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같이 ‘까톡, 까톡.’ 새벽잠을 깨우는 친구가 오늘도 어김이 없다. 창문을 열고 새벽공기를 마신다. 내 작은 뜨락에 심어놓은 천리향의 향기가 와락 가슴에 안긴다. 그 꽃향기를 마음에 담아 친구에게 보낸다. 좋은 아침이라고…. 아침을 여는 마음이 상큼하면 하루가 가뿐해진다. 꽃샘바람이 귓불을 에이는데도 봄의 화신이 뜨락으로 숨어들었나 보다. 찬바람에 숨죽이던 풀포기가 파릇파릇 새싹을 틔우고 풍란의 줄기마다 하얀 꽃망울이 옹기종기 햇살을 쏘인다. 머잖아 망울망울이 터질 것만 같다. 봄이 오면 겨우내 움츠렸던 마음이 생기를 찾아 가슴을 들썩인다. 그럴 때마다 연초록 풀잎 향연을 찾아 길을 나선다. 조금 남은 여생의 즐거움이다.
오늘따라 창밖에 봄비가 내린다. 마음이 싱숭생숭하여 우산을 받쳐 들고 산책길 나선다. 마른 가슴이 우수에 젖어 촉촉해, 진다. 예나 지금이나 벗님은 변함없는 사랑으로 나를 반긴다. 소싯적에 도단 집 지붕 위에 또닥또닥 떨어지는 빗소리가 너무 좋아 쪽마루에 누워 비 잠을 잤던 기억이 생생하다. 사라호 태풍이 도단지붕을 몽땅 쓸고 갔지, 나의 빗속 추억은 아직도 그곳으로 달려간다. 지금도 비가 오는 날이면 빗속 낭만에 젖고 싶어 우산을 쓰고 길을 나선다. 흘러간 추억들을 떠올리며 아무도 방해치 않는 나만의 낭만에 젖는다. 엉어리진 상념들이 빗물에 씻기우는 아늑한 습성이다.
이제는 뒤돌아 갈 수 없는 순간순간들이 모두가 그리움이다. 추억은 세월 가도 늙지 않는 불사조, 언제 어디서나 그때 그 모습으로 다가온다. 못다 한 사랑도, 멀어져 간 친구도 이제와 생각해 보면 모두가 내 탓이다. 조금만 참았더라면, 한 발짝 물러섰더라면, 감정을 억누르고 이성적으로 대했더라면 너와 내가, 우리가, 보다 좋은 인연으로 남아 멋진 추억을 만들어갈 수가 있었을 텐데, 만시지탄이다.
추억만을 먹고 사는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 삶의 끝자락에 매달려 바둥거려 보지만 옛날 같지가 않다. 이제는 가슴속에 남아있는 삶의 찌꺼기를 하나둘 노을에 묻고 가는 세월, 회한의 숲속을 거닐며 용서하고 회개하면서 하루하루를 정리하고 흔적 없이 사라질, 그날을 준비한다.
나를 해치는 것이 남이 아니라 부질없는 탐욕과 원망을 내려놓지 못한 나 자신임을 깨우친다. 가끔씩 얄팍한 자존심으로 나부대다가 끝없이 추락하는 모습을 보면 연민의 정을 느낀다. 나 역시 분수를 모른 채 덧없는 욕심에 비틀거린 세월도 있었다. 이제는 깨어나고 싶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글귀가 새겨진 아폴로 신전을 훌쩍 떠나고 싶은 심정을 간신이 억누른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라고 했다. 만나면 마음이 따듯해지고 만날수록 공명이 오래가는 사람이 좋다. 마음을 얻지 못하여 나락으로 빠져드는 권세가를 보면서 권력도 명예도 민심을 저버리면 일순간에 물거품이 된다는 교훈을 수없이 경험한다. 민심이 천심임을 알지 못하고 아직도 아집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 그들의 양심이 한없이 가엽기도 하다. 함지박 같은 웃음꽃 만발하는 세상이면 좋겠다. 화무는 십일홍이요, 인생은 일장춘몽이라고 하지만 이왕 사는 세상이면 목단 꽃 같은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고 싶다. 일말의 후회도, 티끌만 한 오류도 남기지 않는 청량한 여생을 누리고 싶다. 하지만 호락호락, 하지 않는 세상, 이제는 힘이 든다. 낡은 수레처럼 여기저기가 삐거덕거린다. 어느새 팔부능선에 다다랐건만 백 세 고지는 아스라이 멀기만 하다.
갈 곳이 없어 공원 벤치에 앉아 시간과의 싸움에 지처 있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절룩거리는 몸으로 아슬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아려진다. 그들 앞에 서면 한없이 겸손하고, 싶다. 가던 길 멈추고 뒤돌아보기도 한다. 그냥 스치고 지나가면 될 걸 자꾸만 뒤돌아봐 지는 마음은 무슨 까닭일까, 연민의 정 때문일가, 머잖은 나의 미래가 거기에 있음일까.
오늘도 장자산 능선에 올라 하늘을 본다. 흥망성쇠도 생로병사도 하늘이 내리는 우주의 섭리일진대 창공의 구름 한 조각 바람에 실려 간들 어찌할 소냐. 울분과 통한의 시간들을 세월의 강물 위에 흘려보낼 수밖에. 그것이 인생인 것을…….
첫댓글 '도단 자붕위에 또닥또닥 빗물 떨어지는 소리' 참으로 정감이 가는 대목입니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 하더군요. 지나간 것을 후회할 줄 아는것 만으로도 이미 완성된 삶을 살은 것이라고. 사람은 누구나 완벽할 수는 없지 않나요? 선생님 께선 여성 못지않은 감성을 지니셨습니다. '그것이 인생인 것을' 에서 많은 것을 뒤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저도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 많이 노력하고 있답니다. 언제나 내가 앞서지 않고, 나를 내세우지 않는 삶을 살기로 마음 다졌습니다. 나이가 들고 보니 미운사람이 없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