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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구원과 양심의 자유
信天함석헌
不在其位 不謀其政
공자는 부재기위(不在其位)하면 불모기정(不謀其政)이라, 그 자리에 있지 않으면 그 일 이야기 아니하는 법이다 했다. 옳은 말이다. 자리는 일에서 오는 것인데 제 일에 충실한다면 제 일 아닌 일에 입을 내밀 여유가 있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세계는 뉘 세계인가? 씨알의 세계다. 씨알이 무슨 씨알인가? 인류의 씨알이요 생명의 씨알이다. 오늘날 세계를 걱정하고 도리를 걱정할 사람은 씨알,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오직 타고난 인간성만을 가지고 있는 씨알 밖에는 없다. 그들은 세계가 자기네들 안에 있고 자기네가 세계 안에 있음을 몸으로 알기 때문에 스스로 세계의 시민, 우주의 씨알인 것을 잘 알고 있어, 누가 시키기 전에 세계의 운명을 걱정하고 문명의 귀추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온 세계의 씨알이, 인간만 아니라 실로 생명 전체가 인제는 운명공동(運命共同)의 한 유기체(有機體)인 것을 느끼고 있다.
그런데 정치가란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철저한 집단주의자들이다. 그러기 때문에 세계 전체 문제에 성의도 없고, 따라서 그것을 걱정할 자격도 없다. 그들이야말로 부재기위(不在其位)다.
‘위’(位)라는 그 글자가 우선 증명해주지 않는가? 위(位)가 뭔가? 인립(人立)이다. 사람이 일어선 것이다. “불환무위(不患無位)요 환소이립(患所以立)“이란 말이 있다. 자리 없는 것 걱정 말고 무엇으로써 일어서나 그것을 걱정해라. 참말 지위가 뭐냐? 참 사람답게 일어선 것이다. 입(立)이란 글자가 본래 사람이 땅 위에 어엿이 일어선 것을 그린 것이다. 서야만 사람이란 말이다. 그런데 그 입(立) 옆에 인(人)을 더한 것은 위에서 환소이립(患所以立)이라 할 때에 그 소이가 무엇임을 가르쳐 주는 뜻이다. 무엇으로 서느냐? 인간답게 서는 것이다. 그럼 인간답게 선 것이 누구냐? 아무것도 의지한 것이 없이 다만 사람인 자격으로만 서는 씨이야 말로 그것이다. 사람인 자격 말고 다른 무엇을 더 소중한 듯 여겨 그것을 명함에 박아 자랑하는 것은 사람으로 선 것이 아니요 마치 작대기로 받쳐 세운 허수아비같이 면이나 칼이 아니면 못서는 것이니 참의미의 지위를 가지지 못한 사람이다. 재미있지 않은가? 땅(地)에 선 것만이 위(位)다. 제도나 조직이나 종잇장이나 도장 위에 선 것은 정말 지위가 아니다. 그럼 인간 제 자리에도 못 선 사람이 어찌 인간의 일을 의론할 수 있겠나? 그들이 세계문제에 대해 말이 없는 것은 제 일을 잘 알아서 그런 것인가?
히브리서는 환난시대에 나서 고생하는 씨알들을 격려하면서
“우리가 아니고는 저희로(지나간 시대의 모든 의인들) 온전함을 얻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서다”
라고 했다. 즉 세계구원, 역사완성의 책임은 우리게 있단 말이다.
어엿한 태도로 천하대사를 의론해보자!
모든 것을 다 뺏기면 뺏길수록 대지 위 밖에 설 곳이 없는 우리야말로 세계의 씨알이요, 천국의 시민이다.
앓는 세계
세계가 앓고 있다.
유마(維摩)는 중생의 병을 앓았다지만, 우리야말로 세계의 죽을병을 앓아야 한다. 앓는 것이 아는 일이요, 알면 살아날 것이다.
앓음이 앎 아닌가? 지식은 병에서 시작이다. 몸이 아프지 않았다면 나를 몰랐을 것이요, 마음이 아프지 않았다면 양심 있는 줄을 몰랐을 것이다. 인생에 병이 있는 것은 남을 알고 한삶의 님을 알게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세계가 앓으니 그 아픔이 우리게로 올 것밖에 없지 않은가? 가장 연약한 것에 가장 귀한 것이 있다. 우리는 그의 아픔을 앓는다. 우리가 그를 몰음으로 그가 아파했고, 그가 아픔으로 비로소 우리가 그를 알고 우리를 알고 아파하기 시작했다. 그럴 때에 우리가 지혜를 얻었고 그의 병을 우리 몸에 지고 싶어진다.
우리보다 앞서서 세계의 병을 앓았던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어짊으로 그럴 수 있었다. 오늘 우리는 못났으므로 그래야 한다. 그들이 우리에 앞서 앓은 것은 우리로 하여금 앓게 하기 위하여서다. 우리가 큰 소리로 앓으면 우리를 잡아먹으려던 악한 것들이 겁나 물러갈 것이다. 곡성직상간운소(哭聲直上干雲宵)라, 씨알의 부르짖는 소리는 사뭇 하늘을 뚫고 올라간다.
프랑스의 씨알이 통곡했을 때 그들을 재갈 물려 타고 앉았던 도깨비 들이 대서양 밑으로 들어갔고, 러시아 씨알이 몸부림을 했을 때 그들을 승냥이처럼 뜯어먹던 것들이 북빙양(北水洋) 속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그보다 더 악독한 것들이 지구를 나사로 조이고 허공을 독기로 덮고 대양에 독약을 흘러 넣어 생명의 씨를 왼통 없애버리려 하고 있다. 누가 이것을 우주에 외치며 한 삶의 주인에게 호소할 수 있을까?
하늘 닿는 거목들이 있었으되 그들에게 눈과 귀와 입과 심장을 주지 않았고 뭍, 물, 공중에 날고 기고 달리고 호통하는 맹수들이 있었으되. 그들에게 연하고 부드럽고 알아차리는 심정을 주지 않았다. 그리고 다만 인간만이 그것을 가졌다. 또 사람 중에 잘난 것이 있어 그 힘이 코끼리 고래보다 더하고 그 움키는 것이 독수리보다 더하며 그 찢는 것이 사자보다 더하고 그 독한 것이 뱀보다 더하며 그 간교한 것이 박테리아보다 더한 것들이 있으되 그것들이 땅을 차지하게 하지 않고 항상 온유하고 겸손해 말하지 않는 것들이 인류를 대표하게 한 것은 뜻이 있어서 그런 것 아닐까?
세계의 장래 생명의 운명은 생각하는 씨알에게 맡겨진 것이다.
그렇다. 생각하는 것이 씨알이다. 생각밖에 못하는 것이 씨알이요, 생각해야만 씨이다.
사람의 사람된 점은 생각하는데 있는데, 생각은 항상 못났어야 할 수 있다. 생각하던 사람도 스스로 잘났거나 하는 의식에 빠지면 생각하기를 그치고, 또 생각해도 그것은 참 생각이 아니요 거짓된 망녕된 생각, 곧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생각이 돼버린다. 생각은 못난 자리에 있어야 할 수 있다. 인간의 인간됨은 스스로 못났다는 의식, 그래서 늘 알아차리고, 적응할 준비 태세에 있고, 가르쳐주면 들을 수 있는 심정에 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 생각했을 때 사람이 인간성조차 잃고 타락했다는 이야기는 사람의 생각하는 태도가 잘못됐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를 경고해주는 말이다. 인류가 생물 중 어느 종족보다도 더 준비기간 즉 교육받는 기간이 긴 것은 이 때문이다. 항상 못난 줄 알아야 인간적일 수 있다. 토론보다도 사실을 보라, 사람이 스스로 잘났다 생각할 때는 사람에서 멀어지고 발달을 그친다. 가장 본질이 된다는 도덕에서조차 스스로 잘났다 할 때 정반대의 악마의 지경으로 떨어진다.
그러기 때문에 연약한 씨알만이 인간의 본 면목을 가질 수 있고 따라서 인간 이상의 지경을 알 수 있다. 예수가 이것을 잘나고 지혜 있는 자에게는 감추시고, 어리석고 가난한 자에게 주신 것은 아버지 뜻입니다 하고 감사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가 복으로 곱은 것들을 보라. 다 잘난 것이 아니요 못난 꼴들이었다. 예수야말로 씨알중의 씨알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모든 씨알을 부를 수 있다. 그야말로 참 임금이다. 모순이지만 진리다. 소위 세상에 임금으로 자처하는 것들이야 말로 인간심정 잃은 인간 이하의 물건들이다. 그러므로 씨알이 가려 하지 않는다. 가려 하지 않는 줄 알기 때문에 인간적이 아닌 짐승적이요 기계적인 방법으로 묶으려 하지만, 그럴수록 씨알은 거기서 떨어지고 남는 것은 짐승만도 못한 것들뿐이다. 그것으로 어떻게 세상을 건질 수 있겠는가?
세계평화 문제
세계를 건지려면 세계의 병이 어디든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의학의 발달은 진단의 발달이다.
앓음이 앎이라고 했지만 또 반대로 알아야 앓음이다. 병이 있어도 있는 줄 모르면, 아파할 줄 모르면 고칠 수 없다. 내 병이 어디 들었음을 알 때 비로소 참 아픔을 느낀다. 참 아파함은 나음의 시작이다.
세계의 죽을병이 어디 들었나? 평화에 들었다. 세계가 하나인데 그 통일이 깨졌다. 한몸의 지체끼리가 서로 싸우고 있다. 그것이 세계의 위기다.
물론 어느 시대에도 세계의 완전한 통일이란 없었다. 그러나 세계의 운명이 관계되리만큼 위험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는 세계적인 평화의 틀거리가 서지 않는다면 전인류의 운명이 위태한 것을 아주 몸으로 느끼게 됐다. 마치 병이 잠복기에 있을 때는 병을 안고 다니면서도 죽을 줄 모르고 있었는데, 이제 그 결과 병이 정말 심해지니 이제 비로소 내가 죽게 됐구나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다.
역사는 본래 하나였다. 생명은 첨부터 종족적이었다. 하나의 산 유기체다. 우리 몸이 수없이 많은 세포(고운 씨이라 할까?)가 하나로 모여서 된 것같이 민족도 모여서 된 것이요 세계도 모여서 된 것이다. 모여서 됐다고 하나 먼저 씨이 따로 있어가지고 그것들이 모여서 하나를 이룬 것이 아니라 첨부터 하나다. 전체는 분자의 모인 것이 아니라 전체가 분자로 존재하고 있다. 분자를 모아놓은 이상의 것이다. 그것이 전체 곧 생명의 특성이다. 그래서 무기(無機), 유기(有機)를 갈라서 말한다. 생명 없는 것을 무기라 하고 생명을 유기라 한다. 기계(機械)라는 기(機)자를 쓰지만 사실은 기계 이상의 어떤 신비론 생명의 작용을 말하는 것이다.
세계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영국의 L. P. 작스라는 사람이『살아있는 우주』라는 책을 써서 크게 감동을 준 일이 있지만, 그의 말로 하면 세계대전 같은 그런 참혹한 환란의 근본 원인은 본래 이 우주가 살아 있는 하나의 생명체인데 그것을 잘못 알아 물질인 줄만 알고 업신여겨 마음대로 정복하고 파먹다가 그 우주의 복수를 받아서 그렇게 됐다는 것이다. 세계가 그 말에 감동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인간이 생각하기 시작할 때 맨 먼저 느낀 것은 우주가 살아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 그때의 단순한 마음답게 생령설(生靈說), 물령숭배(物靈崇拜)하는 원시적인 종교가 시작됐다. 그런데 그후 과학이 발달하여 어느 정도 정확히 물질관계를 밝혀낼 수 있게 되자, 그만 지나친 자신을 가지고 우주는 하나의 물질덩어리로서 과학적 방법으로 못 밝힐 것이 없다 생각하게 됐다. 그 결과 세계관, 인생관이 달라지고 종교, 도덕이 그 영향을 입고 그 결과로는 정치하는 사람이 매우 교만해져서 정신이고 신비고 다 무시하고 물질적인 힘의 철학만을 믿게 됐다. 그래서 나온 것이 군국주의, 제국주의요, 생존경쟁 철학이요, 공업주의요, 침략전쟁이요, 식민지주의였다. 그래서 그 결과로 나온 것이 1차, 2차의 세계 전쟁이었다.
세계대전 전까지가 병의 잠복기요 대전이 난 것이 비로소 자각증상(自覺症狀)을 느끼게 된 것인데, 더구나 제 2차 대전에서 핵무기를 씀으로 말미암아 크게 위험을 느끼게 됐다. 그래서 지금 강대국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를 만일 쓴다면 지구 전체를 일곱 번 여덟 번 파괴하고도 남는다는 것을 우리 상식으로 알게 됐다. 그러므로 이것이 죽을병이라는 것이다. 하나됨이냐? 그렇지 않으면 멸망이냐?
그러고 보면 그 병증을 자각하게 된 것은 핵무기로 인해 된 것이지만, 그것은 하나의 계기가 됐을 뿐이지, 그 원인은 본래부터 깊이 들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정치회담이나 무기 감소 혹은 폐지로 해결하려는 것은 마치 문둥병을 고약으로 발라 고치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일이다. 그보다 깊이 인간본성에 뿌리박고 있다.
우리가 세계의 이 위기는 다른 길이 없고 오직 세계 씨의 일어남으로만 면할 수 있다 주장하는 것, 그리고 이것이 어떤 문제보다도 시급 하다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다. 사람을 살리고 만물 위에 세우는 것도 생각이지만 또 사람을 죽이고 짐승 버러지 이하로 떨어뜨리는 것도 생각이다.
내가 잘 아는 친구에 의사가 있었다. 심정도 참 좋은 사람이었다. 어떤 관계로 술을 심히 마시는 버릇이 생겨 마침내 건강이 걱정될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 어떤 가까운 친구가 술을 그만두라고 간곡한 충고를 했다. 그런데 그는 듣고 그것을 다 옳은 말로 인정하면서도 “그거나마 아니 마시면 뭘 하겠소. 그저 그러다가 죽으렵니다” 하고 그냥 계속하다가 그만 아깝게 죽어버렸다.
그가 만일 의사가 아니었더라면 그 말을 들었을는지도 모른다. 다 알면서도 아니 들은 것은 어차피 죽고 말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닐까? 아는 것이 잘도 될 수 있고 잘못도 될 수 있는 원인이 되는 한 실례다.
오늘 정치인들의 심정도 그 의사와 같지 않은가? 지혜는 약하고 욕심은 강하다. 영원에 대한 믿음 없는 것이 근본원인일 것이다. 정치가 뭔가, 현실주의의 기수다. 현실주의적인 인생관이 정신 오염이 된 오늘 정치가 노골적인 권력숭배로 빠져버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완전히 죽었다. 있는 것은 냉혹한 물질의 법칙뿐이다. 그들의 철학은 한마디로 “죽으면 다다”다. 그러니 세계요 생명이요 아끼고 꺼릴 것이 무엇이겠나?
지난해부터 세계에 화해 무드가 시작한 것은 참 고마운 일이다. 우리도 그 영향으로 남북대화(南北對話)가 열렸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러나 그들은 정말 세계평화를 세울까? 믿어지지 않는다. 믿지 않기 위해 아니 믿는 것 아니다. 그 하는 일을 보아서 아직 믿어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의 생각이 달라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생각이 정말 세계구원의 책임을 느끼리만큼 달라졌다면 그 정치의 왕좌에 그냥 있지 못할 것이다. 아픔은 부드러운 마음만이 느낀다. 그렇게 강자의 심리를 가지고 어떻게 세계의 병, 생명의 병, 하나님의 아픔을 느낄 수 있을까? 그 타협하는 태도는 아직까지는 자기네의 현재의 권세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잠깐 수단으로 양보하는 것밖에 아니될 것이다.
그러면 변명은 저쪽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아주 현명한 양면작전이다. 그러나 남을 믿지 못하는 것은 결국 나를 믿지 않는 일이요, 나를 믿지 않는 것은 전체를 믿지 않는 일이다. 왜? 모든 나는 나의 나가 아니요 전체의 나기 때문이다. 전체를 거부하면 멸망밖에 길이 없을 것이다.
전체와 개체
그러나 문제는 그보다 더 심각한 데로 들어간다. 스스로 믿지 않고 자멸의 길을 밟는 이기주의 집단주의의 정치가들만을 그대로 내버려두고 세계는 세계대로 살수 있다면 문제는 간단하지만, 그렇게 될 수가 없다. 자포자기하는 그들이 심술로 자기와 세계를 다 멸망시킨다 해서가 아니라 설혹 무슨 교묘하고 용감한 수단을 써서 그들만을 제해버리고 세계는 남을 수 있다 가정하더라도 그것은 세계의 구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계가 하나의 기계라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기계가 아니요 하나의 유기체다. 하나의 인격이다. 하나의 전체다. 그러므로 부분이 죽으면 전체도 죽는다. 무기체라는 것은 전체와 개체를 분리해도 아무 변동이 없지만, 유기체는 개체를 전체에서 가르면 둘이 다 죽어버린다. 마치 수소와 산소를 화합시키면 수소도 산소도 아닌 하나의 물이라는 새것이 되듯이 인간과 인간이 합해 하나의 유기적인 인격체를 이루면 그 둘을 다 죽임이 없이는 서로 갈라놓을 수가 없다. 사람도 기계적 관계로 만날 수 있다. 그러나 그때는 인간적인 생명은 아니다. 그러나 만일 두 사람이 사랑하여 인간적으로 결합하면, 그것이 결혼이거나 친구 사귐이거나 간에 둘이 서로 인격적으로 파멸을 당함 없이는 갈라질 수 없다. 갈라지고 청산했거니 해도 그것은 망상이다. 여기 생명의 신비가 있다. 인간에 영원한 고통이 있는 것은 아마 이 때문 아닐까?
하여간 히틀러를 히틀러대로 망하게만 두고는 인간은 구원되지 않는다. 우리 정신연령이 어릴 때 우리는 전체와는 상관없이 개인의 구원을 믿어서 좋았으나 이제 인간은 그보다는 더 자랐다. 병을 앓으면서도 자라기는 자랐다. 그러므로 옛날의 방법 정도로 구원될 수 없다. 포플러는 찍히면 그 가지를 땅에 꽂으면 곧 뿌리가 내려 살 수 있지만, 사람의 몸은 지체가 전체로 변하지는 못한다. 그만큼 복잡하게 고등한 발달을 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원시사회나 봉건사회인보다는 훨씬 복잡하게 자랐다. 발달한다는 것은 결국 전체성이 점점 더 복잡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요, 조직이 복잡해지면 거기 따라 의식도 복잡해진다. 봉건 시대에는 봉건시대의 의식이 있었지만 세계시대에는 세계의식이 있다. 그 세계의식에 어떻게 하면 이를 수 있을까? 거기 문제가 있다.
유다가 지옥 밑바닥에서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는 한은 천국은 있을 수 없다고 하면 보수신앙은 분개하겠지만 분개하는 한 그것은 구원은 아닐 것이다. 보수신앙이 뭐라거나 오늘의 인간은 이미 유다의 구원이 없이는 자기의 구원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것을 예수는 남아 있는 아혼 아홉보다 잃어진 한 마리를 더 소중히 생각한다는 말로 가르쳤다. 누가 감히 자기는 잃어진 한 마리에 해당은 아니한다고 말할이만큼 자신이 있을까? 그 자신이 생기는 순간 그는 못났다는 생각을 잃어버리고 강한 부류에 들어서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는 정말 잃어진 인간이 돼버린다. 그러면 얻으면 잃고 잃으면 얻는다는 말, 높은 자가 되려면 낮아져야 한다는 말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씨알만이 세계를 건질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양심의 위기
그렇게 볼 때 세계의 위기는 곧 개인양심의 위기임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핵무기와 정보망을 쓰는 전쟁으로 인하여 나라가 망하고 문명이 파괴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걱정한다. 그러나 사실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사람의 양심이 깨지는 일이다. 나라는 소중하지만 하나의 그릇에 지나지 않는다. 그릇 중에서는 물론 최대최귀(最大最貴)의 그릇이다. 그러나 그릇은 그릇인 이상 아무리 없어져도 다시 만들 수 있다. 나라는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나라가 있어야만 발달할 수 있지만 나라 없이 절대로 못사는 것 아니다. 유대 민족이 그 좋은 실례다. 나라 잃은지 2천년이 돼도 가지가지의 문화 활동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민족의 민족된 것이 땅보다도 정치주권보다도 정신적인데 있다는 것을 잘 증명하고 있다. 문화도 역시 그렇다. 그것도 아깝지만 그것은 하나의 생활방식이지 인간의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살아 있는 한 문화가 다 파괴됐다가도 다시 건설할 수 있다. 그것들은 다 인위로 된 것이다. 그러나 양심은 그렇지 않다. 양심은 인위로 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받은 것이다. 혹은 다른 말로 한다면 전체의 것이다. 혼의 음성이다. 그러므로 한번 죽으면 살아날 수가 없다. 보통 죽었던 양심이 살아난단 말을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형용사지 사실이 아니다. 죽었다 해도 거의 죽는 정도에 갔었지 정말 죽은 것은 아니다. 정말 죽었다면 다시 살아 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양심은 스스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정신의 다른 부분이 파괴되면 양심으로써 그것을 다시 회복할 수 있지만, 양심 그 자체가 만일 죽는다면 살려낼 길이 없다. 기독교에서 둘째 죽음이란 것은 그것을 말하는 것 아닐까? 칼빈 신학에서 인간의 완전 타락을 주장하지만 근래의 모든 신학은 차차 거기 반대하는 경향인 것도 이 때문 아닐까? 인간의 영혼이 불사체(不死體)라면 양심도 불사체일 것이다. 그러나 불사체이니만큼 그것이 파괴되는 일은 참 큰일이다. 사람의 몸에 여러 백조(百兆)되는 세포가 있다지만 그 세포가 다 상했다가도 재생이 될 수 있는데, 그중에 몇 가지 절대 재생이 아니되는 세포가 있다. 없어지면 그만이다. 뇌세포, 신경세포, 생식세포 등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재생이 아니된다. 이것들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어서 재생되는 수가 있다면 좋을 듯싶은데, 생명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생명은 우리보다는 어질다. 여기 신비가 있다. 양심도 그런 것 아닐까? 지성도 감정도 잘못됐다가도 회복될 수가 있는데, 양심은 한번 잘못되면 낙인(烙印) 맞은 것 같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 국가들의 하는 무서운 죄악 중 하나가 이 건드려서 아니 되는 인간양심을 건드린다. 무서운 일이다. 인간이 몇 백만 년 되는 긴 진행과정에서 단 하나로 기르고 지켜온 것이 있다면 양심이란 이것 하나인데 이제 감히 거기 손을 대는 것이다. 문명에 잘못된 것도 많아서 에드워드 카펜터 같은 사람은 문명은 병이라고까지 말했지만, 그와 같이 폐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명이 오늘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양심의 자유는 국가의 권력을 가지고도 건드려서는 아니된다는 이 한 마디 증언 때문이었다.
옛날에 감히 못하던 악을 내놓고 하게 된 원인이 어디 있을까? 과학 기술의 고도의 발달 때문이다. 근래의 과학이 저지른 두가지 잘못이 있다. 하나는 물질의 오실(奥室)을 들추어본 것이요 또 하나는 영혼의 지성소를 들추어본 것이다. 물론 연구하는 그 자체가 나쁘다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옛날 인간이 아직 인간으로서의 겸손과 조심성을 가지던 날에는 어진 마음들이 퍽 주의하여서 덕성이 발달되기 전에 지나친 지성의 발달을 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경계해왔다. 그런데 근세에 와서 급속도로 되는 과학의 발달로 사회변천이 심해졌고 따라서 전통이 많이 깨져버렸다. 그래서 진보된 점도 있으나 잘못된 점도 많다. 이 덕성(德性), 지성(知性)의 조절을 잃게 된 것도 그중 하나다. 확실히 자연은 끝까지 그 신비의 오실(奧室)을 남겨두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자연이란 다른 것 아니고 생명의 초의식적(超意識的)인 의식의 나타남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도 발달하는 것이겠지만 몇백만 년을 단위로 서서히 움직이는 것이므로 우리게 자연으로 뵈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이제 과학이 자신을 지나치게 믿고 감당할 능력이 자라기 전에 그 비밀의 문을 열어버렸다. 그리고 옛날 동화에 나오는 모양으로 그 벌을 받게 됐다. 문을 열기까지는 했으나 거기서 뛰쳐나온 벌을 잡아넣을 수는 없었다. 오늘날 오염문제도 그것이요, 양심침해의 문제도 그것이다. 원자핵을 폭파했을 때 인간양심의 핵도 폭파가 됐다.
단 하나의 길
그러므로 길은 단 하나가 있을 뿐이다. 가장 좁고 험한 양심의 길이다. 예수가 생명으로 이르는 길은 좁고 험하다 한 것은 이것 아닐까? 역사문제는 결국 양심문제다. 양심은 세상나라에 와있는 하늘나라의 대사관이요 육(肉)속에 와있는 말씀의 소리다. 그러므로 죽음으로써 지키는 것이 사는 길이다. 하나됨의 평화는 거기만 있다. 세계평화의 목적은 양심 하나를 살리기 위해서요 양심을 지키는 것은 그것만이 평화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평화를 짓는 자를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평화는 흔히 생각하는 모양으로 무사무풍(無事無風)의 상태가 아니다. 생명은 흐르는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 제 길을 제가 여는 것이기 때문에, 그 흐름은 격류지 산 속의 호수 같은 것일 수가 없다. 격동 속에서 자기를 잃지 않는 것이 평화다. 죽음 속에서 두려워 아니하는 것이 평화다.
화(和)는 본래 하나가 소리를 내면 또 이쪽에서도 거기 맞추어 소리를 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구(口)자를 쓴 것이다. 그러므로 평화는 정상적인 것이 아니다, 동적인 것이다. 동(動)중에 정(靜)이 있는 것이 화(和) 곧 조화다. 참 정(靜)은 동(動)중에 있는 것이지, 죽은 시체의 정이 아니다. 순간도 가만있을 수 없는 복잡한 생명의 약동에 음악적인 조화를 이루는 것이 평화다.
평(平)자의 뜻도 그렇다. 평(平)하다면 대개 높고 낮음이 없이 반듯한 것으로 알기 쉬우나 세상에 그런 것은 없다. 약동하고 폭발하는 생명의 바다에 어찌 그런 것이 있겠나. 글자를 짓는 옛 어진 이들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평(平)자를 본래는 이렇게 썼었다. 그것은 八자와 亏자를 합해서 만든 글자다. 팔(八)은 갈라 헤치는 것을 뜻한다. 여덟이란 수는 쪼개도 또 쪼개도 잘 쪼개지는 수기 때문에 그렇게 표시한 것이다. 公도 그 뜻이다. 厶는 私자에서 보듯이 사사 곧 나만을 아는 것인데 그것을 열어 헤친 것이 공공(公共)한 것이라는 뜻에서 八을 더했다. 그리고 亏는 또 자위에다 한 획을 더한 것인데 7자는 기운이 올라오다가 막힌 것을 표시한 것이다. 땅속에서 기운이 올라오는 형상을 그린 것, 곧 S이렇게 그린 것인데 그 위에 덮인 것이 있어서 올라가지 못하는 것이 다. 그런데 그 위에 다시 한 획을 더해 亏 이렇게 쓰면 그 막혔던 것이 다시 뚫고 올라옴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 그 두 자를 합하여서 쓴 자는 막힌 기운을 활짝 열어젖혀서 쑥쑥 발산되도록 하는 뜻을 가진다. 그리고 보면 평이란 단순히 반듯한 기계적 물리적 정지(靜止) 상태라기보다는 갇히고 눌리는 기운을 헤쳐서 자유롭게 발산시킨 때에 오는 시원한 정신 상태를 표시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사람은 어디까지나 정신적인 존재인 것을 알 수 있다, 불평(不平)이 뭐냐? 결국 생명이 기운 제대로 피어나지 못하고 막힌 것이다. 그래서 말로도 “기(氣)가 막혀 죽겠다” 한다. 생(生)은 기(氣)다. 기는 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갇히면 답답하고 불평(不平)하다. 불평은 가만있지 못해서 불평이 아니라 가만있으므로 불평(不平)이다. 사람의 마음은 정복하는 군대 같아서 가만있으면 불평이요 불평하다 불평하다 못해 터지면 폭발이다.
그러면 이제 평화의 뜻이 무엇임을 알 수 있다. 모든 씨알이 자유로 정신운동을 할 수 있는 것이 평화다. 그럴 때 세상에는 일이 없다, 문제가 없다. 일이 일어나는 것은 정신으로 하여금 일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가만 못 있는 물건이다. 생명이 한창 날뛰는 때기 때문이다. 씨은 영원한 어린이다. 반대로 소위 어른이라는 인간들은 그 씩씩한 생명을 잃고 속으로 늙고 쇠(衰)해버린 것이다. 소위 영웅이요 지도자요 하는 것들이 쓸데없는 장난을 좋아하는 것은 이 속 생명이 죽어가는 것을 견디어 하지 못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정치인들이 골프를 자주 치는 것은 그 속에 기운이 죽은 증거다. 속 정신이 활발하게 피어오르고 있으면, 그런 부질없는 것에 정력과 시간을 소모할 생각조차 일어나지 않는 법이다. 씨이 온순한 것은 속으로 정신이 자유롭게 활동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약동하는 정신의 고동이 어디 있느냐 하면 양심에 있다. 문천상(文天祥)이 불러서 천지정기(天地正氣)라하고 맹자가 가르쳐 호연지기라 한 것이 이것이다. 그 정신이 자유로이 활동하고 있을 때 온 우주가 대조화 속에 있다. 마음이 정성될 때 천지 화육(化育)에 참여한다는 것은 이것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 할일은 이 양심의 자유를 지키는 일이다. 두려운 것은 이 양심이 그 천연의 폭발성을 잃어버리는 일이다. 폭발이라야 폭탄같이 파괴하는 폭발이 아니라 십자가에 숨이 지면서도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는 식의 폭발이다.
듣기에도 몸서리치는 것이 과학적인 방법으로 인간 영혼의 지성소에 장난을 치는 일이다. 만일 그렇게 해서 거기 무슨 고장이 일어날 때 어떻게 될까? 세계의 끝날이란 것은 이것을 말하는 것 아닐까?
감히 상상을 마음대로 하기를 허락한다면, 교만한 인간의 생각이 이렇게 끝장에 오르다가는 이 종류의 인간은 아주 멸종이 돼버리고 말지도 모른다. 진화의 과정은 생명이 그런 비극적인 길을 택한 일이 이따금 있었던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도 생명은 죽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을수록 우리는 새 인류의 씨를 준비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물론 한 삶의 님 그 자신의 지혜로 할 일이요 우리가 능히 헤아릴 수 있는 것 아니지만, 상대 없는 절대 없고 마음 없는 하나님 없는 이상, 또 그것은 우리하기에 달린 점도 있을 것이다. 우르를 떠나는 아브라함같이 이집트를 떠나는 모세같이 다 버려야 하는 대신 씨를 가지고 나가는 것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때 이 양심을 지킨다는 것밖에 더 할 말이 무엇이 있을까? 이 20억 년 지어온 지구 위에서의 농사가 끝나고 타작을 하는 날이 온다면 그때 남을 것이요 눈에 뵈지도 않고 귀에 들리지도 않고 손끝에 만져지지도 않지만 또 물로도 불로도 바람으로도 원자폭파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 이미 증명이 된 요 지극히 작은 양심이란 한 밖에 가지고 나갈 것이 없을 것이다.
나는 세계 속에 있는 이 수난의 여왕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 살 길은 정신적으로 앞을 지르는 것밖에 길이 없다고 한다. 인간이 만물의 앞장을 선 것이 강해서가 아니요 유약(柔弱)으로서 정신을 기른데 있지만, 이 민족은 유약 중에서도 유약 아닌가? 유약이 철저해질 때 무엇으로도 부술 수 없는 알갱이 곧 인(仁)이 되고 인일 때 무적어천하(無敵於天下)다. 인이 싹이 트면 푸른 생명목(生命木) 아닌가?
제발 어리석은 장난으로 이 씨알의 알갱이(仁)를 죽이지 맙소서!
씨알의소리 1973년 1월 18호
저작집30; 없음
전집20; 9-2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