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코코스타입니다. 우리나라의 어머니라 불리우던 육영수 여사를 다룬 뮤지컬이 시작된다고 합니다. 육 여사는 성실하고 온화한 성격으로 박정희 대통령 재임 당시 국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퍼스트레이디 입니다. 추억의 흰 목련 뮤지컬을 만나기 전에 육영수 여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먼저 알게 된가면 뮤지컬을 봤을때 이해도 잘되고 감동이 배가 될 것 같아요. 그래서 그녀의 일대기를 적어보도록 할께요.
육영수 여사는 1925년 11월 29일 충북 옥청에서 태어났습니다. 육여사는 소녀 때부터 바느질 솜씨가 뛰어나 동생의 옷을 지어 주기도 했어요. 얀전하고 예의바른 육여사는 다락에 가득 쌓인 현금관리를 맡았기도 했던 살림꾼 아버지의 총애를 받기도 했습니다. 6.25사변이 일어나자 육영수 여사는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어요. 이 시절에 육여사는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육영수 여사는 박대통령과의 첫 대면에서 결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해요.
아버지의 반대를 이기고 1950년 12월 12일날 결혼을 올리게 됐습니다. 그때의 육영수 여사의 나이는 26살 이였습니다. 이렇게 결혼한 육여사와 박대통령은 조그마한 한옥을 전세내어 신접 살림을 시작하였고 신혼살림이 어려워 졌어요, 육여사의 친정집은 부잣집이였지만 도움을 받을 생각이 없어 절약과 저금으로 살림을 꾸려나갔습니다. 조금씩조금씩 모아서 결홍6년이 넘어 조그만한 집을 장만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절약정신과 알뜰함이 이렇게 만든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1963년에 청와대의 안주인이 되었습니다. 육여사는 천와대 생활이 시작되자 세 가지 일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어요. 첫번째는 열심히 공부하는 일이였도 두번째는 많은 사람을 만나 시중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듣는것 이였어요. 마지막으로는 청와대와 살림을 중류 가정 정도로 하는 것이였습니다. 시장의 얘기와 관심사를 토대로 대통령께 직점 건의하여 청와대 야당으로 불리기도 했어요.
이렇게 그여인은 성심을 다해 자식을 키워낸 대한민국의 보통 어머니였고 죽는 그날 까지 남평을 걱정하고 사랑했던 아내였으며, 모든 국민을 내 몸처럼 아꼈던 최고의 퍼스트레이디였습니다. 육영수 여사는 늘 성실과 겸손, 절제 박애를 중요시하고 실천하고 교육했습니다.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전혀 사치를 하지 않았고, 생정에 한복을 자주 즐겨 입으면서도 종이 한 장, 노끈 하나 그대로 버리는 일 없이 모두 재사용 하였어요.
어린이들과 독거노인을 아끼고 보호하는데 앞장서고, 수 많은 사회사업을 벌였습니다. 나병환자의 손을 꺼리낌없이 잡을 만큼 사람을 사랑하고 용기 있었으며 가뭄으로 시달리던 도시에 비가 내리자 대통령과 밖으로 나가 비를 맞으며 기뻐할 만큼 소탈하고 인간적인 사람이였습니다. 이래서 사람들에게 퍼스트에이디 라고 불리운거 같아요.
생전에 우아한 기품을 자랑하는 목련꽃으로 불리고 모두가 두려워하던 박정희 대통령에게 정곡을 찌르는 조언으로 청와대 안의 제 1야당이라 불렸습니다. 광복이래 모든 퍼스트레이디 중 국모로 추앙 받았던 유일한 분이셨습니다. 1974년 8월 15일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있었덩 제29회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재일교포 청년 문세광이 쏜 총탄에 맞아 49세를 일기로 서거하셨을 때 온 국민은 국모께서 돌아가셨다며 슬퍼하고 추모했습니다.
이렇게 사랑받고 존경받았던 육영수 여사의 안타까운 죽음과 그녀의 삶이 뮤지컬로 재 탄생했다고 해요. 추억의 흰 목련 은 받정희 대통령이 육영수 여사의 영결식에서 본인의 자작시라고합니다. 이 추억의 흰 목련이 뮤지컬로 어떻게 표현했는지 어떤 감동을 주는지 너무 궁금해 지네요. 그때 그 감동을 느끼고 싶은 분들은 뮤지컬 추억의 흰 목련을 보러 가세요^^
|
출처: KOCOSTAR 원문보기 글쓴이: 코코스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