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가장 아름다운 정자중의 한 곳 소쇄원
이헌 조미경
조광조의 죽음을 슬퍼해서 그의 제자인 양산보가 17세에
고향에 내려와 지은 정자라 알려진 곳이 담양에 있는 소쇄원인데
전쟁으로 인해 소실되고 말았지만, 그곳은 마치 자연을 그대로 가지고 온 듯
정자 하나 나무 한그루 까지도 아름다웠는데, 정자에 앉아 멀리 바라다 보이는 평야를 바라보며
시를 짓고, 명상을 했을 옛 선비들의 고매함을 엿보았다. 양산보의 시 중에는 '계곡에 흐르는 물을 베개 삼아'
라는 시구가 있듯이 천재적인 문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소쇄원 입구에는 푸른 대나무가 쭈욱 뻗어 있고 굽이 굽이 돌담에도 우리들의 염원을 이야기하듯이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었는데,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없음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조용한 산사에 풍경 소리가 들리는 듯 한 곳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도 아름다운 곳에서 고요하게 마음을 가다듬고 시 한수 읊어 보고 싶었다.
소쇄원의 자세한 설명은 인터넷 자료를 참고하면 된다.
새로운 시대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찼던 중종조. 중종의 신임 속에 신진사류를 대표하는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가 추진했던 개혁정치가 실패로 돌아갔다.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전라도 능주로 유배당하자 그를 따르던 젊은 학자들은 모두 실의에 빠졌다. 그러나 당시 17세였던 젊은 제자 양산보(梁山甫)는 유배지까지 따라와 그를 모신다. 그해 겨울 스승 조광조는 사약을 받고 사망했는데 이때 큰 충격을 받은 양산보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현세에서의 공명과 현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별서를 짓고 은거생활을 시작한다.
배롱나무 꽃이 개울가에 빨갛게 군무를 이루고 있는 자미탄을 따라 창암촌에 다다르면 소쇄공 양산보가 지은 소쇄원을 만날 수 있다. 자미탄은 무등산의 북쪽에서 발원하여 담양군 고서면을 지나 광주로 흘러가는 개울이 배롱나무로 가득 차 있다고 해서 붙여진 증암천의 별칭이다. 지금은 광주호가 조성되면서 만수 때 소쇄원 아래까지 물이 차올라 배롱나무 핀 여울의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다.
광주호의 상류에 창암촌이 있는데, 이 마을이 양산보가 태어나서 자란 곳이다. 그는 15세가 되던 해에 상경하여 조광조의 문하에 들어갔으며, 1519년 17세에 현량과에 합격했으나 숫자를 줄여 뽑는 바람에 낙방했다.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 그가 창암촌 옆의 산간 계곡을 택하여 조성한 별서가 바로 소쇄원이다. 소쇄원은 정원의 옛 모습을 알 수 있는 그림 자료가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고정원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정원의 설계도, 혹은 준공도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는 〈소쇄원도(瀟灑園圖)〉가 현존해 있다. 〈소쇄원도〉는 1755년에 제작된 목판화로 1548년 하서 김인후가 쓴 〈소쇄원 48영〉이라는 소쇄원의 경관을 노래한 시가 상단에 각자되어 있으며, 계류를 중심으로 조영된 정원의 시설과 세부를 확인할 수 있다.
〈소쇄원도〉
1755년에 목판화로 제작된 그림으로 조선시대 별서정원인 소쇄원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오곡문을 통해 흘러드는 계류를 중심으로 건물과 연못, 담장, 석축, 수목 등의 입면을 사방으로 눕혀서 그리는 기법으로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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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쇄원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이 대숲은 정원에 대한 신비감을 더해준다. 숲을 지날 때 바람소리가 적막과 고요를 깨는 소슬함을 느끼게 하여 지나는 이를 전율케 한다. 소쇄원의 안과 밖을 가르는 경계인 이곳을 통과해야 비로소 은일자의 성역인 선계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대나무 숲
대숲은 소쇄원의 내외를 구분짓는 요소이자 신선의 경역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상징적 의미를 지니는 입구다. 이곳을 지나야만 내원으로 진입할 수 있어 소쇄원에 대한 신비감을 더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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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쇄원의 내원은 광풍각과 제월당을 중심으로 대봉대, 연못, 애양단 담장, 계류, 화계를 비롯해 나무 홈대(飛溝), 물레방아 등의 시설로 구성되어 있다. 광풍각은 소쇄원의 가장 주된 건물로 후면의 단 위에 지은 제월당과 짝을 이루고 있다. 두 건물의 이름은 송나라 때 명필로 이름난 황정견이 주무숙의 사람됨을 이야기할 때 “가슴에 품은 뜻의 맑음이 마치 비가 갠 뒤에 해가 뜨면서 부는 청량한 바람(光風)과도 같고 비 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빛(霽月)과도 같다”고 한 데서 유래되었다. 은일생활을 하는 양산보가 스스로 닮고 싶어 하는 사람의 모습을 뜻하고 있는 이름이라고 생각된다.
광풍각
광풍각은 소쇄원의 중심이 되는 건물로 뒤편에 짝을 이루는 제월당이 있다. 광풍각의 한가운데에는 방이 있는데 호남 지방에 많이 지어진 정자의 전형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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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풍각의 건너에는 작은 연못이 하나 있는데 그 위쪽에 초정으로 지어진 대봉대(待鳳臺)가 자리하고 있다. 대봉대는 귀한 손님을 맞기 위해 지은 조그마한 정자다. 봉황을 기다린다는 이름의 대봉대 곁에는 봉황새가 둥지를 틀고 산다는 벽오동나무를 심었다. 김인후는 〈소쇄원 48영〉에서 대봉대의 풍광에 대해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작은 정자의 난간에 기대어
小亭憑欄
오동나무 대에 드리운 한여름의 녹음을 보네
桐臺夏陰
해 저문 대밭에 새가 날아들고
叢筠暮鳥
작은 못에 물고기 노니네
小塘魚泳
소쇄원은 계류가 암반을 타고 흐르는 아름다운 계곡의 자연을 다듬어 만든 전통적인 계원(溪園)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특히 담장으로 계곡을 가로막아 정원의 구획을 분명히 하면서도 그 아래로는 물이 흐를 수 있도록 교각을 세워 담장을 만든 오곡문은 매우 세련된 조경기법이라 할 수 있다. 내원과 외원을 가르는 담장에는 ‘애양단(愛陽壇)’, ‘오곡문(五曲門)’, ‘소쇄처사양공지려(瀟灑處士梁公之廬)’ 등의 글이 새겨져 있다.
소슬하고 청아한 분위기의 산중 별서에서 소쇄공 양산보와 하서 김인후는 옛사람의 진실한 사귐을 나누었던 것 같다. 두 사람이 평평한 바위에 앉아 그 아래로 떨어지는 폭포소리를 들으며 거문고를 타는 모습을 “맑은 물가에서 거문고를 빗겨 안고[玉湫橫琴(〈소쇄원 48영〉)]”라는 표현에서 상상할 수 있다. 하서의 시에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은일하는 선비의 모습과 자연을 감상하고 즐기는 처사의 생활이 매우 짙게 표현되어 있으며, 소쇄한 별서정원의 모습도 잘 나타내고 있다.
광풍각에 누워 머리맡으로 계곡 물소리(枕溪文房)를 듣는다. 대숲에서 울리는 바람소리(千竿風響)를 들으며 넓은 바위에 누워 달을 본다(廣石臥月). 걸상 바위에 조용히 앉아(榻巖靜坐) 바둑을 두고(床巖對棋) 도는 물살에 술잔을 띄운다(洑流傳盃). 바위 위로 물이 흘러내리고(危巖展流) 계곡에는 대나무 다리가 위태롭다(透竹危橋).
자연과 더불어 지어지는 별서정원은 담장 안으로 한정된 일본이나 중국의 정원과 달리 한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나라 고유의 정원이다. 소쇄원은 이러한 모습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내원조차 크게 수식을 가하지 않고 조영하기 때문에 전혀 화려하지도 인공적이지도 않다. 이러한 별서정원은 정원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을 모두 구성 요소로 차경(借景), 거대한 정원으로 구성하고는 이 모두를 신선이 살고 있는 정원인 동천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소쇄원의 외원은 후간장(帿竿場), 오암(鰲巖)과 오암정(鰲巖井), 지석리(支石里), 자죽총(紫竹叢), 바리봉(鉢裏峰), 황금정(黃金亭), 창암동(蒼巖洞), 고암동(鼓巖洞), 옹정봉(瓮井峰), 가재등(加資嶝), 장자담(莊子潭), 죽림사(竹林寺), 산리동(酸梨洞), 장목등(長木嶝), 한벽산(寒碧山) 등 내원과 바로 곁에 있는 것에서부터 멀리 무등산의 안산까지로 규정하고 있다. 별서정원의 깊고 그윽한 맛은 이러한 정원의 의미와 상징을 이해해야만 비로소 맛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