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아…… 위대한 사랑의 힘이여…… 이판사판 난장판인 이 세상속에서 버거운 똥지게를 하나씩 짊어지고 살아야할 운명들이지만, 사랑이 있기에…… 아, 우리에겐 사랑이 있기에…… 억지로라도 겨드랑이에 손가락을 후벼파넣으며 웃을 수 있는 것 아닐까? 오우, 러브! 그 따스함, 싱그러움, 영롱함, 찬란함을 어떻게 형용할 수 있으리오?
어쨌든 나 김영덕은 예전부터 한화이글스 내부에서 은밀히 싹트고 있는 사랑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렇다. 그곳은 코를 찌르는 휘발유성 땀내새가 진동하고, 무시무시한 나무빠따가 날라다니는, 그런 무지랭이들의 합숙소만은 아닌 것이다. 조명탑 불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생초록 인조잔디처럼, 상큼한 사랑이 새록새록 피어나는, 그런 곳인 것이다. 오우, 러브!
어떻게 여러분들에게 이런 사랑의 진실을 전해드릴 수 있을까…… 처음엔 자연스러움을 담아내기위해 용전동 이글스 타운이나 대전구장 락카룸 등지에 몰카를 설치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만약 발각되어 망신당할 경우, 일구회(원로 야구인 모임)에서 축출되지 않을까 염려되어, 정석대로 직접 취재하는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이번 러브 프로젝트는 날 선생님이라 부르며 쫓아다니는, 김영덕 팬클럽 시삽을 맡고 있는 묘령의 아가씨, 일명 '미스리'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내가 담배 꼬나물고 거들먹거릴 때, 그녀는 6mm로 찍으랴, 노트북 두들기랴…… 거의 혼자 고군분투한 셈. 미스리는 때론 솜사탕같은 속삭임으로 선수들을 녹이다가도 갑자기 9시뉴스 앵커우먼마냥 고압적인 자세로 윽박지르는 등, 탁월한 인터뷰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심지어 노란색 원피스에 린다김 나이방을 쓴 채 무전기같은 구형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그녀를 여간첩 '모란봉 28호'로 착각, 113에 신고때린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음, 너무 궁금하지? 미스리와 나 김영덕이 파헤쳐낸 은밀한 사랑이야기들이…… 자, 이제 러브 프로젝트의 결과물들을 하나씩, 차례대로 공개하도록 하겠다. 아…… 위대한 사랑의 힘이여…… 오우, 러브!
(1) 규수와 희수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
규수: 어떻게 하라고요, 누나?
미스리: 여기 카메라 보구…… 이게 이희수라고 생각하구 그냥 막 떠들면 돼.
규수: 네. 근데, 누나…… 진짜 이거 하면 송혜교 싸인 받아다주는거 맞아요?
미스리: 아이 XX, 속구만 살았냐? 응?
김영덕: 미스리, 시간없어. 빨리 끝내자구.
미스리: 네, 선생님. 임마, 너 때문에 선생님이 짱나셨잖아. 날씨도 더운데. 빨리 아무거나 나불거려봐!
규수: 네, 시작할께요.
감독님 저예요, 귀염둥이 규수. 아, 맞다…… 둘만 있을 땐 '아빠'라고 부르라고 했죠? 에이, '아빠'는 너무 쑥스러운뎅…… 음, 뭐가 좋을까? 그래, '희수아찌'라고 부를께요. 희수 아찌이이잉…… 괜찮죠?
아찌의 아낌없이 주는 사랑, 그 바다와 같은 사랑덕분에 오늘의 제가 있다는 것 항상 잊지 않고 있어요. 마운드에서 위기를 맞을 때마다 희수 아찌의 얼굴을 떠올리며 힘을 낸다는 것, 아찌도 아시죠?
제 일상을 담은 비디오물을 직원 몰래 전광판에 트시기도 하고, 진우 아저씨가 잠깐 한눈파는 사이에 슬쩍 올스타 후보로 절 뽑아주시기도 하고…… 아, 아찌가 제게 베풀어주신 그 사랑을 어떻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그거 아세요?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희수 아찌의 사랑이 때론 부담으로 느껴지기도 한다는 사실 말이에요. 예전에 룸메이트 병준이 형이 저보구 대전의 서태지네 뭐네 나불거렸을 땐 그냥 웃어넘겼었는데요…… 언젠가부터 절 바라보는 동료들의 시선이 왠지 차갑게 느껴지는거에요. 제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요. '그래도 난 병살은 안칠 자신있다'며 석천 아저씨를 원망하던 범호도 저하구 마주치면 뾰로통하게 구는 것 같구, 장백이 형은 저만 보면 '내 얼굴이 못생겨서 그러냐, 아니면 단물빠진 예비역이라서 그러냐…… 왜 난 마당쇠부리듯 하는 거냐'며 투덜거린다니깐요. 1승이라도 챙겨줄려고 희수 아찌가 형을 배려해주는거라구 달래봐도 소용없더라구요.
지난달 아찌가 광호형을 2군으로 쫓아냈을 때는…… 정말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었죠. 아, 질투없인 사랑도 정녕 불가능한건가요? 광호형과 좀 친했던건 사실이지만…… 희수 아찌가 상상하는 그런 사이는 아니란 말이에요. 광호형 차타구 가면서 둘이 무슨 얘기를 주고받느냐구요? 우리가 희수 아찌 욕한다구요? 아니에요. 그저 최신가요 틀어놓고 따라부르거나, 팬 언니들이 준 선물을 풀어보거나 할 뿐이라구요. (예? 전 연상이나 연하나 다 '언니'라고 불러요.)
아, 희수 아찌는 제 팬 언니들도 못마땅하시겠다. 그건 저두 이해해요. 희수 아찌한텐 관중들이 씹다뱉은 오징어다리를 뿌리거나 우동 국물을 쏟아부으며 욕지거리해대기 바쁜데…… 정말 김영삼 할아버지처럼 페인트 달걀같은 걸루 얻어맞지 않는게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니까요. 왜 팬들은 희수 아찌한테만 그렇게 화를 내는 걸까요? 어쨌든 걱정하지마세요. 제가 지켜드릴께요. 아찌가 절 지켜주셨듯. 특히 '구안와사'라고 놀리는 녀석들한텐 제가 강속구를 던져서라도 꼭 복수하구 말거에요!
네, 요새 통 제가 승수를 쌓지 못해서 아찌 가슴도 찢어지시겠지만 저두 너무 힘들어요. 예전에 어떻게 5연승을 했는지 참 신기할 정도죠. 뭐 지난 일이지만, 예전에 청주구장에서 삼성하구 할 때 말이에요, 아찌가 절 최창양씨하구 붙이지 않구 다음날 잠실 LG전 장문석씨하구 붙인적 있죠? 그때 경기끝나고 올림픽 파크텔 가서 제가 베개에 얼굴 파묻고 울었던거 아세요? LG보단 삼성타선이 그래도 저한텐 편하구, 또 당시 장문석씨는 방어율 1위였잖아요. 그때 어느 신문에선 '조규수 과잉보호'라고 신랄하게 씹었지만, 제 생각엔 오히려 반대에요. 그러고보니 정민태, 장문석, 문동환, 최용호, 김진웅…… 전부 그 팀 에이스급들이네? (최용호씨는 우리만 보면 선동렬씨로 변신하는 경향이 좀 있으니까 마찬가지죠 뭐.) 아, 절벽에다 새끼를 떨어뜨리는 사잔지 호랑인지 아무튼 그런 심정이신가요, 희수 아찌? 차라리 빠따로 때리시구 대신 상대 투수는 좀 만만한 사람으로 골라주시면 좋겠는데……
아찌야 뭐 다 절 사랑해서 그런거겠지만, 우리팀 타자 형들은 저보담 제 친구 승호를 더 사랑하나봐요. 승호가 저한테 전화해서 미안하다고 할 정도니까요. 형들의 이상형은 머슴 스타일인감? 그리고 대성 아저씨…… 12일 경기 끝나고 절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더라구요. 아마 속으로 미안한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았는데…… 사실 전 제 옆에 있는 거울이 대성 아저씨 주먹에 깨지지나 않을까 겁이 나더라구요.
아, 희수 아찌. 저 나쁜 아이죠? 이렇게 불만만 늘어놓으니. 저도 이런 불만이 쓰잘데기 없다는 것 잘 알아요. 타자 형들이 뭐 일부러 그랬겠어요? 그리고 대성 아저씨가 딱 벌어진 어깨를 으쓱거리며 불펜에서 하프 피칭을 해줘야 마운드에 선 저도 안심이 된다구요. 최용호씨하구 맞대결에서 진 것두 대성 아저씨가 뒤를 받쳐주지 못하니까 타자 형들이나 저나 너무 조바심을 내다 무너진 거죠. (헤헤, 사실 요 얘기는 김영덕 할아버지가 시킨거에요.)
이건 희수 아찌한테 드릴 얘기는 아니지만, 이왕 말하는 김에 팬북 얘기도 할께요. 제 사진…… 일부러 약간 얼빵한 것만 골라서 집어넣었나요? 아으, 짜증나. 저보다도 팬 언니들이 더 '어머, 왠일이니'하며 흥분한단 말이에욧! 재웅이 형, 해님이 형, 상열이 형도 불만이 많던데요. 투수가 공던질 때의 그 기괴한 표정을 잡아내서 뭐 어쩌자는 거냐구, 그런 만행은 스포츠신문만으로 족한거 아니냐구요. 그래도 이 형들은 조그만 사진이라도 이쁜거 나왔는데 난 뭐람. 아, 누가 물어보던데 데이비스 아저씨는 자다 일어나서 찍은 거에요? 군바리 중대 맞춤 체육복같은거 입고 팬북 사진 찍는 사람 처음봤데나 뭐래나.
어, 미스리 누나가 손날로 자기 목을 베는 시늉을 하네요. 치, 어디서 본건 많아가지구…… 이제 그만 떠들라는 신호인가봐요. 희수 아찌, 김영덕 할아버지와 미스리 누나 두분…… 원래 저렇게 재밌게 사는 분들인가요? 취재하러 왔다면서 아이스박스에 맥주하구 수박같은거 담아오다니…… 아이구, 비치 파라솔과 돗자리도 있네요. 나도 맥주 정도는 마실줄 아는데, 나도 한잔 주시징?
아, 맞다! 김영덕 할아버지가 '규수사랑 나라사랑'에 가짜 회원으로 잠입, 제 욕으로 도배하려다 들켜서 도망간 사람이 혹시 희수 아찌 아니냐구 물어보라는데요…… 설마 아니겠죠? 아마 정수가 장난친 걸거에요. 아니면 김영덕 할아버지가 그랬을지도? 제가 '가짜 정민철'이라구 막 비꼬시던데…… 92년의 프레쉬한 정민철이 아니라 99년의 장호연같은 정민철이래나 뭐래나…… 치, 말두 안돼죠?
이제 정말 끝낼 테니까 너무 욕하지 마요, 미스리 누나. 희수 아찌 화이팅! 나도 화이팅! 20세기 마지막 참피온 한화 화이팅! 어, 김영덕 할아버지, 그 노래 '레디 투 러브' 아니에요? 나도 그 노래 좋아하는뎅?
이후 우리는 최신 유행가요를 들으며, 맥주를 마시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다음에 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