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설 1870년대 중반에 오스만투르크(터키)는 재정이 어렵게 되자 발칸 반도의 속국들에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였다. 이에 불만이 팽배해진 속국들은 1875년 여름에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에서 반란이 일으켰고,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는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 터키에 선전 포고를 하고 싸웠으나 역부족으로 몰리게 되어 터키의 승리로 끝나는 듯 보였다. 그러나 크림 전쟁에서 패배한 후 흑해 연안으로의 진출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러시아가 같은 슬라브민족의 독립을 지원한다는 ‘범슬라브주의’를 내세워 발칸반도와 아나톨리아 반도로 진격함으로서 제2차 동방전쟁이 발발되었다. 러시아 국내에서는 ‘슬라브 동포’인 세르비아를 지원하기 위한 움직임이 각계에서 일어났다. 당시 모스크바 음악원의 원장이었던 니콜라이 루빈스타인도 그러한 운동의 일환으로 세르비아 부상병 위문 성금을 모금하기 위한 자선음악회를 기획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친구인 차이콥스키에게 음악회에서 연주될 ‘애국적인 관현악곡’을 의뢰하기에 이른다. 평소 정치적 사안에는 둔감한 차이콥스키였지만, 이번에는 ‘슬라브 민족주의’라는 대의명분과 발칸 반도에서 들려오는 긴박한 소식들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루빈스타인의 제의를 받아들인 그는 세르비아의 민요선율과 러시아의 국가(國歌)를 활용하여 불과 며칠 동안 전곡을 완성했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은 1876년 11월, 모스크바에서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의 지휘로 초연되어 청중들로부터 ‘진정한 조국애에 불타는 흥분의 폭풍우’를 불러일으켰다. 당시 이 곡의 제목은 ‘러시아-세르비아 행진곡’이었지만, 악보가 출판될 때 프랑스어로 ‘슬라브 행진곡 (Marche Slave)’이라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곡은 차이콥스키의 가장 인기 있는 관현악곡 중 하나이다.
■ 해설 곡의 구성은 장대한 종결부가 딸린 3부 형식으로 볼 수 있다. 제1부는 ‘모데라토 인 모도 디 마르차 푸네브레(장송곡풍의 보통 빠르기로)’의 처연한 행진곡으로 시작된다. 여기에 흐르는 b♭단조의 무거운 선율은 억압받는 사람들의 고난을 상징하는 것으로, 세르비아의 민요 「오 빛나는 태양이여, 그대의 빛은 불공평하단 말인가?」에서 유래했다. 이 의미심장한 선율이 관현악 편성을 달리하여 되풀이되며 격렬한 첫 번째 클라이맥스를 구축한다. 제2부에서는 관악기들의 스타카토로 장조의 새로운 선율이 등장한다. 희망을 상징하는 이 밝고 경쾌한 선율 역시 세르비아 민요에 기초한 것이다. 빠른 전개 속에서 다시금 긴장이 고조되며 연결악구로 넘어가면 저현부에서 귀에 익은 선율이 들려온다. 훗날 ‘1812년 서곡’에서도 사용된 이 선율은 제정 러시아의 국가인 「신께서 차르를 구원하신다」에서 차용한 것이다. 이 부분은 위기에 처한 세르비아를 구출하겠다는 러시아인들의 결의를 나타내는 듯하다. 제3부로 넘어가면 제1부의 선율이 다시 등장한다. 이제 음악은 긴박감을 고조시키며 더욱 격렬한 투쟁을 펼쳐 보이고, 마침내 두 번째 클라이맥스에 도달한다. 그 배후에서 타악기와 관악기로 울려 퍼지는 리듬은 베토벤의 '운명적 리듬'을 연상시킨다. 어두운 분위기가 지배적인 제1부, 밝은 서광이 비치는 듯한 제2부,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제3부를 차례로 통과하고 나면, 종결부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시작된다. 템포가 알레그로 피우 모소(조금 더 빠르게)로 변경된 가운데 팀파니의 타격음이 울려 퍼지면, 클라리넷이 이끄는 목관 파트와 트럼펫이 이끄는 금관 파트가 러시아 민요에서 취한 경쾌한 가락을 릴레이식으로 연주한다. 그리고 이어서 트롬본과 튜바가 「신께서 차르를 구원하신다」 선율을 강력하게 부각시킨다. 이후 음악은 극도로 열광적인 분위기로 치달아 현란하고 떠들썩한 패시지가 숨 가쁘게 이어지다가 장엄하게 마무리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