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시대의 학자 문익점은 1363년 중국(원나라)에 갔다가 1366년에 돌아왔다. 고국으로 돌아오던 길에 그는 길가의 밭에 하얀 눈처럼 피어 있는 꽃을 보고 놀랐다. 9월이었다.
"마치 함박눈이 내린 듯한 저 꽃은 무엇일꼬? 몇 송이 꺾어 갈까?"
문익점이 그 꽃을 꺾으려 할 때였다. 한 노인이 달려오면서 소리쳤다.
"나라에서 법으로 금하고 있는 짓을 하는 당신은 누구요?"
"아니, 이 꽃이 뭔데 법으로까지 꺾는 것을 금하고 있단 말입니까?"
노인은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익점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노인을 붙들고 사정했다. 노인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조용히 일러 주었다.
"이 꽃은 천을 만드는 목화라오. 그래서 나라에서는 이것을 나라 밖으로 내가는 것을 엄한 법으로 막고 있는 것이오."
문익점은 번개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우리 나라에는 옷감으로 명주나 갈포, 모피밖에 없는데 이 것을 들여가면 백성들이 얼마나 유용하게 쓸 수 있을까?'
문익점은 노인에게 다시 사정하여 그 씨앗 세 개를 얻었다. 얻은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 씨앗을 고국으로 가져갈 길이 막막했다. 허술하게 가져가다가는 문익점 뿐만 아니라 그 노인까지 큰 벌을 받게 될 것이었다. 그는 궁리 끝에 붓 뚜껑 속에 목화 씨앗을 넣었다. 그래서 무사히 국경을 넘었다. 이렇게 들여온 목화씨는 풍토가 맞지 않아서인지 겨우 한 알만이 싹을 틔웠다. 한 알의 씨앗이 결실을 맺어 목화가 퍼지게 되었고, 원나라 중홍원의 도움으로 목화씨를 가려내는 일과 솜을 타 는 일 등을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문익점의 손자 문래는, 솜으로 실을 만드는 기계인 물레를 만들었고, 문영은 옷감 짜는 기술인 직조법을 연구해냈다.
우리나라는 14세기고려 공민왕 때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붓뚜껑에 감춰 들여온 목화씨가 시초이다. 문익점과 장인 정천익이 나누어 심었는데 장인이 심은 1개가 싹이나 재배에 성공하고 원나라 승려 홍원에게 씨앗과 솜을 분리하는 방법을 배우고 장손은 경북 의성을 다스릴 목화시배 후 토질이 맞음을 알고 의성을 목화대량산지로 만들어 경제를 발전시켰다.
손자 문래는 솜으로 실을 만드는 물레를 만들고, 손자 문영은 베를 짜는 방법을 연구하여 지금의 물레는 문래에서 온 말이며 무명배란 말은 문영배가 변한 말이다. 우리나라 의복사의 일대 혁신을 일으켰던 면(綿) 생산은 목화 씨앗부터 직조법의 발명과 보급에 이르기까지까지 오로지 문익점 일가의 공로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