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세윤 교수는 이 책에서 ‘인자’ 개념을 ‘하나님의 아들’ 개념과 어떻게 합치 되는지를 밝히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왜 자신을 드러내 놓고 메시야나 혹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나타내지 않고 자기 칭호로서 ‘인자’를 사용하셔야 했는지를 밝히고자 하였다.
제 1장 복음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 ‘사람의 아들’”(p.11)
여기에서는 복음서 저자들이 인자를 하나님의 아들로 이해하여 두 용어를 동일한 것으로 나타내려 했다는 사실을 논증하였다.
1. 마가복음
막 8: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마가복음 8:38에서 우리는 “아버지의 영광” 가운데 심판자로서 오는 인자의 파루시아(parousia)를 읽을 수 있다. 인자 ( ㅌ υㅉㅜζ τξㅐ ν ρㅇοξυ)에게 하나님은 그의 아버지이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마가복음 14:61f.는 人子가 하나님의 아들로 이해된 또 하나의 분명한 예이다.
막 14:61 잠잠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가로되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
여기에는 분명히 다른 사람의 용어로는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 예수 자신의 용어로는 人子이며, 人子에 관한 예수의 말이 대제사장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주장으로 이해되고 있음이 드러난다. 오직 인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해 아래서만 마가복음 9:31의 말씀 속에 포함되어 있는 역리(paradox)를 온전히 감지할 수 있다.
마가복음 2:10에 있는 인자 말씀도 비슷한 해석을 요구하는 것 같다.
막 2: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예수는 중풍병자의 죄가 사해졌다는 그의 용서의 선언을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졌다”고 주장함으로써 정당화한다. 죄 용서는 하나님의 대권이므로 서기관들은 예수의 행위를 하나님께 대한 모독으로 여기고 항의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대권을 주장함으로써 예수는 인자로서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범주(the caregory of the divine)로 분류하고 있으며 그의 초인적인 치유 행위는 이같은 주장에 대한 표징인 것이다.
마가복음 13:26f.의 용어도 흥미롭다.
막 13:26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인자는 그의 택한 자들을 그의 도래 시에 모을 것이다. 보통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모으신다는 것이 정상이므로, 이것은 퍽 놀라운 생각이다.
마가의 예수 수난 설화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앞에서 이루어진 백부장의 신앙고백으로 절정에 이른다. 마가는 여기서(이방인에 의해 언급된) “이 사람”이 인자에 상응하는 것으로 보았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만일 그렇다면 미리 예언된 수난을 당하는 인자가 그 예언의 성취 순간에 다름 아닌 하나님의 아들로 판명되었음을 천명함으로써 마가는 그의 예수 수난 설화를 절정에 이르게 하고 있는 것이다.
2.마태복음(p.15)
마태는 앞에서 살핀 마가의 이해를 정확히 따랐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인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해를 더욱 분명히 하고 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의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보고하면서(16:13-20) 인자와 하나님의 아들을 동일시하는 분명한 표현을 하고 있다.
최후의 심판의 비유(마 25:31-46)에서 인자는 양과 염소를 분리하고 그 “양”들을 위해 그의 아버지 하나님의 심판을 전할 왕과 동일시된다.
3.누가복음(p.15)
인자가 죄 용서의 권세를 가졌다는 말씀(눅 5:24 = 막 2:10)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라는 역설의 말씀(눅 9:24 = 막 9:31)
산헤드린 재판(눅 22:54-71)에서 인자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리라는 예수의 대답이 있자, 재판관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됨을 주장했다고 추론하고 묻는데 이 추론의 물음에 예수는 동의한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인자와 하나님의 아들과의 동일시함이 마가와 마태판보다 더 확실히 나타나 있다.
4.요한복음(p.17)
인자는 하늘에서 선재하였고, 하늘로부터 세상에 내려왔으며 그 하늘로 올라가는 자이다(3:13 ; 6:61).
이같은 표현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언급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3:16f. ; 16:28).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이 언급되었듯이(17:1) 인자의 영광도 언급되었다(12:23 ; 13:31).
1:49-51에서 예수는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나다나엘의 고백을 받아들이면서, 마가복음 14:61f.에서처럼 인자에 관한 말로 대답한다.
인자와 하나님의 아들을 동일시하는 가장 명확한 구정은 5:26f.이다.
인자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신적인 본성을 공유한다 : γㅇ εㅃμθ(8:28).
사복음서 모두는 인자를 하나님의 아들과 동일시한다. 복음서 저자들에게 예수의 하나님 아들 됨은 확실한 사실이기 때문에, 인자와 하나님의 아들을 동일시하는 것은 아마도 자연스러운 것이었다(요 5:26f. 눅 22:69f).
그러나 공관복음서 어디에도 인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직접적으로 확증해 주는 분명한 구절이 없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미 보았듯이 이 두 칭호들의 동일시는 모두 간접적이다. 동일시함의 이런 간접적인 특성은 예수의 입을 통해 발언되는 인자라는 칭호의 신비롭고 수수께끼 같은 특성과 일치한다. 따라서 몇몇 동일시하는 구절들의 진정성이 의심받고 있긴 해도, 복음서 저자들(특히 공관복음서)은 인자에 관한 예수의 말을 대체로 신실하게 전하면서 그 칭호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아들 됨의 감추어진 의미를 몇몇 구절에서 암시적으로 표면에 드러나게 했으며 따라서 그들이 신실하게 예수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제 3장 배경과 용어(p.33)
이미 잘 알려진 대로 ㅅㄴㅇ ㅂㄲ(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나 이에 상응하는 존재로서 묘사된 한 인물은 세 가지의 유대 묵시 문학서, 곧 다니엘 7장, 제 1 에녹 37-71장, 제 4 에스라 13장에 나온다.
다니엘은 “그 사람의 아들”을 본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를 보았다. 이것은 다니엘이 본 형상이 사람과 비슷하며 사람의 모습을 했거나 사람의 모습과 유사하다고 표현한, 하나의 그림으로 묘사한 구절에 불과하다. 그러나 구름을 동반한 그의 나타남은 그가 신적인 인물임을 지적해 주고 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에서 구름은 보통 신의 현현(theophany)에 동반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니엘이 본 그 인물은 인간의 모습을 가진 혹은 인간의 모습과 유사한 신(deity)인 것이다.
구약과 유대교의 신의 현현의 전승들에서 이 인물의 기원을 찾기 위하여 시도함.
1920년 O.Procksch는 에스겔 1장의 ㅁㄷㅇ ㅎㅇㅁㄲ ㅌ ㅁㄷ(사람의 형상 같은 모습 에스겔 1:26-28)으로서의 하나님에 관한 환상과 다니엘 7장의 환상 사이의 문자적 연결을 보았고, 다니엘 7:13의 ㅅㄴㅇ ㅂㄲ(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를 에스겔 1장에 나오는 거울에 비친 하나님의 형상의 실체화(the hypostatatization of the mirroimage of God)로 인식하였다.
A. Feuiller는 에스겔 1장과 다니엘 7장 사이의 문학적 - 신학적 연결을 찾아냄으로써 이같은 주장을 발전시켰다. 다니엘 7장의 인물 ㅅㄴㅇ ㅂㄲ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타남의 일종”이며 다니엘에 나오는 ‘인자’는 확실히 하나님의 범주에 속할 뿐 아니라, 에스겔(1:26)이 사람의 형상으로 본 하나님의 영광의 화신이라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M. Black 또한 다니엘 7:9-13을 열왕기상 22:19-22, 이사야 6장, 에스겔 1, 8, 10장 등의 ’신현 보좌 환상 전승‘(the theophanic throne-vision tradition)에 속한 것으로 보며, Feuiller와 함께 “사람의 아들”이란 인물을 에스겔 1:26ff.에 비추어 이해한다. 그는 계속해서 제 1에녹서를 통해 보좌 환상(the throne-vision)에서 “사람의 아들” 전승의 발전을 추적한다.
H. R. Balz 의 연구
a) 에스겔 1:8-11,40 ; 43장 ; 다니엘 7장 ; 제 4에스라 13장에 나오는 신의 현현 환상을 분석하고,
b) 구약과 유대교에서(지혜, 말씀, 영광 같은) 하나님의 역할과 속성들을 실체화시키고 그것들을 하나님과 분리해 인격화/신격화시키는 경향을 고찰하며,
c) 메타트론(metatron - 하나님의 보좌를 공유하는 존재) 같은 하늘의 중보자에 관한 유대적 사고를 연구함
결론 ; 다니엘 7장의 ㅅㄴㅇ ㅂㄲ라는 인물은 에스겔 1장의 신의 현현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분리되어진 결과(Abspaltung)이다. 에스겔 1장의 환상 전승은 이같은 발전에 대한 결정적 자료를 제공하며, 에스겔 8장 - 11장, 43장은 독립적이고 메시야적이며 제사장적인 인물을 제시해 주었다. 다니엘 7:1-14의 저자는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일꾼인 제사장적 존재로부터 두영광스런 하늘의 존재들 - “옛적부터 계신 이”와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 - 을 형성하여 환상의 언어로 서술하는 결정적 발전을 이루었다. Balz는 또한 에녹서들에서 이 “사람의 아들” 전승이 어떻게 더 발전했는지를 보여 주고 있다.
하나님이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난다는 것과 그 하나님의 형상이나 영광이 “한 사람 같은”(ㅅㄴㅇ ㅂㄲ) 천상의 인물로 점차 실체화됨을 보여 주고 있는 묵시문학 전승에 상응하는 전승사적 발전이 지혜문학 안에서도 나타난다. 지혜문학에는 신의 현현을 가져오는 자(the bearer of theophanay), 즉 신의 현현에서 하나님(혹은 하나님의 형상)을 보여주는 중보자로서 실체화되고 인격화된 지혜/로고스를 표현하는 전승이 있다. 지혜와 로고스를 하나님의 εㅃκㅇν(형상)으로 지칭하는 것은 이같은 전승에 기원을 두고 있는 듯하다.
유대교에서 제 3에녹서에 나오는 메타트론(metatron) 개념에서 그 절정을 이루는데, 제 3 에녹서에서 동일한 신의 현현의 환상 전승의 발전의 다른 계열, 즉 신현을 가져오는 자(Theophanieträger)로서의 지혜/로고스 개념은 천상의 인물 ㅅㄴㅇ ㅂㄲ의 묵시적 계열과 융합되고 있다.
이것은 다니엘 7:13의 인물 ㅅㄴㅇ ㅂㄲ가 인간적 존재가 아니라 하늘의 신적 존재로서 이해 되었음을 의미한다. 다니엘 7장의 이 환상에 대한 해석에서 ㅅㄴㅇ ㅂㄲ는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18, 22, 27절)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네 짐승에 대한 해석에서 왕으로서의 개별적인 이해(17절)와 왕국으로서의 집단적인 이해(23절 이하)가 엇갈려 나오고(oscillation) 있는 것처럼, ㅅㄴㅇ ㅂㄲ라는 존재에 대한 해석에서도 이같은 엇갈림(oscillation)이 있을 수 있다. 만일 그렇다면 네 짐승이 네 왕국들의 상징인 동시에 대표자인 것처럼, ㅅㄴㅇ ㅂㄲ라는 존재도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의 상징인 동시에 대표자(혹은 머리)이다.
예수 당시에 묵시적인 ‘사람의 아들’에 관한 메시야 사상이 있었는가?(p.40)
기독교 이전의 유대교에서 메시야로서의 ‘그 사람의 아들’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는 이전의 학설에 반하여, 최근에는 신약성경 이전에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메시야적 칭호(title)는 없었다는 것이 명백히 드러났다. 그러나 이것은 신약성경 이전에 다니엘 7장의 천상적인 인물 ㅅㄴㅇ ㅂㄲ가 이미 천상적인 메시야로서 인식되었을 가능성과, 다른 유대 묵시적 그룹에 의해 에녹서에서 처럼 하늘로 높임을 받았고 마지막에 심판자와 구세주로서 이 땅에 다시 내려올 존재들(personalities)과 동일시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천상적 인물이 또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와 같은 존재로 묘사되었다고 결론지어야만 한다(cf. 계 1:13f.). 즉 다니엘은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the Ancient of Days) 외에 “한 사람의 아들 같기도 하고” 또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와 같기도 한”(like son of man and like the Ancient of Days) 천상적 인물을 보았던 것이다.
Papyrys 967과 codices 88, 그리고 Syro - Hexapla의 역본들은, 천상의 인물을 단순히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존재라 하며, 그가(수종드는 천사들에 의해)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인도되는 것을 언급하고 있는 맛소라 사본, Theodotion, 그리고 Justin Martyr에 의해 인용된 본문들과 확연하게 구별된다. 그러므로 Papyrys 967과 codices 88, 그리고 Syro - Hexapla는 ㅅㄴㅇ ㅂㄲ라는 인물이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와 유사하다는 점을 강조하려 한 것임에 틀림없다.
적어도 A.D. 2세기에는 다니엘 7:13의 천상적 인물을 하나님의 아들과 메시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같은 사본들의 중요성은 기독교 이전의 유대교에서 다니엘 7:13의 천상의 인물을 하나님의 아들이나 메시야로 보는 해석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다니엘 7장의 신의 현현 장면에서 13절의 천상적 인물이 하나님의 아들과 메시야로 해석될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데 있다고 하겠다.
예수 당시에 메시야 해석은 기껏해야 쿰란 공동체와 같은 몇몇 집단에 국한된 극히부분적인 현상이었음이 분명하다.
예수 자신이 이전의 어떤 전승과도 독립적으로 다니엘 7:13의 천상적 인물 ㅅㄴㅇ ㅂㄲ를 하나님의 아들과 메시야로 해석하기 시작했을 수 있다. 혹은 쿰란의 해석 같은 데서 암시를 얻어 천상적 인물 ㅅㄴㅇ ㅂㄲ(곧 하나님의 아들)의 관점에서 자신의 메시야 사역을 보았을 수도 있다.
「요셉의 기도」라는 제목 하에 Origen이 그의 주석에서 인용한 한 유대 외경의 단편을 검토함. 이 본문에 대한 J. Z. Smith의 번역.
너희에게 말하는 나 야곱은 이스라엘, 하나님의 천사, 다스리는 영이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무엇보다도 먼저 창조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야곱이라 부르나 그 이름이 이스라엘인 나야곱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곧 하나님을 보는 사람이라 부르는 자이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이 생명을 주신 모든 생물의 장자(firstborn)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시리아의 메소포타미아로부터 올라오고 있을 때 하나님의 천사 우리엘(Uriel)은 나와서 내가 땅으로 내려가 사람 가운데 거하며 야곱의 이름으로 불리워졌다고 말했다. 그는 나를 시기해 나와 더불어 싸우고 겨루며, 모든 천사들 앞에 있는 그의 이름이 나의 이름보다 위에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그의 이름이 무엇이며 그가 하나님의 아들들 중 몇 번째 순위인가를 말해 주었다 : “너는 내 뒤 여덟번째인 우리엘(Uriel)이 아닌가, 그리고 나 이스라엘은 주의 능력의 천사장이며 하나님의 아들들 가운데 최고의 우두머리가 아닌가? 나는 이스라엘, 하나님 앞에서 제일의 大臣이 아닌가?” 그리고 나는 소멸치 않는 이름으로 나의 하나님을 불렀다.
확실히 이 본문에는 구약과 유대교의 많은 주제들이 함께 뒤섞여 있으며 다른 헬라적(영지주의적) 전승들과도 비슷한 점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요셉의 기도문이 유대교의 메르카바 신비주의 전승에 속해 있으며 전승사적으로 다니엘 7장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증하는 데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요셉의 기도문에서 또 다른 흥미로운 사상은 천사 이스라엘이 내려와 야곱의 몸 안에서 성육신 했다는 것이다.
천사 이스라엘이 지상으로 내려와 야곱 안에 거한다고 서술하고 있는 요셉의 기도문에는 하나님 곁에 서있는(잠언 8:30), 아니 실상 하나님과 더불어 영광의 보좌를 나누어 가지고 있는 지혜가 내려와서 야곱 - 이스라엘 안에 거한다는 사상 이외에, 야곱의 상이 하나님의 보좌에 새겨져 있으며 (그것을 직접 보는 것이 금지된)천사들이 지상의 야곱을 보기 위해 내려오고, 또한 그것을 동료 천사들에게 알려 주려고 올라 간다는 창세기 28:12의 널리 알려진 전승이 반영되어 있는 것 같다.
후자 전승은 랍비들의 메르카바 신비주의에서 더욱 발전하여 3세기에는 라쉬키의 아들 랍비 시므온에 의해 족장들이 곧 메르카바이다 라는 교리에까지 이르게 된다.
메르카바 환상과 관계 있는 모든 본문들의 진정한 관심은, 관념적으로 이미(그들의 조상 야곱-이스라엘 안에 담기어) 하나님과의 가장 밀접한 사귐 속에 서 있는, 하나님의 백성(하나님의 자녀들)으로서의 이스라엘을 확인하려는 것이며, 그것이 하늘에서 완전한 실체(reality)가 되리라는 희망, 즉 M. Black의 말을 빌린다면 “이스라엘의 하나님같이 됨”에 관한 희망을 확인하려는 것 같다.
출애굽기 4:22은 장자로서 하늘 보좌 위에(곁에) 있는 이스라엘에 관해 말하고 있는 모든 메르카바 문서들의 배경이 되는 본문이다.
다니엘 7:13의 천상적 인물 ㅅㄴㅇ ㅂㄲ를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고 하나님 백성(하나님의 아들들)의 체현으로 해석하고, 다니엘 7:13ff.의 환상을 하나님의 백성이 그들의 머리인 하나님의 아들 안에 내포되어 하나님의 아들됨으로 높임 받음의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예수 당시에 충분히 가능했다.
C. F. D. Moule은 1QS 11:20에 나오는 유일한 외견상의 예외를 제외하고, 기독교 이전 히브리 문학에서 “사람의 아들”(단수)이란 문구가 정관사와 함께 나오는 경우가 한 번도 없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Moule은 복음서에 나오는 이 색다르고 한결같은 ㅌ υㅉㅜζ τξㅐ ν ρㅇ-οξυ에는 단순히 “사람의 아들”이 아니라 “그 사람의 아들”(the Son of Man) 혹은 “저 사람의 아들”(that Son of Man)을 의미하는 아람어 표현(아마도 ㅂ ㅇㅅㄴㅇ)이 배경으로 연관되어 있음이 분명하다고 확신한다.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가 사용한 ㅇㅅㄴㅇ ㅂ의 한정적 의미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은 신약성경에서 ㅇㅅㄴㅇ ㅂ를 한정적 용법의ㅌ υㅉㅜζ τξㅐ ν ρㅇοξυ로 획일적으로 번역했다는 사실에 의해 증명된다고 하겠다.
사실상 예수는 들을 귀 있는 자들에게는 신중이 자신의 신분(identity)을 나타내고 들을 귀 없는 자들에게는 감추기 위한 이중의 목적으로 이 자기 칭호를 사용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아들’”이란 칭호를 가지고 예수는 자신을 종말의 하나님 백성의 내포적 대표자(혹은 머리)인 신적 존재 즉 하나님의 아들들의 머리인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내길 의도했다.
환상 중에 다니엘에게 보여진 것은 관념적으로는 이미 하늘에 존재하고 있으나 이 땅 위에서는 종말에 실현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었다. 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하나님 백성의 숙명에 관한 것, 즉 그들의 머리인 하나님의 아들 안에 내포되어 하나님 아들 됨으로 높아져서,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과 왕적 통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p.62)그렇다면 “그 ‘사람의 아들’”이란 칭호를 가지고 예수는 자신을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실현시키는 자로서 나타내길 의도하였다. 다시 말해서, 예수는 “그 ‘사람의 아들’”이란 칭호를 사용해서 자신의 사명을 하나님의 백성의 머리인 자신에 의해서 대표되는(또는 내포되는) 하나님의 종말의 백성을 모아(또는 창조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들로 높임 받게 하는 것으로 나타내고자 하였다.
하나의 “메시야 운동”이 당시 일으키기 십상이었던 오해를 피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이 “메시야적” 사명을 표현하는데는, 이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감탄할 정도로 적절할 뿐 아니라 아마도 유일하게 가능한 칭호였다.
제 4장 “그 ‘사람의 아들’”의 말씀으로서의 최후의 만찬의 말씀(p.71)
마가복음 10:45의 전체의 진정성에 대한 연구
본문을 최후의 만찬의 맥락 속에서 보려고 시도함(p.79). - “그 ‘사람의 아들’”은 최후의 만찬 말씀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혹은 엄밀히 말해 최후의 만찬의 말씀들은 예수가 “그 ‘사람의 아들’”로서한 말씀이다. 만일 그렇다면 마가복음 10:45의 말씀 자료를 최후의 만찬 말씀의 요약이나 또 다른 표현으로 한 말씀으로 보는 것이 타당함을 알 수 있게 된다.(p.90)
마가복음 10:45의 말씀 자료는 최후의 만찬 말씀에 대한 예수 자신의 요약이거나 또 다른 표현이다(p.93).
만일 최후의 만찬 말씀이 “그 ‘사람의 아들’”의 말씀이라면 이것은 “그 ‘사람의 아들’”의 수난 예고들(막 8:31 par ; 9:31 par ; 10:33par)과 좋은 병행을 이룬다. 왜냐하면 최후의 만찬 말씀에서도 “그 ‘사람의 아들’”의 죽음 또는 “넘겨짐”이 언급되었기 때문이다(막 14:21 par).
대다수의 학자들에 반대하여 Grimm은 마가복음 10:45의 핵심 단어들과 개념들이 이사야 53장 보다는 이사야 43장에서 나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마가복음 10:45에서 이사야 53장의 영향을 완전히 배제한 M. Hooker에 반대하여, Grimm은 마가복음 10:45의 “많은 사람들”(οξλλξθ)은 이사야 53장의 ㅂ에서 온 것으로 본다.
예수는 자신의 메시야적 임무를 이사야 43장에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으로 묘사함으로써, 자신이 이스라엘이 죄사함 받고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위한 속량물로 바쳐져야 할 열방의 위치를 점하는 자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죽음은 이사야 53:10-12의 하나님의 종(Ebed)의 ㅅㅇ으로서 실제로 이스라엘과 열방들의 죄의 형벌을 담당하여 그들을 구원하거나 마지막 심판의 형벌에서 자유롭게 하는 대신적 고난이기 때문에, 예수가 자신의 죽음을 이사야 43:3f.의 ㅍㄲ로 보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러므로 이사야 43장과 53장 모두가 마가복음 10:45의 배경임을 볼 때 우리는 아마도 야웨의 종(Ebed Yahweh)으로서 예수가 스스로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열방들의 속죄와 구속을 위해 내어주기 원했던 ㅍㄲ와 ㅅㅇ로 보았으며 이같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자기의 삶으로(혹은 죽음으로) 그들을 섬겼다고 말할 수 있다.
(p.106) 주요 개념 λㄷτρξν(ㅍㄲ)은 명백히 죄로 인한 파멸의 위협으로부터 인간의 생명을 속량하거나 자유롭게 하는 대속적 성취 혹은 대속적 고난을 의미한다. 예수의 자기를 내어줌은 이스라엘을 위한 대신일 뿐 아니라 세계의 열방, 즉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한 대신이다.
(p.108) 마가복음 10:45의 말씀은 예수를 이상적 이스라엘의 대표자로 보여 준다. 이상적 이스라엘의 대표자로서 그는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고 그리하여 죄많은 이스라엘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위한 속죄와 구속을 이룬다. 또한 이상적 이스라엘의 대표자로서 그는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중보자가 되어야 하는 이스라엘의 임무를 성취한다.
그러므로 예수가 다니엘 7장에 따라 이상적 이스라엘의 대표자인 “그 ‘사람의 아들’”로 이같은 자기 이해를 표현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예수가 자신과 동일시한 다니엘 7장의 천상적 인물 ㅅㄴㅇ ㅂㄲ와 이사야 53장의 야웨의 종(Ebed Yahweh) 사이에는 그들이 하나님의 이상적 백성의 내포적 대표자라는 바로 그 공통점이 있다. 따라서 다니엘 7장으로부터 자신을 하나님의 이상적 백성의 대표자로서 이해한 예수는 야웨의 종의 모습 안에 자신의 신분과 임무가 나타나 있음을 보았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의 숙명을 대신적으로 성취해야 하는 하나님의 종이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속죄받고 구속받을 수 있도록 예수가 그들에게 요구되는 순종을 대신적으로 그리고 대표적으로 성취하고 그들의 불순종의 죄를 위해 대신 고난을 받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또한 예수가 열방에 대해 하나님의 구원의 중보자가 돼야 하는 그들의 선교적 숙명을 대신적으로 성취함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야웨의 종(Ebed Yahweh)의 역학들을 성취함으로써 예수는 자신이 머리로서 하나님의 종말적, 이상적 백성을 체현하는 “그 ‘사람의 아들’”임을, 도는 하나님의 자녀들인 종말의 하나님 백성을 모으는, 혹은 “창조하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또한 잔의 말씀에서 예수는 예례미야 예언(31:31ff.)의 성취로서의 새 언약이 출애굽기 24:8의 옛 언약의 후형(typology)으로서의 자신의 피흘림에 의하여 성립될 것임을 표명하였다.
예례미야 31:31-34에서 새 언약의 약속이 옛 언약 아래서 지은 죄에 대한 용서의 약속과 함께 나온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잔의 말씀에서 예수가 자신을 야웨의 종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했을 때, 그것은 단지 속죄 사상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미 예수가 자신의 죽음을 언약을 세우는 제사로 보는 해석 안에는, 이사야에 예언된 야웨의 종으로서의 자기 이해가 반영되어 있다.
“언약”이란 말은 항상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살도록, 즉 창조주 하나님을 의지하고 복종하며 살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한다는 뜻을 함축한다(예, 출 19:3-6). 따라서 예례미야 31:31-34에서 새 언약의 약속은 동시에 성결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만든다는 약속이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가 임박한 자신의 죽음을 속죄와 언약을 위한 제사로 해석했을 때,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속죄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헌신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식탁교제에서 예수와 함께 앉은 “열둘”(혹은 열하나)은 하나님의 새 백성의 핵을 형성할 것이다.
예수는 그의 추종자들에게 그들로 하나님의 종말 백성을 삼겠다고 약속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열두 명(혹은 열한 명)이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심판한다는 것은 분명히 그 열두명이 새로운 하나님의종말 백성을 대표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신약 다른 곳에서도 미래의 세상 통치와 심판권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지도록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는 분명하다(고전 6:2f.; 계 5:10 ; 20:4-6).
예수가 언약의 방법으로 그의 추종자들에게 βασθλεθα를 주는 것은 그들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 또는 세상을 다스리는 그의 통치권을 함께 나눌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그 ‘사람의 아들’”로서의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라를 받고 그것을 자기 추종자들에게 주어 그들로 그의 통치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종말 백성이 되게 한다.
이와 같이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 백성의 대표자 “그 ‘사람의 아들’”로 이해하기에, 누가복음 22:29에서 그는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 부른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왕적 통치권을 줌으로써 증명하듯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의 왕이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 대신 행사할 왕적 통치권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웠던 것과 마찬가지다.)
예수는 최후만찬에서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는, 즉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는,속죄와 언약의 제사로 해석하였다.이것은 그의βασθλεθα-선포와 βασθλεθα로서의 초청의 정점(culmination)이다. 하나님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심으로 이같은 가르침과 이 죽음이 옳다고 확증할 것이며 그의 속죄와 언약의 제사를 덕입는 자들을 그의 백성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설립이며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백성의 창조이다. 그래서 예수는 최후의 만찬에서 자신의 죽음을 넘어 하나님 나라가 성취되는 것과 그가 그 왕국 안에서 그의 백성들과 함께 메시야 잔치를 베풀 그 날을 기대하는 것이다(마 14:25 ; 눅 22:29-30).
마가복음 10:45이나 최후 만찬의 말씀과 마찬가지로 히브리서 9:14f.에서도 역시 예수의 사역은 속죄, 구속,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축복에 참여할 하나님의 백성, 또는 그의 나라를 우리 아버지의 것으로 상속 받을 하나님의 아들들(cf. 롬 8:14-30)로 만드는 새언약 세움의 관점에서 해석되고 있다.(p.120)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한다. “뿌린 피”는 예수의 속죄와 언약의 제사를 가리킨다. 따라서 여기에 다시 한번 속죄, 언약,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나라가 모두 함께 나온다. 예수의 속죄와 새 언약의 중보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함께 모이는 하나님의 백성 중의 일부가 된다.
요한계시록 1:5-7도 이스라엘의 언약에 기초해 하나님의 백성과 제사장들의 나라가 되었다는 출애굽기 19:5f.를 반영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께 대하여 나라로 만들었다. 이것은 필시 그가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았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이 그는 우리로 하나님께 대하여 제사장 노릇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다. 하나님의 옛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의 특권은 이제 교회에로 전이되었따. 그런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중보되었다.
요한계시록 5:9,10의 어린 양의 찬송시에서도 요한계시록 1:5-7에서처럼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께 “나라와 제사장” 삼은 것 때문에 찬양을 받는다. 출애굽기 19:5f.에서 하나님은 그의 구속과 언약에 근거하여 이스라엘을 그에 대한 제사장들의 나라로 삼았다. 이제 그리스도는 그의 구속과 언약을 세우는 죽음을 통하여 우리를 모든 민족들로부터 불러 하나님께 대하여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아 세상을 다스리게 하였다. 앞에서 우리가 보았듯이, 이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하나님께 대하여 제사장 노릇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었음을 의미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p.125)
앞의 비슷한 문맥(계 1:7,13)에서 다니엘 7:13이 실제로 인용되고 “한 사람의 아들(인자) 같은 이”의 환상이 서술되어 있다는 사실은 요한계시록 5:9,10에서도 예수의 사역이 “그 ‘사람의 아들’”의 사역의 관점에서 인식되고 있다는 견해를 확증해 준다. 만일 이런 고찰이 옳다면 요한계시록 5:9,10에서의 예수 사역에 대한 해석은 본 연구에서 해석한 최후 만찬의 예수 말씀(막 10:45의 말씀을 포함하여)과 완전히 일치한다.
이제 우리는 예수의 최후 만찬의 말씀 속에 있는 예수의 의도를 아래와 같이 확신을 가지고 요약할 수 있다.(p.129)
1. 예수는 자신을 “그 ‘사람의 아들’”, 즉 환상 중에 다니엘이 본 천상적 인물 ㅅㄴㅇ ㅂㄲ, 종말의 하나님 백성의 대표자, 하나님의 아들들을 대표하는 하나님의 아들로 이해하였다. 그 자격으로 그는 종말의 하나님 백성, 즉 하나님 나라를 받는 백성 또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종말의 백성에 관한 하늘의 어전 회의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계획을 실재화하도록 운명지어진 자로 이해하였다.
2. 그는 이같은 “그 ‘사람의 아들’”로서의 임무를 자신이 이사야 42-61장에 예언된 야웨의 종의 역할을 감당함으로써 성취해야 한다고 이해하였는데, 이사야에 예언된 야웨의 종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운명을 대신적으로 성취하는 자이다. 예수는 자신이 죽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여, 이스라엘의 죄(즉 그들의 불순종)에 대한 속죄와 구속을 이루며, 열방에 하나님의 구원을 중보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선교적 임무를 성취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따라서 그는 “많은 사람을 위해” 죽어야 했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그에 의해 대표되는 자들 (그의 부름을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예수의 대속적 죽음을 덕입는 자들)의 죄를 속하며 그들을 하나님의 새로운 종말 백성으로 하나님께 바친다. 따라서 이같은 죽음은 새 언약을 출범시키는 제사이다. 이와 같이 대신적 속죄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고 새 언약을 세우는 야웨의 종의 역할을 성취함으로써, “그 ‘사람의 아들’”인 예수는 종말의 하나님 백성에 관한 하늘의 계획(단 7장)을 실현하여야 하는 것이었다.
3. 그는 이같은 종말의 하나님 백성의 창조를 그의 βασθλεθα 선포의 절정으로 보았다. 그래서 βασθλεθα가 가까왔다고 선포했던 그는 최후 만찬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핵인 열두 명(또는 열한 명)에게 그들이, 그의 죽음과 부활(그리고 파루시아)을 통해 시작될 그의 나라에서 그와 함께 천국의 기쁨(bliss)과 통치를 나눌 것임을 가르쳐 준 것이다.
4.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그의 자녀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고 그 자격으로 그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기를 원하였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피조물인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해되어 우리가 다시 한번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르며 그의 사랑과 부요함으로 인하여 살도록(그렇다, 말 그대로 사는 것이다) 하기를 원했다. 이것이 구원이다. 예수는 자신이 이 구원을 이루도록 운명지어졌음을 알았다. 그는 다니엘 7장으로부터 이같은 자기 이해를 얻었고,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자기 칭호를 사용해 그것을 표현하였으며, 이사야 42-61장에 예언된 야웨의 종(Ebed Yahweh)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그것을 성취하였다.
제 5장 “그 ‘사람의 아들’”과
예수의 ‘압바’ 호칭,
하나님 나라 선포,
그리고 메시야적 자기 이해
1. 압바(Abba)
J. Jeremias가 반복하여 강조했듯이, 압바(ㅇㅂㅁ)는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독특한 호칭으로서 “예수의 하나님과의 관계의 중심”, 즉 예수의 아들로서의 의식을 표현해 준다.
하나님께 대한 예수의 독특한 abba 호칭은 하나님의 독특한 아들로서 자신이 자기를 따르는 자들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만든다는 예수의 자기 의식을 표현하고 있다.
abba 호칭과 “그 ‘사람의 아들’”이란 자기 칭호는 예수의 독특한 언어 사용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이며, 다른 어떤 것보다 예수의 자기 이해를 더욱 분명히 보여 주는 것들이다. 따라서 이것들은 서로 내용상 밀접히 연결되어 있을 것임이 분명하다.
2.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백성
βασθλεㄸα τξㅐ εξㅐ는 예수의 가르침의 중심적 주제이다 그는 임박한 하나님의 종말론적 통치를 선포한다. 진실로 그는 그 하나님 나라가 그와 함께, 즉 그의 말과 행위 안에서 이미 시작되엇다고 가르친다. 이렇게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는 자이며 따라서 하나님 나라는 그의 사역과 운명에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왕국 선포에서 예수가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 것을 목표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예수가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자기 칭호를 가지고 의도했던 바라고 우리가 확인한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안티오커스 4세 에피파네스의 엄청난 박해가 있을 때 다니엘 7장에 나타난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백성의 승리의 환상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믿음을 지키도록 하는 위로와 격려가 되었다. 이같은 예언은 “그 ‘사람의 아들’”인 예수 안에서 완성되는 것이며, 그 왕국은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게 곧 주어질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박해 아래 있어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의 추종자들에게 왕국을 주는 하나님은 “너희 아버지”라 불리어진다 - 이는 우발적인 것이 아니다! 그는 예수가 abba라 부르며 그의 제자들에게 “우리 아버지”라 부르라고 가르친 바로 그분이다. 그는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the Ancient of Days)로서 그의 아들은 다니엘에게 환상중에 “한 사람의 아들같이” 나타났다. 따라서 누가복음 12:32에서 예수는 실제적으로 자기 칭호를 사용하지 않고서도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 곧 하나님의 자녀들을 창조하고 대표하는 자인 “그 ‘사람의 아들’”로서 자기 이해를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이 한 구절에서 우리는 예수의 세 가지 특성들이 서로 결합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 즉 예수의 자기 칭호 “그 ‘사람의 아들’”, 하나님께 대한 예수의 abba 호칭, 예수의 βασθλεㄸα 선포. 그들은 모두 동일한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있다 : 즉,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에 의해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이 창조된다는 것이다.
3. 메시야적 자기 이해
자신의 권위적인 “아멘” 말씀들, 하나님에 대한 abba 호칭, βασθλεㄸα 선포, 죄 용서의 선언 들을 통해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의 전권 대사의 권위를 부여받았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사역을 계시와 구원의 종말론적 사건으로 나타내었다.
마가복음 14:58의 말씀을 사무엘하 7:12-15과의 관련지어 생각해 볼 때 예수의 메시야로서의 자기 주장을 짐작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아들을 자신의 아들로 삼아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한 집(즉 성전)을 짓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따아서 증인들과 대제사장은 예수의 성전 말씀 안에 메시야로서의 주장이 숨겨져 있음을 보았던 것이다.
성전 말씀에 함축된 메시야적 주장을 보았기에 대제사장은 예수에게 직접적으로 그가 메시야 곧 하나님의 아들인지 물어 본다. 예수는 긍정적으로 대답하나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그 ‘사람의 아들’”이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막 14:62 par). 이같은 대답은 대제사장에 의해 사형에 해당하는 신성 모독죄로 판결받는다(막 14:64).
예수의 메시야 주장은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예수의 자기 칭호가 그렇듯이 그의 아들로서의 인식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전통적으로 메시야적으로 해석되어온 사무엘하 7:12-15에 따르면 다윗의 아들 메시야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그 ‘사람의 아들’”로서의 자기 이해에 근거하여 종말의 하나님 백성을 창조하고 모았듯이, 그의 메시야적 자기이해로 인하여 종말의 하나님 백성을 창조하고 모았다. 사실상 그가 메시야인지에 관한 대제사장의 질문에 예수가 “그 ‘사람의 아들’”이란 용어로 대답했다는 사실은 예수에게 있어서 두 칭호는 동일한 의미임을 시사해 준다. 또는 예수에게 있어서 메시야 됨은 “메시야”란 용어보다 “그 ‘사람의 아들’”이란 용어가 더 잘 드러내 준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 ‘사람의 아들’”이란 칭호는 그가 어떤 종류의 메시야인지를 보여 주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자기 칭호에 대한 어떤 해석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옳다고 인정받으려면, 그 해석이 예수의 자기 칭호 이외의 방법에 의해서 표현된 예수의 메시야적 자기 이해와 일치해야만 한다.
예수 당시의 유대교에는 완전히 확립되어 보편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메시야에 대한 교리가 없었으며 또 예수가 예수 당시의 주된 메시야 개념들과 외관상 대조되는, 자신의 메시야직에 대한 독특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 6장 요한복음 1:51
요한복음 1:51은 야곱에 대한 탈굼과 랍비의 전승을 전제하면서 창세기 28:12의 말씀을 천사들이 야곱 위로 오르락 내리락 했다고 보는 해석을 받아들인 것 같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야곱이 “그 ‘사람의 아들’”로 대치되어 있다. 만일 천상의 인물 ㅅㄴㅇ ㅂㄲ에 관한 전통과 야곱에 관한 탈굼과 랍비의 전통이 동일하게 메르카바 환상 전승의 일부라면, 요한복음에서 야곱이 “그 ‘사람의 아들’”로 대치된 것은 납득할 만하다. 유대 문서에서는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주신 이스라엘이란 이름 때문에, 또 그가 그 민족의 조상이기 때문에, 야곱은 종종 이스라엘 민족의 내포적 대표자로 이해되었다. 즉 야곱은 그 자신 안에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내포하는 조상으로 이해되었다.
탈굼과 랍비의 전승이 메르카바 환상 전승으로부터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 있는 이스라엘의 조상(Stammvater) 야곱 안에서 (옛)이스라엘의 “apotheosis”(하나님처럼 됨)를 본 반면에, 예수는 자신이 메르카바 환상 중에 나타났던 “그 ‘사람의 아들’”이며 따라서 새 이스라엘의 조상(Stammvater)이라고 선언한다.
마가복음 14:55-62과 요한복음 1:47-51 사이에 또 하나의 흥미로운 병행점은 이들 모두가 예수의 성전 말씀과 관련되어 있다는 개연성이다.
구약의 두 전승들(창세기 28:12과 사무엘하 7:12ff.)은 요한복음 1:51의 “그 ‘사람의 아들’” 말씀에 동일한 의미를 가진 것들로 반영되어 있다. 요한복음 1:47-51에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왕으로 고백한 나다나엘은 메르카바 환상 중에 나타났던 천상의 인물 ㅅㄴㅇ ㅂㄲ에 관한 예언이 예수에 의해 성취됨을 보게 될 것이라고 약속받는다. 이 약속과 함께 요한은 그의 복음의 서론을 끝맺는다. 따라서 계속 이어지는 요한복음의 장들은 이 약속이 예수의 말씀과 행위, 특히 그의십자가 처형과 부활에서 어떻게 성취되는지 보여 줄 것을 기대하게 된다. 실제로 요한복음의 본론은 어떻게 예수가 새로운 이스라엘, 곧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하나님의 자녀)- 다시 말해 예수 자신 안에 체현하고 있으며, 미래에 예수와 함께 하나님의 집에 거하기 위하여 높임받게 될 백성을 창조하는가를 보여 준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51의 “그 ‘사람의 아들’”의 말씀은 마가복음 14:62과 상응하는 진정한 예수의 말씀이거나 혹은 마가복음 14:62 말씀에 대한 초기의 주석일 것인데, 하여간 자기 칭호로 예수가 의도한 바에 대한 우리의 해석을 확고히 뒷받침해 준다.
제 7장 다양한 형태의
“그 ‘사람의 아들’” 말씀들
1. “그 ‘사람의 아들’”의 수난과 부활 예고(막 8:31par ; 9:31par; 10:33par; 14:41par; snr 24:7) : 만일 예수가 자신을 야웨의 종의 역할들인 대신적 속죄와 언약세움을 성취함으로써 종말의 하나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 “그 ‘사람의 아들’”로 이해했다면, 그는 자신의 수난과 하나님의 옳다 인정하실 것을 미리 예고할 수 있었을 것이다.
2. “그 ‘사람의 아들’”의 집 없음(마 8:20 = 눅 9:58) : “그 ‘사람의 아들’”인 예수는 자기를 주장함이 아니라 자기를 내어 줌을 삶의 법칙으로 받아들이는 종말의 하나님 백성의 대표자이다(막 5:3-12, 38-48; 눅 6:20-36; 막 9:33-37par ; 10:42-45par).
3.마가복음 8:38par과 누가복음 12:8par : 예수를 영접하여 지금(이 거꾸로 된 세상에서 배척받고 빼앗김 당하는) 예수와 연합한 자들, 즉 그를 자신들의 대표자이며 머리로 인정하여 이제 자신들을 예수에 의해 대표되도록 하는 자들은, 재림 때에 “그 ‘사람의 아들’”/하나님의 아들에 의해 그가 대표하는 무리에 속한 자들로 또는 그가 머리로 있는 하나님의 백성(=하나님의자녀들)에 속한 자들로 인정받을 것이다.
4. 다니엘 7장을 언급한 “그 ‘사람의 아들’”의 영광 중에 옴에 관한 모든 말씀들 : “그 ‘사람의 아들’”의 옴은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 그의 사역의 완성이 될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우편(막 14:62par) 또는 영광의 보좌 위(마 19:28; 25:31)에 앉은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고 자기 아버지의 영광 중에 오는(막 8:38par ;akr 13:26par) 하나님의 아들로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막 9:9par). 그가 올 때 자기 백성을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으로 함께 모을 것이다(막 13:27=막 24:31). 그는 또한 심판을 베풀 것이다(마 25:31-46).
5. 지상에서 죄를 용서하는 “그 ‘사람의 아들’”의 권위(막 2:10par)와 죄인들과의 교제(마 11:19=눅7:34f. ; 눅 19:9f. ; cf. 막 2:15-17)
이 땅에서 신의 특권인(시 103편)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위”에 대한 예수의 주장은 세 가지 점에서 그의 자기 칭호와 연결되어 있다.
1)자신이 다니엘 7:13f.에 따라 하나님께서 자기 권세를 부여한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데 근거를 두고 있다.
2)이같은 신적 권세를 가진 “그 ‘사람의 아들’” 예수는 종말의 심판자(또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는 자)이며, 심판자로서 그는 죄 용서를 선언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진다.
3)“그 ‘사람의 아들’”은 자신을 죄인들을 위한 속죄제물과 언약을 세우는 희생 제물로 드림으로써 그들을 속죄받은 하나님의 종말 백성으로 만드는 자이다.
6. 안식일의 주로서의 “그 ‘사람의 아들’”에 관한 말씀(막 2:28par) : 안식일에 예수의 병 고침에 관하여 강조되는 사실은 그의 메시야적 권위와 임무를 나타내려 의도된 것이고, 자신의 왕국선포에 대한 주석이고 그가 가져온 basileia 또는 종말에 있는 구원의 상징적 표현이며, 인류의 타락으로 훼손된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종말적 회복을 목표로 한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원래 의도하신 대로의 진정한 안식일의 안식이 있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자기칭호 “그 ‘사람의 아들’”을 사용하여 스스로가 속죄와 언약을 세우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인류를 하나님과 화해시키며 그들을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피조물과 자녀들로서의 본래 상태로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나타내고자 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아들’”로서의 예수는 인류(와 나머지 모든 피조물)가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원래 상태로 완전히 회복되는 진정한 안식일의 안식을 가져오는 자이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아들’”(인자)은 안식일의 주이다.
로마서 8:18-23에서의 바울의 종말론적 안식일과의 관련 : 종말론적 안식일의 안식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최종적으로 드러날 때 오게 되는데, 그때는 곧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Αββα ㅌ οατ ρ!(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도록 하여 준 “그 ‘사람의 아들’” 예수를 통하여 이미 선취적으로 경험한 것이 완전한 실재로 드러날 때인 것이다(롬 8:15 ; 갈 4:6).
제 8장 “그 ‘사람의 아들’”과
예수의 죽음에 대한
구원론적 해석의 발생
예수의 죽음을 구원의 사건(heilsgeschehen)으로 해석한 부활절 이후의 선포가 하나님의 basileia가 중심이 되고 있는 예수 자신의 선포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는 항상 문제거리로 남아 있었다. 많은 학자들은 주저함이 없이 여기에 하나의 완전한 단절이 있음을 주장하는데,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부활절 이후의 케뤼그마에서 그것의 합법성의 역사적 근거를 박탈하고 그리하여 케뤼그마의 발생을 역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제거하였다. 심지어 이같은 급진적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 학자들도 그 관계성을 만족할 만하게 설명하지 못하였다.
H. Schürmann은 최근 예수의 자기 죽음에 대한 이해를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게다가 긍정적으로 연구한 학자이다. “예수의 독특한 죽음 이해”라는 치밀한 논문에서 그는 이렇게 주장하였다.
모든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말씀은 이러한 중심적 가르침 (즉 basileia 선포)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가 자신의 죽음과 관련하여 구원을 이해했음의 사실성에 관해 질문할 때, 이 죽음을 통한 구원과 basileia의 구원을 동일시하거나 관련지워야 한다. 십자가를 통한 구원은 본질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구원과 다른 것일 수가 없다.
H. Schürmann은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하나님의 통치의 도래와 관련하여 의미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많은 사실들이 그가 그것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그렇게 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라고 말한다. H. Schürmann은 “종말론적 구원을 가져오는 자” 예수가 죽기까지 고수했던 “남을 위한 존재”(proexistenz)(즉 다른 사람들, 곧 죄인들과 원수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자로서의 존재)의 자세, 그것은 그의 죽음이 구원의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지적해 준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러한 ‘위하여’(ㅈο ρ)라는 단어는 예수가 제공하는 임박한 하나님 나라의 구원만큼 광범위하게 - 그러나 역시 그만큼 불확정적으로 - 이해되어야 한다.
H. Schürmann은 예수가 자신의 죽음을 구원의 의미를 가진 것으로 이해했고 그것은 그가 선포한 basileia와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Schürmann은 예수가 그의 죽음에서 보았던 구원의 의미가 어떤 종류인지 또 예수가 어떻게 자신의 죽음이 basileia의 도래와 연결되었다고 보았는지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우리가 보기에 예수의 죽음을 구원의 사건(heilsgeschehen)으로 이해한 초대교회의 케뤼그마와 예수의 basileia 선포 사이의 내용상의 연결을 설명하는 방법은 당시 유대교에서는 매우 중요한 개념들이었던 속죄, 언약,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세 가지 개념들을 다리로 삼아 연결시키는 것 외에는 없을 것 같다.
“그 ‘사람의 아들’” 말씀을 통하여 예수는 자신이 야웨의 종(Ebed Yahweh)의 역할을 성취하여 자신을 속죄와 언약을 세우는 제사로 내어줌으로써 하나님의 종말 백성(=하나님의 자녀들)을 창조하며 그리하여 하나님의 basileia를 실재화하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나타냈다. 예수의 제자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것은 이같은 예수의 가르침을 옳다고 인정하신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의 속죄와 언약을 세우는 죽음 안에서 실현되었다고 보았으며 그들 자신을 새 언약의 백성, 하나님의 종말 백성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므로 예수의 죽음 - 하나님의 백성의 숙명을 대신적으로 성취하는 하나님 백성의 대표자(즉 “그 ‘사람의 아들’”)로서의 대신적 죽음은 ”우리를 위한“(for us) 구원의 사건(heilsgeschehen)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의 선포의 중심이 되었다. 예수의 basileia 선포에서 약속된 구원 -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 혹은 자녀로 만드는 것 - 은 예수의 속죄와 언약 성립을 위한 죽음으로 이룬 구원과 다른 것이 아니다. 예수는 공개적으로 하나님의 basileia를 선포하였으나, 그의 속죄와 언약을 세우는 죽음을 통한 하나님의 basileia의 실현은 오직 basileia의 약속을 이미 받아들여 이제 basileia의 실현 방법을 배울 수 있는 자신의 제자들에게만 설명하였다. 그것도 몇번의 결정적인 순간들에만 그렇게 하였는데, 그 중 하나는 최후의 만찬 때였다. 그리고 예수는 그것을 “그 ‘사람의 아들’”의 관점에서 설명하였다.
결 론
“그 ‘사람의 아들’”이란 칭호를 사용함으로써 예수는 환상 중에 다니엘에게 ”한 사람의 아들 같은“(ㅅㄴㅇ ㅂㄲ) 이로 나타난 천상적 존재를 가리키면서 자신을 지칭하였다. 그 존재를 하나님의 이상적 백성의 내포적 대표자, 또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대표하는 하나님의 아들로 이해한 예수는 자신을 다니엘에게 미리 계시된 천상의 구원의 계획을 실현하여 하나님의 종말 백성을 창조하도록 운명지어진 자로 보았다. 따라서 “그 ‘사람의 아들’”(=이상적인 하나님 백성의 대표자)로서 예수는 하나님의 백성의 숙명 - 언약에 따라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에게 복종하는 것 - 을 대신적으로 그리고 대표적으로 성취해야 하는 것으로 자신의 사명을 이해하였다. 즉, 그는 “그 ‘사람의 아들’”로서의 자신의 임무를 이사야 42-61장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숙명을 대신적으로 성취하며 대속과 새 언약의 성립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는 야웨의 종의 기능들을 성취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자기 칭호로 예수는 자신이 종말에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하나님의 자녀들)을 창조하여 그들로 하여금 창조주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부르며 그의 사랑과 부요함을 덕입어 살 수 있도록 하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은근히 나타내려 한 것이었다.
예수는 메시야적 자기 이해를 표현하기 위해 메시야, 다위의 아들, 또는 (아마도) 하나님의 아들 같은 전통적인 메시야 칭호들을 자신에게 사용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같은 칭호들은 당시 유행하던 정치적 정복자로서의 메시야에 대한 기대를 담고 있을 뿐 아니라, 정치적 의미가 없다 하더라도 예수의 메시야직에 대한 이해를 표현하기에 적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칭호들에 반해 “그 ‘사람의 아들’”은 완벽한 칭호였으니, 이는 예수가 다니엘서의 “한 사람의 아들같은” 천상적 인물의 관점에서 자신의 메시야직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부활 후의 교회는 “그 ‘사람의 아들’”인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하였다. 초대교회는 ㅅㄴㅇ ㅂ 또는 ㅌ υㅉㅜζ τξㅐ ν ρㅇοξυ를 ㅌ υㅉㅜζ τξㅐ εξㅐ로 바꾸었는데, 이는 칭호로서의 “그 ‘사람의 아들’”이 특히 이방 청중들에게 익숙치 않았고 심지어 오해될 수도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확정되고 높임받았기에 더 이상 “그 ‘사람의 아들’”이란 칭호 속에 예수의 하나님 아들 됨을 숨길 필요가 없어졌고 나아가 그 칭호의 진정한 의미,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미를 확실히 드러내 놓는 것이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
人 子 論에 관련된 참고도서 목록
신약신학. 레온 모리스(박용성) CLC p.370
________. G.E.래드(이창우) 성광. pp.207-226
________. 레온하르트 고펠트(박문재)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pp.246-279
________. 도날드 거스리(이중수) 성서유니온. pp.95-125
________. J.예례미야스(정충하) 새순. pp.373-398
신약성서신학. R.불트만(허혁) 성광. pp.23-34
____________. W.G.큄멜(박창건) 성광. pp.86-107
하나님 나라. H.리델보스(오광만) 엠마오. pp.222-240
예수와 하나님 나라. G.R.비슬리-머리(박문재)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pp.57-72
예수의 자기계시. G.Vos(이승구) 엠마오. pp.264-295
바울신학 및 신약신학 연구. 박형용. 합동신학원. pp.42-47
신약성서의 통일성과 다양성. 제임스 던(김득중,이광훈) 무림. pp.68-76
반더발 성경연구. (명종남) 연합. pp.364-365
예수의 난해한 말씀들. F.F.브루스(정명섭) 요단. pp.33-35
성서대백과사전 vol.7. 기독지혜사. pp.167-169
신약성서 신학사전. 제프리 W.브라밀리 편역. 요단. pp.1352-1361
Baker's 신학사전. (신성종 책임번역) 엠마오. pp.121-122
다니엘서의 메시야 예언. 간하배. 개혁주의신행협회. p.166
신약의 기독론. O.쿨만(김근수) 나단. pp.217-298
신약의 기독론 명칭연구. 박영희. 총신대출판부. pp.128-295
人子論. 한기태. 성광. 1983년.
“그 ‘사람의 아들’”(人子)-하나님의 아들. 김세윤. 엠마오
하나님의 아들. 마르틴 헹엘(김명수) 대한기독교서회
신약성서의 중심 메시지. J.예례미야스(김경신) 은성. pp.1-93
예수와 성전. 김세윤. 총신대학 대학원편.
- 형람서원. 한국개혁신학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