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 해보고 싶은 일의 목록을 버킷리스트라 하던가.
반대로, 죽은 후 육체가 없기 때문에 즐기지 못해 애석해 할 목록 - 이를테면 푸짐한 식탁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든가 피보기 당구 후의 시원한 막걸리나, 짜릿한 섹스를 맛보지 못하는 따위, 죽었기에 못할 사후 버킷리스트 - 을 열거한다면 나는 단연코 그 첫 번 째로 음악 못 듣는 안타까움을 꼽을 것이다. 2만5천 일 살아왔고 앞으로도 만5천 일가량 살아갈 동안 나를 위로해 주고 힘을 주는 인생길 수행 동료 진정한 도반道伴은 술과 음악이란 생각까지 한다.
여자들이 외출할 때 이 옷 입을까 저 구두 신을까 고심하듯, 나도 일 나갈 때마다 작은 망설임을 갖는다. 오늘 차에서 들을 CD판 고르는 행복한 고민을 하는 것이다. 기분 꿀꿀한데 리스트 헝가리광시곡을 들을까, 오늘은 좀 피곤하니 멘델스존이나 부르흐 바이올린협주곡을 들어야겠군. 비가 좍좍 내리니 쇼팽은 어때? 어이쿠 이분이 돌아가셨네, 레퀴엠은 누구 걸 갖고 나갈까 하는 식이다.
게을러 손이 잘 가지 않게 되는 LP에 비해 CD는 빈약하지만 그래도 소중히 수집해 깔축없는 판들이 몇 장 있다. 시대 장르 작곡가 연주자별로 한장 한장 고심하며 샀으니, 몇 장씩 뭉테기로 빌려 간 놈이 어느 놈인지 기억 안 날 땐 몇 배 돈 주고서라도 되찾고 싶다.
차의 라디오는 93.1 KBS FM에 주파수를 고정해 놓고 있어도 국악 시간이 되면 갖고 나간 CD를 꽂아 듣는다. 국악도 억지로나마 들으려 애써 보지만 취향이 맞지 않고 귀에 설다.
요즘 애들은 유치원 때부터 우리 가락을 익히지만, 우리야 서양 음악만 접하며 커왔으니 취향이 그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다. 결국, 취향도 습관이다. 또 모친을 비롯해 집안에 성악 등 음악 하신 분들이 계셨던 덕에 자연스레 클래식을 들으며 자라왔다. "야, 노래 하나 불러봐." 하면 아 목동아나 솔베이지의 노래 또는 가곡 등을 부르며 커 왔기에 대중가요 쪽은 귀에 좀 생경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어느 건 저급하고 뭐는 격조가 있느니 하는 편견은 없다. 베토벤 시절엔 베토벤 음악이 그 시대 정서였듯이, 뽕짝이나 랩 등 대중음악도 요즘 사람들이 공유하며 소통하는 이 시대의 음악 언어이기 때문이다.
하긴 딸년에게 이런 말 하며 혀를 끌끌 차긴 한다.
"임마. 세상엔 대중음악뿐 아니라 클래식도 있고 재즈 샹송 칸초네 파두 탱고 등 다양한 장르가 있어. 깊게 파려면 넓게 파고들어 가야 해. 장한나가 첼로를 더 잘 연주하기 위해서라며 하버드대 철학과 들어간 거 봐라. 모든 학문은 서로 연관성이 있어. 크로스오버니 퓨전이니 하며 장르를 넘나들기도 하잖냐. 만화 책보며 낄낄거리는 것도 좋지만, 수준 높은 책 읽으며 법열의 눈물 흘린다 하지?. 음악도 마찬가지야. 너희 젊은 애들 중 국악 하는 사람 따라다니며 오빠 오빠 하는 애들 있냐? 편식하지 말고 좀 다양하게 섭렵하라구."
딸에게 지청구 늘어놓지만 실은 내가 더 편식이 심한 편이다. 주요 작곡가들의 생몰 연도를 도표로 만들어 놓고 외운다거나, 한 2년간 바흐 무반주 첼로모음곡만 집중적으로 듣다가 악보까지 구입해서, 분석한답시고 장님 코끼리 만지듯 더듬어 보는 쓸데없는 짓도 하게 된다.
식당 개 3년이면 라면 끓인다더니, 덕분에 작곡가나 연주자 성악가 등 전공자들의 음악 이야기 자리에 겁 없이 끼어들어 한두 마디 거들 수 있을 만큼 음악 雜지식 정도는 갖추게 되었다.
어젯밤엔 옛 거래처에 일은 계속해주며 돈 못 받는 꿈과 친구 녀석들에게 쫓겨 산으로 들로 헤매는 꿈이 뒤섞인 개꿈을 꿨다. 깨고 나니 찝찝하고 기분 더럽고 개맹이가 풀린다. 오늘은 어떤 CD를 갖고 나갈까 이것저것 고르는 손에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이 잡힌다.
알다시피 환상교향곡은 베를리오즈가 1830년 작곡한, 당시로써는 파격적 구성으로 낭만주의의 꽃을 피운 작품이다.
마약에 취한 주인공이 짝사랑 여인을 죽여 단두대에서 처형되고 장례식 종소리와 마녀들의 소름 끼치는 춤이 어우러지는 5악장 구성의 교향곡 형식이다.
혹시 누가 차 문이라도 열까 봐 그늘 밑에 차를 박아 놓고 환상에 취해 음악을 듣는다.
내 차의 내비게이션은 좁은 공간을 활용하기 위해 CD플레이어 위에 겹쳐 설치해 놓았다. 회전식 경첩이 달린 내비를 위로 젖히고 그 사이로 CD를 넣고 빼기 때문에 CD가 반 쯤 걸린 상태에선 내비를 아래로 내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서로 걸려 부딪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만 CD가 반 걸린 상태에서 내비를 확 내리는 바보짓을 저질렀다. 아자작 쨍 소리와 함께 CD판이 두 동강 났다. 반 쪼가리는 밖으로 뎅강 떨어졌지만, 나머지 반은 플레이어 안에 깊숙이 박혀 있어 끄집어낼 방법이 없다. 철사 끝을 U자로 휘어 낚시하듯 꺼내려 했지만 걸리지 않을뿐더러 괜히 센서를 건드려 긁어 부스럼으로 일을 키울 것 같아 내일 공업사에 맡기기로 맘먹었다.
아까운 환상교향곡 판을 박살 냈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환상이란 원래가 깨어지게 마련인 것 -. 꿈은 꼭 이루어진다고 누가 헛소리하는가. 극히 일부 사람 외의 거의 모든 꿈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꿈을 못 이룬 불쌍한 사람들 위로하기 위해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달래주는 것이다. 어디 환상뿐이랴. 영원할 것 같은 사랑도 깨어지고 두터운 우정도 깨어지게 마련이다. 형제간 우애도, 부모 자식간 사랑도 결국엔 깨어지게 마련이니
헛되고 헛되도다. 色即是空 空即是色 우리 생을 포함한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1장 2절 말씀)
깨어져 박살난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 ㅠㅠ
* 앞부분의 2만5천 일과 만5천 일이 몇 년인가 계산기 두드린 사람 자수하시오.
첫댓글 저요. 내년 5월18일이 내 25,000일이고. 2031년 1월25일이 나의 30,000일인데(82년 49일째) 더살아남는다면 33,333일을 찍어보고 싶구려 (91년 4개월 4일째). 그 정도면 거하게 기념할 수 있을듯하오. 매년 생일 챙기기도 숨이차니 1,000일단위로 의미있게 챙겨보는게 어떨까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소. 세월은 너무 빠르고 갈날은 빨리도 쳐들어오니 말이오. 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