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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항상 어렵다. 어렵지 않은 산은 가지 않는다. 어려운 산은 만나면 어린애가 되고 싶다. 계절은 항상 빠르게 다가온다. 산길도 어느새 다가온다. 이십년전에 늘 해마다 가는 영동 사군봉 월류봉 암릉 과 금강을
굽이치는 산길을 오는 초여름 산바람 따라 다녀왔다.
인간의 성격이란 원칙적으로 성질에서 나오는 것으로 삶에서 각인된 스스로의 착각으로
그렇게 되어간다는 것이다. 성격은 삶을 지탱하는 중심축이다. 척추가 근육과 뼈의 복잡한 상호작용으로 몸의 균형을 유지하듯 행동과 감정, 삶의 태도는 성격이라는 핵심구조에 따라 방향이 정해진다. 성격은 단순한 특성이 아니다. 생각은 감정에 영향을 주고, 감정은 다시 행동을 강화한다. 성격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성격은 내가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 즉 세상을 어떻게 해석하고 반응 할지를 결정짓는 바탕이다. 우리가 왜 지금의 성격이 되었는지, 프로이트는 인간은 자신도 모르는 무의식의 영향을 받고, '지금의 나를 만든건 오래전의 경험과 그때의 감정들' 이라고 과거의 상처를 떠올리고, 그때 눌려 있던 감정을 꺼내보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융은 성격이 무의식과 의식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과정속에서 발달한다고 말한다.
스스로 나는 이런 성격이야 라고 생각하는 특성들은 어쩌면 반복된 학습의 결과인지 모른다. 행동주의 심리학은 성격은 타고난 기질보다는 환경과 경험의 산물로 본다고 한다. 진화심리학은 성격은 결국은 인간이 생존하고 번식하는데 유리한 전략중 하나라는 것이다. 과거 환경에서 생존에 유리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이어져왔다는 것이다.
성격 심리학에서는 다섯가지로 구분하면 외향성. 성실성, 개방성, 우호성, 신경성으로 성격의특성을 나타낸다. 성격은 과거의 경험, 반복된 학습, 충족되지 않은 욕구, 유전적 경향등 많은 요소가 얽혀 만들어진다고 본다.
"나는 이성격을 꼭 껴안고 살아야 할까? 나를 정말 나답게 만드는 것은 뭘까?" 실존주의 철학의 샤르트르는 인간이 고정된 성격이나 정체성을 갖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며 자유로운 선댁과 행동을 통해 스스로 만들어 가는 존재라 한다. 인간이 자유와 책임을 자각하며 살아갈때 진정한 의미의 성숙이 가능하다고 한다. 성격이란 단순히 성질이 아니라, 영적인 성숙의 경로에서 점차 다듬어지는 여정이라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변화는 늘 불확실성과 낯섦을 동반한다. 지금껏 살아온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불편함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부딤감이 클수도 있다. 변화는 우리가 알던 세계를 흔들어 놓은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회피는 상실에 대한 두려움 과 연결된다.
내가 이루어놓은 관계, 역활, 신념조차 버리는 불안이 무의식적으로 나타낸다. 사람들은 기존의 믿음과 새로운 정보사이의 충돌을 불편하게 느끼며, 이 불편함을 줄이기 위해 변화를 피하려 한다 고 레온 페스핑거는 '인지부조화 이론'을 말한다. 언제나 선택의 기로에서 변화하는 쪽이 정답만이 아니다. 그러나 변화를 택하는 내면의 소리가 들리면 무시하지 말고 삶을 윤택한 쪽으로 가야한다.
이런 말로 "쾌를 가까이하고, 불쾌를 멀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좌절과 실망의 가능성, 관계에서 생길수 있는 예측 불가능한 사건들로 받게될 스트레스, 거절이나 버림받음의 상처들을 원천 봉쇄하려는 무의식적 의도는 피할려는 것은 무엇때문인가? 회피의 양상은 좋은 것을 허락하지 않는 마음, 필요한 것을 채우지 않는 마음, 해야하는 것에서 도망치는 마음이 우리가 무엇을 욕망하고, 어떻게 선택하며 살아가는 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기준이라는 것이다. 좋은 것은 감정적인 즐거움과 취향에 따른 선택이고, 필요한 것은 기본적인 생존과 안정, 성장에 필요한 것들, 해야만 하는 것은 자아실현의 목표, 자기주도적인 삶에 관한 것들이다. 좋아하는 것은 기쁨이요, 필요한 것을 충족하는 것은 안정이요, 해야하는 일은 성취감이다. 이세가지는 독립적이지만 종종 서로 얽히고 조화로운 것이 제일 좋은 변화이다.
아는 만큼밖에 못본다. 공부란 시야를 넓히는 것이다. 마음을 넓히는 것이다. 담을수 있는 크기만큼 밖에 못한다. 넓히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고 어렵다.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은 크기만큼 밖에 못한다. 말도 글도 배우는 만큼 밖에 못한다. 여행이나 경험도 넓히는 공부다. 산을 수없이 타는 이유는 넓히는 공부를 하는 것인지 모른다. 행복감을 느끼기 위해선 의식 그자체를 행복회로로 바꾸는 것이 좋다고 한다. 일상에서 행복감을 높이는 방법은 지적훈련 이라한다. 행복감이란 어떤 것에 대한 기계적 반응이 아니라 나의 해석 이기 때문이다. 결국은 해석의 폭을 넓히는데 있다. 지적 훈련이란 배우는 것이나 경험이 많어면 알아지는 것이 행복이다. 모르고 지나가면 복할수도 있다는 것은 모르는 자체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모르는 것은 다른 것이다. 몰라도 된다 하는 것과 모르면 언젠가 알아야 한다는 천지차이 이다. 공부는 자기 객관화를 이루게 해준다. 인간은 감각동물에서 지성의 동물로 가는 것을 알아야한다. 최소한 인문, 과학 교양이 필요하다. 왜 그러지는 알아야한다. 나도 인간이다라고 말할수 있어야한다. 객관적 지식은 우리모두를 작동방법과 조작방법을 경험하는 사람으로 만든다. 이것을 능숙하게 되면 지혜롭다는 것이다. 인간은 끝없이 배워야한다. 공자의 말대로 어린아이 에게도 배워야한다. 행복도 아는 자만이 느낄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경험 밖 세계를 알수없다. 내가 무엇인지 조차 모르는 것을 알아야하는 것이 인간의 기본이다. 나를 찻는 것이 가장 행복한 일이다. 그것이 공부이다.
인간은 누군가에게는 하나의 이름이라는 언어의 산물이다. 내가 붙인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커가면서 이름도 바꾸고 인터넷 상의 닉네임도 만드는 경우는 있지만 태어나면 사회에서 언어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 먼저 태어난 분들에게서 이름을 받는다. 언어의 바같세계는 존재한다. 절대로 생각해 본적이 없는 세계는 그 사람의 언어로 표현하지 못한다. 어느 세프가 자주하는 찬사가 말로 다하지 못하겠다고 한다. 인간은 자기앞의 현상을 언어로 정립해 받아들인다고 한다. 언어가 없어면 개념도 있을수 없다. 공부란 새로운 언어를 찻는 과정인지 모른다. 물리학을 공부하는 과학자나 새로운 원자구조를 연구하는 분들이나 가장 어려운 것이 새로운 의사소통을 할수있는 언어를 만드는 일이다. 스티브 쟙스나 머스크같은 창조적인 개념이 뛰어난 사람들도 가장 어려운 것이 새로운 미지의 언어를 만드는 일이다. 스마트폰이나 자율 주행차나 새로운 이름이 아니다. 이름의 조합일 뿐이다. 새로운 화학원소나 물리학에서 새로운 이론이나 나타내는 언어는 대딘하다. 우주의 탄생을 빅뱅이라는 언어를 나타내는 과학자는 신인지 모른다. 신이란 항상 새로은 차원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언어는 상상계를 내포하기에 완벽한 진실이 있을수 없다고 한다. 사실 그런 것이 있을수 없는지 모른다. 언어 바같의 세계는 느껴도 모르고 지나가기 때문이다. 재미있냐는 말보다 뛰어난 바같세계를 느끼지 못하니 언어를 만들어도 모르는 것이다. 언어의 사슬에 묶인 원칙이다. 그래서 침묵이 무서운 언어이다. "말할수 없는 것에 침묵하라 " 던 비트게슈타인의 인간의 언어 허실에 대한 답이다.
불가에서 번뇌란 보이는 것이나 느끼는 것으로 인한 원인의 결과라는 것이다. 원인이 있어니 당연히 마음에 남는 흔적을 지울수 없다는 것이다. 대상이 없어면 번뇌가 없다는 말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인간은 내마음도 못칫지만 자신의 마음에는 모든 것은 대상으로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족도 대상이고, 부모도 대상이고, 관계가 깊든지 멀든지 모두가 하나의 대상으로 저장한다는 것이다. 마음을 비우면 모든 것에서 벋어날수 있다는 불가의 석가모니 부처님의 육년동안 해탈의 경지에서 인간의 고뇌를 벗어난다는 말은 우리를 가르치지만 그 뜻은 참으로 항상 배워서 깨달아라 하는 말씀이다. 어른이 애들을 바라보면 애들이 무슨 소리를 하든지 받아주고 다스리고 보살핀다. 어느 경지에 오른 프로 선수의 감독은 자신의 선수들의 일수족을 바라만 보아도 알수가 있는 것이다. 이름난 교수님들이나 뛰어난 학자들은 배우는 학생 제자 들의 질문이나 생각을 다스릴줄 알고 계신다. 마음을 비우고 대상을 버린다는 것은 어느 경지에 오르지 않어면 할수없는 높은 성찰의 모습이다. 세상을 보는 혜안이나 어느 행위들이나 결과를 깨뚫어보는 사람들의 경험은 덜 익은 생각이나 서두르는 마음이나 바쁜 행동이나 결과를 아는 경우는 쓸데없는 짓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보이는 것을 어찌 누가 안보인다 하면 무어라 답을 할것인가? 마음을 비우는 일은 깨닫지 못하면 할수없는 경지 인것이다. 마음을 비우고 대싱을 멀리한다는 것은 모든 진리를 알지 못하면 할수 없는 일이다. 오늘부터라도 배우는 마음이 없어면 도달할수 없는 일이다.
마음에 모든 것을 알때까지는 비울수 없다.
인간에게 신이란 무엇인가? 신은 존재하는 것인가? 신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신은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가? 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신학에 대하여 무수한 인간들이 신앙으로 만드는 과정은 태고적부터 만든 것들이다. 현대는 많은 것들이 신을 대신하는 물질의 풍부시대에 산다. 비가 오지 않어면 기우제를 지내기보다 집에 수도관에 물이 계속 나오기를 바라고 비가 많이 오면 홍수의 피해를 견디는 시설의 유무에 관심이 많다. 질병도 바이러스가 침입하고 아프면 의사를 찻아가지 기도를 드리지 않는다. 모든 철학자들은 종교나 신앙에 대하여 지금도 계속 자신의 환경이나 관점으로 신이나 종교의 연구나 의견을 나타내고 가면 갈수록 편한 물질에 의존한다. 그러나, 불현듯이 위기나 고난을 얻어지면 마치 복권이 당첨되기를 바라듯이 기도를 하고 자신의 신을 만드는지 모른다. 무신론자가 많아지는 것은 신은 존재하지 않음을 특별히 고통스럽거나 생사를 흔드는 불안으로 받아들이지도 않고 신을 배우고 아는 것에 시간을 소비하기 싫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탄이 떨어지는 곳이나 위험에 노출되면
돌아가신 엄마를 부르는 것이 대부분이다.
무신론자는 대부분 편하게 느끼는 현실이나 복잡한 논리를 본인에게 적응 시키기에는 자신이 너무 관념에 쌓여있는 것이지 모른다.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는 자신만의 세계가 존재하는지 모른다. 그리고 같은 종교의 파벌로 마치 신의 대리인들의 광란을 좋게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종교가 경멸의 대상이라는 공산주의도 자신들을 신으로 만들어 무소불위의 교리를 앞세워 군림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종교를 만들고 믿음이 항상 존재한다. 단지 기존의 탈을 쓴 종교의 무지를 진리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모르는 것을 배척하는 것은 또 다른 맹신을 부르는 짓이다. 부정은 또 다른 긍정의 길로 들어가는 길이다. 무신론이란 다른 종교의 탈은 쓴것에 믿음과 사랑을 가지는 것 뿐이다.
이혼은 또 다른 결혼으로 가는 수단에 불과하다. 모든 인간은 한낱 인간일 뿐이다.
내가 무신 론자이고자 여겨지는 것에 대한 욕망과 추구하는 것은 비종교적이라 확신하는 것은 다른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모른다. 인간은 믿음이 없는 날은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에 믿음이나 위로가 주는 것은 인간이기에 편안함을 주는 안락이 아닌가? 배우자나 사랑하는 모든이가 종교가 될 수 있다. 사랑으로 대하는 모든 것들이 존재하는 한 종교는 가지고 배우는 것이 나은지 모른다.
철학자의 기질이란 본인에게 익숙한 걸 곧 본질로서 확대 적용하려는 성향인 세상을 전혀 모른다는 전제하에 비롯되는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하는 자신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가지는 불가능의 성취라는 것이다.
러설의 말대로 "철학자의 기질은 매우 드문데, 상충하는 두 가지 특징을 결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중 하나는 우주나 인생에 대한 일반적 명제를 믿고자 하는 강한 욕구이고, 다른 하나는 지적으로 타당해 보이는 근거가 없으면 쉽사리 믿지 못하는 무능력이다. 깊게 생각하는 철학자일수록 자신의 지적으로 납득할수 있는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스스로 만들어내는 오류도 더욱 더 정교하고 복잡해지는 법이다. 철학적 모호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철학자는 믿음의 능력을 잃어버리지 않고는 사유하지 못한다.
스스로의 앎도 의심의 그늘에서 끊임없이 세계를 관통하는 어떤 본질을 찻으려고 하고,
본인이 본질을 주장하더라도, 무수한 반례를 낳을수 밖에 없다는 사실에 직면하는 알고 철회를 할수없는 명제에 살아가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무슨 명제이든 본성상으로는 오류를 낳을수 없다. 반론도 오류를 낳을수 없다. 그것은 단지 철학적 명제이기에 끊임없는 반론에 시달려야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자신을 변호하는 해석적 풍부함이 우리 사회를 발전 시키는 것 들이다. 철학은 본질을 강력히 욕망하기 때문에, 어느 지점에서 이를 정립하고 만다. 그리고 끝까지 밀어 붙인다. 이런구도가 세계는 진리가 추론되어야 할 무대가 아니라, 반대로 구현되어야 할 무대이다. 그래서 철학자의 기 질은 매우 드뮬다.
돈과 생계는 근본적인 문제가 되는 것은 오래전부터 현실적인 일이다. 노동이란 일은 생존을 위한 값어치가 된지는 종교적으로 "일을하지 않어면 먹지도 말라" 는 말처럼 기본적인 이다. 그런데, 프롬과 일리치의 통찰처럼 '소유'의 삻에서 '존재'의 삶으로, '임금 노동'에서 ' 가치 노동'으로 바꾸는 것을 택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것이 진정한 경제적 자유라 한다.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 에서 '더 많이 갖는 것'에 사로잡힌 소유 중심의 삶에 갇혀있다는 것이다. 소비를 위한 노동이 소유중심 사고가 만든 결과라는 것이다. 노동 으로부터 자유는 소유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 뿐이다. 노동은 단순한 의무수행이 아니라 자신이 추구하는 내면의 가치를 중심으로 가야한다. 엄마가 가족을 위해하는 가사노동에 값을 주지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랑의 실천이다. 이반 일리치는 ' 가치노동' 으로 노동의 본질을 임금이나 직업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너머로 확장하라 한다. 가치 노동이린 단지 돈을 벌기 위한 일이 아니라, 인간 본연의 필요와 공동체적 유대를 바팅으로 자율적으로 실천하는 일이다.
누군가가 노동을 하면 많은 행위가 넓은 의미로 이타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노동의 본질이 경제적 보상에 있지 않고, 타인과 공동체에 대한 기여에 있다. 일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하고 삶의 주도권을 되찻는 능동적인 태도이자 기술이라는 것이다. 모든 노동을 긍정적인 시야로 보고, 연결고리는 모두에게 유용한 것이고, 하는 역활은 공익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는 것이다. 노동 으로부터 도피가 아닌 노동의 재구성이 필요하다. 존재의 이유는 노동의 신성함 이다. 좋아하는 일을 택하는 지혜는 자유로운 삶의 기본이다.
진화 생물학에서 브라운 헤어와 버네사 우즈는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 라는 저서에서, 인류가 지구상에서 가장 번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협력과 우정에 기반한 '다정함' 태문이라 한다. 적자 생존의 냉혹한 원리 뒤에는 우리가 모르는 다른 진실, 서로 배려하는 이타적 본성이 인류 진화의 핵심 유산이라 한다. 이들의 연구결과 경쟁과 생존의 논리만을 강요하는 현대사회를 넘어서
훨씬 근원적인 인간 본성의 실마리는 다정함이 인간에게만 극한 되는 것이 아니라 동물의 세계에서도 무리를 위해 희생하거나 서로를 보완해주는 이타적 행위가 우선이라는 것이다. 이타성은 인간만의 고유한 미덕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보편적이고, 효율적인 전략이라는 것이다. 농사를 짓는 농부는 우선 농토에 만물이 존재하기를 바라는 것이 좋은 것이지 키우는 작물만을 살리기 위해 다른 것들을 말살하는 것은 잘못된 발상이다.
자연은 서로 최소한의 먹이 사슬로 연결되어 유기적으로 살아가는 체제이다. 모든 생명체는 본래 서로에게 다정한 존재인지 모른다. 우리가 지구에 살면서 거대한 흐름 속에서 존재로 살아가면서, 동시에 그 흐름의 일부로서 끊임없이 타자와 상호작용을 하고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다. 우주도 서로가 작용하는 힘에 의해서 궤도믈 돌고 존재하고 이루는 것 같다. 프란스 드빌 은 공감의 시대라는 글에서 인간이 본성적으로 이기적이지 않고, 오히려 공감 능력과 협력 본능이 인간 진화의 핵심이고, 다양한 동물들은 서로를 위해 위로하고 도우며 고통을 나누는 모습을 발표했다. 공감이란 단지 감성적 교류가 아닌 생존을 위한 전략적 감각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생존과 번영을 위해 진화시켜온 본성이고, 연대와 이타성은 선택의 문제가 아닌 생명다움 그 자체라는 것이다. 타인과 연결을 끊어야만 자유를 얻는 이기심이나 경쟁은 소멸의 길이라는 것이다. 타자와 연결되고 그들에게 다정한 손길을 내밀때 자유는 비로소 빛을 내는 것이다. 개인이 진정한 어른의 자유로 서면, 그 존재가 타인과
관계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확장되는 '이타적 개인주의' 의 시작이다. 풍요로움이란 다같이 즐기고 나누는 것이다. 자유로운 존재가 타인과 따뜻한 교류는 충만한 풍요 로움 속에서 생존한다.
삶에는 목표가 있는가? 하는 질문은 하니마나 하지만 대부분은 마시는 공기처럼 일상으로 치부한다. 성공, 행복, 사랑 이 본질적인 세 가지가 인간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목표라고 한다. 성공은 단순히 부와 명예일수도 있지만, 내적 성장과 성취감을 가져야한다. 행복은 마음의 평안과 만족감을 통해 삶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할때 가능하다. 사랑은 인간 관계의 본질이자 삶을 풍요롭게하는 원천으로, 이해와 배러, 헌신의 의미를 되새긴다. 우리는 성공하기 위해 행복하기 위해, 서로를 사랑하기 위해산다. 성공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공은 하나의 결과로 이루려고 하지만 성공한 사람이란 성과보다 유지나 끊임없이 성숙의 여정으로 하는 개념이지 달성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성공한 이들은 존재의 유무를 떠나도 남아있는 것들이다. 타인을 위한 이타적인 마음이 나누어질때 성공의 유지는 나타나는 것이다. 행복은 이루는 것이 아니라 이루어 지는 과정을 아는 것이다. 지나고 나면 남아있는 것들은 지나간 것들의 아름다운 여정에 사라진 것들 뿐이다. 지금 이라는 순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게 감사할준 아는 순간이 가장 행복한 일이다. 행복은 혼자서 가지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타자에서 오는 반응으로 부는 바람이다.
행복은 거울에 보이는 나의 민낯으로 나타나는 지금의 모습이 쌓여있는 것을 아는 것이 우선이다. 산꾼이 조그만 바위위에서 행복은 기다라고 있다. 사랑이란 종교의 진리처럼 억압된 것이 아니라 배려하고 항상 변하지 않는 평소의 마음이다. 보상이나 결과물이 아닌 서로 각자의 개체의 독립성을 존중하는 바라봄이 우선이다. 사랑은 나누는 것에 아무런 흔적이나 부담이나 진정성이 없어면 줄수 없는 아침이슬 같은 순박함이다. 사랑하는 것은 희생이 없는 것은 부담이다.
성공, 행복, 사랑은 결과가 아닌 유토피아 이다.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새옹지마 塞翁之馬와 같다. 결과에 너무 연연 하지 말라.
우리가 뇌를 쉬게한다는 것은 마음을 쉬게 한다는 것과 같 다. 그러나 무슨 일을 하고 있을때나 쉬고 있을때나 뇌의 네트워크는 똑같은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휴식상태의 뇌의 네트워크와 일하는 동안에도 우리는 다른 생각이나 책을 읽는 순간에도 몽상에 빠진다는 것이다. 쉬고 있을때가 몽상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흔히 이야기 하는 주의력 결핍은 과잉행동장애, 즉 ADHD가 이런경우이다. 자꾸 생각을 곱씹는 것을 반추라 한다. 특히 우울증 있는 사람이 자신의 고통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반복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우울증 있는 사람은 과제 수행시 나 휴식중 이런 네트워크 의 내부연결상태가 증가하는 것이다. 우리의 뇌는 쉬지않는다. 외부의 과제에 집중하든지 집중하지 않든지 다른 과제에 푹빠져 산다는 것이다. 그러나 외부에 집중한 일이 없을때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거나 타인의 마음을 추론하는 일로 생각보다 바빠지고 지치고 있을지 모른다. 실제로 뇌의 마음이론 회로와 기본 설정 네트워크 는 항상 겹치기 때문이다.
어릴때부터 우리는 항상 뇌는 투잡인생을 살아가면서 수시로 기본설정 네트워크에 내면의 공터에 집을 짓고 살아가고 있다. 단지 좋아하는 일을 할때 뇌는 기분이 좋고 쉬는지 모른다. 첫째, 사랑을 할때 둘째, 운동을 할때 셋째, 대화를 나눌때 넷째, 놀고있을때 다섯째, 음악감상 여섯째, 걷거나 산책이라 한다. 가장 기분 나쁠때는 일할때고 돈버는 일을 할때가 다음이라하니 어쩔수 없이 뇌는 쉬지 못하는 것같다. 기분 좋은 일을 할수있도록 노력하는 것만이 마음의 네트워크 인 뇌늘 쉬게하는 것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명상이다. 명상이란 딴 생각과 직접적으로 경쟁하는 활동이다. 거창한 것도 아니다.
인간과 동물의 공동체적 일은 같은 지구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동물과 인간들의 차이는
단 하나의 이론은 인간위주의 동물 보호법이다. 인간의 소유물에 대한 당국의 허가와 승인을 다루는 법이다. 정확히 말해서 동물 보호법이 아니고 동물 활용법이다. 유럽 국가들과 미주지역 국가들은 동물에 대한 비합리적인 학대가 야만적이고 , 형법으로 처벌해야 한다고 한다.
이들의 주식은 육식이다. 인간은 자신의 공동피조물 에게 고통을 가하고 싶다면 마음대로 해도 된다. 합당한 이유만 있어면 된다. 동물들이 대입을 고퉁보다 그로써 인간이 얻을 이익이 더 크다는 이유만 있어면 된다. 육식과 동물실험, 모피및 가죽산업이 그런이유로 당연하다. 이것은 합리적 이유가 아닌 경제적 이유다. 합리적 이유란 개념은 최소한 정의를 내리기 힘들다. 이따금 길고양이나 애완견 학대로 처벌을 받는다.
그러나, 태어난지 하루만에 수많은 숫병아리들의 도살이나 모피사육을 하면서 하루에도 수천마리씩 도살하는 밍크들은 처벌을 하지 않는다. 동물 기본법의 주체는 동물이 아니고 '동물을 생명체로 존중해야 한다' 는 문구는 없고 동물 자체로는 소송을 할수 없는 인간들 만의 판단 뿐이다. 유럽 연합 이나 서구의 나라들은 동물사랑을 법으로 만들어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나라들을
미개한 나라로 동물보호를 앞세운다. 그들은 지금도 실험실에서 동물들을 학대하고 도살한다. 단지 몇몇 애완동물들이나 육식가공 공장들의 이익을 줄이기위한 단체들의 소송으로 이용된다. 인간들은 지구의 모든 종들을 희귀한 종을 만들고 보호한다 고 난리이다. 누가 그렇게 안들었는지는 중요한 일이 아니다. 인간들의 법적사항은 꽤 혼란스럽다. 인간과 동물은 자연 상항에서는 동일한 위치이다. 인간이 만든 문화 속에서는 보호라는 것은 허울좋은 법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아는 이가 있을까? 인간은 항상 어릴때부터 아는 것은 자기 위주이다. 끝까지 가는 인간은 항상 간단한 죽음뿐이다.
늘 당연히 저지르는 죽음은 나의 것이 아니라는 개념이다. 그러나, 항상 마지막에는 얻는 것은 본인의 죽음이다.
무더운 산을 가야하는 일은 누가 만든 원칙인가?
계절마다 험한 산에서 얻는 것은 무엇인가?
언제나 산이 주는 것을 받는 산꾼은 누구인가?
오라고 하지 않는 산에서 늘 허덕 거리는 산꾼은 신에 주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첫댓글 애럽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