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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지에서 비롯된 사자성어 50개 **
[영한대역 만화 삼국지(三國志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 국내 및 세계 최초
- 출처 : 영한대역 칼라 만화 삼국지(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 저자 : 21세기 영어교육연구회(21st C.E.T.A.)
- 출판사 : (주)파우스트 칼리지
1. 간뇌도지(肝腦塗地)
간과 뇌장을 쏟아낸다는 뜻.
사지에서 아두를 구해온 조운에게 유비가 도리어 아두를 땅바닥에 집어던지며,
'이 아이 하나 때문에 명장을 잃을 뻔 했구나!'고 탄식하자 조운이 감복하여
'간과 뇌장을 쏟아내도 주공의 은공을 갚을수 없겠습니다'고 말하였다.
2. 강노지말(强弩之末)
강하게 날아간 화살도 멀리 날아가 끝에 이르러서는 비단결 한 장 뚫지 못한다는 뜻.
제갈량이 적벽전에 앞서 손권을 만나면서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이렇게 말하였다.
여기서는 강노가 조조의 병력을 뜻한다.
3. 개문읍도(開門揖盜)
문을 열어두고 도둑을 맞이한다는 뜻.
손책 사후 그의 뒤를 이은 손권이 자칫 슬픔에 젖어 국정을 그르칠까 두려워 장소가 충고
하였다. 유) 개문납적(開門納賊)
4. 거재두량(車載斗量)
훌륭한 인물이 수레로 날아 실을 만큼 많다는 뜻.
오의 사신 조자가 위제 조비를 만나면서 이 고사를 인용하여 오의 실력을 과시하였다.
촉의 장송도 양수에게 비슷한 말을 건낸 적이 있다.
5. 괄목상대(刮目相對)
눈을 씻고 다시 서로를 상대한다는 뜻.
한낱 무장에 불과했던 오의 여몽이, 노숙의 권유에 책을 펴든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학식을
갖춘 지장으로 모습이 바뀌자, 노숙이 여몽을 칭찬하며 이 말을 하였다.
6. 군신수어지교(君臣水魚之交)
제갈량을 모시다시피하여 신야로 온 유비는 그날부터 제갈량을 스승처럼 대접하여 잠시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를 본 관우와 장비는 좋게 생각하지 않고 늘 불평을 늘어놓았다.
"아무리 군사라고 하지만 아직 나이도 어리고, 재주가 있다 할지라도 형장은 지나치게 대우하십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 보기에도 별로 좋지가 않습니다."
유비가 타이르며 단언했다.
"내가 군사를 얻은 것은 고기가 물을 얻은것과 같으니 아우들은 불평하지 말고 두고보라.
반드시 큰 업적을 쌓을테니..."
관우와 장비는 달리 대꾸할 말이 없었다. 이렇듯이 주군과 신하가 마치 물과 물고기처럼
돈독한 관계를 맺을때를 수어지교라고 한다.
이때 유비의 나이는 마흔일곱살이고 제갈량은 스물일곱 살이었다.
7. 계륵(鷄肋)
조조군이 한중에서 철수하기 얼마 전이었다.
그날 밤 조조가 저녁식사를 하려는데 음식이 닭갈비였다.
때마침 하후돈이 들어와, "오늘밤 군호를 무엇으로 할까요?" 하고 물으니 별다른 생각없이 방금 전에 먹었던 음식 생각이 나서 계륵이라고 했다.
하후돈이 전령하기를 오늘밤의 군호는 계륵이라 하였다. 이때 행군주부 양수가 하후돈의
군호를 듣고는 행장을 수습하여 돌아갈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하후돈이 깜짝 놀라 양수에게, "그대는 어찌하여 행장을 수습하는 것이오?" 하니 양수가 대답하기를,
"제가 군호를 듣고 위왕께서 곧 귀환하실 뜻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계륵이란 것이 뭡니까. 그러니까 먹으려면 먹을 고기가 없고 버리려면 아까운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처한 전황처럼 이제 나아가도 이기지 못하고 물러가려 하나 남의 치소가 두렵고 여기에 있자하나 아무 이로움 점이 없는 형국과 똑같지 않습니까. 아마 내일이나 모레쯤 위왕께서
철수할 생각이라는 것을 밝힌 것이니 아예 미리 행장을 수습한 것입니다."
하후돈은 원래 똑똑하기로 소문난 양수의 말을 듣고 '과연 학문이 깊은면 위왕의 마음속
깊은곳까지 헤아리는구나' 하고 칭찬하며 자신도 행장을 수습하니 여러 장수들도 덩달아
돌아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날 밤 조조는 심신이 편치못하여 밤바람이라도 쏘이려고 막사밖으로 나왔는데 하후돈의 병사들이 제각기 돌아갈 준비를 하는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 그래서 하후돈을 불러 물어보았더니 양수가 군호인 '계륵'을 풀이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이 말을 들은 조조는 크게 노하였다. 마치 속마음이 들킨 기분이 드는데다가 평소 똑똑한 티를 내는 양수가 얄미웠던 것이다. 그래서 군심을 어지럽혔다 하여 양수를 처형하고 머리를 영문에다 효수했다. 바로 여기에서 계륵이 유래되었다.
8. 난공불락(難攻不落)
학소가 지키는 진창성이 쉽사리 빼앗기지 않자, 제갈량이 감탄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9. 단기천리(單騎千里)
조조를 떠나 유비를 찾아가는 관우의 모습을 묘사한 고사. 말 하나를 타고 천리를 내달린다는 뜻.
10. 도원결의(桃園結義)
복숭아나무 정원에서 유,관,장 세 사람이 의형제 결의를 맺고 황건적 토벌에 나선 것을 말한다.
11. 득롱망촉(得籠望蜀)
조조가 한중을 얻고 허창으로 되돌아가려 할 때, 사마의가 조조에게 권하길,
'이 기회를 틈타 유비가 있는 촉을 얻으십시오'라 하였으나, 조조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옛말에 농지방을 얻고 촉을 바란다더니, 욕심이 과하군'이라 답변하였다.
12. 망천지시(亡天之時)
하늘이 망하려는 것. 17로 제후군이 모여서 원소를 장으로 추대하자, 원소가 동탁의 만상을 이말로 표현하였다.
13. 백리지재(百里之才)
재능이 뛰어난 사람을 일컫는 말. 노숙이 방통을 유비에게 추천하면서 방통을 이에 비유하였다. 참고) 그러나 연의에서는 이 구절을 '방통은 백리를 다스릴 인물이 아니다'라고 풀이해 놓았다.
14. 백미(白眉)
마량의 눈썹이 흼을 뜻함. 형제 다섯 중 눈썹이 흰 마량의 재주가 가장 출중하다 하여,
여럿 중 제일 나은 인물 혹은 물건 따위를 이름이다.
15. 복소지란(復巢之卵)
공융의 두 아들이 한 말. 둥지가 부서지면 알이 성할리가 없다는 뜻. 공융이 조조의 노여움을 사 끌려가자, 그의 비복들이 그 두 자제에게 몸을 피하라고 권했지만, 둘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유) 복소지하 안유완란 (復巢之下 安有完卵), 소훼란파(巢毁卵破)
16. 순망치한(脣亡齒寒)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뜻.
촉의 운명이 바람앞 등잔일 때에 화핵이 이 고사를 인용하여 손휴에게 구원군을 보내기를 간하였다. 참고) 이 고사는 춘추시대 진나라 헌공과 궁지기라는 신하 사이에 오간 대화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17. 식소사번(食少事煩)
적게 먹고 일은 많이 한다. 제갈량의 사신에게 사마의가 말하면서, 제갈량은 얼마 안가 죽으리라고 예언하였다.
참고) 이에 대하여 주부 양옹이 담당하는 군무의 양을 줄이라고 건의했으나, 제갈량은 선주의 은총을 떠올리며 거절한다.
18. 우도할계(牛刀割鷄)
소 잡는 칼로 닭을 잡는다는 뜻.
동탁이 사수관을 지킬 장수를 뽑을때 여포를 보내려 하자, 화웅이 여포를 소 잡는 칼, 손견을 닭에 비유하며 자신의 출전을 요청하였다. 유) 할계언용우도(割鷄焉用牛刀)
19,20. 육출기산, 구벌중원(六出祁山,九伐中源)
기산에 여섯번 나가고, 중원을 아홉번 어우른다는 뜻 .
각각 제갈량과 강유가 북벌을 여섯번, 아홉번 시도한 것을 뜻한다.
21. 청경우독(淸耕雨讀)
맑을 땐 밭을 갈고 비가 올 땐 책을 읽는다. 제갈량이 융중에서 이런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22. 천계일봉(千鷄一鳳)
닭 천 마리 중에 봉황이 한 마리가 있다는 뜻.
황건적 장수인 절천야차 하만이 조조 군영을 농락하며 등장하자, 조홍이 이렇게 외치며
그와 맞섰다.
23. 칠종칠금(七縱七擒)
일곱번 잡고 일곱번 풀어준다는 뜻.
제갈량이 남정을 떠나 남만왕 맹획과 싸워 일곱 번 잡고 일곱 번 풀어준 후에 그의 진정한 항복을 얻어냈다.
24. 파죽지세(破竹之勢)
대나무를 쪼개는 기세.
진의 장수 호분이 두예에게 차근히 오 정벌을 풀어나갈 것을 권유하자,
두예는 이렇게 말하며 그의 권유를 거절하였다.
25. 홍문연회
유비와 조조가 영웅에 대하여 논하고 있을 때, 갑자기 관우와 장비가 들이닥치면서 '칼춤이라도 추어보이기 위해 달려왔습니다'라고 하자, 조조는 그들의 충심에 감복하면서,
'이곳은 홍문의 연회가 아니니 칼을 들 필요는 없을 것이오'라고 답하였다.
참고) 홍문연회란 항우가 모사 범증의 말에 따라 홍문이라는 곳에서 유방을 죽이려 했던 일을 말한다. 범증은 항장이라는 장수를 시켜 칼춤을 추다가 은밀히 유방을 죽이도록 하였는데, 이를 알아챈 항백이라는 자가 같이 칼을 뽑고 춤을 추면서 항장의 행동을 저지하였다. 곧 유방의 장수인 번쾌도 칼을 뽑아들고 뛰어 들어 항장을 막았고, 낌새를 알아차린 유방은 곧 장 자리를 떠서 화를 면했다고 한다. 이 고사는 유비의 입촉에서도 인용된다.
26. 회귤고사(懷橘故事)
오의 육적이 원술의 초청을 받아 잔치에 참가하였을때, 모친을 생각하여 귤을 품어 달아났다는 고사. 육적회귤(陸績懷橘)
27. 오관참육장(五關斬六將)
서주에서 쉽게 유비를 물리친 조조는 관우가 있는 하비성으로 군사를 몰았다. 이때 관우는 유비의 일가를 보호하고 있었는데, 조조의 항복 권유를 받고 세가지 조건 - 자신의 항복은 조조에게가 아니라 천자에 대한 항복이라는 것, 유비 식구들의 안전을 보장하고, 유비가 있는 곳을 알면 언제라도 떠나겠다는 것 - 을 제시하고 그에게 투항한다.
조조는 유비에게 향한 관우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여포가 타던 적토마를 주고, 날마다 연회를 베풀며, 각종 진귀한 물건을 주는 등 갖은 노력을 다 기울였다. 그러나 관우는 유비가 원소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바로 조조를 떠난다. 이 때 관우는 다섯 관문을 지나며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는 조조의 부하장수 여섯 명의 목을 벤다. 관우가 떠났다는 소식을 뒤늦게 안 조조는 장료를 보내 관우의 무사통과를 지시하지만, 이미 자신의 부하 장수들이 희생을 당한 뒤였다. 이에 격분한 하후돈이 관우를 죽이려고 하지만 조조는, "무릇 사람이란 자신이 섬겨야 하는 주인은 따로 있는 법"이라며 관우와의 약속을 지키고있다.
이 일을 연의삼국지에서는 오관참육장(五關斬六將)이라고 기술하여 유비를 향한 관우의
변함없는 의리만을 찬양하고 있다.
28. 수인사대천명(修人事待天命)
삼국지에서는 관우가 조조를 화용도에서 놓아주고 왔을 때, 유비의 간청으로 관우를 살려준 제갈량이 유비에게 '아직 조조는 죽을 때가 안됐기 때문에 관우로 하여금 과거 조조에게 입은 은혜나 갚으라고 유독 그를 화용도로 보낸 것'이라고 하면서, 그러나 자신은 다만 인간으로써 할 수 있는 모든 도리를 다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이 표현으로 밝히고 있다.
29. 난형난제(難兄難弟)
후한 말엽. 11대 환제 12대 영제대 환관들의 전횡이 심하여 정의파 관료나 관료예비군이라고 할 수 있는 태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당인(黨人)이라는 정치단체를 결성하여 환관정치에 저항, '당고의 화(黨錮의 禍)' 라는 탄압사건을 불러 일으켰다.
그대 진식(104-187)은 태구현의 장관으로서 명망이 있었으나 역시 환관정치에 저항하여
옥에 갇히기도 했지만 처형되지 않고 나중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손자들을 교육시키며 노후를 보냈다.
그의 장남 원방(元方. 이름은 기 ) 은 후한 말 동탁밑에서 시중으로 승진했으나 동생인 계방(季方)은 젊어서 죽었다. 모두 명성을 얻어 아버지나 형과 함께 세 사람의 걸출한 인물이라고 불리웠다.
원방의 아들 장문(張文. 이름은 군 )은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어 위왕 조조 정권을 거쳐 위문제 조비밑에서 대신이 되어 유명한 '구품관인법(처음으로 관직을 의계품으로 나눈 관제 및 관리등용법)'을 입안 제정하기도 했다.
그 장문이 어릴적에 계방의 아들인 효선(孝先. 이름은 충 )과 서로 자기 부친의 공적을 예로 들면서 우열을 논한 일이 있는데 결판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조부 진식의 의견을 물어보았다. 그러자 진식이 말했다.
"원방은 형, 계방은 아우지만 덕행으로 보면 원방을 형이라고 하기 어렵고 그렇다고 해서
계방을 아우라고 하기도 어렵다(元方難爲其兄, 季方難爲其弟)." '난형난제(難兄難弟)'란 말은 여기서 나온 고사로 형제의 우열을 가릴수 없다는 뜻으로 나중에 바뀌어 상하우열을 가릴수 없는 것을 지칭하게 되었다.
이 말을 후학들이 평가하기로 부모된 사람은 죽을때까지 자기 자식의 우열을 가려 품평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는가 하면 부모로부터 '형보다 못하다'는 말을 들은 아우도 기분이 좋을리 없는데 만일 동생보다 못한 형이라고 평가한다면 어떤 정신적 고통을 받게 될까를 염두에 두라는 뜻으로 풀이했다.
30. 내조(內助)
위문제 조비의 황후인 곽후(廓后, 187-234)는 원래 군의 장관이었던 곽영의 딸로 태어났을 때부터 남과 달라 곽영이 '내 딸은 여자 가운데 왕이다'라고 말했기 때문에 '여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녀는 조조가 위왕이 되었을 무렵(216년) 동궁으로 들어갔다. 여성으로서 보기 드물게
조비가 황태자가 되는 데에도 책략을 썼다. 조비가 제위에 오르자 참소하여 조예를 낳은
견후에게 죽음을 내리게 했고 222년에 자신이 왕후의 자리에 앉았다.
견후는 머리칼로 얼굴을 덮고 겨로 입을 틀어막은 채 매장되었다고 한다.
이보다 앞서 중랑(궁에서 숙직하여 시위하는 관리)인 잔잠(棧潛)이 곽황후를 세우는 것에 반대하여 위제 조비에게 상소를 올려 '예로부터 제왕의 정치에는 밖에서 정치를 돕는 자뿐만 아니라 내조도 있습니다' 라고 말하고 가르침으로 알아야 할 선례나 관례, '역경'이나 '춘추 좌씨전'에 적혀있는 것을 들어 사람이 신분이 높은 자리를 탐하여 발생하는 많은 불상사와 집안의 불행에 대해 간언하고 설득했으나 위제 조비는 받아들이지 않고 급기야는 곽씨를 황후로 세웠다.
내궁의 법도와 황후의 인덕을 뜻하는 말로 시작된 '내조'란 내부에서 돕는다는 의미로서
내덕의 공을 말하는데 일반 시중에서는 '내조의 공'이라 하여 널리 아내가 가사를 잘 돌보아 밖의 일을 하는 남편이 집안 일에 신경쓰지 않도록 한다는 의미로 쓰였다.
31. 돈견(豚犬)
조조가 천하통일에 나서서 25만 대병력으로 장강 연안에 포진하고 주유와 제갈량은 이에
맞서 결전한 것이 유명한 '적벽대전' 이다. 이때 수전에 익숙치 못한 조조는 화공작전이라는 기략에 휘말려 대패했다. 조조는 그 후에도 자주 손권을 치려고 했으나 끝내 무찌르지 못했다. 조조는 탄식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자식을 가지려면 손중모와 같은 자를 갖고 싶다.
앞서 항복한 형주의 유표 아들 따위는 돈견과 같다 (生子當如孫仲謨, 劉景升兒子, 苦豚犬耳)." '삼국지' 주해에 '돈견'은 '돈아견자(豚兒犬子)'로 경멸하고 업신여기는 말이라고 되어 있다. 자기 아들을 낮추어 말할때 '돈아'라고 말하는 것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건안기를 대표하는 시인이기도 했던 조조는 무슨 일이 생겼을때마다 한마디 하지 않고서는 못배겼던 것 같다. '돈견'이라는 악담을 뒤집어보면 쉽게 무찌를 줄 알았다가 의의로 적벽에서 패한 것을 원통해 하는 심정도 숨겨져 있을 것이다.
32. 망매해갈(望梅解渴)
위왕 조조는 '젊어서부터 기경, 권수가 있었다'고 그에 대한 각종 사료에 나타나 있다.
'기경(機警)'이란 기지가 있고 영리하다는 것이며 '권수(權數)'는 '권모술수'를 줄인 말로
남을 기만하는 모사를 말한다. 한마디로 영특하여 여러 사람을 이끌만한 리더쉽이 있었다는 말이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대표적인 기경권수의 예로 전해지고 있다.
위왕 조조가 행군하던 중 물이 있는 곳을 찾지 못하여 모든 장병이 목이 말라 허덕이고 있었다. 이 모양을 바라보던 조조는 갑자기 소리쳤다. "자! 저 너머에 커다란 매실나무 숲이 있다. 새콤한 열매가 가득 열려 있을 테니까 조금만 더 가면 목마름을 풀 수 있을 것이다."
장병들은 이 소리를 듣고 매실을 생각하자 절로 입안에 침이 고여 기운을 내서 샘이 있는 곳을 찾아갈 수 있었다. 이 고사를 '망매해갈(望梅解渴)'이라고 한다.
조조의 뛰어난 재치를 말하는 것이 되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사람을 속인 예로써 지적되기도 한다. 이때 매실이 있다고 한 장소는 안휘성 노강현 동남방의 매실나무가 많은 누은산, 또는 안휘성 추보현 서남방이라고도 하지만 사실인지 아닌지 어느때 얘긴지 확실하지는 않다. 그러나 이 고사는 기경과 권수를 수단으로 정치력을 발휘한 위왕 조조의 단면을 잘 말해 준다고 하겠다.
33,34. 명모호치(明眸皓齒)와 폐월수화(閉月羞花)
미인을 두고 '침어낙안(沈魚落雁)'이나 '폐월수화(閉月羞花)' 또는 '명모호치(明眸皓齒)'라는 말이 시나 부 등에서 자주 사용된다.
출처를 보면 조조의 삼남 조식이 견씨를 좋아했는데 그녀는 형인 조비에게 시집가 견후가 되었다. 그녀는 얼마후 곽씨에게 황후의 자리를 빼앗기고 죽음을 당했고 조식은 그녀의 유품인 베개를 형 위제 조비로부터 받아 임지로 돌아오는 길에 낙수가에 이르렀다. 그때 조식은 견씨의 모습을 회상하며 '낙신부(洛神賦)'를 지었는데 조식은 매우 비감한 심정이 되어 다음과 같이 읊었다.
'엷은 구름에 사인 달처럼 아련하고 흐르는 바람에 눈이 날리듯 가뿐하다.'
'폐월(閉月)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낙신부'에서 '폐월'의 명구를 낳은 부분에 이어 그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어깨선은 깎은 듯 매끄럽고 허리에는 흰 비단을 두른것 같다. 목덜미는 길고 갸름하며 흰 살결을 드러내고 있다. 향기로운 연지를 바르지도 않고 분도 바르지 않았다. 구름같은 모양으로 머리는 높직하고 길게 그린 눈썹은 가늘게 흐른다. 빨간 입술은 선연하게 눈길을 끌고 하얀 이는 입술 사이에서 빛난다. 초롱한 눈은 때로 곁눈질 치고 보조개는 귀엽기 그지없도다.'
여기서 명모(明眸)란 시원스럽고 맑은것, 호치(皓齒)는 하얗고 아름다운 이를 말한다.
'명모호치'는 미인의 조건이 되었다. 나중 시인들은 이 말을 빌어 미인을 뜻할때 명모호치 또는 폐월수화라고 노래했다.
35. 비육지탄
어느날 유표의 초청으로 저녁식사를 함께 하는 자리에서 유비가 화장실에 갔다. 볼일을 마치고 우연히 자신의 허벅지에 찐 살을 본 유비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자리로 돌아왔으나 운 것을 눈치챈 유표가 이상히 여겨 물었다.
"아니, 왠 눈물이오?" "제가 이제 오십을 바라보는 세월을 살면서 단 한가지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한실을 다시 일으키는 것입니다. 제가 전쟁터에서 평생을 보내 언제나 말등에 앉아 있었으므로 허벅지에 살이 찔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보니 살이 많이 찌고 달라져 있었습니다. 이룬 것은 없고 그저 무위도식, 살만 찌고 있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불우한 상태에서 지내는 것을 한탄하는 이 말은 양양일대에 살고 있는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처럼 쓰여지고 있다.
36. 박면피(剝面皮)
진의 천하통일은 어떤 측면에서 오의 손호 스스로가 행한 폭정탓에 반대급부로 얻어졌다고 해도 좋을 만큼 그 포학성에 대해서는 널리 알려져 있다. 간언하는 신하를 거열형에 처하거나 뜻에 거역하는 궁녀를 참살해서 격류에 던져버리는 등 갖은 학정을 다 했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박면피'라는 것도 오제 손호가 얼마나 포악했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이다. 손호의 잔인성은 마음에 맞지 않는 자의 얼굴 가죽을 벗기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 그가 진에게 항복하여 낙양으로 끌려갔을때 진의 실력자인 가충이,
"어째서 사람의 얼굴 가죽을 벗기는 짓을 했습니까?" 라고 묻자 손호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얼굴 가죽이 두꺼운 것이 우선 밉살스러웠기 때문이었소."
이 고사는 나중 배씨어림 속에 수록되었다. '면피를 벗긴다'는 것은 파렴치한 자의 면모를 밝혀 수치를 맛보게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른바 낮가죽이 두껍다라든가 뻔뻔스럽다라든가 염치를 모른다는 것을 '후안무치'라고 하는데 이것은 '시경' 소아의 의 한편에 '교언여황(巧言如簧)은 안지후의(顔之厚矣)' 에서 나온 고어로 이것을 좀 새롭게 구성한 것이 '남사(南史)' 변변전에 나오는 '면피후(面皮厚)' 즉 뻔뻔스러운 사람을 두고 얼굴 가죽이 두껍다고 말했다.
37. 삼고초려(三顧草廬)
유비의 인재 영입 방법의 백미로 꼽히는 삼고초려의 이야기는 끈끈한 인간관계에 호소하여 혈연 이상의 정분을 맺고 믿음을 획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비는 제갈량에 대한 소문을 듣고 눈보라치는 추운 겨울에도 두번씩이나 허탕을 치며 성의를 다해 찾아갔다. 그리고 이듬해 봄이 되자 다시 점쟁이에게 물어 길일(吉日)을 잡고 사흘이나 목욕재계한 후 다시 제갈량을 찾아 융중으로 향하는 것이다.
이때 관우, 장비는 화가 났다. 칼 한 자루 휘두를 만한 힘도 없을 서생 하나를 영입하려고 벌써 두번이나 찾아갔었고 상대가 웬간하면 답례 정도 할 수 있는 일을 안하는게 더욱 괘씸했던 것이다. 그래서 유비에게 불평을 늘어놓았으나 유비는 일언지하에 묵살하고
"예를 다하여 모셔와야 한다."고 호통친다.
결국 세번째 방문으로 제갈량의 영입에 성공하는데 사람의 일은 오직 정성을 다하는 것에서 좋은 결실을 맺을수 있다는 예로도 이 삼고초려란 말이 쓰인다.
38. 양상군자(梁上君子)
진군의 조부 청류파 출신의 거목이었던 진식은 하남성 태구현의 장관으로 유명했다.
그가 태구현의 장관으로 있던 어느해 극심한 흉작으로 백성들은 먹을것이 없어 허덕이고 있었다.
어느날 밤 도둑이 그의 방에 몰래 들어와 들보위에 웅크리고 있었다. 진식은 그 기미를 알아차리고 옷차림을 단정하게 한 다음 아들과 손자를 불러 타이르면서 말하였다.
"사람은 수양을 게을리하면 안된다. 좋지 않은일을 하는 사람도 본시부터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닌 것이다. 하던 버릇이 습성이 되어 그렇게 되는 것인데 저 '양상(梁上)의 군자(君子)'도 바로 그렇다."
대들보 위에 바짝 웅크리고 있던 도둑은 크게 놀라 스스로 뛰어내려 엎드려 죄를 받으려고 했다. 진식은 조용히 타이르며 '보기에 악인 같지 않으니 깊이 반성해서 자기를 극복하면 선으로 되돌아 설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배고픈 탓이겠지'라고 말하고 비단 두필을 주며 놓아주었다. 그 이후 현에는 흉년이 들어 먹을것이 없어도 일체 도둑이 없었다.
이 고사는 진태구의 명성과 함께 널리 처져나갔고 이후부터는 도둑을 '양상군자'라고 부르게 되었고 때로는 쥐를 가리키기도 한다.
39. 일룡분이호(一龍分二虎)
이 이야기는 유비와 장비의 고향인 탁주에서 그 지방의 토박이 주민들 사이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탁주성 외곽의 도장(桃莊)이라는 곳에서 대대로 살아온 장비는, 원래 돼지고기를 취급하는 식육 해체업자(도살장)로, 천하의 호걸과 교제하기를 좋아하여 언제나 한 덩어리의 고기를, 문 앞에 낡은 우물속에 넣어두고, 천근이나 나가는 커다란 돌로 덮어놓고 돌에다가 이라고 써 놓아다.
어느날, 불그레한 얼굴의 남자가, 수레를 끌고 지나가다가 돌에 쓰여있는 글을 읽어보더니 곧 덮개를 열고 고기를 꺼내어 가지고 유유히 성안으로 사라져버렸다.
집으로 돌아온 장비는 그 이야기를 듣더니, 얼른 곡물 시장으로 그의 뒤를 쫓아갔다.
과연 불그레한 얼굴을 한 몸집이 큰 남자가 녹두를 팔고 있었다.
장비는 그앞에 서서 갑자기 녹두를 손에쥐고, 손안에서 부수어 가루를 내 보였다.
장비의 이런 도발적인 행동은 녹두장수인 남자의 화를 돋우어, 이내 말다툼을 하던 끝에 서로 치고받는 싸움을 하게 되었는데, 양쪽이 다 천근을 들어올리는 힘이 센 장사여서 승부가 나지를 않았다.
이때에 나타난 것이 짚신장수, 그의 몸집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단정한 용모에 양쪽 귀가 어깨까지 늘어져 있었다. 두 사람의 사이를 가르고 들어온 그는 두 사람의 팔을 붙잡고 들어올리며, 하고 말했다. 두 사람은 깜짝 놀라 손을 떼었다. 주위에 서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짚신장수에게 일제히 갈채를 보냈다. 두 사람은 크게 감동하고, 세 사람은 서로 공수(拱手-중국식 절의 하나로 공경의 예를 표하기 위하여 두 손을 마주 잡음)의 예를 올리고, 서로의 이름을 밝혔다.
짚신장수는 유비, 불그레한 얼굴을 한 커다란 몸집의 남자는 관우였다. 관우는 산서(山西)사람으로 의리로 인하여 그 지방 토박이인 악당을 죽이고 뛰쳐나온지 6년, 이때에 탁주로 녹두를 팔러왔던 참이었다. 세 사람은 싸움과 중재로 알게 되었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라고 하는 말로 전하고 있다.
40. 화병(畵餠)
위제 조비는 위왕 조조의 법치주의를 계승하여 획기적인 '구품관인법'을 만들었다. 관리 등용의 기준을 향론, 즉 후한 말 이래로 인물 평론에 의존하고 있던 것을 개선한 것이다.
당시 선비들 사이에는 말재주를 부리거나 화려한 언행만을 좋아하는 무리들이 득세하고 있었다. 소위 여론을 의식한 행동만이 만연하고 있었던 것이다.
철학적인 청담을 선구적으로 이끈 그룹들은 사총(四聰), 팔달(八達)이라 칭하고 무리를 지어 명성을 얻은 것도 이 무렵이었다. 다행히 당시는 유능하고 착실한 인물을 평가하는 조조시대의 풍조가 약간은 남아 있었다.
조비는 유능하고 착실한 인물들을 좋아했고 명성에 의존하는 자들을 극히 미워했으며 학문도 높고 덕행으로도 손꼽히는 노육(盧毓)을 이부상서로 기용했었다.
그에게 '그대와 같은 자를 모아라'라고 명령하고 특히 명성만 화려하고 실속이 없는 인물의 등용을 피하도록 지시하면서 말했다.
"관리임용을 할 때는 명성으로 판단하여 채용해서는 안된다. 명성은 마치 땅에 그린 떡과 같아서 쓸모가 없다." 노육은 이렇게 해서 우선 고과법(考課法)을 만들고 재능보다도 덕행을 중시하여 관원을 임명했다.
'화병'이란 말은 이 고사에서 나온 것으로 그림으로 그린 떡이니 먹을 수 없다. 따라서 실제적으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의 대명사처럼 쓰이게 되었다. 실질을 숭상했던 조조가문의 특성이 엿보이는 고사다.
41. 읍참마속(泣斬馬謖)
제갈량이 1차 북벌 대 가정의 전투 책임자로 임명한 마속이 제갈량의 지시를 어기고 자기의 얕은 생각으로 임의로 전투를 하여 참패를 가져 왔다. 마속은 우수한 장수요,제갈량과는 문경지교를 맺은 마량의 아우였지만 한중으로 돌아오자 눈물을 머금고 마속을 베고 장병들에게 사과를 한 것이다.
장관이 제갈량을 보고 "앞으로 천하를 평정하려 하는 이때에 마속같은 유능한 인재를 없앴다는 것은 참으로 아까운 일입니다." 하고 말하자 제갈량이 눈물을 흘리며
"손무가 항상 싸워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군율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이 같이 어지러운 세상에 전쟁을 시작한 처음부터 군율을 무시하게 되면 어떻게 적을 평정 할 수 있겠는가?" 하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42. 빙고시하 세여파죽 (☆高視下 勢如破竹)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쳐내려 가면 그 기세가 대나무를 쪼개는 것과도 같다는 뜻. 마속이 산위에 진을 치며 병법에 나오는 이 글귀를 인용하였다.
43. 사제갈 능주 생중달 (死諸葛 能走 生中達)
죽은 제갈량이 산 사마의를 쫓아냈다는 뜻.
오장원에서 제갈량이 죽기 전에 사마의를 몰아낼계책을 세워두고 죽었다. 사마의는 제갈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촉군을 들이쳤으나,촉군 진영엔 제갈량이 죽지 않고 군대를 통솔하고 있었다. 사마의는 혼이 빠질 듯이 도주했는데, 실제로 그것은 제갈량이 아니라 목상이었다.
44. 괄목상대(刮目相對)
이 말은 《삼국지(三國志)》 〈오지(吳志)〉에 나오는 고사에서 유래된 것으로, 중국 삼국시대에 오(吳)나라의 왕 손권(孫權)이 그의 장수 여몽(呂夢)이 무술에는 능하나 학문을 너무 소홀히 하는 것을 나무라자 여몽은 이로부터 학문을 열심히 닦았다.
후에 노숙(魯肅)이 찾아가 전과 달라진 그의 높은 식견에 놀라워하자 여몽은 "선비가 사흘을 떨어져 있다 다시 대할 때는 눈을 비비고 대하여야 합니다(士別三日 卽當刮目相對)"라고 하였다.
45,46. 국궁진췌, 사이후이(麴窮盡膵, 死而後已)
《삼국지(三國志)》에 나오는 말이다.
제갈 량이 위(魏)나라를 공격하기 전에 한 말에서 유래한다. 제갈 량은 촉한(蜀漢)의 소열제(昭烈帝) 유비(劉備)의 삼고초려(三顧焦廬)에 감명을 받고 그의 천하 경략을 돕기 위해 온 힘을 쏟기로 결심하였다. 이런 결심은 유비가 죽고 그의 아들 유선(劉禪)에게도 마찬가지로 충의를 다하였다. 출사표 후편에서 제갈 량은 이렇게 말하였다.
"한(漢)나라의 위업은 익주(益州) 같은 변경에 안주할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위나라를 멸망시켜 천하를 통일하고 왕업을 중원에 확립해야 합니다. 신은 이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전력 투구하고 죽고 나서야 그만둔다는[死而後已] 각오로 출정합니다."
사이후이는 제갈 량이 왕업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전력 투구한다는 데서 유래하듯이 어떤 일을 할 때 최선을 다한다는 뜻도 들어 있다.
《논어(論語)》의 〈태백편(泰伯篇)〉에도 나온다. 효성이 지극하고 노(魯)나라에서 후학 양성에 주력한 증자(曾子:BC 506~BC 436)는 선비 본연의 참모습을 "선비는 인(仁)을 자기의 본연의 임무로 삼아야 하는데, 이것이 어찌 무겁지 않겠는가. 죽은 뒤에야 끝나는 일이니[死而後已] 머나먼 길이다."라고 하였다.
동의어는 폐이후이(斃而後已:죽을 때까지 그치지 않고 힘쓴다는 뜻)이다.
47. 낙불사촉(樂不思蜀)
즐기느라 촉의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뜻.
암우한 후주 유선이 촉 멸망 후 사마소를 뵙는 자리에서 '너무 즐거워서 촉의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라고 하자, 그를 크게 비웃었다고 한다.
48. 내조지현(內助之賢)
내조(內助)란 내부에서 하는 원조라는 뜻으로, 아내가 집안일을 잘 다스려 남편을 돕는다라는 말로 쓰이고 있으며, 내조지공(內助之功)이라고도 한다.
《삼국지(三國志)》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위(魏)나라 문제(文帝) 조비(曹丕)의 황후(皇后)인 곽씨(郭氏)는 군(郡)의 장관인 곽영(郭永)의 딸이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남달리 똑똑하였으며 곽영이 “내 딸은 여자 중의 왕이다”라 말하여 ‘여왕’이라 불렀다고 한다.
조조(曹操)가 위나라 왕이 되고 나서 후계자로 장자(長子)인 조비를 정할 것인가, 똑똑하고 문장이 뛰어난 조식(曹植)으로 정할 것인가 고민하다가 나이와 장자라는 명분으로 조비를 황태자로 정하였다. 그러나 뒤에 조비의 황후 곽씨가 책략(策略)을 썼다는 설도 있다.
조비가 즉위하자 조예(曹叡:3대 명제(明帝))를 낳은 원후(甄后)를 참소(讒訴)하여 죽였는데, 머리로 얼굴을 덮고 겨로 입을 틀어막은 채로 매장하였다고 한다. 이후 곽씨를 황후로 삼으려고 하자 중랑(中郞:궁중 宿衛의 감독관)인 잔잠(棧潛)이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상소하였다.
“옛날 제왕은 천하를 다스림에 있어[在昔帝王之治天下(재석제왕지치천하)] 밖에서 돕지 않으면 안에서 돕는 것이 있었다[不惟外輔 亦有內助(불유외보 역유내조)]. 다스려지고 어지러움이 이로 말미암고 성하고 쇠하고 이로 쫓아 된다[治亂所由 盛衰終之(치란소유 성쇠종지)]. (《위지(魏志)》 ) 이어서 경계해야 할 전례(典例)로 《주역(周易)》이나《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기록된 내용을 인용하면서, 원후 살해의 경위 등으로 보아 내조의 공을 세울 수 없는 위인(爲人)으로 보고서 신분이 천한 사람을 귀한 자라에 앉히는 위험을 말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 말을 듣지 않고 곽씨를 황후로 삼았으며, 여기서 ‘내조지공’이라는 말이 유래되었다.
남편의 사회생활이나 출세에 미치는 아내의 도움을 내조의 공이라고 말하는데, 여성의 사회 진출이 많아지면서 외조지공(外助之功)이라는 말도 요즘에는 자주 쓰인다.
49. 단도부회(單刀赴會)
칼 한자루를 들고 모임에 나간다는 뜻으로, 여기서 모임이란 위험한 자리를 뜻한다.
관우를 초청하여 죽이겠다는 노숙의 궁벽한 꾀에 대해 관우는 청룡도 한자루만 들고 찾아가는 대담함을 보여주었다.
50. 도리상영(倒履相迎)
신을 거꾸로 신고 손님을 맞이하는 것을 말한다. 왕찬에 대한 설명 중, 그의 스승 격인 채옹이 왕찬의 방문에 신마저 거꾸로 신고 나가서 환영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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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로 읽는 영한대역 세계명작 만화]
징기즈칸[Genghis Khan, 成吉思汗]
출생 – 사망 : 1162 ~ 1227
재위 기간 : 1206 ~ 1227
지역 : 아시아 대륙
왕조 : 몽골 제국
거대한 몽골 제국은 동방으로부터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유럽 세계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서양사에 공포의 상흔을 남긴 징기즈칸, 그리고 몽골은 어떠한 존재였을까?
(1) 배경 - 동방 왕의 전설
리처드 왕의 십자군도 만족스러운 전과(戰果)를 올리지 못하고 유럽 세계가 이슬람과의 오랜 싸움에 염증이 났을 무렵, "적국 이슬람의 동쪽 저편에 기독교도들의 나라가 있는데 그 나라 왕은 프레스터 존(Prester John), 즉 '사제 요한'이라고 한다"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동방에서 이슬람과 싸우면서 기독교의 성지 예루살렘을 노리고 있다는 이 왕의 이름은 서방의 '십자군' 사이에 하나의 구세주의 전설로서 사실인 양 퍼져 나갔다. 전설의 근원이 된 것은 당시 위구르와 몽골 고원의 일부에서 널리 퍼져 있던 네스토리우스파(派) 기독교(景敎)의 일부인데 그 실체는 전설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유럽은 이 허상을 바라고 있었다. 페쇄된 시대에 성스러운 왕이 동방에서 나타나 이슬람군을 격파해 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결국 희망대로 동방에서 전설의 왕이 왔다. 하지만 그 왕의 이름은 징기즈칸이었다.
(2) 태생 - 몽골의 고아
징기즈칸이 이끄는 몽골이 역사의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13세기 초이다. 당시 몽골 고원에서는 위구르 유목 제국이 해체된 이후에 3세기 반에 걸쳐 분열과 할거(割去)가 이어졌다. 요(遼)를 비롯한 주위 국가들은 모두 몽골의 유목 부족이 하나로 뭉치는 것을 두려워했는데 그 이유는 과거의 흉노(匈奴), 돌궐(突厥)같이 하나가 된 부족 연합은 틀림없이 아주 강력한 힘을 발휘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조금이라도 유력한 부족이 나타나면, 그 대항마(對抗馬)를 지원하여 서로 싸우게 했고 그래도 안 될 때는 대군을 북벌(北伐)하게 하여 직접 격파했다. 경연(硬軟) 양면에서 간섭한 결과 유목 부족들이 통일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요(遼)가 금(金)에 쓰러지고 멀리 중앙 아시아에서 서요(西遼)가 된 이 당시에는 몽골 고원에 대한 압박도 다소 느슨해져 있었다. 사실, 이 시대에 이르면서 몽골 부(部)는 통일되었고, 칸도 3대째에 이르렀다. 그러나 유목 부족 사이에서 여전히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고, 몽골 고원 전체를 하나의 군단(軍團)으로 통일할 사람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징기즈칸, 그의 어릴 때 이름은 테무진이었는데 초년 시절은 그리 평탄치 않았다. 아버지 에스게이는 쿠트라 칸의 뒤를 이어 몽골 부의 제4대 족장에 오를 것으로 촉망받고 있었으나 테무진이 어렸을 때 숙적(宿敵) 타타르 부(部)에 의해 독살당했다. 그러자 에스게이를 따르던 타이치우트 씨족은 손바닥 뒤집듯이 테무진을 배신했고, 테무진의 복수를 염려해 어린 그를 죽이려고 계획했다. 난세에 이용 가치가 없는 사람을 배척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각별히 사악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테무진이 어리고 힘이 없을 때 제거하려 한 것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테무진의 실력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호에른의 엄한 교육 때문에 테무진은 아주 가혹하고 격렬한 성격으로 자라났다.
이런 일화가 있다. 어느 날, 테무진을 비롯한 4형제가 강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이때 에스게이의 또 다른 아내의 아들, 이복형제 두 명이 찾아와서 그들이 낚은 고기를 빼앗았다. 테무진은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말했는데, 어머니는 형제끼리 싸워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다. 어머니의 책망을 듣고 테무진은 남동생 카사르와 활을 들고 집을 나가 이복형제를 앞뒤에서 공격하여 활로 쏘아 죽였다. 집으로 돌아온 두 아들을 보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된 어머니는 "같은 집안 사람끼리 싸워서 어떻게 하느냐"고 테무진을 꾸짖었다고 한다. 그런 성격의 소유자가 조용히 참으며 살 리가 없었다.
테무진은 보르테를 아내로 맞이하면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눈에 불이 있고 얼굴에 빛이 있는' 소년 테무진과 소녀 보르테를 약혼하게 한 것은 아버지 에스게이였지만 정식 결혼은 그로부터 9년이 지나서야 성사되었다. 이때 보르테가 갖고 온 결혼 선물 크로텐(검은담비) 가죽옷이 테무진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당시에 크로텐 가죽옷은 매우 고가품이었고 유목민 사이에서 진귀한 옷이었다. 테무진은 이 털가죽을 가지고 케레이트 부(部)의 군주 토오릴 칸에게 찾아갔다. 토오릴 칸은 선친 에스게이의 친한 친구였고 그를 같은 편으로 만들면 100만의 우군을 얻게 되는 셈이었다. 테무진은 몽골 고원 최대의 군주를 우군으로 받아들여 그것을 이용하려는 과감한 도박에서 결국 이겼던 것이다. 크로텐 모피에 기분이 좋아진 토오릴은 기뻐하며 말했다.
"답례로 너의 해산된 씨족 사람들을 모아 주마."
(3) 인격 - '유린하라'고 초원은 말했다
유목민의 생활은 가혹한 편이다. 으레 초원이라고 하면 초목과 바람, 끝없이 높은 하늘을 떠올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기후는 1년 중 짧은 여름에 불과하며 이 시기를 제외하고는 혹독한 추위 속에 갇힌다. 1월의 평균 기온은 영하 26.1도. '눈에 방목된 소의 머리가 얼어서 깨지거나' '쇠꼬리가 얼어붙어서 뚝 잘려 땅에 떨어지기도' 하는 가혹한 환경 속에서 유목민들이 철저한 약육강식의 논리로 살아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정확한 판단력과 단호한 행동력이 없으면 유목 생활을 해나갈 수 없으며 그것이 몽골 제국 전체의 특징이기도 했다. 그러나 징기즈칸은 그렇게 단순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그는 "남자가 쾌락과 기쁨으로 삼는 것은 모반인(謀叛人)을 유린하고 적을 정복하여 재산을 박탈하고 그 시종들의 눈, 코에서 눈물을 흘리게 하며, 그들의 살진 말을 타고 그들의 아내를 나의 침상으로 삼아 그 장미 같은 뺨을 애무하고 진홍빛 입술에 입맞춤하며 끌어당기는데 있다"고 말했다.
징기즈칸의 이 잔학성은 젊을 때 겪은 여러 굴욕적인 사건이 원인인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죽음을 당하고 가난의 밑바닥에서 허덕이며 아내를 빼앗기고 아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남자의 아들을 낳은('징기즈칸의 큰아들' 박스 글 참조) 데 대한 분노는 마음 속 깊이 앙금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징기즈칸이 단순히 어두운 분노에 자극받아 행동할 사람은 아니었지만, 어떤 분노에도 좌우되지 않는 냉철함, 그것이 징기즈칸이 무서운 진짜 이유였다. 그의 냉철함과 지략(智略)은 원정(遠征)에서 충분히 발휘되었다.
(4) 징기즈칸의 큰 아들
징기즈칸의 아내 보르테는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메르키드족에 의해 납치당했다. 그녀는 토오릴 칸이 9개월 동안 교섭을 벌인 끝에 징기즈칸에게 돌아올 수 있었는데, 돌아온 직후에 사내아이를 낳는다.
징기즈칸은 아들의 이름을 주치[朮赤]라 했는데, '객인(客人)' 즉 '이방인'이라는 뜻이다. 이런 이름을 붙인 이유는 보르테가 남편에게 돌아오는 도중에 뜻하지 않게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설과 사실은 징기즈칸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5) 대서정(1) - 호레즘 샤와의 대립
1219년, 징기즈칸은 서양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때까지의 10년 동안 그는 몽골을 강력한 통일 국가로 통합하고 중국 북부의 금(金)을 침략하여 정복했다. 당초에는 유목민 특유의 약탈 행위로 시작된 이 침략은 해를 거듭하면서 토지를 제압하고 항구적으로 지배하는 정복 행위로 그 성격이 바뀌어 갔다. 혹독한 자연 속에 자란 유목민들에게 정착민들의 토지는 처분하기에는 너무 풍요로웠던 것이다. 지배를 하게 되면서 몽골 유목민들의 성격도 바뀌어 많은 나라를 정복하고 지배하기 위해 서쪽으로 눈을 돌렸다. 몽골의 서양 정복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 당시에 서아시아 최대의 이슬람 국가이던 호레즘 샤 왕조는 1210년에 국력이 쇠퇴해 있던 서요(西遼)를 멸망시키고 북쪽은 카스피해 연안으로부터 남쪽은 페르시아, 동쪽으로는 힌두쿠시로부터 서쪽은 코카서스(카프카스)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징기즈칸은 몽골의 접경 지역에 위치한 호레즘 샤와 당초에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1215년에 징기즈칸은 호레즘 샤가 보낸 사절단에게 말했다.
"내가 동방의 패자가 될 것이니 샤는 서방의 패자가 되시오. 우리는 서로 평화와 우호를 유지하여 상인들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게 해야 하지 않겠소?"
그러나 징기즈칸의 진의는 다른 데에 있었다. 『집사(集史)』에 의하면 1216년에 대금(對金)침략에 일단락을 지은 징기즈칸은 몽골 전군에게 2년간 휴식을 명령했다. 부족 전체적으로 대원정 준비가 진행되어 서방으로 첩보(諜報)·조략(調略)을 목적으로 통상단이 보내졌다. 표면상의 우호 관계는 적의 내정을 다 살필 때까지의 수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1219년에 호레즘 영(領)인 오트라르(시르다리야 강의 동안, 그 지류 아리스 강 남쪽에 있었으며 옛 명칭은 파라브. 호레즘 왕국 시대에는 그 국경 도시가 되고, 태수가 몽골의 대상을 살해했기 때문에 징기즈칸이 서부 정벌을 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에서 몽골 통상단이 첩자 혐의로 학살을 당했다. 문명국 사이에서 통상단이 파견되는 경우 그것은 보통 스파이로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며,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상태에서 받아들일지 아닐지 판단하는 것이 일반적 방식이었다. 호레즘이 취한 방법은 그다지 문명적이지 못했다. 징기즈칸은 분노했고, 이것은 침략을 개시할 아주 좋은 빌미였다.
(6) 대서정(2) - 중앙 아시아에서 러시아로
용의주도한 첩보 활동을 벌인 결과 호레즘에 대한 조사가 끝났다.
골 왕조, 아바스 왕조를 누르고 이슬람 세계의 최대 패자(覇者)로 알려졌던 서방의 강국은 실은 겉보기보다 실속은 없었다.
호레즘 샤 왕조가 갑자기 대두하게 된 것은 아랄해(海) 북방의 사나운 유목 민족인 터키계 캉글리족(族)의 무력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직접 충성을 맹세한 것은 호레즘 국왕 무하마드의 생모, 캉글리족 출신의 테르켄 하튼이었고, 호레즘 왕조에서는 어머니와 아들이 대립하고 있었다. 캉글리족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킬 것을 염려한 무하마드는 병력을 집중시킬 수 없었다. 이러한 사정은 몽골측에 바로 누설되었다. 몽골의 철저한 내부 교란(攪亂)의 결과, 공격의 손길은 무하마드의 어머니 테르켄 하튼에게까지 뻗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결국 호레즘 군대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개별적 도시 방위군으로 몽골 군대 전체와 싸워야 했고, 마침내 모조리 패하고 만다.
1219년, 징기즈칸이 이끄는 원정군은 오토라르 시를 공격하고, 이어서 마와라 안나르 지역을 침공했다. 나중에 제왕 티무르에 의해 번영하는 이 지역은 옛날부터 중앙 아시아에서 가장 비옥한 지대였고 수도 사마르칸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탐내던 곳이었다.
오아시스 여러 도시를 공격, 함락시킨 몽골군은 공성전(攻城戰)에도 뛰어났다. 오토라르를 공략하는 데는 5개월이 걸렸지만 부하라는 며칠 만에, 그리고 사마르칸트는 4일 만에 함락되었다. 금(金)과 서하(西夏)에서 등용한 기술자에게서 습득한 공성전 기술이 주효했음은 물론이고, 몽골군(軍)이 두려워 자진해서 문을 여는 도시들도 많았다. 사전에 조사한 대로 호레즘 샤 왕조의 행동은 전혀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또한 몽골군은 강력하고 잔학한 군대임을 알려 전쟁 전부터 정보전에서 상대방의 사기를 꺾어 놓았다. 사마르칸트에 몽골군이 오기 직전에 국왕 무하마드는 도시에서 도망쳐 버렸다.
서양 세계에 이 사태는 전설의 구현으로 전해졌다. 프레스터 존은 다윗 왕으로 이름을 바꾸고, 페르시아를 석권하고 바그다드 근처까지 육박했다는 정보가 로마 교황청을 통해 유럽에 퍼졌다. 환상의 구세주가 나타났다는 데 힘을 얻은 십자군은 아이유브 왕조의 수도 카이로를 공격했으나 물론 동방으로부터의 원군(援軍)은 오지 않았다. 십자군은 참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서양 세계에 동방에서 온 군단이 루시(러시아)를 향해 올라오고 있다는 새로운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7) 진격 - 러시아 공략전
사마르칸트에서 도망친 호레즘 국왕 무하마드는 서쪽으로 달아났다. 무하마드가 도망친 것은 몽골군을 내지(內地)로 유인, 공격하려는 책략이었다는 설이 있지만 이미 때늦은 일이었다. 국왕의 추태가 호레즘 샤 왕조의 해체를 앞당겼다는 설도 있다.
이 시기에 니샤푸르에서 징기즈칸이 낭독한 선언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사령관, 대관, 평민들이여. 신이 동에서 서에 이르는 지상의 제국을 짐에게 준 것을 알라. 항복하는 자는 목숨은 살려 줄 것이다. 그러나 저항하는 자는 불행을 당하여 처자(妻子), 평민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풍요로운 마와라 안나르를 제압한 징기즈칸은 세계 제패의 실현을 계획했는지도 모른다. 징기즈칸의 군대는 이란 서부 여러 지역을 공략하는 한편, 장군 제베와 스베테이가 군대를 이끌고 루시로 향했다. 무하마드를 쫓아간다는 것이 명목이었지만 사실은 새로운 땅을 정복하기 위한 침략 행위였다.
무하마드는 추격을 피해 카스피해 남안의 쿠르간까지 달아났다. 그러나 결국 몽골군에게 발견되어 카스피해 앞바다의 아바스쿤 섬으로 다시 탈출했으나 폐병이 악화되어 죽고 말았다. 이것이 1220년 12월의 일이다.
제베와 스베테이의 진군은 계속되었다. 몽골군은 그대로 카스피해 서안에서 북진하면서 도시들을 함락해 나갔다. 카프카스 지방을 지나 흑해 연안으로 들어간 원정군은 곧 칼카 해반(海畔)에서 루시군(軍)과 일전을 벌인다.
몽골군은 당초에 남러시아 초원에 분포하는 터키계 유목민 부족 킵차크족(族)을 정복하려는 계획도 있었는데, 킵차크족은 예전의 징기즈칸의 숙적 메르키드족과 교류하는 부족이기 때문에 제압해야 할 적이었다. 몽골군이 쳐들어오자 킵차크의 족장이며 루시와 인연이 있던 코치아는 루시측에 협력을 요청했고, 루시의 대공 게오르규는 몽골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게 된다.
루시 제후들로 이루어진 연합군은 드네프르 강 우안(右岸)에 진을 치고 몽골군을 기다렸다. 연합군은 8만 정도였고, 이에 비해 몽골군은 훨씬 열세였다. 첫 전투에서는 연합군의 가리치 공(公)이 몽골군을 압도했다. 기세등등해진 연합군은 후퇴하는 몽골군을 추격했고, 몽골군은 연합군을 방어하면서 칼카 강 동안(東岸)까지 후퇴했다. 그러나 그것은 몽골군의 책략이었다. 몽골에 비해 기동력이 뒤떨어지는 루시군(軍)은 추격전에 지쳐 있었는데, 가루치 공은 혈기만을 믿고 칼카 강을 건너는 작전을 감행했다. 때를 기다리고 있던 몽골군은 일제히 반격에 나섰고 루시군은 꼼짝없이 격파당하고 말았다.
가루치 공의 군단과 그것을 지원한 킵차크 군대는 괴멸되었고 몽골군은 제후들을 추격하여 그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키에프 공, 체르니고프 공은 붙잡혔고 공전승(共戰勝)의 연회석상에서 함께 처형되었다.
칼카 강의 결전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그후 원정군은 동쪽으로 전진하여 징기즈칸의 본군대와 합류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루시 남쪽에 몽골군의 직접적 영향이 미치지는 않았지만, 이 패배는 루시 제후, 그리고 흑해 건너편의 비잔틴 제국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상흔(傷痕)을 남기고 몽골은 이렇게 떠났다. 1227년 징기즈칸은 서하 정복전이 한창일 때 죽었는데, 그가 만든 제국과 정복에 대한 야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서양 세계는 다시 한번 징기즈칸의 그림자에 떨게 된다.
(8) 재방문 - 유럽 침입
1236년, 루시인들이 몽골을 거의 잊어갈 무렵에 몽골은 다시 동쪽에서 왔다. 징기즈칸의 뒤를 이은 오고타이 칸의 명령하에, 죽은 징기즈칸의 장남 주치의 아들인 바투 칸이 군을 이끌었다. 이번 원정의 목적 또한 킵차크족 지배, 호레즘 잔당의 괴멸, 그리고 서양 세계의 정복이었다.
바투 원정군은 우선 가까이 있는 킵차크족을 공격했다. 유목민 집단에 불과하며 몽골처럼 군단으로서 통일되지 않은 킵차크족은 몽골군의 적수가 못 되었다. 어떤 자들은 서쪽으로 도망치고 어떤 이들은 투항하여 대부분이 몽골의 지배하에서 몽골군의 일원으로 재편성되었다.
새롭게 킵차크군을 얻게 된 바투 원정군은 그 다음으로 루시를 침공했다. 카스피해에서 북상하여 모스크바, 블라디미르 여러 도시를 장악하고 노브고로드를 위협한 후에 방향을 바꾸어 폴란드, 헝가리 방면으로 침입해 들어갔다.
겁에 질린 두 나라는 동유럽의 비잔틴 제국과 로마 교황에게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지만 당시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는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의 전쟁에 패해 그 호소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9) 압도 - 발슈타트 전투
유럽의 권력자들이 방관하고 있는 동안, 몽골군 별동대는 폴란드에 침입하여 폴란드 대공은 국내가 수습되지 않은 채 이를 맞아 싸우게 되었다. 1241년 4월, 양군은 리그니츠 평원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이고 몽골군은 폴란드군을 괴멸했다. 이곳은 훗날 발슈타트라 불렸는데 독일어로 '시체의 도시'라는 뜻이다. 이는 전투 후에 시체가 많이 나왔기 때문인 듯하다. 이 전투의 규모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있지만, 몽골군의 가차없는 살육은 러시아인들에게 이질적인 모습으로 비쳤을 것은 확실하다.
그 무렵 바투가 이끄는 본대(本隊)는 헝가리로 향하고 있었다. 당시 헝가리 왕국의 군대는 유럽 최강으로 알려져 있었고, 국왕 베라 4세가 이끄는 헝가리군은 전력상 몽골군에 뒤지지 않았다고 한다.
헝가리의 수도 부다(현 부다페스트)로 진로를 잡은 몽골군과 헝가리 국왕군은 사요 강의 하반(河畔)에서 대치했다. 몽골군의 노궁포(弩弓砲)가 빗발치듯 쏟아져 헝가리군 내부에서는 참전한 수도원장과 국왕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 이 혼란을 틈타 몽골군은 헝가리를 격파했다. 참패한 헝가리군은 몽골군의 추격을 받아 퇴로에는 여정 이틀에 걸쳐 시체가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10) 공포의 전설 - 타타르의 멍에
유럽은 위기에 처해 있었고, 몽골군이 어디까지 공격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헝가리에서부터 서쪽으로 향하면 그곳은 독일, 프랑스와 평원이 이어져 있었다. 라인 강 이외에 몽골군의 진격을 저지할 요충지는 없었다. 그대로 대서양에 도달하고 마는 것이다. 바투군은 헝가리 평원의 목초 지대에 주둔하며 전진에 대비하고 있었다. 만약 몽골군이 유럽을 정복했더라면 라인 강가의 구릉지대는 목초지대로 모습을 바꿔, 훗날 유럽의 역사, 아니 세계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유럽을 구한 것은 1241년 12월의 오고타이 칸의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정복 명령은 본래 오고타이 칸이 내렸으므로 그것을 계속할 것인지는 대회의를 열어 결정할 문제였다. 바투 칸은 빈을 눈앞에 두고 군사를 돌려 유럽을 떠났다. 그후에 몽골군이 유럽을 공격하는 일은 없었지만, 루시 땅에서는 제후와 각 도시, 그리고 정교회(正敎會)가 몽골의 지배를 완전히 받아들여 이후 수백 년간 루시는 킵차크 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를 러시아인들은 '타타르의 멍에'라 불렀고, 이 말은 지금도 불행을 뜻한다.
몽골인들의 지배는 몽골군의 가혹함과 잔학성에 비하면 훨씬 온후한 편이어서 기독교는 보호되었고 국내의 치안은 양호했다. 하지만 그들은 러시아인으로부터 10분의 1세(稅)를 거두는 한편 그들의 노동력을 이용했는데, 거역할 경우에는 가차없이 학살했다.
러시아 제후는 이 타타르의 멍에 아래에서 단결을 결의했다. 1380년에 모스크바 대공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주위의 제후에게 킵차크한국의 지배로부터의 해방을 호소하여 크리코보 전투에서 한번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대군을 이끌고 역습한 킵차크한국에 패하여 모스크바는 황폐화되었고 1만 내지 2만 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결국, 러시아가 타타르의 멍에에서 탈출하려면 이반 뇌제(雷帝) 시대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11) 몽골 제국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서양 제국에게 몽골, 그리고 징기즈칸은 파괴와 약탈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몽골에 관한 저서들은 대부분 그들의 파괴와 약탈, 폭력과 살육만이 묘사되어 있다. 그들이 서양 세계에 던져준 공포를 생각하면 당연하겠지만, 몽골이 서양 세계에 준 또 다른 영향 ― 몽골이 동서의 교통을 활발하게 만들었다 ― 에 대해서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몽골의 지배자들은 '초원의 길'이라 전해지는 동서의 교통로에 역과 말과 숙사(宿舍)를 마련했고 그 때문에 외국 사절과 여행자들은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었다. 또한 금과 은으로 된 파이자라는 여권이 발행되어 이것이 있으면 외국인도 여행할 때 시설을 이용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 상인 마르코 폴로가 멀리 중국을 여행하다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그 영향이 크다. 파이자는 현재의 러시아 영(領)에서 여러 장 발견된 바 있다.
몽골인들은 통상을 통해 얻는 이익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결국은 육로뿐 아니라 해상로도 열렸다. 몽골 제국의 지배하에 통일을 회복한 중국 남부 항구에서 3층 갑판의 큰 배가 인도를 향해 항행(航行)했다. 몽골 제국의 보호하에 중국, 페르시아, 인도, 중앙 아시아, 흑해 주변에서 러시아까지를 포함한 거대한 통상 시장이 나타나 세계는 동과 서가 서로 통하게 되었던 것이다.
"······인쇄술, 항해자의 나침반, 화기(火器), 사회생활의 매우 중요한······이것들은 유럽에는 없는 것들이며 몽골의 영향에 의해 극동(極東)에서 유럽에 이입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라고 말한 사람도 있다.
몽골 고원의 한촌(寒村)에서 태어난 소년 테무진, 징기즈칸은 세계를 공포에 떨게 한 상징으로서, 또 한편으로는 세계를 발전으로 이끈 공로자로서 역사에 그 이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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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로 읽는 영한대역 세계 명작 칼라 만화]
폭풍의 언덕 Wuthering Heights / 에밀리 브론테(Emily Bronte)
(1)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은 영국의 작가 에밀리 브론테가 필명 엘리스 벨(Ellis Bell)로 출간한 유일한 소설이자 유작 소설이다. 아버지 패트릭 브론테 신부가 성공회 사제였던 가정환경상 에밀리는 어린시절을 사제관이 있던 영국 요크셔의 황량한 벌판에서 보내면서 작가로서의 상상력을 길렀으며, 어른이 된 후 요크셔 벌판의 폐가(TopWithens)에서 영감을 얻어 《폭풍의 언덕》을 썼다. 캐서린(Catherine Earnshaw)과 히스클리프(Heathcliff)와의 불멸의 사랑을 우울하면서도 아름답게 묘사한 작품으로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가 뛰어난 게 장점이다. 출간당시에는 비윤리적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20세기에 토머스 몸 등에 의해 재평가되었다. 한국어판은 범우사 등의 문학전문출판사들에 의해서 역간되었다.
(2) 폭풍의 언덕 Wuthering Heights 줄거리
1801년 황량한 벌판에 위치한 폭풍의 언덕에 세입자인 락우드씨가 찾아온다. 자신이 세든 집인 드러시크로스 저택의 주인인 히드클리프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두 거칠었고 잘 곳도 변변하지 못하여 감기에 걸려서 돌아온다. 집에 돌아온 락우드는 폭풍의 언덕과 드러시크로스 저택의 역사를 잘 알고 있는 가정부 넬리 딘에게 그동안 있었던 두 집안의 역사에 대해서 듣는다.
이야기 1
폭풍의 언덕의 주인이었던 언쇼는 리버풀에 갔다가 거지꼴을 한 소년을 데려온다. 가족들은 출신을 알 수 없는 소년에게 경계심을 갖고있었는데, 특히 아들 힌들리는 히스클리프를 미워한다. 죽은 아들의 이름까지 지어줄 정도로 히스클리프를 편애하는 아버지에 대한 불만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죽은 후, 아내 프랜시스를 데리고 집에 돌아온 힌들리는 결국 히드클리프를 머슴처럼 가혹하게 학대한다. 게다가 어린시절부터 같이 자랐던 친구이자 애인인 캐서린까지 드러시크로스 저택의 아들인 에드거에게 사랑을 품자, 이에 상심한 히드클리프는 가출한다.
이야기 2
몇 년후 부자가 되어서 돌아온 히드클리프는 몸이 약했던 아내 프랜시스의 죽음이후 폐인이 된 힌들리를 도박으로 빈털털이로 만들어버린다. 알코올 중독으로 힌들리가 죽자, 그는 힌들리의 아들인 헤어턴에게 자신이 당한대로 앙갚음을 하여, 무식한 머슴으로 키운다. 새끼 뻐꾸기가 다른 새의 알들을 내치는 것처럼, 폭풍의 언덕의 주인이 머슴이 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애인을 뺏어간 에드거의 여동생 이사벨라를 유혹해서 결혼한 뒤, 인권을 짓밟는다. 히드클리프와의 만남이후 결혼전부터 갖고 있던 정신착란이 심해져서 죽은 캐서린만 찾는 무관심과 학대를 견디지 못한 이사벨라는 런던으로 달아나서 아들을 낳는다. 한편 에드거는 죽은 아내가 남긴 외동딸 캐시를 곱게 키운다.
이야기 3
여동생이 병으로 죽자 에드거는 런던에 가서 조카를 몰래 데려오지만 12살의 철없는 꼬마 캐시의 말실수로 발각된다. 히드클리프가 아들을 데려갈 것이 분명하자, 에드거는 마지못해서 조카를 폭풍의 언덕에 데려다 준다. 까다롭고 버릇없는데다가 허약하기까지 한 아들이 마음에 들리 없었지만, 히드클리프는 아들을 캐서린과 결혼시켜서 드러시크로스를 먹어치울 생각을 한다. 결국 히드클리프는 아들을 캐시와 강제로 결혼시켜, 탐욕을 채운다. 딘은 셋방을 구해서 어릴적부터 모셔온 캐시 아가씨를 다시 모시고 싶어하지만 그건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이야기 4
1802년 친구의 초대를 받아서 가던 락우드는 폭풍의 언덕에 다시 온다. 전세 문제를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는데, 딘 아주머니는 히드클리프가 죽었다고 했다. 비가 몰아치는 날, 눈도 못 감고 죽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헤어턴과 캐시 사이에서 사랑의 감정이 싹트고 결혼을 앞두면서, 폭풍의 집과 드러시크로스저택의 불행한 역사는 끝나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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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돈키호테 Don Quixote / 세르반테스 (Miguel de Cervantes)
(2) 걸리버 여행기 Gulliver's Travels / 조나단 스위프트 (Jonathan Swift)
(3) 우주 전쟁 The War of The Worlds / H.G. 웰즈(H.G. Wells)
(4) 폭풍의 언덕 Wuthering Heights / 에밀리 브론테(Emily Bronte)
(5) 로빈슨 크루소 Robinson Crusoe / 다니엘디포우(Daniel Defoe)
(6) 파우스트 Faust / 괴테(Goethe)
(7) 로미오와 줄리엣 Romeo and Juliet /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8) 왕자와 거지 The Prince and the Pauper / 마크 트웨인(Mark Twain) - 사무엘 클레멘스(Samuel Clemens)
(9) 보물섬 Treasure Island / 스티븐슨(R.L. Stevenson)
(10) 백경(白鯨) Moby Dick / 허만 멜빌(Herman Melville)
(11) 슬리피 해로우의 전설 The Legend of Sleepy Hollow / 워싱톤 어빙(Washington Irving)
(12) 노트르담의 꼽추 The Hunchback of Notre Dame / 빅토르 위고(Victor Hugo)
(13) 정글 북 The Jungle Book / 루드야드 키플링(Rudyard Kipling)
(14) 지킬박사와 하이드씨 Dr. Jekyll and Mr. Hyde / 스티븐슨(R.L. Stevenson)
(15) 크리스마스 선물 A Christmas Carol / 촬스 디킨즈(Charles Dickens)
(16) 80일간의 세계일주 Around The World in Eighty Days / 쥴 베른(Jules Verne)
(17) 해저 2만리 20,000 Leagues Under the Sea / 쥴 베른(Jules Verne)
(18) 위대한 유산 Great Expectations / 촬스 디킨즈(Charles Dickens)
(19) 모히칸족의 최후 The Last of the Mohicans /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James Fenimore Cooper)
(20) 죄와 벌 Crime And Punishment /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Fyodor Dostoevsk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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