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눈에 반하다 / 임정자
1991년 9월 7일 토요일, 내게는 큰 사건이 있는 날이다.
큰언니에게 남편을 소개받았다. 만나기 일 년 전부터 말이 있었지만, 고향은 목포인데 직장이 강원도 원주,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만나지 않았다. 그런데 다시 내게 연락이 왔다. 첫 만남은 광주 고속버스터미널 안 서울 방향 매표소 앞에 있는 다방이었다. 일차로 커피를 마셨다. 혀끝에 단맛을 남겼다. 저녁을 먹자는 말에 나는 그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호수에 잔잔한 윤슬처럼 반짝이는 눈이 아직도 기억난다. 뭐 그때야 33년이나 알고 지내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만.
어느 던 강산이 세 번 변했다. 6개월 연애하고 결혼도 하고 지금은 나 닮은 딸, 남편과 판에 박은 듯이 똑같은 아들도 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아니 한 사람과 함께 살아온 시간에 대해 생각해 보면, 단순히 한 공간에서 공동으로 생활한 시간만이 아닌 상대방과 함께 역사를 기록하는 게 아닌가 싶다. 낯설고 어색했던 첫 만남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되었다. 30년이 넘도록 많은 일들을 해냈다.
결혼 초기 원주에서 살 때는 시댁과의 거리가 멀어서 좋았지만, 말동무 삼을 사람이 없었다. 일가친지 하나 없는 곳에서 심심했다. 유일하게 남편하고만 놀았다. 서로가 알 수 있는 시간이 짧았다. 생활방식을 맞춰가는 것이 큰일이었다. 별것도 아닌 일로 토라져서 며칠 말을 안 했던 적이 있다. 결정적으로 다른 입맛 사이에서 저녁 음식을 타협해야 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였다. 남편은 술을 좋아하고 나는 커피를 좋아한다. 이는 서로에게 적응해 가는 시간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서서히 드러나지 않은 서로의 취향을 알아가고, 관심사나 가치를 공유하게 되면서 점차 친해졌다. 같이 치악산을 오르고, 야구장을 함께 가고, 주문진항에서 회를 먹고, 가을이면 집 근처 논 가에서 메뚜기 잡아 볶아 먹었던 일 등은 함께 즐길만한 취미를 찾아 깊게 빠져들었다. 즐거운 기억이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수용하려는 노력이 자연스럽게 체험하여 알게 되었고, 우리는 친근하게 서로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시간이 더 지나면서 믿고 의지했다. 서로의 약점을 드러내 보일 용기가 생기고, 말다툼하고 남편이 어떻게 반응할지에 대한 두려움이 점차 사라졌다.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상대방의 마음을 읽고 보살펴 주려고 세심한 관심을 쓰는 일이 생기며 점점 더 단단한 관계가 되었다. 내가 서른아홉 되던 해 방송통신대학에서 공부할 때, 통계청에서 일할 때, 떡볶이 가게 할 때, 가족 간의 대소사를 챙길 때 많은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를 고민하면서 우리는 때로 친구처럼, 오빠처럼 서로에게 다가갔다. 나름대로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여러 선택을 함께 하면서 지금까지 온 것 같다. 부부는 상대의 노력을 인정하고 고마워하면서 만들어가는 것을 알게 되었다.
3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이어진 관계가 그다지 많지 않다. 부모님, 형제자매 말고는 남편과의 관계를 통해 아주 길고 깊은 관계를 체험해 본 것이 참 흥미롭고 재미있다. 또 우리의 관계가 의미와 가치를 주니 누군가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신뢰를 쌓으려고 노력하고 서로를 지지하고 성장하게 하는 동력이 되어주는 듯하다.
스스로 느끼기에, 결혼 하고 나서 나는 그전에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점을 몇 가지 알게 되었다. 일단 정서적으로 안정되었다는 것, 형제가 많은 친정에서 받아보지 못했던 작은 친절을 너그러운 시어머니에게 호의를 받으며 나를 성장시킬 기반을 마련한 것 같다. 언제나 지지와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가 원했던 것들에 도전하며 살아도 괜찮다는 것을 배웠다. 33년이란 시간은 정말 바쁘고, 다양한 경험들이 여러 색깔의 유리 조각들로 모자이크로 만든 스테인드글라스같이 느껴진다. 슬프게도 반짝였던 남편의 검은 눈동자는 흐릿해 졌지만.
첫댓글 세월이 약이겠지요.
힘든 시간 잘 견뎠으니 앞으로는 더 좋은 일이 많을 거예요.
고맙습니다.
하루가 쌓여 1년이 되고... 그리고 33년. 정말 긴 시간이네요. 여전히 처음 만난 날을 세세히 기억하시는 걸 보면 선생님 부부에게 시간은 별의미가 없는 거 같아요.
33년 동안의 결혼생활이 선생님에게 소중하게 느껴집니다.아직도 남편을 많이 사랑하시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