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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수님좋다오 원문보기 글쓴이: (一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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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믿음 안에서
히브리서 11장1-16절 / 양의섭 목사
➤“1. 이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 그것으로 장로들이 좋은 평판을 얻었느니라. 3. 믿음을 통해 우리는 세상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깨닫나니 그런즉 보이는 것들은 나타나 보이는 것들로 만들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욱 뛰어난 희생물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의롭다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께서 그의 예물들에 대하여 증언하시느니라. 그가 죽었으나 믿음으로 여전히 말하고 있느니라. 5. 믿음으로 에녹은 옮겨져서 죽음을 보지 아니하였으니 [하나님]께서 그를 옮기셨으므로 그들이 찾지 못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게 하였다는 이 증언을 가졌느니라. 6. 그러나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하나니 그분께 가는 자는 반드시 그분께서 계시는 것과 또 그분께서 부지런히 자신을 찾는 자들에게 보상해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하느니라.
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한 일들에 대해 [하나님]으로부터 경고를 받고 두려움으로 움직여 방주를 예비함으로 자기 집을 구원하였으니 그것으로 통하여 그는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으로 통하는 의로움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아 훗날 상속 재산으로 받게 될 곳으로 나가면서 순종하였고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 채 나갔으며 9. 믿음으로 그는 낯선 나라에 머무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머물렀고 자기와 함께 동일한 약속의 상속자가 된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장막들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그가 기초들이 있는 한 도시를 바랐기 때문이라. 그것의 건축자와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시니라. 11. 믿음을 통해 사라 자신도 나이가 지났을 때에 씨를 수태하는 힘을 받아 아이를 출산하였으니 이는 그녀가 약속하신 분을 신실한 분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라.
12. 그러므로 심지어 죽은 자와 다름없던 한 사람에게서 하늘의 허다한 별과 바닷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사람이 나왔느니라. 13. 이들은 다 믿음 안에서 죽었으며 약속하신 것들을 받지 못하였으되 멀리서 그것들을 보고 확신하며 끌어안았고 또 땅에서는 자기들이 나그네요 순례자라고 고백하였으니 14. 그런 것들을 말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본향을 찾고 있음을 분명히 나타내느니라. 15. 참으로 그들이 자기가 떠나온 본향을 깊이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그들에게 있었으려니와 16. 이제는 그들이 더 좋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의 본향이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하나님]이라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분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도시를 예비하셨느니라.”(히 11:1-16 KJV)
1. 믿음을 가진 사람들
한 아이가 삼촌이랑 스테이크 집엘 갔습니다. 웨이터가 와서 묻습니다. 고기는 어떻게 구워드릴까요? 삼촌이 그럽니다. “미디움(medium)으로 구워주세요.” 그러자 조카가 눈이 똥그래져서 그랬답니다. “와, 삼촌, 대단하다. 고기도 믿음으로 구워?”
오늘 말씀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으로, 믿음으로,’가 반복되는 일명 믿음장입니다. 믿음의 영웅들의 이야기, 믿음이란 뭔가에 대해 가슴 뭉클하게 나열하는 장입니다. 믿음이란 뭔가요? ➤“1. 이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 그것으로 장로들이 좋은 평판을 얻었느니라.” 바라는 것들, 내가 소망하는 것들, 그것들의 진짜 모습이 믿음입니다. 또한 보지 못하는 것들, 지금 내가 아무리 보려고 해도 볼 수 없는 미래의 것들, 그것들이 존재함을 증거 하는 게 믿음입니다.
즉, 믿음은 손으로 확인하고, 내 손에 쥐어져야 확신하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미래의 것, 보이지도 않는 것, 그러나 그것이 분명히 있음을 알고, 그것을 현재 즐기는 것, 그게 믿음이란 것입니다. 그러니 참 믿음의 사람은 현실에 연연하여 사는 이들이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 미래를 보고, 그 보이지 않는 것을 마치 지금 보고 있는 듯이, 그것을 누리며 사는 이들이다. 그 예로 3사람이 소개됩니다.
2. 하나님을 기쁘게 한 믿음을 소개합니다.
아벨,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께서 의로운 자라 하십니다. 왜요? 그는 하나님이 받으실 원함이 있는 예물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게 왜 의로운가요? 이게 믿음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그 하나님께 주께서 원하는 예물을 드립니다. 그런데 아벨은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고, 자신이 드리는 것을 확실히 받으신다. 확신하고, 주님께서 원하는 예물을 드렸습니다.
우리 같으면 예배를 드리면서도 가끔은 하나님이 정말 계신가? 하는 의구심을 갖고 대충 드리는 경우가 있는데, 아벨은 철저하게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자신이 예배를 드린다고 주님이 바라시는 예물을 드리고 지성(至誠)의 자리로 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을 의인으로 여겨주신 것은 그의 예물이 예정되어 있는 예물이었고, 그 예물이 왜 가치가 있었는가 하면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언제나 자신의 예배, 자신의 제사를 받으신다는 확고한 믿음으로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런 믿음으로 예배하기에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입니다.
또 다른 인물, 에녹, 에녹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도대체 어떻게 기쁘시게 해 드렸습니까? 이렇게 설명합니다. ➤“6. 그러나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하나니 그분께 가는 자는 반드시 그분께서 계시는 것과 또 그분께서 부지런히 자신을 찾는 자들에게 보상해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하느니라.”
이 말씀은 에녹에게 해당되는 말씀인데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다’는 말씀은 히브리어 원어를 직역하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뜻이랍니다. 우리가 쓰는 ‘기쁘시게 해 드렸다’는 해석은 희랍어 성경을 번역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선? 주님을 기쁘게 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과 동행하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그 하나님이 동행하는 자신을 마침내 복 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에녹은 그랬답니다.
세 번째 인물, 노아, 이렇게 소개합니다.
➤“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한 일들에 대해 [하나님]으로부터 경고를 받고 두려움으로 움직여 방주를 예비함으로 자기 집을 구원하였으니 그것으로 통하여 그는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으로 통하는 의로움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아직 보이지 않는 일, 대재앙의 심판, 홍수의 심판을 예고 받았습니다. 그리고 비가 내릴 낌새도 보이지 않는데, 배를 만듭니다. 사람들이 미쳤다고 하는데도 아랑곳 하지 않고 액션을 취합니다. 역시 노아에게도 믿음은 미래의 것, 미래에 속한 것입니다. 아직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액션이요 순종입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요?
“세계 2차 대전”, “너무나 먼 다리”, “가장 길었던 날” 등 대작을 쓴 문학가 ‘코넬리어스 라이안, Cornelius Ryan’은 5년 간 암과 투병하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투병 기록을 부인이 책으로 엮은 것이 ‘가장 긴 밤’(The Longer Night)인데 부인은 남편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남편은 ‘또 하루 좋은 날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하는 짧은 기도로 매일 아침을 시작했다. 어느 날 나는 남편에게 무엇이 그토록 좋은 날이냐고 물었다. 남편은 자기가 암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남은 날이 많지 않음을 자각하고 있었을 터인데 그런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남편은 평소에 생각해 두었던 것처럼 새날을 맞이하는 기쁨을 다섯 가지로 척척 말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하루가 좋은 이유는 첫째, 아내를 또 볼 수 있기 때문이고, 둘째, 가족들을 다시 볼 수 있기 때문이며, 셋째, 병들어 눕기 전에 마지막 작품인 '가장 길었던 날'을 탈고 할 수 있었기 때문이고, 넷째, 병과 싸울 의지의 힘을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이며, 다섯째, 주님이 언제나 '저기에' 계신 것을 알기 때문이다’고 대답했다.” 믿음은 ‘내 곁에’ 주님이 계심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현재 여기, 비록 힘들고 벅찬 삶의 현실이라도 그 주님과 동행하며, 그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순종하여 마침내 복을 누립니다. 할렐루야!
3.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자
그런데 나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독특한 사실을 하나 보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위인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여기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등장하는 것은 당연한데, 왜 하필이면 아브라함 앞에 아벨, 에녹, 노아가 등장했을까요? 왜 하필이면 이 세 사람을 믿음의 사람으로 소개하는 걸까요?
물론 신학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내가 보는 느낌은 이렇습니다. 아벨, 너무 일찍 죽었습니다.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장가도 못 가고 죽었습니다. 청년 때 죽었습니다. 얼마나 아까운가요? 그것도 형에게 살해당했으니, 비참한 인생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선 뭐라 하십니까? 아벨의 인생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의로운 자! 에녹,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데려가셨습니다. 그러나 실상 이게 죽음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가족들, 사랑하는 이들의 눈앞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그런데 에녹은 언제 그렇게 되었습니까? 365세!(창5:23) 굉장히 오래 산 것 같은 나이지만, 실상 그 당시의 수명은 천년을 살던 시대입니다. 그러니까 당대로서는 평균 수명 1/3을 조금 넘은 수명입니다. 요즘 90세를 기준으로 한다면 30-40대에 사랑하는 이들의 눈에서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이 데려가신 겁니다. 이 역시 우리 인간이 보기엔 안타까운 일입니다.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었다지만 우리에겐 죽은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의 인생을 하나님은 어떻게 평가하신다고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자, 하나님과 동행한 자!
노아, 950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수했습니다. 할 것 다 하고, 누릴 것 다 누리고 그리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께 평가받기를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라고 큰 인정받았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 그는 175세에 별세하였습니다. 노아 이후, 많은 세월이 흘러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단축된 이후, 아주 평범한 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인생은 어떻든 간에 결국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이 경우 저 경우를 통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아무리 나와 가까워도, 아무리 나와 멀어도 떠납니다. 어디로 떠납니까? 아까운 나이든, 피워보지도 못한 나이든, 지긋지긋하게 오래 산 나이든, 그저 평범하게 산 나이든, 인생은 다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디로 떠나는 걸까요?
4. 우리는 아브라함의 이야기에 주목합니다.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아 훗날 상속 재산으로 받게 될 곳으로 나가면서 순종하였고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 채 나갔느니라.”(히 11:8)
갈 바를 알지 못하지만 믿음으로 미래를 내다보며 순종하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그곳에서 집을 짓고, 자기 나름대로 왕국을 만들어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아브라함과 그 가족, 이삭, 야곱 등은 가나안 땅에서도 정착하는 터전을 마련하지 않고, 언제나 이동하기 쉬운 장막, 텐트 속에서 살았습니다.
마치 여전히 가야할 곳이 있는 것 같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말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것이 있었습니다. 약속의 땅이라고 일컬어지는 가나안에 들어갔지만, 사실 그곳이 자기들이 가야할 곳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궁극적으로 자신들이 가야할 곳, 자기들이 터를 잡아야 할 곳은 이 땅의 집이 아니라, 저 하나님의 나라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9. 믿음으로 그는 낯선 나라에 머무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머물렀고 자기와 함께 동일한 약속의 상속자가 된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장막들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그가 기초들이 있는 한 도시를 바랐기 때문이라. 그것의 건축자와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시니라.”(히브리서 11:9-10)
약속의 땅에 들어왔으나 이방인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살았답니다. 왜요? 이 땅의 장막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터가, 그 성이 따로 있음을 알았기에! 그러기에 ➤“14 그런 것들을 말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본향을 찾고 있음을 분명히 나타내느니라.” 본향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돌아가야 할 본향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15절에 보면 또 다른 본향이 나옵니다. ➤“15. 참으로 그들이 자기가 떠나온 본향을 깊이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그들에게 있었으려니와 이제는 그들이 더 좋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의 본향이라.” 여기의 본향은 자기들이 떠나온 고향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사는 게 힘들어 ‘에라 고향으로 돌아가자’ 했다면 돌아갔을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리 현실이 어려워도 그런 이 세상의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계속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기에 16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하나님]이라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분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도시를 예비하셨느니라.” 우리에게 더 나은 본향, 하늘에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곳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곳을 사모하며 사는 것입니다. 보라, 그런 이들을,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사는 이들을 하나님께서 결코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그들을 위하여 도시를 예비하셨답니다. 곧 천국을 예비하셨답니다.
5. 이 땅에서 나그네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베드로는 이를 두고, ➤“11. 극진히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순례자인 너희에게 내가 간청하노니 혼을 대적하여 싸우는 육체의 정욕들을 삼가라.”(벧전 2:11)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우리의 생활권은 하늘에 있다고 합니다. ➤“20. 우리의 생활 방식은 하늘에 있으며 거기로부터 또한 우리가 [구원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자기에게 복종시킬 때 사용하는 능력을 발휘하사 우리의 천한 몸을 변화시켜 자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게 만드시리라.”(빌3:20-21)
골로새 교인들에게는 위엣 것, 하늘의 것을 추구하라고 합니다.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켜졌거든 위에 있는 그것들을 추구하라.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에 있는 것들에 너희의 애착을 두고 땅에 있는 것들에 두지 말라.”(골3:1-2)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 땅에서 나그네입니다. 어떤 자세로 살고 있습니까?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 같이 살고 있지 않으십니까? 기를 쓰고 사는 것이 미래도 없고, 천국도, 소망도 없이, 그저 이 땅에서 살다가 죽으면 다 소멸되는 듯이 사는 것은 아닙니까? 아닙니다. 믿음은 미래의 것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듯이 사는 것입니다. 믿음은 앞의 것을 준비하며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아무리 건강해도, 아무리 가진 게 많아도 이 땅에서 영원히 사는 것, 아닙니다. 어느 날 그날이 내 인생 앞에 갑자기 다가올 것입니다. 어떤 자세로 살다 그날을 맞이하겠습니까?
본문 9절을 보면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 비슷한 단어인데, 차이 나는 것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에 거류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거류했다’는 동사는 나그네가 이(異)민족의 땅에서 시민권도 없이 사는 것을 뜻합니다. 철저하게 나그네로 사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인데, 그 축복의 땅에 살면서도 그는 본질적으로 그 땅에 속하지 않는 나그네로, 비시민권자로 살았답니다.
그런데,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하는데, 여기서 ‘거하였으니’는 도리어 영원히 살 것 같은 의미의 단어입니다. 가족들과 더불어 이 땅에서 집을 짓고 오순도순 살아갈 때에는 영원히 살 것 같이 사랑과 믿음으로 살지만, 그러나 그들의 마음 한 가운데에는 이 땅의 삶은 잠깐의 삶이란 게 분명했다는 뜻입니다.
즉, 이 땅은 스쳐지나가는 것이라고 가족 간에 무성의하게, 소홀히 대하며 산 것이 아니라 영원을 살 것 같이 사랑하며 그리 살았지만 그 밑바닥, 삶의 기저(基底)에는 분명한 것, 아무리 이 땅이 좋고, 이 땅의 사람들이 사랑스러워도 언젠가는 떠날 것이며, 그날에 내가 가야 할 곳,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준비해 두신 축복의 성이 있다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믿으십니까?
6.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신앙의 본질은 뭘까요? 이거저거 말하고 싶은 게 많아요. 그런데 오늘 성경은 ‘이 사람들은 다 그렇게 믿음으로 이 땅을 살다가, 저 하나님의 나라가 있음을 분명히 믿고, 그 나라를 소망하며, 준비된 삶을 살다가 어느 날이고 주님께서 오라 하실 때 그리 갔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이 사람들은 다’라고 말씀하는데, 믿음의 사람들은 다 그렇게 했다는데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도 믿음의 사람들로 그리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정말 천국이 있음을 아십니까? 그곳은 이곳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곳임을 아십니까? 주님께서 보시기에, ‘이 사람이 정말 천국이 있음을 아는가? 천국보다 이 땅이 더 좋다고 여기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안들 정도로 살고 계신가요?
여러분, 잊지 맙시다. 우리의 본향은 천국, 하나님께서 직접 예비하신 성입니다. 이 소망이 확실한 자가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알콩달콩 살더라도 우리가 가야할 곳, 우리의 본향을 그리워하며 살고 있음을 확실히 보여주며 삽니다. 가족들과는 영원을 살 것 같이 오손 도손 행복하게 살아야 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궁극적으로 가야 할 본향이 있음을 잊지 맙시다. 사람들이 내가 세상 백성이 아닌 하늘 백성임을 알 수 있도록 저 높은 곳, 본향을 향하여 사는 하늘 시민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