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히리랴/신금재
-호프 가는 길
성탄절 휴가를 맞아 밴쿠버에 다녀오려고 뉴스를 듣고있자니 날씨는 점점 나빠진다고하였다.
아무래도 예정보다 조금 일찍 출발하는 것이 낫겠다싶어 크리스마스 전 날 정오 뉴스를 듣다말고 가방을 챙기기 시작하였다.
언젠가 처음으로 밴쿠버에 가던 날, 새벽에 떠난 것과 비교하면 터무니없이 늦은 시각이었다.
가다가 길이 안좋거나 해가 떨어지면 근처 모텔에서 자고갈 요량이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푸른 하늘에 두둥실 구름이 걸린 로키를 넘어 캠룹스에 다가도록 길은 너무 좋았고 딸 안젤라가 만들어준 한국 가요 유에스비에서는 끊이지않고 흘러간 옛노래가 흘러나왔다.
장거리 운전에 지칠만도한데 남편은 쉬지도않고 달리기만하였다.
눈만 안오면 괜찮아, 하면서.
그런데 호프를 향하는 코퀴할라 산에서 그예 눈길을 만나고야말았다.
아마도 아침나절에 폭설이 지나갔는지 여기저기 제설차들이 보였고 눈이 내린 뒤 녹으면서 얼어붙었는지 도로는 울퉁불퉁하였다.
긴장한 남편은 그래도 덜 미끄러운 가운데 쪽 중앙선 쪽으로 차를 몰아가고있었다.
주변에는 오직 어둠 만이 정적에 잠겨있을 뿐 어느 차량도 보이지않는데
차창 밖으로 동지가 지난 초승달이 우리를 따라오고있었다.
차가운 초승달이 한 척의 배처럼 코퀴할라 산 등성이를 따라 넘어갈 때 무수한 작은 고기떼로 별들이 헤엄치고있었다.
우리가 사는 디스커버리 동네에도 인디언 마을 위로 별들이 무수히 많이 보이는데 로키 산 위로 뜨는 별은 그 감회가 달랐다.
보이지않는 이 험한 산 위에서도 매일매일 달은 뜨고 별은 지고하면서 우리네 인생살이가 저물어가겠지.
남편은 위험한 길에서 운전하느라 긴장하면서 아마도 덜덜 떨지도 모르는데 철없는 아내처럼 별타령, 달타령 한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내 나름대로의 긴장 처방전이었다.
야, 초승달이네.
어쩜 저렇게 별이 총총할까.
호프에 사는 친구를 만나 하루를 묵은 뒤 메리 크리스마스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밴쿠버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밴쿠버에서
밴쿠버로 가는 길에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있었다.
길가 양 옆으로 캘거리에서는 잘자라지 못하는 측백나무가 줄서기를하고 들판에는 초록빛이 가득하여 마치 캘거리 여름 풍경이었다.
밴쿠버 성당에서는 아침 성탄 미사가 끝나고 대미사 준비가 시작되고있었다.
성가대와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성탄 음악이 장엄하게 울려퍼지고 산타할아버지가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누어주는 색다른 분위기의 미사가 가슴에 감동의 물결로 다가왔다.
특별히 비슷한 시기에 이민와 캘거리에서 가까이 지내던 루치오 신학생을 만나 반가운 만남을 하고
내년에는 사제서품을 받게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루치오신학생에게 주님의 은총을, 성모님의 사랑을 기도드린다.
시애틀의 바다와 그 물결
밴쿠버 선배님 댁에서 시애틀에 사시는 다른 선배님을 만났다.
마침 우리도 이번 여행에서 시애틀에 다녀올 계획이어서 그분을 따라 떠나게 되었다.
차로 미국에 다녀오던 몇 년 전, 그때 우리는 몬타나에서 미국 국경을 넘어 아리조나, 유타주를 넘어서 갔다.
이번에 넘어가는 국경이름은 peace arch-평화의 배-
국경 너머로 보이는 태평양 바다 위에는 한가로히 몇 척의 배들이 보였다.
저 바다를 따라가면 우리나라 동해가 나오겠지.
시애틀로 내려가는 하이웨이 풍경은 캐나다와 그리 다르지않게 상가와 몰들이 이어져있고 간혹 주택들이 보이는데 겨울 나무들은 볼 수 없었다.
선배님 댁으로 가는 길, 다운타운을 지나가면서 불빛에 반짝거리는 마이크로소프트 간판을 보니 이곳이 그 유명한 시애틀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시애틀 관광을 오면 스타벅스 커피 1호점을 찾고 보잉사도 보고 무슨 타워도 본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선택한 곳은 시애틀 바닷가였다.
우리가 찾아간 아침 바다에는 바람이 많이 불어 파도가 몰아쳤다.
선배님과 어린 시절 같은 동네에 살았던 남편은 바닷가 주변 풍경이 자유공원 아래 모습과 닮았다며 어린 시절 추억의 고향으로 돌아가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학교 다닐 때 걸어다닌 이야기
선생님들에게 벌서던 이야기
이민와서 십년 만에 고향을 찾아갔지만 모든 것이 달라지고 돌아올 때 인천공항에서 내려다보이던 고향이 너무 서글퍼서 남편은 이제 다시는 고향에 가고싶지않다고 하였다.
캘거리를 떠나와 밴쿠버에서는 고향 이야기를 별로 하지않던 그가 시애틀 바닷가에서 고향의 한 조각 파도를 보았을까.
끝도 없이 이어지는 고향이야기에 커피잔은 식어버리고 바다 위로 훼리호는 떠나는데 정지용의 향수가 떠올라 우리는 파도가 부서지는 바닷가를 거닐었다.
향수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돌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