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산의 나이
이삭빛 시인
신이 나를 넘어뜨린 것은 내 길을 막으려 함이 아니라
길바닥에 낮은 몸으로 엎드린 작은 꽃을 보게 함이다
내가 거대한 강인 줄 알고 바다만을 갈구하며 요동칠 때
한 방울 이슬이 된 내 몸 안으로 온 우주가 들어와 앉는다
이제는 살아 있는 웃음소리가 아니어도 좋다
침묵마저 깊은 노래가 되는 나이
말문이 막힌 눈동자를 가만히 마주 보는 일
영혼이 닦아내는 가장 투명한 거울이 되어
부서진 가슴의 틈 사이로 당신의 발소리를 듣는다
사람들은 더 높이 올라야만 빛을 만난다 말하지만
나는 가장 깊은 우물 바닥에서 가장 눈부신 별을 본다
어둠은 별을 가리는 장막이 아니라
별을 별답게 키워내는 지극한 사랑의 품
우물 속 별빛을 이정표 삼아 나에게로 돌아오는 길
상처가 꽃이 되는 법을 배워온 기나긴 외출이 끝났다
오십 년 세월의 능선을 넘어
비로소 시작되는 산의 축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새로운 여행을 떠난다.
📝 시평: 낮아짐으로써 비로소 깊어진 영혼의 노래
— 이삭빛의 <50대, 산의 나이>를 읽고
시평: 윤정 시인
이삭빛 시인의 <50대, 산의 나이>는 인생의 하프타임을 지나는 이들이 마주하는 고독과 상처를 새로운 탄생의 동력으로 치환하는 따뜻한 성찰을 보여준다. 이 시는 단순히 나이 듦에 대한 위로를 넘어, 존재의 본질을 회복해가는 과정을 세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1. 낮은 곳에서 발견한 무한(無限)
도입부에서 '넘어짐'은 좌절이 아닌 '작은 꽃을 보는 시선의 전환'으로 다가온다. 거대한 강이 되고자 요동치던 젊은 날의 욕망을 내려놓고 스스로 '한 방울 이슬'이 되었을 때, 오히려 그 작은 몸 안으로 온 우주가 들어온다는 대목은 비움으로써 채워지는 역설의 진리를 전한다. 50대는 비로소 나를 작게 만듦으로써 세상을 크게 품는 나이임을 나직하게 들려준다.
2. 침묵 속에 고이는 맑은 울림
중반부에서 묘사된 '침묵의 노래'는 소음 가득한 세상을 살아온 중년에게 바치는 위로다. 말문이 막힌 눈동자를 마주하는 행위는 곧 타자와 자아에 대한 깊은 연민이다.
특히 '부서진 가슴의 틈'을 통해 당신의 발소리를 듣는다는 대목은, 상처를 통해 영혼의 귀가 열리는 신비로운 성숙의 경지를 보여준다.
3. 어둠이 품은 지극한 사랑
상승만이 빛을 만나는 길이라 믿는 세상의 통념을 뒤집고, 시인은 '가장 깊은 우물 바닥'에서 별을 발견한다. 어둠은 별을 가두는 장막이 아니라 '별을 별답게 키워내는 지극한 사랑의 품'으로 재해석한 대목은 이 시의 백미다.
이는 지나온 고통의 시간들이 실은 나를 온전한 빛으로 빚어내기 위한 우주적인 배려였음을 깨닫는 고백이다.
4. 외출의 끝, 나에게로 돌아오는 여행
마지막 부분에서 오십 년의 세월은 '기나긴 외출'로 갈무리된다. 외부 세계를 헤매던 마음이 비로소 본연의 나에게로 돌아오는 '귀가'의 시간이다. 시인은 이를 '산의 축제'이자 '새로운 여행'이라 부른다. 상처가 꽃이 되는 법을 배운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고요하고도 찬란한 출발이다.
이 시는 50세라는 나이가 가진 무게를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축제의 리듬으로 바꾸어 놓는다. 인생의 능선을 넘어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단단하고도 따뜻한 시선이 독자의 가슴에 깊은 여운을 남긴다.
그림 채수억 작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