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루드글리의 『바바리안』의 내용중, 일부분입니다.
(다적으면 저작권에 걸리겠죠 ^^;)
동고트의 테오도릭대왕에 대한 내용입니다.
로마라는 시체의 열기가 아직 식지않은 시점이라 여기 적어봅니다.
-------------------------------------------------------------------------
"가난한 로마인은 고트족을 따라 하며,
부유한 고트족은 로마인을 따라 한다."
-동고트의 왕, 테오도릭.
테오도릭은 판노니아에서 454년에 태어났다. 그는 고트족의 동쪽지류, 즉 동고트의 왕인 오스트로소트 티우디미르 아말로(Thiudimir Amalo)의 아들이었다. 티우디미르는 그의 형제인 비디메르(Vidimer), 발라메르(Valamer)와 함께 통치를 했다. 테오도릭은 8살이 되자 그의 아버지와 삼촌이 로마와 맺은 협약에 의해 볼모로 보내져 고난을 겪는다. 당시 고대의 외교 관습상 로마와 협약을 맺으면 협약을 맺은 부족의 후계자는 로마에서 거주해야 했다. 로마인들은 왕족을 인질로 잡아두는 방식으로 야만 왕족의 자제가 로마 문화에 동화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므로 어린 테오도릭 역시 약 10년 간 비잔틴의 궁정에서 보내게 된다. 그러나 적어도 그의 경우 이러한 로마의 원래 의도와는 완전히 어긋나게 된다.
비교적 최근까지도 많은 역사가들은 단순하게 테오도릭 황제가 문맹이었다는 고대의 주장을 수용했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도 10년 간 궁정에서 인격 형성기를 거쳤다는 사실은 이러한 설명을 받아들이기 어렵게 한다. 그러한 주장은 단순한 정치적 선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인격 형성기를 제국의 중심점에서 보내며 분명 최고의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또한, 그의 딸은 라틴어와 그리스어에 능통한 문화적으로 매우 세련된 사람이었으며, 자신의 아들에게도 동일한 교육을 시키려 했음을 보여주는 자료들이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테오도릭은 다소 내향적이고 재치가 없었던 어린 시절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예술, 철학, 정치 그리고 군사문제 등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그가 후에 보여준 기량 중 어느 정도가 로마 왕궁에서 조용히 계획된 것인지는 추측에 맡길 수 밖에 없다.
티우디미르 왕이 그의 아들을 돌려달라고 요청했을 때 분명 그는 아들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고 싶었을 것이다. 고트족 왕자가 비잔틴 문명세계에서 보호를 받으며 수학했기 때문에 어째면 나약해지지 않았을까 궁금했을 것이다. 황제(로마황제겠죠 ^^;)는 다 큰 십대의 "손님"을 풀어주는 것을 전혀 반대하지 않았다. 분명 테오도릭이 무력하고 소심해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와 그를 볼모로 잡았던 황제조차도 어린 테오도릭이 풀려나자마자 엄청난 용기와 비전을 보여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동고트로 돌아오자마자 테오도릭은 아버지가 수에비족에 대항하고 돌아오기도 전에 신기두넘[Singidunum, 오늘날 벨그레이드(Belgrade)]시를 성공적으로 공격했다. 그 도시를 정복했을 뿐만 아니라 그 도시를 황제에게 넘기지 않음으로서 그는 그때까지 지켜져 왔던 동고트와 로마제국간의 협약을 조롱한다.
2년 후인 474년에 그의 아버지가 죽자 테오도릭은 동고트의 왕으로 지명된다. 그리고 황제 폐위 음모로부터 두번이나 제노(Zeno) 황제를 구해준 480년대에 그의 명성과 세력은 강화된다. 그 보상으로 테오도릭은 제노 황제의 동의 여부와 관계없이 영토를 받았고, 이탈리아를 마음대로 장악한 오도아케르(Odovacar)라는 야만인 지도자를 제거한다는 약속하에 이탈리아를 인수했다. 오도아케르가 어느 부족 출신인지는 불분명하지만 그의 군대는 여러 야만 부족으로 구성되었다. 제노는 속으로 두 야만인 족장이 서로 싸우다가 함께 망하기를 희망했을지 모르지만 그는 어쨌든 테오도릭이 이탈리아를 인수하는 데에 동의했다.(이탈리아의 통치권자는 제노가 아니라 오도아케르였지만).
테오도릭은 487년 오도아케르와 싸우기 위해 남녀노소 30만명에 이르는 동고트족 전체를 이끌고 2000Km에 이르는 대장정에 나설 준비를 시작한다. 추수한 모든 것을 싣고 488년 가을에 커다란 마차는 떠난다. 겨울이 시작될 즈음에 그들은 게르만족의 땅에서 자신들을 별로 달가이 여기지 않는 게피드족(Gepids)을 만난다. 두려운 저항군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고트 군인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테오도릭은 봄이 오기 전까지 게피드족 땅에서 살다가 그들의 일부까지 설득하여 두 부족 연합군을 이끌고 "모세(Mose)"처럼 알프스를 넘어 약속의 땅 이탈리아로 향했다.
오도아케르는 미리 경계와 대비를 하였으며, 많은 전략적 연습 후에 489년 9월 베로나(Verona) 근처에서 결국 전투가 시작되었다. 혈투는 오도아케르의 승리로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자 테오도릭은 전장 가운데서 사령관들에게 용맹을 호소하여 전세를 유리하게 만들고 적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다. 운 좋게 생명을 부지하고 도망가는 오도아케르를 추격하기에는 테오도릭의 군대 역시 너무 약해져 있었으믈 오도아케르는 살아남아 다음을 기약할 수 있게 되었다.
오도아케르는 군단기지를 서로마제국의 수도인 라벤나시로 옮기지만 결국 함락되고 라벤나는 이후 350년 동안 수도로 남는다. 그 후 오랫동안 묻혀 있다가 20세기에 들어서 주변 습지의 물을 퍼 냈을 때 다시 한 번 고대 도시의 모습을 드러내었어다.
아드리아해와 습지대의 사이를 다스렸던 오도아케르는 자기가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테오도릭은 자신이 질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이곳까지 오지 않았다. 그는 쉬지않고 포위 공격을 했는데, 거의 1년 반이 지나자 양쪽 모두가 괴로움을 겪기 시작했다. 도시 안의 사람들은 굶어 죽어 갔고 포위를 한 테오도릭의 군대는 오랫동안 모기투성이의 더러운 습지에서 지낸 결과 말라리아에 걸려 죽어 갔다. 결국 6개월이 더 지난 후, 오도아케르가 먼저 항복하고 도시를 포기했다.
493년 3월 5일, 승리한 테오도릭은 평화롭게 라벤나에 입성한다. 오도아케르의 군대는 무장해제를 당하지 않았음에도 전혀 보복을 하지 않았다. 도시의 시민들은 그들의 새 지도자를 오히려 따뜻하게 맞이했다. 새 정권이 들어서고 2주일이 채 안 되어 테오도릭은 오도아케르를 작은 파티에 초대한 후 단검으로 살해한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에도 라벤나 사람들은 테오도릭을 경멸하지 않고 오히려 오도아케르가 자신에게 반기를 들려 했다는 테오도릭의 설명을 받아들였다. 테오도릭은 오도아케르의 모든 가족, 지지세력들을 모두 처단하고 그의 정권을 굳게 안정화했다.
테오도릭은 즉각 일련의 사회적 경제적 개혁을 단행했다. 이탈리아 전기(傳記)작가인 스테파니아 솔티(Stephania Salti)와 레나테 벤튜리니(Renata Venturini)가 언급했듯이 그는 부패의 기질을 타고났다고 생각한 이탈리아 부족을 결코 믿지 않았다. 그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동고트의 보호하에 그들의 경제를 재건하기를 원했다. 그는 두 부족이 나란히 서로의 문화를 존중하면서 사는 사회를 만들고자 했다. 그들을 구분짓는 것은 문화 차이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서로 다른 두 기독교파인 카톨릭과 아리우스파에 각각 속해있었다.
한동안 새로운 정권에서 모든것이 잘 이루어지고 있었다. 경제는 부흥하고 두 문화도 함께 잘 어우러지는 듯했다. 그러나 523년 새로운 법 개정이 이루어져 유태인과 이교도는 정부관청에서 일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이 동로마 황제인 유스티니아누스에 의해 통과된면서 분위기는 바뀌게 된다. 이 칙령은 특히 아리우스파들을 권력에서 배제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동로마 황제가 아리우스파 무리를 박해하도록 조장하기 전까지 테오도릭은 아리우스파와 카톨릭 교도간의 평화스럽고 조화로운 공존을 지켜나갔다. 어쩌면 외부인과 야만인으로서 그는 다른 종교를 존중해야 할 필요를 이해했고, 모든 이를 위해 소수 부족을 존중해야 할 필요를 알았던 것 같다. 그러나 아리우스파들이 박해받은 후 테오도릭은 모든 카톨릭 교회가 아리우스파에게 인수되도록 황제령으로 명령한다.
...(생략^^;)...526년 8월 30일 테오도록은 심한 복통으로 고생하다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는데, 그의 사인을 알려지지 않는다. 다만, 그가 죽은 바로 그날이 카톨릭 교회가 테오도릭의 명에 의해 몰수된 사실은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 그가 카톨릭을 박해한 보복으로 암살자에 의해 독살당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는 어렵지만 카톨릭은 그의 사망을 하느님의 처벌로 생각했다.
분명하지는 않으나 그의 시체는 무덤에 안치되었다가 제거되었으리라 추정된다. 그의 시체가 없어진 것과 관련해서는 두 전설, 즉 야만인의 것과 카톨릭의 것 2개의 버전이 공존한다. 카톨릭 버전에서는 악마가 검은 말을 타고 나타나 그의 시체를 지옥에 떨어뜨렸다는 것이고, 야만인 버전에서는 신화적 동물인 슬레이프니르(Sleipnir, 다리가 8개 달인 말)가 그를 전사의 천국 발할라로 데려갔다는 것이다.
그의 영면 장소가 무덤에서 아주 가까운 다른 장소라는 소문이 있지만 이것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비록 그가 이 평화로운 장소에 있지 않았다 해도 무덤은 '그림자 황제' 테오도릭의 이중적 이미지에 맞는다. 그는 로마의 모든 것을 사랑하면서도 진정한 고트인이었다. 스테파니아 솔티와 레나타 벤튜리니는
'테오도릭이 1,500년 후를 내다보고 많은 부족들이 서로의 종교적 신념을 존중하고 자신의 문화를 전파하는 통합된 유럽을 꿈꾸었다'
라고 말한다. 그의 모든 단점에도 불구하고 테오도릭은 비전을 가진 리더였고 로마와 고트 유산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졌다. 두 문화에 대한 그의 이해는 비전의 폭을 더욱 넓혀주었다. 종교적인 관용과 다문화주의에 대한 그의 신념으로 그는 구식 로마인들을 유럽인으로 성장시키는 길을 마련한 원동력을 제공했다.
첫댓글 흠...번역자의 번역이 매끄럽지 못한듯 합니다.....문장이나 문맥이 좀 이상 -_-;
예.. 번역된 문체가..좀 과장해서 말한다면 블리자드사의 게임 메뉴얼에 번역된 시나리오를 읽는것 같은 느낌이 나는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