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
가장 많은 고을 싸안은 남도의 명산 - 지리산의 원래 이름은 '싸안음'의 뜻의 두류산 -
한국땅이름학회 회장 배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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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마을의 앞산은 저 마을의 뒷산이 된다. 크게 얘기하면, 이 고을의 주산(主山)은 저 고을의 명산(名山)이 될 수도 있다. 그만큼 산은 지역과 지역을 나눈다. 아니, 나눈다기보다 산 자체가 여러 고을을 아우른다고 할 수도 있다. 가슴이 크면 아우를 수 있는 물건의 양도 많은 법. 그래서, 큰 산일수록 여러 고을을 아우르게 마련이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많은 고을을 아우르는 산은 어디일까? 바로 지리산이다. 이 산이야말로 여러 도(道)와 나 여러 시군(市郡)을 한꺼번에 싸안고 있다. 이 산은 전북 남원시, 전남 구례군, 경남 산청군, 하동군, 함양군 들 무려 3도 5개 시군에 걸쳐 있다. 천왕봉을 중심으로 하여 거대한 산덩어리로 이루어진 지리산은 최고 높이 1915m의 명산으로, 이 일대는 우리 나라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 여러 이름을 가진 명산
신라 5악의 남악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진다’하여 '지리산(地理山)'이라 불렀다던가? ‘멀리 백두대간이 흘러왔다’하여 또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했다던가? 옛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方丈山)'이란 이름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이 산은 큰 산인 만큼 이름도 여러 개를 가졌다. 그러나, 이 산은 원래 산이 둘려 있음을 뜻하는 '두루뫼(두리뫼)'가 원이름일 것으로 보인다. '두루'나 '두리', '두레'는 '두름', '둘레' 등의 의미를 갖는다. 지리산을 '두리뫼'라 한 것은 아마도 이 산이 여러 고을을 둘러싸고 있어서 나온 이름일 것으로 보인다,
'두류산 양단수를 예 듣고 이제 보니 도화 뜬 맑은 물에 산영(山影)조차 잠겼에라. 아희야, 무릉이 어디메뇨 나는 옌가 하노라.' -조식(曺植:1501∼1572)
옛 시조에 나오는 '두류산'도 지리산이다. 이 두류산이 음의 변화로 옮겨진 것이 '지리산'이란 이름까지 간 것으로 보인다. 두류산> 두리산>디리산>지리산 남한 내륙에서는 가장 높은 이 산은 서쪽 끝의 노고단(老姑壇)(1507m), 서쪽 중앙의 반야봉(般若峰)(1751m) 등 3봉을 중심으로 하여 동서로 100여 리의 거대한 산악군(山岳群)을 형성한다.
□ 그 웅장함이 내륙에선 최고
천왕봉에서 노고단에 이르는 주능선을 중심으로 해서 각각 남북으로 큰 강이 흘러내린다. 하나는 낙동강 지류인 남강(南江)의 상류로서 함양·산청을 거쳐 흐르고, 또 하나는 멀리 마이산(馬耳山))과 봉황산(鳳凰山)에서 흘러온 섬진강(蟾津江)이다. 이들 강으로 화개천, 연곡천, 동천, 경호강, 덕천강 등 10여 개의 하천이 흘러들며 맑은 물과 아름다운 경치로 ‘지리산 12동천’을 이루고 있다. 지형은 융기 작용 및 침식·삭박에 의해 산간분지와 고원·평탄면이 형성되어 있고, 사방에 골짜기들이 깊다. 최고봉은 섬록암(閃綠岩)으로 되어 있고, 주변은 화강암, 화강편마암의 지질이 넓게 분포되어 있다. 유서 깊은 사찰도 많다. 화엄사, 천은사, 연곡사, 쌍계사 등이 그것. 이들 사찰을 중심으로 해서 국보, 보물 등의 문화재가 널려 있다. 말하자면, 지리산은 많은 보물들을 사안고 있는 셈이다. 800여 종의 식물과 400여 종의 동물 등 동식물상 또한 풍부하다. 1967년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된 것은 그만한 ldb가 있다. 산세의 웅장함에 있어서도 으뜸이다. 천왕봉, 반야봉, 노고단의 3대 주봉을 비롯하여 높이 1, 500m를 넘는 봉우리들도 많다. 제석봉(帝釋鳳), 연하봉(烟霞峰), 삼신봉(三神峰), 촛대봉 영신봉(靈神峰), 평봉(坪峰) 명선봉(明善峰), 토끼봉 등이 산무리를 형성한다. 높이 1, 000m 이상 되는 준령도 20여 봉이나 된다. 그 밖에 수많은 크고작은 산봉이 서로 어우러져 큰 산악군을 형성한다. 천왕봉에서 노고단에 이르는 주능선의 길이가 42km이며, 10km 내외의 대소 능선도 15개. 가을 단풍으로 유명한 피아골을 비롯하여 뱀사골, 칠선(七仙), 한신 등 4대 계곡 외에 심원(深院), 대성동(大成洞), 백무동(白武洞) 등 20여 개의 크고 작은 골짜기가 특색을 자랑한다. 불일, 구룡, 용추, 칠선, 차발, 목 삼홍소 등 이름 있는 폭포들이 계곡을 따라 널려 있다.
명승과 비경을 열거한 지리산 10경(景)이 있다.
① 노고운해(老姑雲海) ② 피아골 단풍 ③ 반야낙조(般若落照) ④ 섬진청류(蟾津淸流) ⑤ 벽소명월(碧沼明月) ⑥ 불일폭포 ⑦ 세석(細石) 철쭉 ⑧ 연하선경(烟霞仙景) ⑨ 천왕일출(天王日出) ⑩ 칠선계곡
□ 피가 연상되는 피아골
지리산의 대표적 골짜기의 하나인 피아골은 철마다 우리의 눈을 홀려 놓는다. 봄철의 연분홍 진달래가 그러하고 여름의 짙은 녹음이 그러하다. 가을의 단풍과 겨울의 눈꽃도 우리 눈을 묶어 놓는다. 그 중에서도 가을 단풍이 절경. 산이 붉게 타서 산홍(山紅)이고, 단풍이 물에 비쳐 수홍(水紅)이며. 그 품에 안긴 나그네의 옷도 마음도 물들어서 인홍(人紅)이다. 이러한 삼홍(三紅)의 절정을 이루는 곳이 질매재 남동쪽의 삼홍소(三紅沼)다. 붉은 빛의 물이 흐른다 고도 햬서 홍류동(紅流洞)이라고도 한다.
'가을에 붉은 단풍 봄꽃보다 고와라. 천공(천공)이 나를 위해 뫼빛을 꾸몄으니, 산도 붉고 물도 붉고 사람마저 붉어라'.
조선 중기의 학자 남명 조식이 쓴 이 '삼홍소'의 시를 읊어 보면 마음까지도 붉어지는 듯하다. 해마다 10월 말에는 전국에서 모이는 등산객들이 피아골 단풍제를 지내는데, 이 산신제는 1977년부터의 연례행사이다. 전남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소재 연곡사에서 반야봉(般若峰:1, 751m)에 이르는 연곡천 계곡의 피아골은 길이 약 20 km. 지리산 제2봉인 반야봉의 중턱에서 발원한 맑고 풍부한 물이 임걸령 ·불무장 등의 밀림지대를 누비며 피아골 삼거리 ·연곡사 등을 지나 섬진강으로 빠진다. 폭포 ·담소(潭沼) ·심연이 계속되는 계곡미가 뛰어나다. 특히 이 곳의 단풍은 지리산 10경의 하나로 손꼽힌다. '피아골'은 고산자 <대동여지도>에는 직전동(稷田洞)으로 표기돼 있다. 따라서, 피(血) 때문에 나온 이름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 일대에 피밭[稷田]이 많아서 ‘피밭골’이라는 이름이 생겼고 이것이 변해 피아골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피아골은 '피밭골' 또는 '피왓골'이 원이름일 것으로 보인다. 피밭이 있는 골짜기라는 뜻일 것이다. 한자로 '직전곡(稷田谷)'이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 '피아골'은 비탈 심한 골짜기를 뜻하는 '비아골(비알골)'에서 나왔을 가능성도 있다. 땅이름에서 '비'는 곧잘 '피'로 격음화한다. 경북 청송군 안덕면 성재리의 '빗골'이 '핏골(稷谷)'로 된 것이라든가, 충북 단양군 대강면의 '빗재'에서 '빗'은 모두 '비탈'을 뜻하고 있다. '피아골'이라고 하면 우선 피(血)를 연상한다. 임진왜란 때는 왜군이 이 골짜기까지 찾아 들어와 이 곳에 숨어 든 사람들을 무참히 살상, 피의 골짜기를 이루게 했고, 여순 반란 사건 때도 도주한 반란군 일부를 소탕하기 위한 작전으로 여기서 또 많은 피를 보아야 했다. 육이오를 전후해서 또 적(공비)의 주력부대 거점이 되어 피아간에 치열한 격전이 벌어져 피아골의 연곡천이 핏물이 되어 흘렀다. 골짜기 이름에 '피'라는 글자가 들어가서일까? 어떻든 피아골은 그 이름 때문에 피(血)와 관련한 역사를 떠안아야 했는지도 모른다. 봄철이면 피아골의 진달래빛이 왜 그리 붉으냐고 하면 누구든지 그렇게 대답한다. 피가 밴 땅에서 거름을 빨아들여 꽃을 피우니 어찌 꽃이 붉지 않을 수 있겠냐고. 가을이면 단풍 빛이 왜 그렇게 붉으냐고 물어도 대답은 똑같이 나온다. 어차피 피아골은 크나 작으나 피의 역사를 만들어야 했고, 핏빛의 꽃과 단풍으로 골짜기를 물들여야 했다. 그러나, 피아골은 이제 더 이상 피의 역사를 떠안는 현장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봄의 진달래나 가을의 붉은 단풍을 보고 피가 연상도지 않아야 한다. 지리산은 많은 문화재도 싸안고 있지만, 많은 슬픔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그 지리산은 오늘도 말없이 여러 고을을 치마폭에 거느린 채 의연하게 서 있다. /// (글. 배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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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 관하여 더 알기>
□ 노고단
전남 구례군 산동면과 토지면의 경계 높이 1,507 m. 천왕봉(1,915 m), 반야봉(1,734 m)과 함께 지리산 3대봉의 하나이다. 신라시대에 화랑국선(花郞國仙)의 연무도장이 되는 한편, 제단을 만들어 산신제를 지냈던 영봉(靈峰)으로 지리산국립공원의 남서부를 차지한다. 노고단이란 도교에서 온 말로, 우리말로는 ‘할미단’이며, ‘할미’는 국모신인 서술성모(西述聖母:仙桃聖母)를 일컫는 말이다. 산정부에 가까운 1,100∼1,200 m 높이에는 원추리꽃으로 덮인 광활한 고원이 펼쳐져서 부근이 좋은 피서지를 이루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서양사람들의 별장지가 되었다. 노고단의 경관은 지리산이 그렇듯이 기봉난산(奇峰亂山)의 경치보다 울창한 임상(林相)과 웅대한 산용(山容)의 경치가 훌륭하고, 정상부에서의 조망이 뛰어나다. 남록 계곡에는 화엄사가 있는데, 경내에 각황전(覺皇殿)을 비롯하여 국보 ·보물로 지정된 전각 ·석등 ·석탑 등이 많다.
□ 쌍계사
지리산에는 유서 깊은 사찰이 많다. 화엄사, 천은사, 연곡사, 쌍계사 등이 그것. 이들 사찰을 중심으로 해서 국보, 보물 등의 문화재가 널려 있다. 말하자면, 지리산은 많은 보물들을 사안고 있는 셈이다. 쌍계사는 경남 하동군 화개면에 있는 사찰. 840년(신라 문성왕 2) 진감선사 최혜소 창건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 840년(신라 문성왕 2)에 진감선사(眞鑒禪師) 최혜소(崔慧昭)가 개창, 처음에 옥천사(玉泉寺)라고 하다가 헌강광 때 한 고을에 같은 이름의 절이 둘 있어 혼동을 일으켰으므로, 문전에 흐르는 쌍계에 연유하여 쌍계라는 호를 하사하고 학사(學士) 최치원으로 하여금 ‘쌍계석문(雙磎石門)’의 4자를 쓰게 하여 바위에 각자하였다. 그 후 두 차례나 화재로 절이 소실되었으나 1632년(인조 10)에 벽암(碧岩)을 비롯한 여러 승려들에 의하여 복구 ·중수되었다. 경내에는 국보 제47호인 진감선사대공탑비(眞鑑禪師大空塔碑)를 비롯하여 보물 제380호의 쌍계사 부도(浮屠), 보물 제500호의 대웅전 등의 지정문화재가 있고, 이 밖에 5층석탑 ·석등 ·일주문 ·팔상전(八相殿) ·명부전(冥府殿) ·천왕문(天王門), 중국의 승려 혜능(慧能)의 두상(頭像)을 봉안했다는 금당(金堂)에 있는 육조정상탑(六祖頂相塔)과 나한전(羅漢殿) ·금강문 ·칠불아자방(七佛亞字房)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 등 많은 문화재가 있다.
□ 청학동
경남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에 있는 마을. 인구 100(1990). 도인촌(道人村)이라고도 한다. 지리산 삼신봉(三神峰:1, 284 m)의 동쪽 기슭 해발고도 800 m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예로부터 천석(泉石)이 아름답고 청학이 서식하는 승경의 하나로 꼽혀왔으며, 주민 전체가 갱정유도(更定儒道)를 신봉한다. 일명 일심교(一心敎)라고도 한다. 집단생활을 하는 이들의 가옥은 한국 전래의 초가집 형태를 띠고 있고, 의생활도 전통적인 한복차림을 고수한다. 미성년 남녀는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고 길게 땋아 늘어뜨리며, 성인 남자는 갓을 쓰고 도포를 입는다.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마을 서당에 보내는 것도 특이하다. 마을 사람들은 농업 외에 약초 ·산나물 채취와 양봉 ·가축 사육 등으로 생계를 꾸려 나간다.
□ 화엄사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지리산 노고단 서쪽에 있는 사찰로 연기조사가 창건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 창건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사적기(寺蹟記)》에 따르면 544년(신라 진흥왕 5)에 인도 승려 연기(緣起)가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시대는 분명치 않으나 연기(煙氣)라는 승려가 세웠다고만 전하고 있다. 670년(신라 문무왕 10)에는 의상대사가 화엄10찰을 불법 전파의 도량으로 삼으면서 이 화엄사를 중수하였다. 그리고 장육전(丈六殿)을 짓고 그 벽에 화엄경을 돌에 새긴 석경(石經)을 둘렀다고 하는데, 이때 비로소 화엄경 전래의 모태를 이루었다. 사지(寺誌)에서는 당시의 화엄사는 가람 8원(院) 81암(庵) 규모의 대사찰로 이른바 화엄 불국세계(佛國世界)를 이루었다고 한다. 신라 말기에는 도선국사가 중수하였고 고려시대에 네 차례의 중수를 거쳐 보존되어 오다가 임진왜란 때 전소되고 승려들 또한 학살당하였다. 범종은 왜군이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섬진강을 건너다가 배가 전복되어 강에 빠졌다고 전한다. 장육전을 두르고 있던 석경은 파편이 되어 돌무더기로 쌓여져오다가 현재는 각황전 안에 일부가 보관되고 있다. 1630년(인조 8)에 벽암대사가 크게 중수를 시작하여 7년만에 몇몇 건물을 건립, 폐허된 화엄사를 다시 일으켰고, 그 뜻을 이어받아 계파(桂波)는 각황전을 완공하였다. 대개의 절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가람을 배치하지만, 이 절은 각황전이 중심을 이루어 비로자나불을 주불(主佛)로 공양한다. 주요 문화재로는 국보 12호인 석등, 국보 35호인 사사자삼층석탑(四獅子三層石塔), 국보 67호인 각황전이 있으며, 보물 132호인 동오층석탑(東五層石塔), 133호인 서오층석탑, 300호인 원통전전 사자탑(圓通殿前獅子塔), 299호인 대웅전이 있다. 부속 암자로는 구층암(九層庵)·금정암(金井庵)·지장암(地藏庵)이 있다.
4사자3층석탑
상층 기단에 돌사자 네 마리를 각 모서리에 배치해서 나온 탑명으로, 화엄사의 창건주인 연기조사와 어머니의 전설을 담고 있다. 신라 선덕여왕14년(645)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불사리 73과를 모셔와 연기조사의 공덕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탑으로 불사리 공양탑이라고 한다. 전체적인 탑모양은 연기조사께서 편단우견 우슬착지한 자세로 머리에 석등을 이고 있는데, 왼손으로 찻잔을 들고 찻잔 위에 여의주를 받쳐 어머니에게는 진리를 공양하고 부처님에게는 차 공양을 올리는 모습을 하고 있어 세간과 출세간이 둘이 아닌(不二)의 경지를 느끼게 해 준다. 수행자에게는 용맹정진과 반야의 힘을, 불효자에게는 효의 정신을 일깨워 주는 이 쌍탑은 능숙한 기법과 균제된 조형미를 지닌 신앙의 결정체로서 불국사의 다보탑과 더불어 통일신라 석탑 예술의 극치로 평가받고 있다. 사사자삼층석탑(4獅子3層石塔)은 국보 35호로 1962년 12월 20일 지정되었다. 각황전을 왼쪽으로 돌아 108계단을 오르면 현재 화엄사 가람 중심에서 서북방에 '효대(孝臺)'라 불리는 높은 언덕이 있고, 그 대지 위에 '4사자3층석탑'이라 불리는 걸작이 자리잡고 있다. 전체 부재를 화강암으로 조성한 이 사자탑은 경주의 불국사 다보탑(국보 20호)과 더불어 우수한 걸작품으로 손꼽힌다. 절의 창건자 연기조사가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탑의 바로 앞에는 석등 1기가 배치되어 있어서 본래부터 이 장소가 석탑을 세우기 위하여 마련된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우리 나라의 수많은 석탑 가운데 이 석탑만큼 '기발한 아이디어'를 종횡무진 구사한 것은 없다.
시조 '효대" 이은상 지음
일유봉은 해 뜨는 곳, 월요봉은 달 뜨는 곳 동백나무 우거진 숲을 울삼아 둘러치고, 네 사자 호위 받으며 웃고 서 계신 저 어머니!
천 년을 한결같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여쁜 아드님이 바치시는 공양이라, 효대에 눈물어린 채 웃고 서 계신 저 어머니!
그리워 나도 여기 합장하고 같이 서서 저 어머니 아들 되어 몇 번인가 절하옵고, 우러러 다시 보오매 웃고 서 계신 저 어머니!
통일신라시대 네 사자탑으로는 유일하다. 다보탑과 함께 한국 이형(異形) 석탑의 쌍벽을 이룬다. 불교 조형물에서는 원래 사자를 진중히 대접한다. 사자가 백수의 왕이라는 관념에서 여래의 위상에 비유한 데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석등과 마주보고 서 있는 탑은 2중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얹은 후 꼭대기에 상륜부를 얹어놓은 전형적인 신라 석탑의 형태. 지대석 위에는 높직한 3단 받침이 있고 하층 기단 각 면석, 각면에는 탱주가 없으나 대신 고대 양식에 따른 큼직한 3구씩의 안상(眼象)을 음각, 그 안에 천인상(天人像)을 1좌씩 12구를 돋을새김했다. 천인상(天人像)은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 춤추고 꽃을 공양하는 모습 등 다양하다. 상층 기단에는 귀기둥(隅柱)을 대신하여 연화대(蓮花臺)에 꿇어앉은 암수 두 마리씩의 사자를 한 마리씩 지주(支柱) 삼아 네 귀에 배치했다. 네 사자는 각각 희(喜).노(怒).애(哀). 락(樂)의 표정이다. 그 사자머리 위에도 연화대를 얹어 갑석(甲石)을 받치게 했다. 네 사자의 중앙에는 찰주(擦柱:가운데 기둥) 대신 연화대 위에 합장한 스님(大德)의 입상을 세웠고, 갑석 이면 중앙에는 연꽃을 조각하여 천개(天蓋)로 삼는 등 다양성을 갖추었다. 부처님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세상의 모습을 잘 표현했다. 어김없이 연꽃은 등장하는데, 사자가 밟고 서 있는 복련과 사자 머리 위의 앙련이 그렇다. 주목되는 것은 네 귀에 앉은 돌사자상과 중앙에 있는 대덕의 모습인데 네 돌사자는 상하 앙복련화대(仰覆蓮花臺) 위에 앞발을 뻗고 뒷발을 구부려 앉아서 정면을 바라보며 입을 벌려 날카로운 이를 보이고 있는 작품이 곧 불국사 다보탑의 석사자상을 연상케 한다. 원각한 대덕의 입상은 얼굴의 인상이나 몸에 걸친 가사의 의문과 균정한 체구 등이 당시의 불상과도 같은 조성수법을 보이고 있있다. 탑신부는 첫 몸돌(1層 塔身)의 정면에는 문짝 모양(門扉形)을 새겼고 문짝 좌우에 인왕상(仁王像) 2구를, 양 측면에는 四天王像 2구씩, 뒷면에는 보살상 2구를 돋을새김했는데, 모두 8명이 새겨저 있고 그 모습이 볼수록 장엄하다. 반면 문짝에 달린 조그마한 문고리의 돋을새김은 볼수록 앙증맞아 미소를 짓게 한다. 탑신은 2층에서부터 단일석으로 되어 있다. 지붕돌(屋蓋石)은 초층부터 3층이 모두 같은 형식으로 처마의 받침이 5단씩으로 정형화 되어 있고,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다. 상륜부,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露盤)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 모양의 장식)만이 짧은 상륜(相輪)과 둥근 보주(寶柱)가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각 부분의 조각이 뛰어나며 살짝 들린 처마에서 경쾌한 느낌을 주고 있는데, 조각수법이나 건조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의 전성기인 8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전체 높이 5.5m. 탑 조성에 있어 착상이 기발하고 조각이 섬세한 점 등은 현재 국내에 남아 있는 여러 개의 사자탑 가운데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손꼽게 한다. 造成 연대는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 돌을 다루는 솜씨에 있어서는 통일신라시대가 압권이며 그만큼 화려하다. 탑 전체에 석재가 노쇠하여 생기는 白花현상이 번지고 있어 특단의 대책이 시급하다. 흔히 한국을 「석탑의 나라」라고 부른다. 중국에는 전탑(塼塔:벽돌탑), 일본에는 木塔의 수가 압도적이다. 한국에는 품질이 우수한 화강암이 많다. 특히 智異山 계곡에는 지천으로 많다. 오늘날 남아 있는 우리나라 유적 유물 가운데 石造 미술품이 다른 어느 것보다 많은 까닭이다. 4사자 3층석탑의 석재도 화강석이다. 4사자 3층석탑 앞에 있는 석등 역시 특이한 모습. 길쭉한 직사각형 배례석(拜禮石)을 놓고 화사석을 받치는 간주석(竿柱石:3개의 기둥) 안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공양하는 인물상을 배치했다. 이 인물상은 한 손에 공양기(供養器)를 들고 4사자 3층석탑에 세워진 스님상을 정면에서 우러러보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석등 속의 인물상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조사(緣起祖師)라 하고, 4사자 3층석탑의 스님상은 조사 어머니라고 한다. 효심이 깊은 조사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해 이런 작품을 축조했다는 것이다. 효대 이름도 이런 전설에 따라 지극한 효성이 서린 곳이란 뜻으로 후세에 명명된 것이다. 다음은 고려 문종 넷째 왕자로서 우리나라 천태종 종조(宗祖)인 대각국사 의천이 읊은 「효대(孝臺)」(종무소 건너편, 금강문을 지나 오른쪽에 세워저 있는 "孝臺詩碑"와 "碧巖國一都大禪師碑"참고) 적멸당 앞은 경색도 빼어나고 / 길상봉 위에는 한 점 티끌도 끊겼네. / 온종일 서성이며 지난 일을 생각하니, / 저문날 가을바람 효대를 감도네. (寂滅堂前多勝景, 吉祥峰絶纖埃. 彷徨盡日思前事, 薄暮悲風起孝臺) 이 시가 4사자3층석탑이 있는 지역을 효대라고 부르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효대는 불교의 효(孝) 사상을 짐작해 볼 수 있는 대표적인 곳이다. 4사자3층석탑과 석등은 어느 사찰의 탑이나 석등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이다. 4마리 사자가 둘러싼 석탑 안에는 스님이 합장한 채 서 있고, 그 앞 석등에는 탑 안의 비구니 스님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 공양을 올리는 모양이 너무나 극진해 마치 살아있는 것 같다. 조선조 유학자 남효온(1454∼1492)은 지리산일과(智異山日課)란 저술에서 탑의 네 모서리 안에 있는 사람은 연기의 어머니로 비구니가 된 ‘자다’이며, 석등에서 공양물을 받치고 있는 인물은 ‘연기조사’라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효대 석탑과 석등은 단순한 불교적인 상징물이 아닌 연기조사의 어머니에 대한 뜨거운 효심이 담겨 있는 상징물이라는 것. 효대 이름이 붙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 연기조사는 어머니를 위해서는 화엄사에 효대를, 그리고 아버지를 위해서는 신라화엄경사경발문을 지었던 것이다. 연기 스님은 효대와 사경을 통해 부모에 대한 극진한 효성을 드러냈다. 효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 맺은 지중한 인연을 아름답게 회향하는 하나의 방편이다. 효대와 화엄경사경발원문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석탑의 건조 연대는 각 부의 조각수법이나 건조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 성대인 8세기 중엽으로 추정되며. 능숙한 기법과 균제된 조형은 가히 신품이라 할만 하며, 주위의 풍경과 조화를 이룬 점을 볼 때 당대 신앙의 일면과 예지에 놀라지 않을 수 없고 이와 대하고 있는 파격적인 석등과의 조화 또한 기묘하다. 보통 탑들은 법당 앞에 있는데 이 탑은 법당보다도 높이 있고 탑만 따로 있다. 탑이 있는 곳은 노고단을 배경으로 한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하는 소나무 들과 주위의 동백숲, 특히 탑 뒷면(북쪽)의 400년(?)이 넘은 노거수 반송 서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면서 멀리 태극을 형상하며 흘러들어오는 섬진강의 물줄기는 바라보고 있노라면 가히 극락에 와 있는 느낌이다. 야! 이런 감탄사가 찾는 이를 놀라게 한다, 서양의 로뎅의 '사색에 잠긴 남자' 보다 더 훌륭하고 감동적인 그런 작품이다. 문화재란 말보다는 신의 작품에 가까운 그런 우리 조상의 솜씨이다. 탑 북쪽 큰 소나무 반송 아래, 사람이 앉기 딱 좋은 축단에 앉아서 석탑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또 다른 느낌이 든다. 이 탑이 다른 탑과 다른 것은 우선 탑의 몸돌을 네 마리의 사자가 받쳐들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탑 앞에 공양을 하는 사람 형상을 한 석등을 만들어 놓았다는 것. 이렇게 정상적인 모습이 아닌 탑을 이형탑이라고 한다. 다른 모양의 탑이란 뜻. 대표적인 이형탑으로 이 탑과 함께 불국사 다보탑을 든다. 다보탑 역시 사자가 네 마리 앉아 있고 아름다운 집이 층층이 있는 형태를 띠고 있다. 화엄사에는 원통전 앞에 또 사자 네 마리가 있고 각황전 부처님 수미단(부처가 앉아계신 단)에 역시 사자가 매달려 있다 -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사자(?)가 아니라고도 느낀다!! -왜! 사자일까? 4사자는 불교의 발생국인 인도에 많이 등장한다. 인도인들은 부처님을 사자로 곧잘 비유했다. 부처님의 설법을 사자후라고 표현한 것이나 "사자는 네 발 달린 짐승 가운데 뛰어난 존재로, 두려움이 없고 일체를 능히 굴복시킨다. 부처님도 이와 같아서 일체를 항복 받으므로 인사자"라 한다. 그리고 사자는 문수보살이 데리고 다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탑을 사자가 받치고 있는 것에 별 이상함은 없다. 사자의 입 모양이 각각 다양하다. 사자가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이 다 다르다. 크게 벌린 사자부터 아예 꽉 다물고 있는 사자까지 다양한 입 모양을 하고 있다. 이 탑을 만든 석공과 스님은 왜 그렇게 표현했을까? 인간의 희노애락을 표현했다는 것이다. 인간이 깨우침을 얻을 때 처음에는 많은 말로써 그 깨우침을 표현하려 한다. 그러나 결코 진리는 말 속에 있지 않음을 서서히 깨달아 가는 것이다. 결국 어떠한 말이든 단 한마디라도 한다면 그 한마디로 인해 진리가 왜곡되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아 결국은 입을 꽉 다물어 버릴 수 밖에 없는 구도자의 모습을 저 네 마리 사자로 표현했을 것이다. 결코 말을 많이 한다고 하여 자기 속을 모두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말을 많이 함으로 인해 더 많은 갈증을 느끼고 더 큰 공허함만을 느낄 뿐이다. 입을 아예 꽉 내리 닫아 버린 저 사자의 모습을 보고 또 한번 삶을 배운다. 또한, 탑 속의 인물이 여자(?) 같지는 않다는 것인데!! 왜 무슨 연유로 신라인들은 탑을 여기에 이런 모습으로 만들어 놓았을까? 모를 일이다. 어차피 아무도 모른다면 보는 사람마다 다양한 해석을 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과연 탑속의 인물이 의천스님이 말한 연기 대사의 어머니일까? 오히려 문수보살이 아닐까? 연화대좌 위에 네 마리 사자가 포효하고 있고 가운데 사자를 데리고 다니는 문수보살이 합장하고 그 머리 위에 또 연꽃이 화려하게 표현되어 있다. 바로 극락이 아니겠는가? 극락 세계를 문수보살과 네 마리 사자가 수호하고 있고 그 위에 부처님의 상징인 탑이 우뚝 서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탑 앞에 스님이 부처님을 위해 차를 공양하고 있는 그 모습, 진정한 도를 깨달아 세상을 비추는 등불이 되고 나아가 부처님이 계신 극락으로 환생하려하는 인간의 열망을 이 탑을 세운 석공과 스님은 표현한 것이 아닐까? [출처] 4사자 3층석탑|작성자 신선
□ 연곡사
전남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지리산자락에 있는 사찰. 544년(신라 진흥왕 5) 연기조사 창건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인 화엄사의 말사. 544년(신라 진흥왕 5), 화엄사의 종주(宗主)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하여 임란 때 병화로 인하여 불탄 것을 중건하였는데, 6 ·25전쟁 때 다시 불탔고, 그 후 중건하였다가 1981년 구 법당을 헐고 정면 5칸, 측면 3칸의 웅장한 새 법당을 세웠다. 경내에 국보 제53호인 연곡사 동부도(東浮屠), 국보 54호인 연곡사 북부도를 비롯하여 보물 151호인 연곡사 3층석탑, 보물 52호인 연곡사 현각선사 탑비(玄覺禪師塔碑), 보물 153호인 연곡사 동부도비, 보물 154호인 연곡사 서부도 등의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다. 이 곳은 조선 말기 수백 명의 의병이 왜군과 싸운 곳으로 당시 순절한 의병장 고광순(高光洵)의 순절비가 동백나무숲 아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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