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12일 주님 세례 축일>
하늘의 문을 열다
요한 1서 5장에 의하면,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에 관하여 친히 증언해 주셨다. 그래서 하느님의 아드님을 믿는 사람은 이 증언을 자신 안에 간직하지만, 이 증언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셈이다. (9-10)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증언하시는 분으로 등장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는 것은 하느님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것이요,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하느님의 증언을 거짓으로 치부하는 것이니, 하느님을 거짓말쟁이로 여기는 꼴이 된다.
창세기 3장에 의하면, 뱀이 여자에게 묻는다. “하느님께서 ‘너희는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는데 정말이냐?”(1ㄴ) 묻는 질문에 함정이 있다. 오히려 여자가 진상을 수정해준다. “우리는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를 먹어도 된다. 그러나 동산 한가운데에 있는 나무 열매만은, ‘너희가 죽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만지지도 마라.’하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2-3) 그러나 뱀은 여자에게 거짓 증언으로 유혹한다. 여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잊고 뱀의 거짓 증언에 속아 넘어간다. 속아 넘어갔다 해도 책임을 면할 수 없는 법, 사람은 에덴에서 쫓겨난다.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비(非) 구원(救援) 상황에 놓이게 된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 19-20)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유다 땅으로 가시어, 그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머무르시며 세례를 주셨다.”(요한 3,22) 사도행전에서 베드로 사도는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2,38)
뱀의 유혹으로 어두운 공포와 불안의 세계로 떨어진 인류에게, 하느님의 품에서 멀어지는 고통에 던져진 인류에게 하느님께서 친히 ‘증언자’가 되신다. 의심 많고 쉽게 흔들리는 인간에게 확신을 주시고자 하느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증언자’가 되셨다. 그 증언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이 당신 아드님에게 있다.”(1요한 5,11)라는 것이다. 공포와 불안에서 영원히 헤어 나올 수 없었던 인류에게, 분열과 불목의 고통으로 짓이겨진 인간의 삶에 새로운 생명의 길을 열어주신다. 뱀의 거짓 증언은 인류를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뜨렸으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나가는 문을 열어주신다.
불로 세례를 주실 분(마태 3,11ㄷ),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마르 1,8)께서 물의 세례를 받으신다.(마태 3,13. 마르 1,9. 루카 3,21) 그분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다 까닭이 있으셨다. 죄 없으신 분이 세례를 받으신 까닭은 하느님의 뜻이었다. “지금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하여라.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마태 3,15) 굳이 사양하는 요한에게 하신 말씀이다. 사람이 에덴에서 쫓겨난 사건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었다. 아버지 하느님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요한 6,40)이다.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예수님께서 오늘 물로 세례를 받으신 것이다.
뱀의 유혹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잃고-에덴에서 쫓겨나’ 평생을 헤매는 신세로 전락했지만, 예수님의 세례를 통해 우리에게 ‘참된 자아 회복-영원한 생명’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아담의 원죄로 굳게 닫힌 ‘하늘의 문’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활짝 열리게 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하나하나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원하신다. 우리 하나하나가 당신께서 심어주신 ‘참모습’을 회복하기를 원하신다. 불안과 공포로 얼룩진 인생살이에서, 불신과 분열이 가득한 인간관계로부터 성령의 세례, 불의 세례가 이루어져 참된 생명으로 나아가길 바라신다. 물의 세례가 우리의 신앙고백이라면 성령과 불의 세례는 거짓 자아와의 사투가 아닐까? 거짓 증언을 한 뱀의 유혹에서 벗어나, 참된 증언을 하시는 하느님께 의탁하는 것, 그리하여 거짓 자아의 유혹을 이겨내고, 그 가면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성령과 불의 세례가 아닐까? 물의 세례로 시작된 영원한 생명의 여정이 성령과 불의 세례로 완성되는 것은 아닐까?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카 12,49-50)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중략)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루카 12,57-59)
에덴동산 이래 인간은 자신과 분열된 채 세상을 떠돌았다. 뱀에게 속은 인간은 거짓 자아를 자신인 줄로 속은 채 세상을 살아간다. 그 세상살이가 어떠하겠는가?
“더러운 영이 사람에게서 나가면, 쉴 데를 찾아 물 없는 곳을 돌아다니지만 찾지 못한다. 그때에 그는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야지.’하고 말한다. 그러고는 가서 그 집이 말끔히 치워지고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면 다시 나와,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루카 11,24-26)
거짓 자아는 거짓 자아일 뿐 결코 ‘나’가 될 수 없다. 어설프게 ‘자아’를 찾게 되면 아니 찾는 만 못할 수 있다. 물론 우리가 죽어 하느님께 간다면 하느님께서 우리의 옷을 다 빨아주실 것이다. 그리고 더 좋은 옷으로 입혀주실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나에겐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이 있고, 나는 그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가장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는 삶은 자신을 알고 하느님을 알아 그분의 뜻을 살아가는 삶이다. 설사 깨닫지 못하고 하늘의 뜻을 알지 못했다 하더라도 다 용서받을 수 있겠으나, 삶을 ‘지루하게 사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것 같다. 자신의 거짓 자아에서 해방되지 못하고서는, 우리 인생은 참으로 지루하기 짝이 없는 드라마가 되기 쉽다.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묵시 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