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11138
발해 멸망시킨 거란(요)은 발해 이은 후예국
성헌석의 ‘대고구리’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기사입력 2013-07-29 01:37:32
최근까지 사화산으로 알려져 왔던 백두산이 폭발할 것인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고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왜냐하면 만일 백두산이 폭발한다면 어마어마한 규모로 예측되기 때문에 한반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관측 때문이다. 특히 북한정권이 그로 인해 붕괴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러면서 천년 전 해동성국 발해의 멸망을 그 예로 들고 있다.
백두산 화산폭발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 일본 나고야대학교 연대측정종합연구센터 연구팀은 백두산에서 용암과 화산재로 쓰러진 고목을 채취해 연대측정을 해본 결과 백두산의 화산 폭발은 929~945년에 있었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한다. 이는 폭발이 문헌상 발해가 거란족의 요(遼)나라에 멸망한 926년보다 3~19년 이후에 발생했음을 의미한다. 과학적으로 보면 발해의 멸망과 백두산 화산폭발은 직접적으로 아무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국내 화산학계의 권위자로 알려진 모 교수는 “백두산 폭발이 발해 멸망 3년 후에 일어났으나, 그 전조증상이 미리 일어나는 법이므로 그로 인해 발해국의 민심이 이반되어 거란에게 멸망당한 것이다”라고 이상한 설명을 하면서, <요사 야율우지전>에 “민심이 이반하고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군대를 움직이니 싸우지 않고 이겼다”라는 기록을 근거로 들었다. 화산학계에서 발해 멸망과 백두산 화산 폭발을 연계시키는 근거 역시 바로 이 기록 때문이다.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네티즌들에게는 그럴듯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이는 역사적 사실과 전혀 다르다. 왜냐하면 우선 백두산에 엄청난 화산폭발이 있었다는 역사기록이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당시 화산폭발지수가 7.4정도로 추정된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지수가 4이상이면 대규모 폭발에 속하며, 8을 최대로 지정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7.4의 강도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대폭발이다. 수년 전 발생한 아이슬란드의 화산지수가 4정도라고 한다. 천년 전의 백두산 폭발은 그의 1000배에 해당하는 화산재를 분출했을 것이므로 말로는 이루 형용할 수 없는 실로 엄청난 재앙을 한반도와 만주 그리고 특히 일본열도에 주었을 것이다.
백두산 일대는 대진국(발해)의 동북 변방
백두산이 대폭발한 적이 있다는 과학적 근거가 이렇듯 확실하나, 폭발했다는 역사기록이 어떠한 사서에도 없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 이유는 우리가 국사시간에 배운 대로 백두산 일대가 대진국(발해)의 중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대진국의 도읍이 그 일대에 있었다면 위에서 모 교수가 말한 전조증상으로 발해국의 민심이 이반되어 요나라에게 쉽게 망했다는 이상한 주장도 어느 정도는 수긍될 수 있다. 게다가 곧 화산이 폭발할 발해 땅을 얻기 위해 거란이 병력을 이끌고 쳐들어올 이유가 없지 않은가?
지난번 칼럼에서 언급했다시피, 대진국의 도읍이 있던 핵심강역은 북부 하남성 일대로, 남으로 황하에서부터 정혜·정효공주의 무덤이 발견된 동만주까지 9000리가 해동성국 대진국의 영토였던 것이다. 따라서 백두산 일대는 대진국의 중심이 아니라 수천 리나 떨어진 동북단 변방의 외지이기 때문에 백두산 대폭발이 있었다고 해서 그것이 대진국(발해) 멸망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는 것이다. 기류의 흐름 때문에 오히려 일본열도가 영향을 훨씬 크게 받았을 것이다.
대진국(발해) 멸망 원인은 내부 쿠데타
▲ 대진국의 강역은 하남성 황하에서부터 연해주까지 9000리. 백두산 폭발과 대진국(발해) 멸망은 아무 상관이 없다. <이미지=필자제공>
먼저 <요사>에 기록된 발해의 멸망 장면을 보기로 한다. 925년 12월, 거란의 야율아보기가 발해 정복을 위해 출병한다. 발해의 부여성을 포위한지 3일 만인 1월 3일 성을 함락시킨다. 거란의 선봉이 발해의 도읍 홀한성을 향해 질주하는 도중에 발해의 3만 대군을 격파하고 9일 홀한성을 포위하고, 3일 후인 12일 발해의 마지막 왕에게 항복하라는 의사를 전한다. 이틀 뒤 14일 대인선은 흰 소복을 입고 양을 끌고 신하 300여 명과 함께 항복하고 만다. 이로써 발해는 15대 229년 만에 멸망했다는 것이 사학계의 중론이다.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도 “대진국 애제의 청태 26년 봄 정월 야율배는 동생 요골과 선봉이 되어 밤에 홀한성을 포위하자 애제가 성 밖에 나가 항복함으로써 나라가 망했다”고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어 위 <요사>의 내용보다도 축약되어 있고, 다른 점은 대진국이 건원칭제했다는 사실 뿐이다.
너무도 허망한 멸망으로 솔직히 뭔가가 이상한 기록이다. 해동성국이라는 명성을 얻었던 대진국(발해)으로서는 너무도 허망한 멸망이다. 고구려의 광활한 고토를 거의 대부분 차지했던 대제국이 채 보름도 못돼 속절없이 무너졌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그리고 거란족이 쳐들어왔는데 겨우 3만 병력으로 저지했다가 패하자 도성이 포위되어 왕이 항복했다는 만화 같은 이야기를 믿을 수 있을까?
9000리 대제국 대진국의 진짜 멸망 원인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고리국지(高麗國志)>와 <고리사력(高麗史歷)>라는 역사책이 있는데, 이 책들은 대진국의 역사실록으로 <요사>가 왜곡하고 있는 대진국의 역사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사서로 현재 소장처는 일본(고려국지 28권)과 러시아(고려사력 16권)이다. 이 책에는 대진국 멸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1. <고리국지>의 거란에 대한 기록
契丹を属国にしたし部族民たちを受け入れ、中央管理に登用した。その中に耶律阿保机は5城大将軍に封じてたし、契丹軍を担当する役割を果たした。契丹軍は輪に忠誠することができる10万の兵がいた
(해석) (대진국은) 거란을 속국으로 삼았고 부족민들을 받아들여 중앙관리로 등용하였다. 그 중에 야율아보기를 ‘5성 대장군’에 봉했고 거란군을 담당하는 역할을 맡겼다. 거란군은 (대진국에) 충성할 수 있는 10만의 군사가 있었다.
2. <고리사력>의 거란에 대한 기록
Император 916 лет aejong генералов и пять генералов бывшего вассального государства будет goguri из yayul просмотра голосовых связок yowang стержней.
(해석) 916년 애종 황제는 고구리(=대진)의 종속국인 거란 출신의 장군 야율아보기를 5성대장군과 요(遼)왕에 봉하였다. (※ 거란의 요왕은 대진국 황제의 제후임이 명백히 밝혀진 기록)
3. <고리국지>의 대진국 멸망 기록
大将軍 耶律阿保机が 上京城に入城して宮城を襲撃して皇帝を捕虜とした。新しい高句麗は遼国に千人おり震国の管理をそのまま登用した。
(해석) 대장군 야율아보기가 상경성에 입성하여 궁성을 습격하였고 황제를 포로로 잡았다. 새로운 고구리(=대진국)는 요(遼)나라로 천명했고 진국의 관리를 그대로 등용하였다.
※ 대진국의 임금을 황제라 표현했고, 진국이라는 국호도 나온다.
4. <고리사력>의 대진국 멸망 기록
Путаница дела вождя 926, № 5 yayul капитализированных привел армию в 100000 был введен в sanggyeongseong Вынужден отречься от престола императора принять naeeotda печати
(해석) 926년 5호대장군 야율아보기가 혼란한 국정을 틈타 10만 대군을 이끌고 상경성에 입성하였다. 황제에게 양위를 강요하여 인새를 받아내었다.
5. <고리사력> 거란의 대진국 황족 처우에 대한 기록
Ko, которая для лиц в качестве королевских семей бывших аристократов daessi и Принцесса и брака было укрепление системы управления.
(해석) 전 황족인 대씨와 공주와 혼인하였고 고씨 황족들을 고관으로 기용하여 통치체제를 강화하였다. ※ 대씨와 고씨를 황족이라 표현한 것으로 보아 고구리와 대진국은 황제국
6. <왜인흥망사(倭人興亡史)> 의 기록
926年 耶律阿保机は上京城に入城した後ホール忽汗城に療養がある皇帝に譲位を強要した。
(해석) 926년 야율아보기는 상경성에 입성 후 홀한성에서 요양 중인 있는 황제에게 양위를 강요하였다.
위 기록들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오는데, 대진국이 왜 멸망했는지 확실해진다.
“황제국 대진국은 거란을 속국으로 삼아 야율아보기를 대장군 겸 제후인 요왕에 봉한다. 야율아보기가 나중에 쿠데타를 일으켜 애제를 체포하고 양위를 강요했다. 애제가 양위함으로써 대진국은 망했고, 요나라가 새로운 고구리가 되어 대진국의 정치체제를 그대로 답습한다” 고구리는 대진국을 거쳐 요나라 --> 금나라 --> (원나라) --> 청나라로 계속 이어졌던 것이다.
첫댓글 다들 짐작하시겠지만, 위 글에 언급한 사서들은 정치적인 이유로 공개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재작년인가, 요 태종과 청나라 강희제가 고구려 황제들을 추존했다는 사료가 러시아 모처에 소장되어 있다고 모 역사동호회에 연구자 분이 소개하신 적이 있는데, 주변 분들이 이 사실이 퍼지면 중국, 러시아등과 외교문제로 비화해서 러시아 측에서 책을 감출수도 있다, 이런 우려를 하셔서 구체적인 소장처를 지워버린 적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금, 청사를 한국사에 편입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들어봤지만, 요사는 저도 처음이네요. 현재로선 급진적인 이야기지만 위 사서들의 기록이 맞다면 충분히 생각해 볼만한 문제라고 봅니다. '물증이 없으니 인정할 수 없다' 이런 분들은 열린 마음을 가지고 '아, 이런 것도 있구나'하는 정도로 봐주셨으면 합니다.
귀한 자료 감샤합니다 ?
앞으로 자주 좋은 자료및 글 부탁드립니다.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