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북한산 숨은 벽(836m)
2023년 11월 01일(수요일) / 구름, 안개, 강풍 ( 15 º ~ 22 º)
산행시작 밤골매표소 : 경기 고양시 덕양구 효자동 산 14-1
산행종료 북한산성탐방지원센터 : 서울 은평구 대서문길 45
코스 : 효자2동 정류장 → 밤골통제소(국사당) → 숨은 벽능선 → 바람골 → 백운대정상 →
위문(백운동암문) → 북한산성코 스 → 북한산계곡길 →북한산성탐방지원센터.
(산행후 북한산성입구 승강장 탑승후 종로5가 광장시장 뒤풀이)
대중교통 : 서울역 3호선 구파발역에서 하차 → 구파발역 704승 차 →
"효자 2동"버스승강장 하차 → 밤골공원지킴터 탐방안내소
함께한 분들
민대감 / 피오나 / 풍경소리 / 이프로 / 깃비 / 청마(靑馬).
사진 촬영 청마(靑馬)
한 달 전부터 숨은 벽 산행을 계획하고 모든 산행준비를 끝내고 일기예보를 보니 강한 바람과 5~20 mm 비가 내린다는 소식에 걱정부터 앞서고, 대전역에서 07:10분에 출발하는 KTX를 타고 08: 25분에 서울역에 도착을 하고 지하철 3호선을 타려니 출근시간대에 걸려 바로 타지 못하고 다음지하철로 이동하여 구파발역에 내려 704번 버스로 환승하여 효자2동에서 내려 밤골통재소에 도착한다.
도착하기 전에 비가 왔는지 물기에 땅이 촉촉이 젖어있고, 주변들이 안개에 휩싸여 보기 어려운 데다 조금씩 바람이 불더니 점점 강도가 세지더니 숨은 벽에서 사진 담기가 위험한 상황까지 가고 민대감님 모자도 날아가고. 벗어놓은 배낭도 강풍에 날리는 힘든 상황까지... 모두 안전에 안전을 기하며 비만이라도 안오길 학수고대를 해가며 진행을 해본다.(비가 조금이라도 내릴 시에는 하산하기로 함) 제대로 숨은 벽의 암봉들을 안개 때문에 보질 못했지만 다음에 다시 한번 오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기로 하고 진행한다. 땀을 많이 흘리는 나는 강풍에는 좋았지만.. 암튼 우리 일행들은 안전하게 산행을 마무리까지 한다.
경기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효자동, 의정부시 [북한산 836.5m]
북한산은 백운대.인수봉.망경대 이렇게 세개의 봉우리가 있는 산이라 하여 삼각산이라 불리웠다 숨은벽은 백운대(837m)와 인수봉(811m)사이에 그들보다 조금 낮게 솟아 있는 봉우리이다. 백운대에 올라서서 인수봉쪽을 바라보면 중간에 작은 봉우리(768.5)가 하나 더있는데 이 봉우리에서 북서쪽으로 거대한성곽처럼 뻗은 바위 능선을 숨은벽 능선이라고 한다. 백운대와 인수봉 사이에 숨어있는 암벽이라 하여 숨은벽이라고 부르며 인수봉 북 서릉인 암릉과 백운대 서릉인 염초봉 능선이거대한 방벽을 치듯하여 이룬 공간 한가운데 마치 허공을 가로질러 걸쳐둔 구름다리같은 느낌을 주는 공간미가 아주 뛰어난 암릉이다.
숨어 있어 더욱 아름답고 그래서 찾는 사람이 많지않지만 북한산의 어느 코스보다도 호젓함과 놀라움과 새로움을 주는 암릉으로보고 있노라면 자연의 신비로움에 벅찬 감동을 안겨다 주는 숨은벽 능선. 가을 단풍이 가장 아름다운 코스인 북한산 숨은벽 코스는 우측으로 백운대 에서 염초봉으로 이어지는 암릉이 있고 좌측은 인수봉에서 설교벽으로 이어지는 기암괴석 절경과 정면에 숨은벽의 장엄한 암벽이 있어 가을 단풍의 진수를 느낄수 있는아름다운 코스다.
해골바위 모습
ㅇ
ㅇ
북한산성
백제가 위례성(慰禮城)을 도성으로 삼았을 때 도성을 지키는 북쪽의 방어성으로 132년(개루왕 5)에 쌓았다. 이곳은 고구려·신라 사이에 위치한 접경지이었기에, 삼국이 여러 차례 서로 바꾸어가며 점유하였다. 백제는 주력군을 머물게 하여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였는데, 특히 근초고왕(346∼375) 때는 북정군(北征軍)의 중심 거점으로 삼기도 하였다. 하지만 고구려는 475년(장수왕 63)에 북한산성을 포위하고 함락시킨 뒤 백제의 개로왕을 죽이고 도성을 함락하였다. 백제는 공주의 웅진성(熊津城)으로 도읍을 옮기고서 신라와 힘을 합쳐 고구려의 남진을 막았다.
그 뒤 신라는 553년(진흥왕 14)에 백제의 영토인 한성(漢城) 일대를 점령하고, 북한산 비봉에 순수비(巡狩碑)를 세웠다. 하지만 고구려는 603년(영양왕 14) 8월에 장군 고승(高勝)을 보내어 신라가 장악하고 있던 북한산성을 포위하였는데, 신라의 진평왕은 친히 1만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구원하였다. 661년(무열왕 8) 5월에도 고구려 장군 뇌음신(惱音信)이 말갈인 장군 생해(生偕)와 함께 북한산성을 20여 일 동안 포위하며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이때 성주(城主) 동타천(冬陀川)은 군민(軍民) 2,800인과 함께 필사적으로 방어하였다. 당시 신라는 백제부흥군의 연이은 공격을 받았으므로, 고구려에게 북한산성을 빼앗기면 한강 하류 일대의 주도권을 잃을 위기에 처할 수 있었다. 때문에 신라 무열왕은 승전에 대한 보상으로 성주 동타천의 관등을 제12관등 대사(大舍)에서 제10 관등 대나마(大奈麻)로 승급시켜 주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에도 북한산성은 전략적으로 중시되었다. 곧 고려 현종 때 거란이 고려를 침입하자, 현종은 태조의 유해를 모신 재궁(梓宮)을 이곳으로 옮기고 건물을 증축하였다. 1232년(고종 19)에 고려군은 이곳에서 몽골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1387년(우왕 13)에는 산성을 고쳐 쌓았다. 조선시대에도 산성을 고쳐 쌓는 역사(役事)가 계속 전개되었다. 곧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외침이 연이어 일어나자 북한산성을 도성의 외곽을 지키는 산성으로 쌓자는 의논이 일어났다.
그 결과, 1659년(효종 10)에는 국왕이 송시열(宋時烈)에게 명령하여 고쳐 쌓았고, 1711년(숙종 37)에는 왕명으로 대대적인 축성 공사를 하여 둘레 7,620보 크기의 돌로 쌓은 성벽을 완성하였다. 당시 성곽에는 대서문(大西門)·동북문(東北門)·북문(北門) 등 성문 13곳과 함께 시단봉(柴丹峰) 위쪽에 동장대(東將臺), 나한봉(羅漢峰) 동북쪽에 남장대, 중성문(中城門) 서북쪽에 북장대 등이 각각 설치되었다. 또한 1712년에는 130칸 규모의 행궁(行宮)과 140칸 크기의 군창(軍倉)도 건립되었다. 성 안에는 승군(僧軍)이 머물도록 136칸의 중흥사(重興寺)를 비롯하여 사찰 12곳을 두었고, 99곳의 우물과 26곳의 저수지가 있었다. 현재 산성에는 삼국시대에 쌓은 흙으로 된 성벽이 약간 남아 있다. 하지만 조선 숙종 때 쌓은 성벽 대부분이 성벽 위에 낮게 쌓은 여장(女墻)이 무너진 채 잘 남아 있고, 대서문과 함께 행궁터·장대터·우물터·건물터로 추정되는 시설의 일부가 확인되고 있다.
서암사(西巖寺)
서암사지(西巖寺址)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옛 절터다. 2007년 8월 13일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40호로 지정됐다. 서암사는 조선 숙종 37년(1711년) 때 북한산성 축성 이후 잦은 왜란과 호란에서 큰 활약을 했던 승려들을 활용하기 위해 산성 내에 건립한 11개 사찰 가운데 하나다. 규모는 133칸으로 승려 광헌(廣軒)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처음에는 고려 문인 민지(閔漬:1248~1326)가 살았던 유지가 그 옆에 있었기 때문에 민지사(閔漬寺)로 불렸다. 수문 일대의 산성 수비 역할을 담당하다가 19세기말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절은 전하지 않는다.
북한산성의 성문을 보통 12개로 알지만, 숨은 문 두 개가 더 있어. 홍수에 씻겨 내려간 水門, 그리고 ‘성문 안의 성문’ 중성문 남아 있어. 그렇다면 북한산성의 성문은 12개였을까? 답은 ‘아니다’이다. 대서문 옆 계곡에 수문(水門)이 있었는데 1915년 홍수에 무너졌으며, 나머지 유구(遺構)도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깨끗이 씻겨 나갔다 한다. 또 하나의 문은 중성문(中城門)이다. 북한산성이 축성된 다음 해(숙종 38년 1712년) 숙종은 친히 이 성을 살폈는데 대서문이 있는 서북 방향이 평지라서 적의 침략에 취약하므로 성 안에 겹쳐 성을 쌓았으니 중성(重城)이며, 이 성의 문 이름을 중성문이라 하였다. 그러니 북한산성의 문은 14개였으며 지금은 수문을 뺀 13문이 남아 있다.
광장시장에서 뒤풀이..
광장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청계천 3, 4가에 있던 광교와 장교로 광장시장의 위치가 이 두 다리 사이에 있다고 하여 붙인 것. 따라서 한자도 廣場이 아닌 廣藏을 쓴다. 다만, 1905년에 시장 개설 허가를 받을 때는 동대문시장이라는 명칭을 썼다고 한다.
서울 지하철 1호선 종로5가역 8번 출구 바로 앞에 입구가 있어 접근성이 좋다. 또한 아케이드 등 시설 현대화가 완료되어 다른 시장에 비해서는 (어디까지나 다른 시장에 비해서지만) 이동 여건이 좋다.
구한말 국내 정세가 혼미를 거듭하던 중 일본, 중국 등 열강세력의 각축장으로 국운은 풍전등화 격이었다. 1905년 고종 42년 을사조약 체결 후 실질적으로 주권행사는 일본이 장악했고 따라서 경제침략 정책을 기도한 바 그 한 예로서 남대문시장 경영권 장악하였고 경제적인 돌파구로 새롭게 문을 연 것이 종로의 광장시장이다. 1905년 우리나라 최초의 상설 시장 이 탄생한 순간이다.
원래 광장시장은 광교(너른 다리)와 장교(긴 다리) 사이를 복개하여 만들려고 했기 때문에 그 다리 이름의 첫머리를 따서 ‘너르고 긴’이라는 뜻의 광장(廣長) 시장이라 이름 지었으나 배오개로 터를 옮기며 이전 이름의 한글 발음은 그대로 둔 채 ‘널리 모아 간직한다’는 뜻을 새로 담아 현재의 광장(廣藏) 시장이 되었다.
시장개설 시 주요 거래 상품으로는 주로 농수산물, 신탄 등인데 가평·뚝섬 이천, 철원 등지에서 우마차로 반입하는 소규모의 단조로운 원시적인 시장 기능일 뿐이었으나 100년이 훌쩍 넘은 현재의 주거래 품목으로는 주단, 포목(한복), 직물(양복, 양장지), 여성의류제품, 커텐지, 침구, 수예, 나전칠기, 주방용품, 수입품코너, 청과, 건어물, 제수용품, 생선, 정육, 야채 등으로 상당량 거래 규모를 자랑하는 종합적인 면모를 갖춘 시장이 되었다.
또한 광장시장에서 가장 번화한 곳은 동문과 북 2문, 남 1문이 만나는 거리에 형성된 먹거리장터이다. 광장시장의 먹거리장터는 학생, 중장년층, 연세 지긋한 어르신까지 모든 연령을 아우른다. 현재 세계 관광코스로 지정되어 우리나라를 여행하는 많은 외국 관광객들의 경유지로 되어 있음을 자랑할 수 있다.
함께하여 더욱 즐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