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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9장 23-31절. 사울이 다메섹에서 도망함
설교
사울은 아나니아를 만나서 안수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 성령님이 강하게 임하게 되었고 사울은 그때 성령 충만을 체험하게 됩니다.
즉, 그는 성령의 세례와 더불어 그는 성령의 충만을 받게 됩니다.
그때 놀랍게도 그 눈을 가리고 있었던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서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 성도들에게도 우리를 막고 있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다.
귀를 막고 눈을 막고 우리의 마음을 막고 주님께 가는 것을 막고 있는 것들이 성령의 놀라운 능력으로 다 떨어져 나가기를 바랍니다.
사울은 음식을 다시 먹게 되었습니다.
건강을 다시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변화 받은 사울은 즉시 각 회당에 돌아다니면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사울 자신이 꿈에도 상상해볼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며칠 전만 해도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23절.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New American Standard Bible: When many days had elapsed, the Jews plotted together to do away with him,
여러 날이 지나매
Ὡς δὲ ἐπληροῦντο ἡμέραι ἱκαναί,
when now having passed days many
‘지나매’(ἐπληροῦντο)는 미완료과거로서(having passed) 지나가고 있는 것을 가리키며, ‘여러 날들이 지나가고 있을 때’란 뜻입니다.
여기서 ‘여러 날’이란 3년간을 가리키는데(갈 1:17-18), 이 기간중 대부분은 아라비아에서 보냈는데, 여기서 아라비아는 다메섹의 변방 지역을 가리킵니다. NIV-SB. Baker)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συνεβουλεύσαντο οἱ Ἰουδαῖοι ἀνελεῖν αὐτόν·
plotted together the Jews to kill him
직역하면,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려고 함께 모의했다’는 뜻입니다.
‘죽이려고’(ἀνελεῖν)는 부정과거 부정사형 동사로서(to kill) 반드시 꼭 죽이려고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공모하더니’(συνεβουλεύσαντο)는 부정과거로서(plotted together) 확실히 공모했다는 뜻이고, 원형(συμβουλεύω)은 ‘함께’(with)라는 접두어(σύν)와 ‘의논’(counsel)이라는 단어(βουλή)가 합쳐서 ‘함께 의논하다’(counsel together)란 뜻입니다.
사울이 3년 후에 다메섹으로 돌아오자, 유대인들의 요구대로 다메섹 통치자 아레다 왕이 사울 체포 명령을 내렸습니다(고후 11:32).
그래서 유대인들은 로마 수비대의 지원을 받아서, 종일 밤과 낮을 불문하고, 다메섹 성문을 지켰습니다. (행 9:24)
다메섹에서 발굴된 로마 화폐에는 아레다 왕이 AD 34-62년 사이에 통치했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1. 사울을 죽이려는 세력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사울은 핍박자를 만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이 핍박자를 만나기 전에 오늘 이 사도행전에는 기록이 되지 않았지만 중요한 한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갈라디아서 1장 17절에 기록이 되어 있는데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난 사울은 먼저 아라비아로 갑니다.
그리고 아라비아에서 3년을 보낸 다음에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옵니다.
다메섹으로 돌아와서 다시 핍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2. 사울에게 있어서는 아라비아로 가 있는 그런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이때 예수를 만난 사건은 그에게 굉장히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엄청난 사건을 재정리하고 확인하는 그런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3. 이러한 시간을 갖기 위해서 사울은 두 가지 충고를 거부했습니다.
첫째는, 혈육과 의논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16절에,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바울에게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바로 그때, 성령님을 통하여 예수님이 내안에 오실 바로 그때, 나는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부모 형제보다 나를 잘 이해하실 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나를 태중에 키우시고 해산의 고통을 통하여 태어나게 하시고 어렸을 때부터 먹이고 재우고 입혀서 이렇게까지 나를 키웠다면 세상에서 나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은 부모님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보통 중요한 일들은 부모님들이나 또 형제들과 의논해서 결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된 입장에서 제일 섭섭한 것은 자식이 자기와 의논하지 않고 무엇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갑자기 어떤 여자를 데려와서 ‘결혼하겠습니다’ 그러면 부모가 얼마나 쇼크를 먹겠습니까?
부모와 의논하지 않고 무슨 사업을 한다든지 공부를 하러 떠난다든지 그랬을 때 부모는 상처를 받습니다.
자기와 의논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사울은 믿음의 도리에 대해서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두번째, 갈라디아서 1장 17절에서, 그는 예루살렘에 있는 먼저 된 사도들과도 의논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충고를 거부한 것입니다
영적인 일이라면 혈육은 그만둔다고 할지라도 그래도 초대교회를 일으켰던 예루살렘에 있는 열 두 사도들과 의논하고 충고를 받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이것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사울이 결코 교만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 이런 사람들은 교만하거나 고집이 세거나 자기의 개성이 강할 때 이렇게 합니다만, 사울의 경우는 자신만만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교만해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그는 자기의 생애에 예수 그리스도가 개입한 이 엄청난 사건은 그가 직접 시간을 드려서 하나님을 만나서 그 문제를 확인하고 결정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4. 문제는 사울이 아라비아로 갔는데 왜 갔으며 그곳에 가서 무엇을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거기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연대를 보면 아라비아로 가 있었던 기간이 3년 정도 된다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1:17-18.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짧은 세월이 아닙니다.
그 기간 동안에 그가 무엇을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사울이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뼈에 사무치도록 유대교에 심취해왔었는데, 이제는 기독교로 신학을 재정립하는 데는 이만큼 시간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원수로 생각해왔던 사람이 갑자기 내 아버지라고 밝혀졌다면, 이 생각을 정리하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5. 사울이 정말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신하기 위하여 이런 시간들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대부분 우리들의 경우는 은혜를 받으면 무엇인가 행동하려고 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몹시 위험한 일입니다.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준비된 사람이 되지 않고 일하면 일한 만큼 손해를 봅니다.
왜냐하면 처음으로 돌아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준비입니다.
행동보다 더 중요한 것은 준비입니다.
준비가 얼마나 되었느냐에 따라서 그 열매가 그만큼 맺어지기 때문입니다.
주인의 뜻을 모르고 무슨 일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주인의 뜻을 모르고 열심히 한들 일은 많이 했을지라도 주인의 뜻과 맞지 아니하다면, 그것은 오히려 주인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부름을 받아 사명을 받은 사람들은 선교지나 사역자로 나가기 전에 최소한 2-3년 정도는 이런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23절에 ‘여러 날’이라고 하는 말은 계산할 수 없는 어떤 날들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1장 18절 말씀대로 3년이 지나서 바울이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왔을 때 사울을 죽이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24절.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New American Standard Bible: but their plot became known to Saul. They were also watching the gates day and night so that they might put him to death;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ἐγνώσθη δὲ τῷ Σαύλῳ ἡ ἐπιβουλὴ αὐτῶν.
became known but to the Saul the plot of them
직역하면 ‘그러나 그들의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졌다’는 뜻입니다.
‘알려지니라’(ἐγνώσθη)는 부정과거 수동태로서(became known) 알려진 과거의 확실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παρετηροῦντο δὲ καὶ τὰς πύλας ἡμέρας τε καὶ νυκτὸς
They were closely watching now also the gates day both and night
직역하면 ‘그들이 밤과 낮으로 성문들을 굳게 지키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지키거늘’(παρετηροῦντο)은 미완료 과거로서(They were closely watching) 계속 굳게 지키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이 사건은 고린도후서 11장 32절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ὅπως αὐτὸν ἀνέλωσιν·
so that him they might kill
‘죽이려고’(ἀνέλωσιν)는 부정과거 가정법 동사로서(they might kill) 반드시 죽이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밤낮으로 사울을 잡기 위해서 성문을 지켰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분명히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나고 변한 후 며칠 후에 된 일은 아닙니다.
상당히 많은 시간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의 제자들과 사울은 결국 성문으로 나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광주리를 타고 성에서 탈출했다는 이야기가 25절에 나타납니다.
25절.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내리니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but his disciples took him by night and let him down through an opening in the wall, lowering him in a large basket.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데려다가)
λαβόντες δὲ οἱ μαθηταὶ αὐτοῦ νυκτὸς
having taken [him] but the disciples of him by night
직역하면 ‘그의 제자들이 밤에 데려다가’란 뜻입니다.
‘데려다가’(λαβόντες)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taken) 밤중에 아주 조심스럽게 데려간 과거의 확실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믿은 후로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이미 전도하여 제자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성벽에서 (달아)내리니라.
διὰ τοῦ τείχους καθῆκαν αὐτὸν
through the wall they let down him
직역하면 ‘성벽을 통해 그들이 그를 내려가게 했다’는 뜻입니다.
‘내리니라’(καθῆκαν)은 부정과거로서(they let down) 굳센 의지로 단호하게 달아 내리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33절에는 성벽에 있는 들창문을 통해서 광주리를 달아 내렸다고 했습니다.
오늘날도 그 지역에서는 창문을 통해서 광주리로 사람이나 물건을 달아 내리는 전통이 있다고 합니다. Baker.
광주리에 담아 (내려서)
χαλάσαντες ἐν σπυρίδι.
having lowered [him] in basket
‘내려서’( χαλάσαντες)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lowered) 조심스럽게 조금씩 내려가게 하는 모습을 가리키고, 원형(χαλάω)은 ‘느슨하게 하다, 낮추다, 내리다’( slacken, loosen, let down, lower)는 뜻입니다.
다메섹 그리스도인들이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서 다메섹 성벽으로 내려서 탈출시킨 사실은 고린도후서 11장 33절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바울(사울)은 이 다메섹 탈출 사건을 다른 어떤 사건들 즉 돌에 맞아 죽었다가 살아난 사건(행 14:19)이나 바다에서 파선한 사건(고후 11:25) 보다도 가장 충격적인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후 11:30-3)
1. 광주리에 사울을 넣고 야음을 이용해서 탈출시키는 이런 사건입니다.
여기에 보면 사울의 제자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사울이 언제 제자를 만들었겠습니까?
이것을 보면 꽤 많은 시간이 지났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더구나 고린도후서 11장 32절에 보면 사울을 죽이려고 공모했던 그 사람이 누군가 하면 다메섹의 왕 아레다의 방백들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다메섹을 통치하는 통치자들에게 뇌물을 바쳐서, 정치적으로 경찰력을 동원하여 계획적으로 바울을 체포해서 죽이려고 했다는 뜻입니다.
만약에 사울이 준비되지 않은 채 이런 핍박을 받았다면 그는 자기의 받은 구원을 의심했을 것입니다.
2.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고 갈등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분명히 성령 체험을 했고 예수를 믿었는데, 예수 믿으면 만사가 다 잘되어야 할 텐데 고난이 온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사업이 잘되어야 할 텐데, 사업이 어려워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건강해야 될 텐데, 병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자기가 믿은 예수에 대해서 회의가 생기고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내가 받은 것이 정말 구원인가?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인가? 이런 시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믿고 어떻게 예수님이 일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누구든지 처음 단계에는 이런 시험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3. 선교지란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바울이 있었던 선교지는 더 위험했고, 지금 있는 선교지는 덜 위험한 것이 아닙니다.
선교지란 주님이 오실 때까지 똑 같습니다.
강팍하고 우상이 있고, 물질적 어려움이 있고, 죽음이 있고, 두려움이 있고, 고통이 있는 이해될 수 없는 그런 곳이 바로 선교지입니다.
이처럼 선교지가 절대 편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렇습니다.
성령의 역사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선교지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위기와 위험도 변화된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초대교회 사도행전에 있었던 그 모든 일들이 오늘 우리 시대에도 똑같이 공존한다는 것입니다.
4. 사울은 그 고난의 시작을 겪게 됩니다.
첫 번째 고난의 시작이 성벽을 넘는 고난입니다.
그는 다메섹에 있을 수가 없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예루살렘에 돌아오니까 또 하나의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메섹에서의 고난은 예수 믿지 않는 불신 헬라파 유대인들 같은 고난이 있었다면, 예루살렘에는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을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6절.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New American Standard Bible: When he came to Jerusalem, he was trying to associate with the disciples; but they were all afraid of him, not believing that he was a disciple.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Παραγενόμενος δὲ εἰς Ἱερουσαλὴμ
Having arrived then to Jerusalem
직역하면 ‘그 후로 예루살렘에 도착하여’란 뜻입니다.
‘가서’(Παραγενόμενος)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arrived) 예루살렘에 도착한 분명한 과거의 사실을 가리킵니다.
갈라디아서 1장 19절에 의하면, 베드로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외에는 다른 사도들도 사울이 무서워서 다 도망갔는데, 이 때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사도는 아니었으나, 예루살렘 교회에서 사도들 못지 않게 지도적인 위치에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야고보는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대로, 최초 예루살렘 총회에서 의장직을 맡아 사회를 진행했습니다(행 15:13-21).
이때 사울은 예루살렘에 가서 15일 동안 체류했습니다(갈 1:18).
그리고 이때 예루살렘 방문에서 사울은 최고의 지도자인 베드로만을 만났습니다(갈 2:1).
그러나 이로부터 14년 후에 다시 예루살렘에 방문했을 때, 사울(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 같은 지도자들인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과 동등하게 악수를 하는 이방인 교회의 대표적인 사도로 인정을 받았습니다(갈 2:9).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ἐπείραζεν κολλᾶσθαι τοῖς μαθηταῖς·
he was attempting to join the disciples
직역하면 ‘제자들을 사귀고자 계속 시도했다’는 뜻이니다.
‘사귀고자’(κολλᾶσθαι)는 부정사형 동사이고(to join) 원형(κολλάω)은 ‘하나가 되려고 하다, 가까이 하다, 달라붙다, 친밀히 교제하려고 하다’( glue, unite, cleave, adhere, join myself closely, cleave, adhere), keep company with, friendly intercourse)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도했다’(ἐπείραζεν)은 미완료 과거로서(he was attempting) 계속 반복적으로 시도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pictures the repeated attempts)
다 두려워하여
καὶ πάντες ἐφοβοῦντο αὐτόν,
and all were afraid of him
직역하면 ‘모두 다 그를 계속 두려워했다’는 뜻입니다.
‘두려워하여’(ἐφοβοῦντο)는 미완료 과거로서(were afraid of) 계속 두려워하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μὴ πιστεύοντες ὅτι ἐστὶν μαθητής.
not believing that he is disciple
직역하면 ‘그가 제자인 것을 믿지 않으면서’란 뜻입니다.
‘믿지’(πιστεύοντες)는 현재분사로서(believing) 계속 믿지 않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뒤의 동사(ἐστὶν)는 현재형입니다(he is).
이때는 사도들 외에는 다 유대지방과 사마리아와 다른 모든 지역으로 도망가고 없었습니다(행 8:1).
1. 사울을 만나는 예루살렘 성도들의 얼굴을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거리를 두는 교제, 마음을 두지 않는 교제였을 것입니다.
언제 저 사울이란 인간이 변해서 우리 사도들과 제자들을 다 잡아가지는 않을까?
전에 스데반을 죽이고, 예루살렘 성도들을 잡아 가두고, 때리고, 재산을 몰수하고, 해외로 도피하게 만들었던 저 인간이 언제 다시 늑대로 돌변하지는 않을까?
쉽게 믿을 수 없고, 또 과거에 사울에게 여러 가지 가정적으로 피해를 당한 성도들이 쉽게 사울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2. 그런데 이때 굉장히 고마운 사람이 하나 나타납니다.
바로 바나바입니다.
27절.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But Barnabas took hold of him and brought him to the apostles and described to them how he had seen the Lord on the road, and that He had talked to him, and how at Damascus he had spoken out boldly in the name of Jesus.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Βαρνάβας δὲ ἐπιλαβόμενος αὐτὸν, ἤγαγεν πρὸς τοὺς ἀποστόλους,
Barnabas but having taken him, brought [him] to the apostles
직역하면 ‘그러나 바나바가 그를 데리고서, 사도들에게 갔다’는 뜻입니다.
‘데리고’(ἐπιλαβόμενος)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taken) 단호한 의지를 가지고 데리고 간 것을 가리킵니다.
‘가서’(ἤγαγεν)는 부정과거로서(brought) 굳센 의지를 가지고 데리고 간 확실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이 바나바는 4장 36절에서 구브로에 있는 밭을 팔아서 예루살렘 교회에 기증한 대단히 훌륭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바나바가 초기에 구브로에서 밭을 가지고 농사하고 있을 때, 사울도 초기에 천막 장사를 하면서, 바나바와 아는 사이였을 것입니다. Baker
그런데 바나바는 자기 누나 마리아(마가의 어머니)를 통해서 예수님을 믿었을 것이고, 예수님의 승천과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에 바나바는 구브로의 밭을 팔아 예루살렘 교회에 공동기금으로 헌금하고,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전에 알고 지내던 사울의 다메섹 회심 사건을 듣게 되었고, 그 진정성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나바가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사울을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에게 데리고 가서 소개해주었습니다.
골로새서 4장 10절에는 <마가가 바나바의 생질>이라고 했습니다.
즉 바나바는 마가의 외삼촌이었습니다.
그리고 마가는 마가의 다락방으로 유명한 당시 예루살렘 교회가 마가의 집을 교회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이 마가의 어머니는 마리아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로 집을 제공한 마리아의 남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바나바가 구브로 섬에 있는 밭을 팔아서 예루살렘 교회에 바쳤습니다.
이 바나바는 나중에 안디옥 교회의 첫 목회자였고 바울을 선교사로 발탁한 인물입니다. (행 11:25-26)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전하니라
καὶ διηγήσατο αὐτοῖς, πῶς ἐν τῇ ὁδῷ εἶδεν τὸν Κύριον
and he related to them, how on the road he had seen the Lord
직역하면 ‘그가 길에서 주를 어떻게 본 것을 그가 그들에게 자세히 말했다’는 뜻입니다.
‘보았는지’(εἶδεν)는 부정과거로서(he had seen) 분명하고 확실하게 본 사실을 가리킵니다.
‘전하니라’(διηγήσατο)는 부정과거로서(he related) 분명히 말한 것을 가리키고, 원형(διηγέομαι)는 ‘완전히 말하다, 자세히 말하다’(relate fully, describe, narrate in full)는 뜻입니다.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καὶ ὅτι ἐλάλησεν αὐτῷ,
and that He had spoken to him
직역하면 ‘그분이 그에게 말씀했다는 것을’이란 뜻입니다.
‘말씀하신’(ἐλάλησεν)은 부정과거로서(He had spoken) 주님이 과거에 사울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신 확실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καὶ πῶς ἐν Δαμασκῷ ἐπαρρησιάσατο ἐν τῷ ὀνόματι Ἰησοῦ.
and how in Damascus he had spoken boldly in the name of Jesus
‘담대히 말하였는지’(ἐπαρρησιάσατο)는 부정과거로서(he had spoken boldly) 과거에 매우 담대히 말한 사실을 가리키고, 원형(παρρησιάζομαι)은 ‘자유롭고 공개적으로 담대히 말하다, 확신하다’( speak freely, openly, boldly; am confident)란 뜻입니다.
1. 사울에게 있어서 바나바가 얼마나 고마운 사람이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의심합니다.
거리를 두고 자기를 관망하고 있었을 때 이 바나바라는 사람이 변호해주고, 보호해주고, 화해자의 역할을 해주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참 따뜻한 사람입니다.
2. 그 사람에게는 두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영적인 통찰력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못 보았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보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영적인 신뢰가 생겼습니다.
사울(바울)의 회심이나 그의 체험이 사실이고 진실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먼저 알았던 것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의심하는 것은 너무 속아 보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잘해 주었다가 돈 떼이고, 잘해 주었다가 배신을 당하고, 잘해 주었다가 큰 봉변을 당하는 일을 너무나 많이 겪었기 때문에, 이제 사람을 만나는 것이 두렵고 사람을 믿는 것이 굉장히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이런 영적인 통찰력이 참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3. 또 하나, 바나바에게서 발견하는 것은 화해자의 모습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옳은 줄 알지만 손해 볼 경우에는 행동을 못합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손해 보지 않을 안전지대를 다니면서 예수를 믿습니다.
자기 시간을 빼앗기지 않을 것, 자기의 사생활에 간섭받지 않을 것, 경제적으로 손해 보지 않을 것, 그러나 약간의 이득이 있을 수 있는 것,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것, 그런 벨트라인을 쫓아다니면서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정말 당신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인가는 얼마나 화해가 되어 있는가로 결정이 될 수 있습니다.
바나바는 그런 오해가 있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뛰어들어서 사울을 변호해주었습니다.
4. 우리 교회에 이런 분들이 많이 생기기를 바랍니다.
교회에 어떤 사람이 많이 필요합니까?
사울 같은 사람이 아니라, 바나바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는 큰일을 안 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화해자입니다.
그는 사람을 격려하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사람을 상담하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그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28절.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nd he was with them, moving about freely in Jerusalem, speaking out boldly in the name of the Lord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καὶ ἦν μετ’ αὐτῶν, εἰσπορευόμενος καὶ ἐκπορευόμενος εἰς Ἱερουσαλήμ,
And he was being with them, coming in and going out in Jerusalem
직역하면 ‘예루살렘에 들어가고 나오면서, 그가 그들과 함께 계속 있었다’는 뜻입니다.
‘있어’(ἦν)는 미완료 과서로서(he was being) 계속 함께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들어가고’(εἰσπορευόμενος)와 ‘나오면서’(ἐκπορευόμενος)는 둘 다 현재분사로서(coming in, going out) 계속 들락날락 출입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29절)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παρρησιαζόμενος ἐν τῷ ὀνόματι τοῦ Κυρίου,
speaking boldly in the name of the Lord
직역하면 ‘주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면서’란 뜻입니다.
이 소절이 원문에는 28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한글 성경에는 29절에 번역되어 있습니다.
‘담대히 말하고’(παρρησιαζόμενος)는 현재분사로서(speaking boldly) 담대히 말하면서 다니는 것을 가리키고, 원형(παρρησιάζομαι)은 ‘자유롭고 공개적으로 담대히 말하다, 확신하다’( speak freely, openly, boldly; am confident)란 뜻입니다.
29절.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nd he was talking and arguing with the Hellenistic Jews; but they were attempting to put him to death.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ἐλάλει τε καὶ συνεζήτει πρὸς τοὺς Ἑλληνιστάς·
He was speaking also and was debating with the Hellenists
직역하면 ‘그가 헬라파와 계속 말하고 계속 변론했다’는 뜻입니다.
‘말하며’(ἐλάλει)는 미완료과거로서(He was speaking) 계속 말하는 모습을 가리키고, ‘변론하니’(συνεζήτει)도 미완료 과거로서(was debating) 계속 변론하는 모습을 가리키는데, 원형(συζητέω)은 ‘논의하다, 토론하다, 변론하다’(examine together, discuss, dispute)는 뜻입니다.
이전에 사울은 그리스도에 대항하여 변론했는데, 이제는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강하게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이 헬라파 사람들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이었는데, 원래 사울도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난 헬라파 유대인으로서 산헤드린 공회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이 헬라파 유대인들과 변론하다가 결국 죽임을 당했는데, 그 때 산헤드린 공회원인 사울이 스데반을 죽이는데 책임자 노릇을 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믿은 사울은 옛날의 스데반처럼 지금 예루살렘에서 헬라파 유대인들과 변론하면서 예수님의 이름을 증언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헬라파 유대인들이 스데반을 죽인 것처럼 사울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οἱ δὲ ἐπεχείρουν ἀνελεῖν αὐτόν.
the but they were seeking to kill him
직역하면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계속 찾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죽이려고’(ἀνελεῖν)은 부정과거 부정사형 동사로서(to kill) 반드시 죽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힘쓰거늘’(ἐπεχείρουν)은 미완료 과거로서(they were seeking) 계속 힘쓰고 있는 것을 가리키고, 원형(ἐπιχειρέω)은 ‘손대다, 시도하다’(put one's hand to, attempt)는 뜻입니다.
이처럼 헬라파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사도행전 22장 17-21절 말씀대로 사울이 기도하는 중에 예수님께서 사울에게 예루살렘을 떠나라고 하셔서, 사울은 주님 말씀대로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1. 사울은 바나바의 도움으로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그런 축복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군가 격려하고 인정해주고 도와줄 때, 꽃을 피우게 되는 것입니다.
사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2. 그러나 이렇게 복음을 증거할 때마다 반대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위해서 살려고 할 때, 핍박이 온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헬라파 유대인>들이 사울과 변론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서 볼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바로 헬라파 유대인과 변론했던 사람이 <스데반>이었습니다.
스데반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 그들과 논쟁했던 사람이 헬라파 유대인이었고, 그 헬라파 유대인들은 결국 복음을 듣다가 스데반을 죽이려고 했고, 결국 그를 끌어다가 돌로 쳐 죽였던 것입니다.
<사울>은 바로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그 자리에 책임자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히 여겼던 사람이 사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놀랍게도 사울이 스데반의 자리에 들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스데반처럼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말을 들었던 사람들은 스데반을 죽이려 했던 것처럼 사울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29절의 내용입니다.
사울이 29절에서 헬라파 유대인과 변론했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사도행전 6장 9절에서 스데반이 어떤 자들(헬라파 유대인들)과 변론했다고 하는 말과 똑같은 단어인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오묘합니다.
사울이 그 자리에 설 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여러분이 복음 증거자가 될 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오묘한 것입니다.
결국 사울은 이 핍박 속에서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서 몸을 피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가 살았던 옛 고향 다소로 돌아오게 됩니다.
30절.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But when the brethren learned of it, they brought him down to Caesarea and sent him away to Tarsus.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ἐπιγνόντες δὲ, οἱ ἀδελφοὶ κατήγαγον αὐτὸν εἰς Καισάριαν
Having known [it] but, the brothers brought down him to Caesarea
직역하면 ‘형제들이 알고서 그를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갔다’는 뜻입니다.
‘알고’(ἐπιγνόντες)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known) 확실하게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을 가리킵니다.
‘데리고 내려가서’(κατήγαγον)는 부정과거로서(brought down) 단호하게 얼른 데리고 내려가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가이사랴’는 헤롯 대왕이 건설한 곳이고(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 15권, 9:6), 뛰어난 항구 도시입니다.
이곳은 로마 총독(proculator)이 6천 명의 군단을 거느리고 주둔한 곳이었습니다.
바울(사울)이 2차 전도 여행을 마칠 때 가이사랴에 들렸고(행 18;22), 3차 전도 여행 때 예루살렘에서 체포되기 전에 가리사랴에 들려서 빌립 집사의 집에도 들렸고, 가이사랴에 있는 로마 총독의 재판정에서 벨릭스 총독과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 왕 앞에서 2년 이상 재판을 받았습니다.( 행 24-26장).
다소로 보내니라
καὶ ἐξαπέστειλαν αὐτὸν εἰς Ταρσόν.
and they sent away him to Tarsus.
직역하면 ‘그들이 그를 다소로 보냈다’는 뜻입니다.
‘보내니라’(ἐξαπέστειλαν)는 부정과거로서(they sent away) 신속하고 확실하게 보낸 사실을 가리킵니다.
이 ‘다소’성은 앗수르 왕 산헤립(왕하 19장, 대하 32장, 사 37장)이 건설했다고 하며, 로마 시대에는 길리기아 지방의 수도였으며, 당시에 다소성은 아태네나 알렉산드리아보다도 더 철학과 교육이 뛰어난 세계 최고의 교육 도시였다고 합니다. Baker
31절.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So the church throughout all Judea and Galilee and Samaria enjoyed peace, being built up; and going on in the fear of the Lord and in the comfort of the Holy Spirit, it continued to increase.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Ἡ μὲν οὖν ἐκκλησία καθ’ ὅλης τῆς Ἰουδαίας καὶ Γαλιλαίας καὶ Σαμαρίας, εἶχεν εἰρήνην
the indeed then church throughout all Judea and Galilee and Samaria, had peace
‘평안하여’(εἶχεν εἰρήνην)는 직역하면 ‘평안을 계속 가지고 있었다’(had peace)는 뜻이고, 동사(εἶχεν)는 미완료 과거형으로서(had) 계속 가지고 있는 모습, 즉 계속 평안한 모습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교회’(ἐκκλησία)가 단수로 표시된 것(church)은 한 지역 교회를 가리키지 않고, 유대와 사마리아와 갈릴리를 포함한 전지역 교회로서, 예수님의 몸된 교회를 가리킵니다.
든든히 서 가고
οἰκοδομουμένη
being edified
‘든든히 서 가고’(οἰκοδομουμένη)는 현재분사로서(being edified ) 계속 든든히 서 가고 있는 모습을 가리키고, 원형(οἰκοδομέω)은 ‘집을 짓다, 교화하다, 용기를 주다’( build a house, edify, encourage)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καὶ πορευομένη τῷ φόβῳ τοῦ Κυρίου, καὶ τῇ παρακλήσει τοῦ Ἁγίου Πνεύματος
and going on in the fear of the Lord, and in the comfort of the Holy Spirit
‘진행하여’(πορευομένη)는 현재분사로서(going on) 계속 진행하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사도행전 전체에는 ‘성령님’의 사역이 강조되어 있습니다(행 13:2).
그래서 사도행전을 ‘성령 행전’(the Acts of the Holy Spirit)이라고도 합니다.
수가 더 많아지니라.
ἐπληθύνετο.
they were multiplied
직역하면 ‘그들이 계속 번성했다’는 뜻인데, 한글 번역은 좋은 번역입니다.
이 동사(ἐπληθύνετο)는 미완료 과거 수동태로서(they were multiplied) 계속 번성해져가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1. 다소에서 출생한 사울은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가서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율법 교육을 받게 됩니다.
그는 다소에서 헬레니즘(Hellenism)을 경험했고, 예루살렘에서 유다이즘(Judaism)을 경험했고, 로마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러자 그의 인생이 180도 변했습니다.
그는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 후로 그는 정말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기 위하여 아라비아로 3년간 가 있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왔습니다.
다메섹에서 핍박을 피해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헬라파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하자 그가 태어났던 고향 다소로 다시 돌아갑니다.
그리고 나중에 보게 되겠지만, 갈라디아 2장 1절 말씀대로 다소에서 13년간 있었습니다.
2. 우리는 가끔 우리의 삶의 거처를 이동하게 됩니다.
어떤 때는 서울에 살다가 경상도로 갔다가 전라도로 갔다가 이민을 가게도 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선교의 깊은 비밀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그냥 왔다 갔다만 합니다.
왔다 갔다 지겹다 무슨 뜻인지 모르고 그냥 왔다 갔다만 합니다.
그러나 선교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 성령을 받은 사람들,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아 하나님이 나를 이곳에 왜 보내 주시는 것일까?
여기에 하나님의 놀랍고 오묘한 신비가 나를 기다리고 있구나.
여기에 무슨 일이 생길까?
이런 기대와 흥분과 감격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아나니아를 통해서 성령 세례와 물세레를 받은 사울이, 가는 곳마다 핍박 속에서도 복음을 전한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들도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보내신 섭리가 있는 줄 아시고,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하나님 말씀을 연구해서,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