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젖은 강물 위로 꺼질 듯 작은 생명 하나 불꽃 시를 쓰며 가는구나 어둠의 강가강에 혼자 앉아 다짐한다 이제 삶이 무엇인지 더 묻지 않으리라 내가 누구인지도 다시 묻지 않으리라 시인의 강물인 대지 위를 흐르며 저 꽃등처럼 목숨 사루어 시를 쓰며 떠가면 되리라
― 「깊은 강」 전문
이성선 시인은 이 시를 4월 7일 소양강 속에 있는 청평사에서 낭송했다. 시사랑문화인협의회가 개최한 강변시낭송회에서다. 그리고 5월 4일 ‘꽃등처럼 목숨 사루어’ 한 줌 재가 되어 그가 그토록 좋아했던 설악산 백담사 계곡에 뿌려졌다.
나는 백담사 가는 길에 강변시낭송회에 들러 이 시인을 만났다. 예순의 나이에도 예의 티없이 맑은 얼굴로 이 시인은 우리 일행에게 “나도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이 시인은 그 곳에서의 시낭송과 강연 일정 때문에 우리와 함께 떠날 수 없었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토끼같이 맑고 애처로운 눈으로 거듭거듭 함께 백담사에 가자고 졸랐다. 그런 이 시인을 남겨두고 누가 뭐래도 그의 산일 수밖에 없는 설악산과 백담사로 일행은 발길을 돌렸다.
백담사의 무산(霧山) 큰스님에게서 우리 일행 셋은 각자 속세에서의 삶의 어려움을 밤새도록 털어놓으며 ‘문둥이 철학’을 배웠다. 나만 삶이 너무 어렵고 마음이 흔들려 백담사를 휘이휘이 찾은 줄 알았는데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문학의 흐름, 특히 유통 과정이 불만이었다. 좋은 문학은 안 읽히고 제발 문학의 이름으로는 읽히지 말았으면 좋을 작품들이 시·소설 베스트셀러의 수위를 달리는 세월이 오래 전부터 계속되어 오고 있다. 더구나 실망스러운 것은 문학 평론 저널리즘마저도 상업문학의 도저한 흐름에 저항할 여력을 잃고 투항, 오히려 그것의 선전에 앞장서고 있지나 않은가.
“스님, 적들은 발칸포 같은 자동화기로 화력을 쏟아붓고 있는데 저는 개인참호 속에서 따콩따콩 단발식 장총을 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좋겠습니까?” “걱정할 것 없다. 문둥이가 되어 뿌려라!”
스님은 6·25 전후 강산도 헐벗고 민간도 너나없이 가난했던 시절의 탁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 마을 저 동네로 손 저리게 목탁 두드리며 하루종일 탁발을 다녀도 겉보리 한 됫박 시주 받기 어려웠다. 그런데도 팔다리 없는 상이군인들은 금방 하루치를 동냥했고 더구나 문둥이들은 문 열고 손 벌리기도 전에 하얀 쌀이 나오더라는 것이다. 그래 스님도 문둥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문둥이 행세를 하며 탁발했다는 것이다.
스님에게는 안 내주는 목숨과도 같은 양곡을 그들에게는 왜 ‘선뜻’ 내주었겠는가고 묻지는 않았다. 천형에 걸린 사람이 먹고 살아남기 위해 남의 눈치를 살핀 일이 있겠는가. 그런 절체절명의 일이라면 뭐가 외롭고 고달프다 엄살피울 수 있겠는가.
자신의 출판사에서 낸 책이 독자들에게 많이 읽힐 가치가 있어 베스트셀러로 올리기 위해 다른 출판사 하는 행태대로 며칠간 사재기를 했다가 양심의 가책에 시달린 출판인. 교수 생활과 논리적인 연구를 하며 순수시 쓰기가 힘들다는 시인 교수도 문둥이 이야기를 들으며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음날 아침 우리 셋은 백담계곡으로 나가 흐르는 물을 바라보고 그 소리를 들었다. 계곡 물빛은 어떤 색깔이던가. 물빛인가, 아침 하늘빛인가고 골똘히 생각케 하는 그 포르스름한 빛깔이 곧 물빛을 바라보는 우리 마음자리의 빛깔임을 알았다.
그래, 우리는 우리의 본디 마음자리를 다시 한 번 확인하기 위해 백담사로 온 것이다. 흔들림 없이 그 순수를 지키기 위해. 그러나 순수 그 자체이며 이 계곡의 주인인 이성선 시인은 정작 떼놓고 왔다. 그리고 한 달도 채 못돼 이 시인의 부음에 접했다. 심장마비로 타계했으며 “죽음을 외부에 알리지도 말고, 부조도 받지 말고, 화장해 설악산 백담계곡에 뿌려달라”는 유언까지 남겼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청평사에서 내게 백담사에 데려가 달라고 부탁한 것은……
부음을 듣고 나서야 나는 그날 이 시인이 낭독한 시 두 편을 처음으로 읽었다. 「깊은 강」이란 시에 해탈의 그림자가 드리워지지 않은 어느 한 구절이나 있는가. 그때 벌써 이 시인은 편안하게 죽음을 맞아들이고나 있지 않았겠는가. 그날 낭송한 두 편 중 다른 한 편도 읽어본다.
소나무 더욱 몸 기울여 좋은 날 구름 속에 들어가 잠들고 싶네 비 그친 하늘 푸른 구름 열치고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운문사 이끼와 천둥이 싸우는 방에 들어 물 한잔 얻어 마시고 좌선하고 싶네 운문사 가보니 소나무들이 구불구불 서서 그 안으로 길을 열어주고 있었네 함께 쉬고 싶은 사람 만나서 차라리 혼자 들어가 문 닫아 걸고 세상 무소식으로 밥 끓여 먹으며 복사꽃빛 얼굴 둥둥 떠 지나가는 학인 비구니 스님 모습 보고 있으면 좋으리 달도 여기 와서 머리 깎고 산을 넘으며 그네들 슬쩍 훔쳐보고 웃음 흘리네 이 속에 들어 모두 늙지 않을 때 오히려 나 혼자 늙어 꽃처럼 오그라들어 세상 향해 두 발만 내보이고 잠들고 싶네
― 「운문사(雲門寺)」 전문
구름 속 문 열고 들어가 이 시인은 이제 좌선하고 있는가? 구름 속 문 걸어 잠그고 세상 무소식으로 밥 끓여 먹고 있는가, 잠자고 있는가? 영결식에 가보지도 못하고 착잡한 마음에 술잔이나 기울이며 이 시인의 시를 되뇌고 있는데 대구 서지월 시인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평소에 정분이 두터워서 이대로 가시게 할 수는 없다는 듯 「이별」이라는 추모시 한 편과 함께.
“이 세상에서 오직 한 사람/빛나던 별이 설악의 산정에서 내려와/이제는 백담사 골짜기 물소리에/귀열고 가버렸습니다/오지 않는 사람 되어 보이지 않는/영혼 되어 잘 내던 피리 소리 마저/멈추어 버렸습니다”고. 이 시인은 혹여 자신에게 좋은 시가 있으면 그 시는 자신이 쓴 것이 아니라 우주 만물이 썼다고 겸손해했다. 자신은 그들이 노래 부르며 지나가는 피리에 불과하다고.
1997년 늦가을 충남 공주에 있는 박재삼 시인 묘소에서 나는 이 시인과 만났다. 대구에서 서지월 시인도 왔고 전북 부안에서 송수권 시인, 그리고 공주의 나태주 시인도 왔다. 지방에서 외롭지만 꿋꿋하게 자신의 시세계를 이루고 있는 시인들이 그 해 타계한 박 시인의 묘소를 참배하러 모인 것이다. 평생 가난하게 살다 간 박 시인은 죽어서도 아무런 연고 없는 산자락 끄트머리에 묘비명도 없이 가난하게 묻혀 있었다.
그게 못내 안타까워서였을까. 아니면 시인들의 신세가 이래서야 되겠는가라는 동병상련에서인가. 시인들은 밤새 술잔을 기울이며 시인의 신세를 한탄했다. 그리고 지역 시인들의 외로움, 중앙 문단으로부터의 소외를 극복해보자며 이런저런 제안을 내놓았다. 그 자리에서 이 시인은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우리가 한두 해 외로웠느냐. 그런 것 따지지 말고 시만 쓰면 되지 않겠느냐. 시로서 무엇이 되기를 바라지 말자는 듯 슬퍼하지도 흥분하지도 않았다.
이 시인은 그런 시인이었다. 뭘 따지지도 분별하지도 않는 시인이었다. 시 그 자체가 우주인 줄 아는 시인이었다. 그런 것들을 그는 그가 태어나서 자란 설악산에서 배웠다.
오륙 년 전이던가. 사진기자가 막 단풍이 타오르기 시작한 설악산을 기가 막히게 사진 스케치해왔다. 그러면서 설악산을 가장 잘 쓸 수 있는 문인에게 청탁해 글을 함께 한 면 전체 컬러판으로 써먹자고 했다. 당연히 이 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백담계곡을 거쳐 봉정암까지 올라갔다 와서 그 소회를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써줄 수 있겠느냐고. 다음날 이 시인으로부터 20장 분량의 원고가 팩스로 들어왔다. 오전 중에 다람쥐같이 날래게 봉정암에 올라갔다 와 이 글을 부친다는 글과 함께.
“설악은 하늘의 첫 마음을 받은 산. 그러기에 단풍빛이 가장 곱고 산의 자태 또한 신성하다. 이런 때 설악 어디를 찾아가든 도량 아닌 곳이 있으랴. 산 전체가 큰 절이다. (중략) 길 따라 흐르는 물의 백 개 연못에 백 번 얼굴을 비치고 백 번 마음을 고쳐야 열리는 산문(山門). 연꽃보다 더 오묘한 구중심처의 이 산문 깊숙이 들어서면 귓가에 넘치는 물소리가 모두 부처님 설법으로 들리고 가지를 스치는 바람소리가 전부 오도송이며 우거진 쑥대풀과 억새꽃이 다 시다.”
산을 오르는 속도와 글쓰기의 속도가 역시 설악산 주인임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했다. 항상 오르내리며 그 안에서 살고 자며 그 산 속의 것들을 통해 우주를 보았으니 어찌 빠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른 종류의 글을 썼다면 아마 지우고 고치고 또 지우고 몇 날 며칠은 족히 걸렸을 것이다. 90년 들어서면서 이성선 시인은 ‘산시(山詩)’ 연작 시편을 쓰면서 확실히 자신이 설악의 주인임을, 아니 자기 자신이 곧 설악임을 각인시켰다.
달의 여인숙이다 바람의 본가이다 거기 들르면 달보다 작은 동자스님이 차를 끓여 내놓는다
허공을 걸어서 오지 않는 사람은 이 암자에 신발을 벗을 수 없다
지난 해 10월, 마지막으로 내놓은 열여섯 번째 시집 『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에 실린 시 「봉정암」 전문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 시인은 ‘달의 여인숙’의 객(客)이었는데 이제 허공을 걸어서 올라가 그 주인이 되었다. 이제 설악에 뿌려져 영육(靈肉)이 설악이 되었다.
니 죽어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해도
저 물 속에는 산그림자 여전히 혼자 뜰 것이다
― 「나 없는 세상」 전문
살다 또 지쳐 순수함이 그리워지면 백담계곡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맑은 물가에 앉아 물 속을 들여다볼 것이다. 그러면 그 물 속에서 “속초에 한번 와 봐. 술 좋아하는 이 선생 위해 내 가장 좋은 오징어 한 축 줄게“라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이 시인에게 오징어 한 마리 못 얻어 먹은 것이 못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