없이 인간은 인간으로서 형상을 갖추지 못한다. 그러나 병이 인간에게 안겨주는 것은 지금까지의 모든 기투를 허사로 돌아가게 만드는 허망함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타인의 도움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타인에게 자신을 기획해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고 상대방이 자신의 기획을 받아들이도록 밀어붙여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환자와 의사가 마주친다. ~~~
인생에는 인간이 오로지 홀로, 그러니까 소통에 의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기획해야 하는 단계가 있다. 사춘기가 그 좋은 예이다. 사춘기는 말 그대로 옩너한 자기 기획의 순간이다. 청소년이 독자적으로 시도하는 자기 기획은 나르시즘이라 부르기에 마땅하다. 사회로부터 거리를 두고 자아 문제로 씨름하지 않는다면, 자기 기획이란 없다. 나르시즘이 없으면 사춘기의 청소년은 무정형으로 남는다. 이런 불가피한 체험인 원초적인 나르시즘은 실패한 소통이 되고 마는 부차적인 나르시즘과 반드시 구별되어야 한다.
Ⅲ 아픔에 대하여
[아픔, 우울증, 세상의 심술궂음]
• 내과 질환의 우울증
우울증에 사로잡힌 인간은 몸의 완전무결함의 상실이나 흔들림을 걱정하고 근심하며 좀체 이런 기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그래서 이런 근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답보 상태에 빠져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영향권 안에서만 움직인다. 이런 영향권 안으로 살아왔던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삶 등 모든 것이 소용돌이에 휘말리듯 빨려 들어가 의존적인 정지상태가 만들어져 미래에 닫힌 태도가 나타난다.~~~이런 정의에 맞아떨어지는 환자가 특히 심장병 환자 가운데 많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윗배에서 나타나는 나쁜 느낌에서 결정적인 것은 대개 가볍기는 하지만 윗배를 잠식하는 것만 같은 포만감이다. 늑골 부위를 좁히며 차지하는 이런 부담스러운 어떤 것의 체험은 환자를 끊임없이 짓누르며 거부할 수 없이 신경 쓰이게 만들며, 마치 늪에 빠져드는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바로 간이나 장의 질병으로 흔히 생겨나는 복부의 가벼운 포만감은 결코 의학적으로 입증 가능한 복부 창만이나, 심지어 배에 물이 차는 복수로 생겨나지 않는다. 환자는 이 부담스러운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내가 보기에는 이 포만감에서 끊이지 않는 목부의 통증이라는 몸의 경험이 상태, 즉 불쾌함이라는 상태와 맞물림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몸 경험 방식의 다양함 가운데 아주 특별해 다른 것과 혼동될 수 없는 특징을 가지는 이 불쾌함은 ‘우울증’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걱정과 의심으로부터는 아직 자유롭지만 이 순전히 둔중한 자극받음, 윗배의 포만감은 정신과적 질환을 넘어서는 포괄적인 의미에서 우울증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질병 초기에 나타나는 복부의 이 지극히 일반적인 불쾌함이 우울증으로 발전하기까지는 간이나 장의 질환에서 각기 다른 시간이 걸린다. 처음에는 가볍고, 그저 혼란스럽기만 한 불쾌함은 늑골 부위의 포만감이 앞쪽으로 옮겨지면서 갈수록 강해진다. 건강했던 시절, 끊임없이 세계에 속하며 모든 소통에서 감쪽같이 모습을 감추던 내 몸은 이제 돌제(실라지), 곧 방파제라는 목직한 물건 같은 특징을 얻는다. 이제 배는 윤곽과 무게를 가진다. 마침내 몸을 내가 끌고 다녀야 하는 짐이 된다. 배는 나를 통째로 요구한다. 나는 늘 배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항상 자신을 알리는 배의 존재는 다시금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려 나를 기묘하게 압박한다. 이 단계에 이르면 배라는 이 짐은 나로 하여금 세상의 모든 것을 멀리하게 만든다. 마치 나와 다른 것 사이를 벽처럼 가로막는다. 아무튼 나의 모든 활동에서 장애물로 나타나며, 나를 집어삼켜 고독하게 한다. 이 소리 없이 고독해짐을 환자가 자신의 것으로 발견하기 몇 주 혹은 몇 달 앞서 의사는 이미 알아차린다.
배라는 짐이 마치 물건 같은 것으로 경험되는 지경에 이르면 당연히 근심, 인생의 회의가 고개를 든다. 이런 근심과 회의는 자신의 아픔을 소화하는 본래적인 의미의 우울증이다. 그 중간 단계, 초기의 순전히 자극적인 느낌과 나중에 나타나는 본격적인 우울증 사이에서는 불편함의 정도가 달라지는 여러 과정이 물처럼 이어져 흐른다. 이러한 중간 단계는 그 불편함의 지속 정도 혹은 끊임없이 되풀이해서 나타나는 몸의 불쾌한 경험, 또는 더 나빠지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 혹은 배경에 무엇인가 숨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불신으로 점철된다.
• 심장병 환자의 우울증
• 병든 몸을 자각하지 못하는 어느 심장병 한자의 사례
• 아픔, 우울증, 세상의 심술궂음
• 우울증이란 몸을 경험하는 하나의 특수 상황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는 것]
• 말수가 줄고 행동은 신중해진다
• 인격을 침식하는 불행한 기분
• 내가 가진 것이 나를 소유한다는 역설
심근경색 환자에게 공통된 사실부터 짚어보자. 이들은 항상 자신의 심장을 느낀다. 아픈 심장으로, 가슴 속의 돌덩이로, 아프고 차가운 어깨로 심장의 존재를 감지한다. 끊임없이 심장의 존재를 감지하는 이 경험, 즉 예전과는 다르게 심장을 가졌다고 느끼는 경험은 어떤 특정한 불행함을 이야기하기에- 충분하다. 이 가짐이라는 특수구조의 특징은 내가 가진 것이 나를 소유한다는 역설이다(가브리엘 마르셀). “내가 심장을 가졌구나” 하고 느끼는 사람은 피할 수 없이 심장의 이 절박한 존재와 맞닥뜨려야 한다. 심장의 주인이 맺는 모든 관계는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심장으로 복잡해지며, 방해받고, 결국 불가능해진다. 조용하기는 하지만, 아주 까다로운 이 심장이라는 내 소유물은 마치 뱀을 발견한 눈길처럼 나를 꼼짝 못하게 사로잡는다. 특히 그것은 바로 나의 고유한 심장이며, 그 있음으로 피할 수 없이 나 자신의 존재를 위협한다는 의미가 이 사로잡음의 원인이다. 나의 일부, 더욱이 가장 고유하고 중요한 부분이 이처럼 낯설게 자신의 존재를 환기시킨다는 경험은 피할 수 없이 상반된 감정이 공존하는 태도를 가지게 한다. ~~~
이는 마치 노는 아이를 지켜보는 어머니의 상황과 같다. 아이에게 무슨 극단적인 일이 닥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그래서 피할 수 없이 구속적인 자세가 생겨난다. 자신의 존재를 감지하게 만드는 심장을 한시도 놓치지 않고 지켜 보는 것이 가벼운 공포감 혹은 체념적인 두려움을 불러올지라도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이 지금 그대로 유지되며, 그 어떤 것도 중간에 끼어들지 않아야 한다. 예상하지 못한 모든 것은 당연히 의심스럽다.
• 아름다운 풍경을 견딜 수가 없소
• 의식되는 몸 대 의식되지 않는 몸
무엇에로 나아감이라는 것은 인간의 몸에 지니는 결정적 특징이다. 이 나아감에서 몸은 항상 중개의 역할을 한다. 중개자라는 말은 아니다. 오로지 중개의 역할과 그 수행을 몸이 맡는다. 몸은 세계로 나아감을 중개해주며, 또 선험적 자아로 나아감도 중개해준다(실라지). ~~~
심근경색을 앓는 환자의 이 중개 가능성은 확연히 줄어들며, 좁아지고, 비틀린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이 환자에게서 거듭 나타나는 공간적 환경의 견딜 수 없음과 미래 없음이라는 경험은 인간의 다양한 영역을 장악한다. 이 경험은 환자가 무엇으로 나아감이라는 의무와 능력과 의지의 불능을 의미한다.
인지 작용, 어쨌거나 인간의 인지 작용은 언제나 느낌과 이해의 통일체다. 다시 말해서 인지 작용은 대상화와 뗄 수 없이 오히려 대상화와 뒤섞인 교감이다. 우리 몸이 온전한 인지 작용을 제공하지 못한다면 느낌이 변한다. 교감은 만감이 된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항상 앞서갈 수 있으려면 그 전제 조건은 몸이 우리의 행동에 유연하게 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몸은 눈에 띄지 않는 잠재적인 것으로, 의식되지 않는 것으로 남아야 한다. 그래야 몸은 우리의 자아실현에서 사라진다. 곧 몸은 우리에게 의식되지 않는다.
심장병 환자처럼 이게 보장되지 않으면, 하루 종일 몸동작이 불편한 나머지 생활이 불행해져, 몸은 잠재적인 것과 매체라는 상태에서 빠져나와 부담되는 것, 물건 같은 것, 돌제처럼 가로막는 것으로 굳어진다. 저림의 나타남이 바로 이런 굳어짐이다. 이 굳어짐을 심근경색 환자는 아른 냉기, 무거움, 왼쪽 팔의 마비로 경험한다. 현상학의 이론 관찰을 신경생리학은 신경체계에서의 행동과 공간 도식의 개념으로 확인해준다. 이것이 바로 프린츠 아우어스페르크의 연구 업적이다. 현상학의 방법과 신경생리학의 방법이 각각 알아낸 것은 이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아떨어진다. 현상학도 신경생리학도 인간 몸의 독특함을 똑같이 파악한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항상 앞서갈 수 있으려면 그 전제 조건은 몸이 우리의 행동에 유연하게 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몸은 눈에 띄지 않는 잠재적인 것으로, 의식되지 않는 것으로 남아야 한다. 그래야 몸은 우리의 자아실현에서 사라진다. 곧 몸은 우리에게 의식되지 않는다.
•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는 것
이 글의 목적은, 일군의 심장병 환자가 보이는 불행한 상태의 현상적 구조를 밝혀보는 것이다.
[인간학으로서의 병듦]
• 아직 심장을 모르는 아동
1944년 당시 나는 모든 연령대의 디프테리아 환자만 150여개의 병상을 차지하는 병원에서 일했다. ~~~주요 원인은 전쟁이었다. ~~~디프테리아로 심근염에 걸려 사망하는 환자가 두드러지게 많았다. ~~~~사망이 주로 11세에서 10세 이하의 아동에게 집중되었다. ~~~이 아이들은 심장이 뛰는 것을 심장이 뛰는 것이라고 느끼는 경우가 기이할 정도로 드물었다. 아이들은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호흡곤란을 거의 혹은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심장부위의 답답함이나 아픔 또는 가슴의 중압감도 호소하지 않았다.
• 심장에 문제가 있으나 자각하지 못하는
• 심장의 아픔을 느끼는 능력
• 심장의 출현, 세계의 새로운 차원
공동체 안에서 아이는 자신의 능력과 결함에 따른 위치를 부여받는 구성원이 된다. 이로써 아이는 자신의 가능성을, 한계와 과제를 깨우친다. 저마다 자신에게 걸맞은 역할을 맡으며, 자신이 보여주는 그대로 대접을 받는다. 놀이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규칙이다. 아이는 놀이를 통해 규칙을 지키는 것이 왜 중요한지 배운다. 이로써 정의감이 강하게 형성된다. ~~~이렇게 해서 명예심과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이 형성된다. 이런 감정은 아이가 갈수록 더 자립적이 되면서 더욱더 분명해진다. 이 시기에 받는 상처는 무엇보다도 부당한 일에서 겪는 멸시로 생겨난다. 명예와 위신이 공격받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아이는 무엇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꿈에도 하지 않는다. 모든 것에 넘치는 자신감을 가지며, 다른 아이와의 비교를 통해서야 비로소 자신의 한계를 알게된다. ~~~
이 극단적이고 일관된 외향성에 이어 대략 11세 혹은 12세부터 내향으로 바뀌는 시기가 시작된다. ~~~~균형이 잡혔으며 작지만 강하게 옹골찬 아이가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럽고 모난 청소년으로 바뀌는 외적인 변화는 극단적인 불안이 특징인 위기를 몰고 온다. 이 위기는 자신의 한계를 경험함에서 생겨나는 결과다. 아이는 모든 것을 다 잘할 수 없음을 깨달으며, 자신을 가족과 집단의 상대적으로 동등한 일원이 아닌 개인으로 보기 시작한다. 예전의 결속에서 떨어져 나오면서 현실에 눈뜨며 아이는 어른, 부모 역시 불완전한 존재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어른은 더는 전능한 권위를 자랑하지 못한다. 이런 깨달음은 아이로 하여금 실망한 나머지 거리를 두고 홀로 있는 시간을 가지게 만든다. 드물지 않게 아이는 자신이 부모의 진짜 친자식일까 하는 의심을 품는다. 이런 해체, 곧 집단에서 떨어져 나와 자의식을 키우는 시기의 특징은 자신은 다르다고 하는 생각과 고독해함이다. ~~~아이는 이제 어른의 의견을 더는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고 관철시키려 한다.
• 심장과 인간의 성숙
[아이는 아픔 안에 빠져 익사한다]
• 아이는 아픔을 표현하지 못한다
• 아이가 아직 아이일 때
• 너무 이른 나이에 심장병을 앓는 아이의 비극
[한국어판 해제]
(2017년 1월. 이승욱)
“우리는 모두 애정 어린 관심이 필요하다”
• 삶의 힘을 키워주는 책
독서를 가치 있는 행위로 만들어주는 글이 있다. 현존을 확인시켜주거나, 나 자신에 대한 앎을 가능하게 해주는 글은 읽기 힘들지만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 지루함에 대한 독창적 해석
꽤 여러 곳에서 단락으로 쉽게 넘어가기 어려운 문장들이 있지만 선택적으로 몇몇 곳을 뽑아 얘기할 수밖에 없겠다. 저자 플뤼게는 파스칼에 기대어 있다. 저자의 사상적 근거를 알 수 있다. 그들은 지루함을 거의 원죄 수준으로 다룬다. 파스칼을 빌려 “인간의 지루함은 대단히 빠르게 불행함으로 바뀌어 결국 불안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주목했다”(20쪽)고 말한다. 플뤼게는 실존적 지루함이야말로 자살, 즉 죽음 충동을 참지 못해서 죽음을 택하게 되는 자기 파괴의 원인이라고 꼽는다. 지루함을 견디기 위해 자기 자신에게 향했던 관심을 바깥으로 돌리는 모든 종류의 dslrks 활동으로서 디베흐티스망(오락)을 말한다. 충격이었다. 인간의 자살이 지루함 때문이라니. ~~~
지루함, 공허한 기다림, 무엇을 기다리는 지, 왜 기다리는지,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상태, 세속적 희망은 여기서 싹튼다. 우연과 우발에 대한 기대, 플뤼게는 이것이 세속적 희망이라고 정의한다. 무릎을 치게 하는 통찰이다.
• 원죄와 윤리, 그리고 문명
이 책을 읽는 독자가 혹여 무신론자라면, 플뤼게의 글에서 나와 마찬가지로 불쾌함을 느낄 수도 있다. 일단 무신론자는 신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을 먼저 말하고 싶다. 내게 신이 있다는 믿음은, 아프리카 세렌게티 초우너에서 풀을 뜯는 기린 한 마리가 있다는 것과 똑같은 무개로 이해된다. 즉, 누군가 t니이 있다고 말한다면 “어쩌라고?”라는 생각이 들 뿐이다. 하지만 플뤼게는 신의 존재에 한 치의 의심도 없다. 유신론자로서 신을 당위로 삼아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가 인간학을 말한다고 하지만, 어쩌면 이것이 신의 자녀학은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 상상력과 거짓말, 자기기만과 자아실현의 역설
고루하고도 보수적인 심리학이 낮을 붉힐 뜨거운 이야기도 있다. 인생에서 동기 또는 동기 부여는 변조와 위조의 속ㅇ미수 과정에서 파생된다고 한다. 학습심리학이나 교육심리학에서 그리도 목을 매는 동기 부여, 동기 유발 이런 것들이 변조와 위조의 부산물이라니, 그의 성찰은 경이로울 정도로 정확하다. 정신분석은 잉하 매우 유사한 입장을 견지한다(를뤼게는 계속 심리학의 한계를 지적하지만, 그가 말하는 심리학이 어떤 종류의 심리학인지 알지 못하겠다. 이런 부분은 다소 불편했다.)
파스칼을 이용해, 상상력은 기만적인 힘이라고 한다. 실존주의 심리학에서는 거짓말을 인간만이 가진 능력이라 칭송한다. 어쩌면 거짓말은 주체의 자아실현을 예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거짓말은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다. 그래서 상상력을 기만적인 힘이라고 하는가? 이런 단선적인 해석은 본질에 부합하지 않는다.
• 일상의 희망을 잃어버려야 진정한 희망이 생겨난다
희망론에 대해서는 반드시 언급해야겠다. 내 감상으로 그의 희망론은 절창이다. 플뤼게에 따르면 희망의 두 갈래로 세속적 희망과 근원적 희망이 있다. 근원적 희망을 품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일상의 세속적 희망을 모두 걷어내는 것이라고 한다. 근원적 희망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 역시 세속적 희망을 잘 설명하는 것일 테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 부분에 천작해야 할 것이다. “세속적 희망은 언제나 정말 이루어질까 하는 의심과 불안을 품는다. 세속적 희망의 특징적인 기다림은 초조함이다. 반면 근원적 희망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린다.”(53쪽)
일상의 희망이 대상과 관계된다는 그의 통찰은 정신분석의 우울에 대한 설명과 거의 궤를 같이하는 것 같다. 연인과 헤어진 뒤 슬픔을 감당해야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장기간의 우울로 힘들어한다면 이것은 뭔가 문제가 있다. 플뤼게가 말한 대상에 연결된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연인과의 관계가 끝난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공허를 채우던 그 대상을 상실했다면 그것은 이제 우울로 채워진다. 나를 떠난 연인은 나의 결핍을 채우던 하나의 이미지였을 뿐임에도, 실연한 이는 흡사 자신을 상실한 것 마냥 우울해한다. 플뤼게는 단호하게 말한다. “일상의 희망을 잃어버려야 진정한 희망이 생겨난다.”(91쪽) 더 이상의 감상문은 사족이겠으나 한마디만 덧붙인다. “내일은 더 나빠질 거야!” 오늘이야말로 희망이 아니겠는가! 시칠리아 사람들의 유명한 속담이다.
• 우리는 모두 애정 어린 관심이 필요하다.
(중략)
[Review]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이 세상과 이별해야 한다는 것은 인생의 모든 의미를 부정한다. 톨스토이는 중년의 나이에 들었을 때 이런 의문에 봉착했다.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즉 ‘이 환상과 같고, 소멸해 가는 나의 삶으로부터 참되고, 소멸하지 않는 무엇이 생길 수 있단 말인가? 이 무한한 세계 속에서 나의 유한한 존재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톨스토이 인생론. 참회록-
톨스토이는 인생의 깊은 회의에 빠지고 자살을 생각하게 되었을 때, 무한한 세계 속에서 유한한 존재로서의 인간이 지닌 의미는 자신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찾을 수 없는 것이며, 무한 무궁한 신과의 결합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해답을 얻고 젊은 날 잃어버렸던 신앙을 다시 회복하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톨스토이를 떠올린 것은 이 책의 주제가 궁극적으로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라는 “인간학”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독일인 의사로서 하이델베르크 대학병원의 원장을 역임했다. 오랜 세월 환자를 돌보는 과정에서 발견한 자연과학적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것들을 저자의 독특한 현상학의 방법론으로 접근한 사례들을 이 책에 담았다. 이 책이 흥미로운 이유는 지금까지 의학의 한 분야로 다루었던 정신분석이나 심리학이 아닌 근원적 인간 정신으로, 환자를 돌보는 의사의 마음이 과학적 치료보다는 인간적 이해에 있다는 점이다.
불치병의 판정을 받고 죽음의 날만 기다리는, 그러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쪼그라든다는 심정이 어떤 것인지? 파스칼은 <팡세-139>에서 인간은 ·아무리 훌륭한 지위, 재물을 소유한 사람이라도 그 삶에서 어떤 흥미를 유발하는 일 없이 자기의 처지만 생각하게 된다면 곧 허무와 절망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허무와 절망은 죽음으로부터 피할 수 없다는 불행에 기인한다. 이 책의 저자 ‘플뤼게’는 파스칼의 이야기를 근거로 해서, 흥미를 기대할 수 없는 삶의 지루함은 곧 허무함을 가리는 장막과 같은 것이라고 표현한 대목은 흥미롭다. 말하자면 인간은 홀로 지루함 가운데 있을 때 허무한 존재임이 드러나기 때문에 그런 상황(지루함)을 피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잘 아는 사람일지라도 홀로 있는 적막함만큼은 간절히 피하고 싶어 한다”(본문)
“인간은 완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 열정(격정)이나 분주함(사건) 혹은 산만함(오락)이나 열심히 노력함(열중함)이 없는 상태를 견디지 못한다.” (본문)
절망 가운데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할까? 우리의 유한한 삶과 무한한 세계를 이어주는 연결고리는 신앙뿐이다. 며칠 전 텔레비전에서 몇몇 알려진 연사들이 강연 하는 것을 보았다. 청취자 질문에서 자신의 절망적인 처지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자, 연사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을 보았다. ‘네, 아직 남아 있는 시간을 생각하세요, 그리고 최선을 다하세요.’ 절망에서 위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환자에게 어떤 위로가 있을까? ‘플뤼게’도 그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죽어감에서, 죽어감을 통해 인생은 새로워진다. 지극히 단순한 일상에 이르기까지 생명에 내재하는 , 생명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며 새롭게 창조하는 죽음은 끊임없는 일과 활동이다.”(본문)
이 책에는 ‘허무와 무한’, ‘몸과 병듦 그리고 행복과 불행’, 아픔에 대하여‘ 라는 큰 제목의 내용들이 환자의 임상적 사례에서 어떻게 관계되는지 다양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저자는 내과 의사이자 임상학자로서 이 책의 내용에서 기록한 현상학적 연구를 독학으로 깨우쳤다고 솔직히 고백했다. 그러기에 어쩌면 과학적 논증에 따른 심리학이나 정신분석과는 거리가 있을 것 같다. 한편, 모든 의사가 이와 같은 마음으로 환자를 대한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책을 읽으면 인생의 유한함에 대한 허무감이 들지만, 동시에 큰 틀에서 인생을 바라보는 지혜의 눈이 열리는 것 같다.
“내과의이면서 임상학자인 나는 현상학 연구에 요구되는 방법을 독학으로 깨우쳤다. 그래서 나는 늘 모범으로 여겨온 인물, 곧 볼노브, 보이텐디크, 겝자텔, 메를로-퐁티, 사르트르와 살라지의 연구를 참고해가며 방향을 잡았다.” (본문) ■
(본문)
“우리 인간은 무한함 그 자체를 파악할 수 없으며, 오로지 그 힘의 작용만 확인한다. 공허함은 물론이고 무한함의 힘 역시 가면을 쓰고, 베일을 드리운 채 나타난다. 지루함은 공허함이 작용하는 위장된 방식의 표현이다”.
“내가 연구한 환자들 사례는 심리학만으로 설명되지 않으며, 인간학을 함께 고려해야 그 원인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런 원인은 1차적으로 지루함, 단조로움이다. 공허함에 강력하게 사로잡힌 나머지 생겨나는 고독, 무한함과 관련해 쪼그라드는 희망이 인간학적 장애다. 다시 말해서 신의 부름을 받고 요구받는 자로 살아갈 능력의 상실이 인간학적 장애다.”
“파스칼은 이 모순을 인간의 두 가지 본성이라는 이론으로 설명한다. 인간은 원죄 이전에 1차 본성을 가지며, 이 본성은 원죄 탓에 산산 조각이 나서 인간의 2차 본성, 곧 무기력한 타협인 2차 본성을 만들어낸다.”
“인간 안에 자리 잡은 희망은 분명 졸아든다. 우리가 믿듯 완전히 졸아들지는 않을지라도, 희망은 계속해서 쪼그라든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지만 이 쪼그라듦은 절망이라는 상태로 이르지 않는다. 인간이 나는 희망이라고 없어 하고 말한다고 해서 근원적인 희망을 잃은 것은 아니다. 절망도 마찬가지다. 내면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절망은 개인의 절망이 아니다. 가장 심오한 절망은 개인의 주관적 절망이 아니라, 공허함이라는 상태, 정체된 기다림, 음울하기 짝이 없는 지루함으로 규명된다.”
“고민, 실존적 깨달음, 인생이 지닌 부조리의 인식으로 이어지는 생각의 흐름은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에게서 자주 보이는 현상이다.”
“외부의 조건이 유리한 쪽으로 인생을 만들어주면, 인간은 이제 어떻게 살아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되묻는다. 이런 정황은 인간에게만 볼 수 있는 특수함이다. 자신의 인생을 의문시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정신적 존재가 보여주는 특징이다.“
“생물적 존재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안정적 조건이 확보되면, 인간은 오히려 무료함과 의미의 갈증을 느낀다. 그저 먹고사는 생물적 존재일 뿐, 정신적 의미로 충만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인간은 자살의 충동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생물적 삶과 의미 있는 인생을 따로 떼어놓는 분열이 자살을 부른다.”
“내가 경험한 환자들은 (중략) 시간, 곧 살아낸 시간과 예전에는 사건과 사고로 넘쳐 나는 시간이 환자를 떠받들어줬다. 이제는 환자 자신이 이 시간을 떠받들어야 한다. 곧 시간에 내용을 채워줘야 하는 쪽은 본인이다.”
“내가 연구한 환자들 사례는 심리학만으로 설명되지 않으며, 인간학을 함께 고려해야 그 원인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런 원인은 1차적으로 지루함, 단조로움이다. 공허함에 강력하게 사로잡힌 나머지 생겨나는 고독, 무한함과 관련해 쪼그라드는 희망이 인간학적 장애다. 다시 말해서 신의 부름을 받고 요구받는 자로 살아갈 능력의 상실이 인간학적 장애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항상 앞서갈 수 있으려면 그 전제 조건은 몸이 우리의 행동에 유연하게 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몸은 눈에 띄지 않는 잠재적인 것으로, 의식되지 않는 것으로 남아야 한다. 그래야 몸은 우리의 자아실현에서 사라진다. 곧 몸은 우리에게 의식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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