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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07.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묵상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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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그들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을 인정하였습니다.>(갈라2,1-2.7-14)
형제 여러분 1 십사 년 뒤에 나는 바르나바와 함께 티토도 데리고 예루살렘에 다시 올라갔습니다. 2 나는 계시를 받고 그리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내가 다른 민족들에게 선포하는 복음을 그곳 주요 인사들에게 따로 설명하였습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나 전에 한 일이 허사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7 그들은 오히려 베드로가 할례 받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임받았듯이, 내가 할례 받지 않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임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8 할례 받은 이들을 위하여 베드로에게 사도직을 수행하게 해 주신 분께서, 나에게도 다른 민족들을 위한 사도직을 수행하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9 그리고 교회의 기둥으로 여겨지는 야고보와 케파와 요한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을 인정하고, 친교의 표시로 나와 바르나바에게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가고 그들은 할례 받은 이들에게 가기로 하였습니다. 10 다만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기로 하였고, 나는 바로 그 일을 열심히 해 왔습니다. 11 그런데 케파가 안티오키아에 왔을 때 나는 그를 정면으로 반대하였습니다. 그가 단죄받을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12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오기 전에는 다른 민족들과 함께 음식을 먹더니, 그들이 오자 할례 받은 자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몸을 사리며 다른 민족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13 나머지 유다인들도 그와 함께 위선을 저지르고, 바르나바까지도 그들과 함께 위선에 빠졌습니다. 14 그러나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에 따라 올바른 길을 걷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케파에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유다인이면서도 유다인으로 살지 않고 이민족처럼 살면서, 어떻게 이민족들에게는 유다인처럼 살라고 강요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복음<주님의 기도>(루카11,1-4)
1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3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4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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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07.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http://www.ofmkorea.org/ofmhomily/586034 2026.10.06 20:54 2026년 10월 7일 수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학교 말씀 기도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루카 11,1-4
먼저 눈여겨볼 것은 ‘순서’입니다. 제자들이 기도를 청하기 전에, ‘예수님께서 먼저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그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았기에 제자들은 청한 것입니다.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어제 마리아가 그분 발치에 앉았듯, 기도는 ‘그분을 바라보는 데서’ 배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방법(기술)’이 아니라 기도의 ‘내용’을, 그것도 아주 짧게 알려 주십니다.
첫마디는 “아버지”입니다. 이 한마디에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아버지’라는 말에는 이미 ‘자녀’가 담겨 있습니다. 그렇게 부르는 순간,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압니다 ―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똑같은 이름으로 하느님을 부름으로써, 우리는 그분과 하나가 됩니다. 성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가 삼위일체의 사랑을 노래했듯, 기도는 무엇보다 ‘사랑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청원도 놀랍도록 단순합니다. 아버지의 이름과 나라(그분의 일), 일용할 양식과 용서와 유혹으로부터의 보호(우리의 삶). 교회는 이 기도를 ‘복음 전체의 요약이며 가장 완전한 기도’라 부릅니다. ‘무엇을 청할지’만이 아니라 ‘어떤 순서로 청할지’, 나아가 우리 마음까지 빚어 주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기도에서 오늘 기념일이 태어납니다. ‘묵주 기도’는 ‘주님의 기도’로 각 신비를 시작합니다. 그러고는 성모송을 알알이 되풀이하며, 성모님의 눈으로 그리스도의 신비 ― 환희·빛·고통·영광― 를 하나씩 되새깁니다. 그러니 묵주 기도는 성모님께 갇힌 기도가 아니라, 성모님과 ‘함께’ 예수님을 바라보는 기도입니다.
영적 열매 성월의 눈으로 보면 묵주 기도는 ‘성실·온유·절제’를 익히는 조용한 학교입니다. 화려한 말 대신 단순한 몇 마디를 ‘날마다 꾸준히’ 되풀이하는 성실, 어머니의 부드러운 손에 이끌리는 온유, 말을 줄이고 한 가지에 머무는 절제 ― 이 되풀이 속에서 마음이 고요해지고, 열매가 천천히 익습니다. 열매는 하루아침에 맺히지 않고, ‘날마다’ 익어 갑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하고 청하라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자녀로 살고 있는가? 나는 ‘우리 아버지’라 부르며 모든 이를 형제자매로 여기는가? 나는 ‘용서하오니 용서하소서’를 감히 진심으로 바칠 수 있는가? 나는 단순한 기도를 ‘날마다’ 꾸준히 되풀이하는 성실을 지녔는가?
주님, 당신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로 살게 하소서. 단순한 기도를 날마다 꾸준히 바치게 하시고, 성모님과 함께 당신의 신비를 되새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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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07.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https://cafe.naver.com/f-e/cafes/30893450/articles/3276?boardtype=L&referrerAllArticles=true 2026.10.06. 15:21
피조물을 통한 회심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삶 안에서 태양이 참으로 자신의 형제임을 깨달았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프란치스코와 자연의 세계 피조물을 통한 회심 2026년 10월 6일 화요일 일리아 델리오 수녀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을 "자연의 신비가"라고 묘사합니다: [1] 프란치스코는 창조 세계를 꿰뚫어 보는 깊은 시선으로 관상(觀想)의 높은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를 "최초의 물질주의자"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세속적 의미가 아니라 가장 긍정적인 의미에서 하는 말입니다. 곧 그는 물질세계를 단순히 "무엇인가"로 보지 않고, "어떻게 존재하는가"로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곧 하느님의 창조 세계였던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자연의 신비가"로 불리며, 광대하고 아름다운 자연의 들판 속에서 하느님을 발견한 분으로 묘사됩니다. 자연의 신비가는 창조 세계를 하느님의 손길로 인식하며, 피조물 안에서 신비로운 체험을 하는 이들을 가리킵니다. 곧 자연은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표징이 되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의 자연 신비주의는 하느님을 의식하는 깊은 내적 감각과 함께, 경외와 감사라는 올바른 신앙적 태도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물질 세계 안에서 자발적인 기쁨을 누리며, 음유시인처럼 그 아름다움을 찬미했습니다. 또한 그는 꾸밈없는 즉각적인 친밀감으로 자신을 창조 세계의 가족 안에 속한 존재로 느꼈습니다. 델리오 수녀는 프란치스코의 회심이 점차 깊어졌음을 설명합니다: 프란치스코에게 있어서 창조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는 일은 단번에 이루어진 체험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사랑 안에서 점차 성장해 가는 과정이었습니다. 회심은 느리고 평생에 걸친 여정으로, 죄 중심의 태도와 행동에서 벗어나 하느님 중심의 관계로 나아가려는 끊임없는 노력입니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의식은 점차 변화하여, 타인과의 관계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까지 새롭게 바라보게 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평생을 통해 자신이 인간뿐 아니라 모든 창조 세계와도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가 죽기 1년 전인 1225년에 지은 「피조물의 찬가(Canticle of Creatures)」는 바로 이 우주적 친교, 곧 태양과 달, 별, 불과 물, 그리고 온 우주와 맺은 일치의 관계를 노래합니다. 성인은 마침내 자신이 참으로 태양과 달, 별, 불과 물, 곧 온 우주의 형제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보나벤투라는 자신의 저서 대전기(Major Legend)에서 프란치스코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깊어지는 경건함"으로 묘사합니다. 여기서 "경건함"(pietas)이라는 라틴어는 단순히 종교적 태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 "혈연적" 혹은 "가족적"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곧, 경건은 종교적 유대나 혈연적 관계, 인간 사이의 친밀한 결속에 대한 존중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보나벤투라는 프란치스코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이 모든 존재와 "가족적" 친밀성을 지니고 있음을 깨달았다고 강조합니다. 이는 인간뿐 아니라 창조 세계의 가장 작은 피조물에까지 확장된 친교였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성은 그리스도와의 일치 안에서 우주적 친교로 넓어져, 모든 피조물을 형제자매로 받아들이는 사랑의 시선으로 완성되었습니다. 보나벤투라는 모든 피조물이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하느님을 "말해 주었다"고 주장합니다. 성인은 창조 세계의 모든 면모 안에서 하느님의 선하심을 "보게" 되었고, 결국 모든 것이 그를 말씀(로고스)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창조 안에서 하느님을 "보게" 되었다는 것은, 그가 피조물 안에서 하느님을 관상했다는 뜻입니다. 관상은 현실의 진리를 꿰뚫어 보는 깊은 시선이며, 프란치스코 성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사물의 진리를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우리가 땅과 동물의 지혜를 자주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에 그 지혜를 인정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지혜는 인간의 지혜와는 다르지만 결코 덜 소중하지 않습니다. 인류는 함께 살아가지만, 동시에 우리가 걸어가는 여정 속에서 자연 세계와 영원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가 동물과 나무, 그리고 모든 자연 안에서 발견하는 지혜는 언제나 제 집이 되어 줍니다. —Nancy B. Reference [1] Ilia Delio, A Franciscan View of Creation: Learning to Live in a Sacramental World (The Franciscan Institute, 2003), 6, 11, 12, 16.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Richard Bell, untitled (detail), 2022,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창조의 신비는 우리가 잠시 멈추어 아주 작은 것, 이를테면 한 줄기 풀잎 위에 맺힌 이슬을 바라볼 때 가장 깊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마치 하느님께서 피조물 안에 숨겨 두신 은총의 흔적을 발견하는 순간과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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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07.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10.07 03:51
- 본받을 점 두 가지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바오로 사도를 한편으로는 존경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존경할 수 없고 싫어하기까지 합니다. 어제와 오늘 갈라티아서의 바오로 사도 모습 때문입니다.
어제와 오늘의 바오로 사도는 매우 독선적으로 제게 보입니다. 독불장군이라는 말이 있는데 제겐 그런 사람처럼 보이는 겁니다.
어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때에 나는 어떠한 사람과도 바로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독선적으로 또는 독불장군처럼 보입니까? 아무하고도 상의하지 않는 사람, 인간하고는 상종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하고만 상관하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오늘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에 따라 올바른 길을 걷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케파에게 말하였습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자기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처럼 말하는 것도 그렇고, 모든 사람 앞에서 베드로 사도를 비판하는 것도 그렇고, 꼭 그렇게 해야겠습니까?
이것이 제가 싫어하고 그래서 비판적으로 보는 관점이라면 바오로 사도가 이렇게 하는 데는 좋은 뜻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의 관점에서 보면 분명히 좋은 의도가 있을 것입니다.
먼저 아무하고 상의하지 않았다고 한 점입니다. 그것은 프란치스코가 유언에서 한 말과 비슷한 맥락일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주님께서 몇몇 형제를 주신 후 내가 해야 할 일을 아무도 나에게 보여주지 않았지만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친히 나에게 거룩한 복음의 양식에 따라 살아야 할 것을 계시하셨습니다.”
은총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직접 은총과 간접 은총이고, 직접 계시와 간접 계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누구를 통하지 않고 직접 은총과 계시를 내리기도 하시고, 누구를 통해 은총과 계시를 내리시기도 하는 분이심을 우리는 믿습니다.
바오로 사도나 프란치스코는 자기가 받은 사명이 주님 친히 내려주신 것이라는 확신이 강했던 사람들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독선적이고 독불장군이기에 그리 말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공개적으로 베드로 사도를 비판한 것에 대해서도 보겠습니다. 제 생각에 그것은 베드로 사도가 여러 사람 앞에서 악표양을 보였기에 여러 사람 앞에서 비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그래서 또 편지로도 이 얘기를 다시 거론하는 것일 겁니다.
바오로 사도를 좋게 이해하고 그래서 본받는다면 하느님께서 주신 사명에 대한 그의 확신과 공의를 세우기 위한 그의 엄격함을 본받는 오늘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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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07.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https://cafe.naver.com/f-e/cafes/30893450/articles/3277?referrerAllArticles=true 2026.10.07. 05:30
주님의 기도, 우리의 기도
우리에게 익숙한 「주님의 기도」는 마태오 복음의 것을 사용하지만, 오늘 우리는 루카 복음의 더 짧은 형태의 「주님의 기도」를 만나게 됩니다. 마태오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표현한 데 비해, 루카는 단순히 "아버지"라고만 합니다. 마태오 복음 전체에서 스무 번이나 쓰이는 이 긴 표현은 그의 문체적 특징으로 볼 수 있는데, 이 표현은 예수님의 직접적인 말씀이라기보다는 마태오의 신학적 강조로 이해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마도 단순히 "아버지"라고 기도하셨을 겁니다. 제자들이 "주님, 저희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청한 것은 다소 낯설게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유다인들은 어린 시절부터 매일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자신들만의 고유한 기도를 청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에게는 특별한 기도가 있었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이 바로 「주님의 기도」입니다. 따라서 이 기도는 단순한 기도가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주어진 독특한 표징의 기도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기도 안에는 그리스도의 신비가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신 자신이나 당신의 수난, 죽음, 부활, 삼위일체 등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이는 곧 이 기도가 예수님 당신 '자신의 기도'였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기도 안에서 오직 아버지께만 마음을 집중하셨고, 당신 자신을 생각하지 않으셨던 겁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우리는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곧 그분의 기도를 함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전에 한 번 언급해 드린 대로 이 기도는 주님의 기도이기도 하면서 우리의 기도이기도 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과 너무 가까이 일치되어 그분을 따로 바라보지 않고, 오직 아버지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마치 예수님의 시선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것처럼, 우리는 그분과 완전히 하나 되어 아버지를 향해 그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전례의 기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로 끝나며, 성찬 전례의 마지막에서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다음 주에 기념하게 될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이 주님의 기도를 온 마음을 집중하여 바치는 것이 오랜 관상 기도보다 더 훌륭한 관상기도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기도라서 우리가 무심코 바치는 기도이지만 이 기도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기도요 우리 존재를 주님과 하나 되게 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때로는 보이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그것은 그분이 모든 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온 세상을 당신의 마음 안에 끌어들이셨고, 우리의 시선보다 더 가까이 계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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