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 (308) / 스위스
생갈 수도원(Convent of St Gall; 1983)
생갈 주[Canton of St Gall], 생갈 도시[Town of St Gall]에 위치한 생갈 수도원은 카롤링거 왕조 시대의 위대한 수도원의 완벽한 모범을 보여 준다. 8세기부터 1805년에 세속화될 때까지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곳 중의 하나였다. 이곳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풍부한 장서를 갖춘 도서관이 있다. 그리고 가장 초기의 것으로 알려진 양피지에 그린 건축 설계도를 비롯하여 귀중한 옛 필사본들이 소장되어 있다. 이 수도원의 건물들은 1755~1768년에 바로크 양식으로 개축되었다. 성당과 도서관은 1200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이어진 활동을 보여 주고 있으며, 이 유적지의 건축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다.
생갈 수도원은 대규모 베네딕토회 수도원의 전형적인 예이며, 예술과 지식의 중심으로서 풍부한 장서와 필사본들을 소장하고 있다. 수도원의 공간을 계속 재조정한 것은 이곳의 종교적, 문화적 기능이 단절되지 않고 이어졌음을 보여 주는 증거이다. 이 수도원은 아헨 공의회[Council of Aachen]의 규칙에 따라 수도원 건축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일랜드의 수도사 갈루스(Gallus; 550?~612)가 슈타이나흐(Steinach) 계곡으로 들어가 은거 생활을 한 것이 612년이었다. 생갈(St. Gall)로 유명해진 곳에 747년 오트마르(Othmar) 수도원장이 베네딕토회 수도원을 건설하고 같은 시기에 학교를 설립했다. 9세기와 10세기에 걸쳐 생갈 수도원은 서양 문화와 과학의 중심지로서 가장 명성이 높은 곳 중 하나였다. 고츠베르트(Gotzbert; 816~837)가 대수도원장을 지내던 시기에 수도원의 명성은 최고에 이르렀다. 생갈 수도원의 설계도로 알려진 그 유명한 양피지 평면도를 그에게 보낸 사람은 아마도 라이헤나우의 수도원장이자 바젤(Basel)의 주교인 하이토(Heito)였을 것이다. 아헨 공의회의 규칙을 따르고 있는 341개의 주석이 달린 이 건축 설계도는 필사실과 도서관을 포함해 베네딕토회 수도원의 이상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다. 젠하우저(Sennhauser)의 생갈 발굴 작업으로 이 획기적인 설계도가 부분적으로 반영된 것으로 드러났다. 818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루트비히 1세(Ludwig the Pious; 778~840)가 카롤링거 왕조 교회 개혁을 하는 과정에서 수도원은 제국에 바로 종속되며 제국의 면책 특권을 받게 되었다. 이로써 수도원은 콘스턴스 교구에서 독립할 수 있었고, 왕의 직접적인 보호를 받게 되었다. 883년에 동프랑크 왕국 루트비히 2세(Ludwig II)는 독일 왕 스스로 수도원장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되었고, 마침내 854년에 콘스턴스(Constance) 주교에게 십일조 헌금을 내야 하는 의무에서 벗어났다. 생갈 수도원은 마침내 완전한 자치를 얻었다. 1206년 이후에는 제국의 왕자들이 수도원장을 맡아 생갈 도시[Town of St Gall] 퓌르스텐랜드(Furstenland)를 다스렸다. 그리고 1468년 이후에는 토겐부르크(Toggenburg) 카운티에까지 그 지배력이 미쳤다. 당시 왕족의 수도원은 도시 주변의 영토를 다스렸고, 그러면서 수도원을 도시와 단절시켰다. 이것은 종교개혁이 일어나 독립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사실 종교 개혁은 한동안 수도원을 해체하려는 위협이었다. 그러나 1531년 이후 성직자의 통치권이 부활했다. 하지만 토겐부르크에는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었다. 수도원의 통치는 1798년 프랑스 군대가 생갈에 들어오면서 실제로 끝이 났다. 1805년에는 수도원은 해체되었는데 성직과 행정의 후임자는 사실상 새롭게 만들어진 같은 이름의 주교직이었다. 이는 처음에는 쿠르(Chur)와 생갈의 자매 교구로 설립되긴 했지만 법적으로는 독립되어 있었으며, 1847년에 쿠르에서 떨어져 나왔다. 1836년에 이 교회는 성당이 되었다. 1960년 이후에 시작된 조사로 건축 터와 몇 가지 건축 요소들을 발견했다. 이는 한때 장엄했던 카롤링거 수도원의 흔적이었다. 이후 여러 차례 재건 작업을 했다. 완전한 바로크 양식의 성당[옛 수도원]과 도서관의 현재 모습은 18세기의 건설 활동 결과이다 |
첫댓글 귀한 유적 오래오래 보존되어지길 ~ 잼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