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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농부가 밭으로 나갔습니다. 밭은 돌들과 온갖 잡초들과 가시덤불로 빈틈없이 채워져 있었습니다. 농부는 이대로는 씨를 뿌려봤자 열매를 조금도 맺을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밭을 향해서 “이 상태로는 절대로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걸 너도 알지? 내일까지 시간을 줄 테니까 돌들과 온갖 잡초들과 가시덤불을 치워 놓도록 해. 그러면 내가 다시 와서 씨를 뿌려줄게!”라고 말했습니다. 농부의 말을 들은 밭은 정신이 바짝 들었습니다. 뒤로 미루지 않고 즉시 돌들과 온갖 잡초들과 가시덤불을 말끔히 치웠습니다. 다음날, 이를 본 농부는 밭을 가상히 여겼습니다.
씨를 충분히 뿌려주었습니다. 밭은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반드시 확인하고 넘어가야할 너무나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밭에게는 과연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생명이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볼 필요도 없습니다. 없습니다. 비록 잡초와 가시덤불이기는 하지만 생명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잡초와 가시덤불도 생명입니다. 그렇지만 밭이 스스로 낸 열매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생명을 품은 씨가 여러 가지 방법과 경로를 통해서 뿌려졌기 때문에 맺을 수 있었던 열매입니다. 거기다 농부는 절대로 잡초와 가시덤불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밭은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하늘이 두 쪽이 날지라도 절대로 농부가 기대하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생명을 품고 있는 씨가 뿌려질 때 비로소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오늘 우리 교회 안에서 밭에게 스스로 열매를 맺으라고 요구하는 이상한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밭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 농부가 절대로 바라지 않지만 조건만 맞으면 언제든지 무성하게 자라서 숲을 이루는 잡초와 가시덤불을 제거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없습니다. 당연히 스스로 옥토가 될 수 있는 가능성도 없습니다.
농부가 원하는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은 더 더욱 없습니다. 교회는 그런 밭에게 옥토가 되라고 요구합니다. 스스로 맺은 열매를 내놓으라고 요구합니다. 눈을 씻고 찾고 또 찾아도 도무지 찾아지지 않는 가능성을 내놓으라고 요구합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스스로 옥토가 되어서 맺게 된 열매들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스스로는 절대로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폭로하셨습니다. 특히, 제자들에게는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 수 있겠느냐?”(막4:13b)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제자들을 가볍게 책망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즉시 누구나 다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쉽게 말씀해 주시지 굳이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운 비유를 통해서 말씀해 주시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신약 학자인 그C. E. B. Cranfield의 주장에 따르면,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는 어두움에 덥혀 있습니다. 지극히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제자들이라고 예외일 수 없었습니다. 어두움에 덥여 있었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를 제대로 깨달아 알 수 없었습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두움에 덮여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너희들에게는 하늘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다.”(마13:11b)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비밀μυστηρια”을 직역하면 “닫아 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지존至尊 회의를 통해서 결정된 비밀입니다. 하나님께서 열어주기 전에는 절대로 깨달아 알 수 없는 비밀입니다. 이 비밀은 하나님 나라의 임재 또는 실현은 아닙니다. 유대인이라면 이미 누구나 다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고 간절한 마음으로 도래할 때만을 사모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비밀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역사 안에 임했다는 사실입니다.
역사 안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목구멍까지 올라와 있던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 온갖 더럽고 추악한 일도 마다하지 않고 있었던 타락한 종교 장사치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로 알 수 없었습니다. 비유로 말씀해주신 첫 번째 이유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선택된 곧 반드시 알아야하는 사람들에게는 알려주고, 절대로 몰라야하는 사람들에게는 알려주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계속해서 “가진 사람은 더 많은 것이 주어져 풍부해질 것이다. 그러나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도 빼앗기게 될 것이다.”(마13:12)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가진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선포된 하나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받아들이는 것도 스스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값없이 부어지는 은혜를 통해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이들에게는 비유가 그냥 깨달아집니다. 그냥 알아집니다. 설명하기 어려운 신비입니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 말씀을 거부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의도적입니다. 의지적입니다. 계획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도록 굳이 따로 모아서 훈련시키지 않아도 됩니다. 심령 깊은 곳으로부터 지극히 자연발생적으로 우러나옵니다.
가진 사람은 은혜 안에서 값없이 선물로 주어지지 않으면 믿을 수 없습니다. 반면,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타락한 본능으로 얼마든지 거부할 수 있습니다. 함께 몰려들었던 무리들은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는 곳마다 행하시는 여러 가지 기적을 목격했습니다.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바로 그 메시아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하게 베풀어주신 은혜 안에서 되어 진 일이었습니다.
구원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를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하게 누릴 수 있었습니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들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한다.”(마13:13b)라는 증거에 따르면, 그들은 두 눈으로 똑똑히 보면서도 보지 못했습니다. 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분명히 두 귀로 듣고 있으면서도 듣지 못했습니다.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눈과 귀는 물론 마음까지도 아예 완전히 닫아버렸습니다. 당연히 이해하지도 못했습니다.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보는 것Seeing은 아는 것Knowing이 아니었습니다.
듣는 것Hearing은 깨닫는 것Perceiving이 아니었습니다. 영적인 불구자였습니다. 소경이었습니다. 귀머거리였습니다. 죄인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내 보이는 영혼의 상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들이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던 메시아라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탐욕을 채우는데 방해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반드시 치워버려야 할 장애물들 가운데 하나 정도로 여겼습니다. 결국 천국 복음을 외면했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큰 축복으로 누리고 있었던 유대인이라는 정체성까지도 발로 차버렸습니다.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를 누리기는커녕 오히려 영원한 죽음과 저주와 지옥으로 던져지고 말았습니다. 비유로 말씀하신 두 번째 목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진짜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누구인지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에게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사6:10a)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둔하게 하라.”를 직역하면 “살찌게 하라 또는 기름으로 덮이게 하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으로 전혀 깨닫지 못하게 만들라는 뜻입니다. “막히게 하라.”를 직역하면 “무디게 하라.”입니다.
어떤 깨달음도 얻지 못하게 만들라는 뜻입니다. “감기게 하라.”를 직역하면 “흐려지게 하라.”입니다. 시력은 물론 통찰력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만들라는 뜻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대상은 성민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종인 선지자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귀가 열리고, 눈이 떠진다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마음이 둔해지고,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긴다는 말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내 길에 빛입니다.”(시119:105)라는 시인의 고백대로, 선지자가 대언하게 될 하나님의 말씀은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를 깨닫지 못하는 무지한 세계가 아니라 오히려 깨달음이 넘치는 지극히 지적인 세계로 인도해 주는 등불이기 때문입니다. 빛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마음이 둔해지고,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되는 일이 전적으로 부패한 죄인의 본성으로부터 비롯된다고 한다면 얼마든지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성경은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라고 증거 합니다.
개혁자인 그John Calvin의 주장에 따르면, 눈이 어두운 사람이 빛을 볼 수 없다고 원망할 수는 없습니다. 귀가 완전히 막혀 있는 사람이 맑은 소리를 듣지 못한다고 불평할 수도 없습니다. 깨닫는 능력이 없는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남 탓으로 돌릴 수도 없습니다. 마음이 둔해지고,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는 근본적인 원인은 다른 누군가가 아닙니다. 전적으로 죄인 자신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구제불능의 인간이 스스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도록 처신하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즉시 이런 상태가 언제까지 이어져야 하는 것이냐고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해도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사6:13b)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나무는 베임을 당해도 그루터기를 남깁니다. 남은 그루터기로부터 새로운 싹을 틔웁니다. 희망을 이어갑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이 아무리 미치게 돌아가도 구원할 거룩한 씨는 언제나 예비 되어 있습니다. 거룩한 씨는 허물과 죄로 죽은 인생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나타나셔서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고, 자신을 거룩한 희생 제물로 내놓으시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두움이 뒤덮고 있는 세상에 나타나셨습니다. 이제까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놀라운 가르침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온갖 종류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사로잡고 있던 귀신들을 몰아내주셨습니다. 눈에 가득했던 눈물을 닦아주셨습니다. 가시는 곳이 어디든지 더 이상 사망이 없었습니다. 애통하는 것도 없었습니다. 곡하는 것도 없었습니다. 아픈 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현실 속에 여지없이 드러났습니다. 순간,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구원하기로 작정한, 은혜 안에서 믿음을 값없이 선물로 허락해주신 영혼들은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귀가 활짝 열렸습니다. 마음은 감동으로 요동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그리스도로 받아들였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간직한 거룩한 씨를 품었습니다. 동시에 간절히 바라던 옥토가 되었습니다. 이제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놀라운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열매가 맺히기 시작했습니다. 반드시 맺어야 한다고 하니까, 열매 맺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니까 맺어보려고 안달을 떨며 몸부림쳐 보았지만 도무지 맺히지 않았던 열매가 드디어 맺히기 시작했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열매는 누구나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고 사모하는 좋은 것들을 가키지 않습니다.
뒤에서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바르게 사는 사람을 단 한 명도 찾을 수 없습니다.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깨어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다들 잘못된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다들 막다른 길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입니다. 혀는 반지르르합니다. 내뱉는 말에는 자신도 죽고 남도 죽이는 맹독이 서려 있습니다. 서로 “올해의 죄인”이 되기 위해서 각축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세상을 온통 비통과 파멸로 채우고 있습니다. 더불어함께 사는 방법은 기본조차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안중眼中에도 없습니다. 거리를 샅샅이 살피며 찾아봐도 의인은 그림자도 볼 수 없습니다. 아예 씨가 말라버렸습니다. 이렇게 인생은 하나같이 길가 밭입니다. 돌 짝 밭입니다. 잡초 밭입니다. 저주 받은 상태입니다. 찔레와 가시를 낼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는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시는 단 하나의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몸부림치며 노력해도 마땅히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없는 절대 절망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라는 탄식과 절규가 저절로 쏟아져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그야말로 벼랑 끝에 매달려 있습니다. 이런 나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줄 수 있는 누구 없습니까?”라고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묻혀 완전히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있다. 그러나 밀알 하나가 땅에 묻혀 죽으면 싹이 나서 몇 배의 열매를 맺는다.”(요12:24)라는 증거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씨이십니다. 거룩한 씨이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품으셨습니다. 길가, 돌 짝, 잡초 밭을 뚫고 들어오셨습니다. 상처 받으셨습니다.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죽으셨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한 속죄 제물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셨습니다. 길가 밭, 돌 짝 밭, 잡초 밭들이 비로소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옥토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기를 원하셔서 질고를 당하게 하셨다. 그런즉 그의 영혼을 속죄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게 되리라.”(사53:10)라는 증거대로, 여호와의 거룩한 뜻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영원한 구원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를 받아 누리기 위해서 저와 여러분의 수고와 희생과 헌신은 0.000000001%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아니 저와 여러분 스스로는 영원한 구원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를 받아 누리기 위한 필수 조건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절대로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 안에서 어떤 조건도 요구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선물로 허락해 주실 때 비로소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와 여러분이 누리고 있는 영원한 구원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는 아들을 거룩한 희생 제물로 내놓으신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역사 이래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일하신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기억하시오. 아브라함은 열매하나 맺을 수 없는 길가 밭이었습니다. 돌 짝 밭이었습니다.
잡초 밭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옥토를 만들어주셨습니다. 믿음의 조상으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모세 역시 길가 밭이었습니다. 돌 짝 밭이었습니다. 잡초 밭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옥토를 만들어주셨습니다. 원망과 불평 곧 죄에 찌들어 있던 성민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길가 밭이었습니다. 돌 짝 밭이었습니다. 잡초 밭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옥토를 만들어주셨습니다. 가나안 완전 정복이라는 전무후무한 업적을 세운 성군으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길가 밭이었습니다.
돌 짝 밭이었습니다. 잡초 밭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옥토를 만들어주셨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길가 밭과 돌 짝 밭과 잡초 밭의 속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어가고 계십니다. 또 기억하십시오.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는 영원한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서 죽였습니다. 그렇지만 빛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거둬들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한 죽음과 저주로부터 일으키셨습니다. 인류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는데, 그 결과 구원이 완성되었습니다. 역설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저와 여러분이 죽을 때 비로소 세워집니다. 또 기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씨 뿌리는 비유를 베풀어주신 궁극적인 목적은 옥토가 되라고 가르쳐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반드시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가르쳐주기 위해서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세상에는 의인이 없다고 적나라하게 폭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세상에서는 눈을 씻고 찾아도 옥토를 찾을 수 없다고, 아니 아예 씨까지 말라버렸다고 폭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은 물론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도 옥토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폭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간에게는 반드시 있어야할 희망은 없고 오히려 무조건 없어야할 절망은 넘친다는 사실을 폭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하나님의 백성들이 생겨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려는 강한 의지로 씨를 뿌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룩한 생명의 씨가 되어 뿌려지셨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비유의 주인공은 밭이 아닙니다. 아니 밭이 될 수 없습니다. 쉬지 않고 씨를 뿌리시는 하나님입니다. 한 알의 밀 알 곧 한 알의 씨로 오셔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밭에 뿌려져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한 가지만 더 기억해 주시오. “거룩한 씨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희생을 통해서 옥토로 거듭난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떤 삶을 살아내야 하는가?”입니다. 열매를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하게 누리고 즐기는 편안한 삶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께서 견디기 힘든 고통과 조롱과 멸시를 당하고, 심지어 하나뿐인 소중한 목숨을 포기하면서까지 끝까지 살아내신 삶입니다. 농부이신 하나님 손에 의해서 뿌려지는 삶입니다. 황폐한 밭에 뿌려져 죽는 삶입니다.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는 삶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기꺼이 지는 삶입니다. 날마다 죽는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농부이신 하나님 뜻에 죽는 순간까지 철저히 순종하는 삶입니다. 나는 조금도 없고, 하나님만 충만한 삶입니다. 나는 흔적도 남기지 않고 철저히 지워버리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오롯이 드러내는 삶입니다. 내가 뿌려지고 달려서 죽은 바로 그 땅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진다는 믿음이 없이는 절대로 살아낼 수 없습니다. 세상 끝날 영원한 구원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에 반드시 참여할 수 있다는 믿음 없이는 절대로 살아낼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일으켜 세워주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 없이는 절대로 살아낼 수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으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에 수시로 변하는 상황에 따라 사정없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 불완전한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 안에서 값없이 선물로 허락해 주셨기 때문에 어떤 상황이 주어지든 결단코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으로 무장했을 때 비로소 살아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눅9:23b-24)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누구든지 당신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죽을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쳐주셨습니다. 뒤에서는 바로의 최정예 부대가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앞에서는 넘쳐흐르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위기였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은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에 완전히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노예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겠다며 아우성쳤습니다. 그때 모세는 그들을 “이럴 때 믿음으로 무장할 수는 없느냐?”라고 다그치지 않았습니다. “마음을 바꿔볼 수는 없느냐?”라고 다그치지도 않았습니다.
“너희는...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해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그저 가만히 있기만 하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해 싸워주실 것이다.”(출14:13b-14)라고 외쳤습니다.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친히 싸우시는 모습을 그저 지켜보기만 하라고 외쳤습니다. 바다 속을 마른땅 같이 건널 수 있었습니다. 두려움이 넘치는 지옥을 평안이 넘치는 하나님 나라로 바꿔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은 처음부터 생명이 없는 존재였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생명의 씨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유일한 주와 그리스도로 모셔 들일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농부이신 하나님 뜻대로 언제든지 또 어디에든지 뿌려질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거룩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옥토로 거듭나는 복된 삶, 자신이 뿌려진 바로 자리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는 복된 삶, 무엇보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기꺼이 뿌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앞서가셨던 길을 온전히 따라가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