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와 나
안골노인복지관 수필반 한숙자
진안 시골 오지마을에서 태어난 언니와 나는 어린 소녀시절을 부모님 덕에 철없이 지냈었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다니던 시절이었다. 먹고 사는 것이 그리 힘들었는지 보릿고개가 오면 쑥으로 연명하면서 부황(영양실조)이 나는 등 고단한 삶을 살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때는 산아제한도 없는 때라 형제들이 많아 부모님들이 들에 나가셔서 일을 할 때면 학교로 동생들을 데리고 와서 앉혀놓고 공부를 했었다.
학교에는 군인들이 주둔했기 때문에 우리는 창고에서 수업을 받은 어수선한 시대였다. 옷은 세탁을 자주 안했기 때문에 이가 득실거려 몸은 가려웠고, 머리는 자주 감지 않아 이와 서캐가 많았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때라 미국의 원조와 세계 여러 나라의 도움으로 연명하고 있을 때였다. 그걸 보고 미국인이 디디티(D.D.T) 약을 보내주어서 학교에서는 어린이들을 한 줄로 세워놓고 옷과 머리에 약을 뿌려 이를 없애기도 했다. 중학교 진학은 한 반에서 몇 명 정도였다. 교복도 무명베에 검정물감을 들여서 만들어 입었던 그 시절에도 언니는 멋쟁이 여학생이었다. 시골학생인 언니는 전주남부시장 구호물자 골목을 찾아가 그곳에서 세루바지와 바바리코트, 시계, 사진기 등을 구입한 멋쟁이였다. 성격이 활발하고 사교적이던 언니는 웅변과 달리기를 잘해서 학교 대표로 뽑히기도 했다. 시골 5일장이 열리면 학생 대표들은 시장에 나가 시국강연을 하여 주민들을 설득했다. 동네마다 좌익과 우익이 있어 좌익을 설득하기 위한 강연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세상은 어수선한 시절이었으나 다행히 부모님 덕에 우리는 전주로 고등학교를 진학할 수 있었다. 언니와 나는 자매이면서도 성격은 전혀 달랐다. 언니는 아버지를 닮아 성격이 급하고 나는 어머니를 닮아 차분했다. 우리는 성격 탓으로 서로 다툼이 심했다. 활발한 언니는 친구가 많았고, 그 시절에는 언니동생을 삼는 것이 유행이라 많은 학생들과 언니 동생을 삼았다. 언니는 S언니를 삼아서 학비까지 대 주었다. 자기 친동생인 나보다 그 언니를 먼저 챙겼다. 나는 그런 언니가 정말 싫었고, 그 언니도 우리 집에서 같이 살았다. 그렇게 챙겨준 언니인데 결혼하고는 한 번도 찾아온 적이 없다. 나도 S동생을 삼았는데 언니같이 요란하지는 않았다. 방학 때면 선생님들께서 가정방문 때문에 시골에 오셔서 우리 집에서 숙식을 하셨다. 그때 어머니는 얼마나 많이 수고하셨을까? 수줍음 많은 나는 어쩌다 길에서 고향 남학생을 만나도 속으로는 반가우면서도 그냥 모른 체하며 지나쳤다. 언제나 혼자 낙서하며 외로움을 잘 타는 성격이었다. 언니는 학교 졸업 후 남부럽지 않게 결혼을 했는데 딸 하나를 낳고 일찍이 사별한 뒤 친정에 와서 직장에 다니다 서독 간호사로 떠나 30여년을 그곳에서 살았다. 몇 년 만에 한 번씩 고국에 들어 올 때는 선물을 많이 사왔는데 본인이 고급스러운 것을 좋아하다보니 선물도 고급스러운 게 많았다. 고국에 올 때는 즐거운 마음으로 왔으나 다시 돌아갈 때는 눈물을 흘렸다. 지금은 아득한 추억이지만 얼마나 서러웠던지 언니가 마치 가난한 집에서 부잣집으로 식모살이 떠나는 것처럼 느껴져 마음이 아팠었다. 그때 우리도 ‘잘살아보세’ 하며 새마을운동이 시작되었고, 산아제한도 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산아제한은 안하는 게 좋았을 것 같은데 그때는 그게 최우선이었을 것이다. 언니는 30여년 만에 영구귀국을 하게 되었다. 부모님과 형제 곁에서 같이 살려고 독일에 있었던 물건들을 가지고 왔는데 이삿짐이 무려 200상자가 넘었다. 꿈에 부푼 귀향이었는데 안타깝게도 2년 만에 언니는 중풍으로 쓰러지게 되어 지금까지 10년도 넘게 고생 하고 있다. 독일에서 생활했던 강한 의지력으로 피나는 노력과 운동을 하지만 호전되지 않아 결국 요양원에서 지내고 있다. 고국에 돌아 올 때는 부모님과 형제들과 내 나라에서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왔을 것이다. 언니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요양원에 찾아가면 몸을 움직이지 못해도 정신은 또렷해서 입원실 문만 열면 멍하니 바라보는 모습이 처량하다. 이제는 가망이 없어 죽음만을 기다리는 언니를 볼 때면 인생무상이 느껴진다. 모든 면이 뛰어났던 젊은 시절의 언니를 회상하면서 하느님 곁으로 가는 순간까지 언니가 편안한 모습이었으면 한다.
며칠 전에 ‘국제시장’이란 영화를 감상하면서 언니를 생각하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언니가 한 말이 생각이 난다.
“외국 사람들은 몸이 비대해서 목욕을 시키려면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고 했었다. 언니와 함께 이 영화를 감상했다면 언니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반성을 했다.
‘남의 단점을 보지 말고 장점만 보는 눈을 주소서. 내 흉은 등 뒤에 두고 남의 흉은 앞에서 보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게 하소서. 건강을 지키며 행복한 하루가 되게 살며 생(生)을 마감하게 하소서!’
(2015. 5.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