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박상철 화백
20대 여성 A씨는 얼마 전 알고 지내던 친구 B씨에게 영문도 모른 채 '손절'을 당했다. B씨처럼 잘 지내오던 대인관계를 무 자르듯이 끊는 사람들이 있다. 작년 일본에선 인간관계를 '리셋'하는 행위가 하나의 문화처럼 유행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람들을 일컫는 말로 '리셋 증후군'이 있다. 리셋 증후군의 증상과 원인 등을 알아봤다.
◇연락처 변경하고 친구 차단하면 의심
리셋증후군이란 말 그대로 컴퓨터 오류를 리셋(reset) 버튼을 눌러 간단히 해결하는 것처럼 현실에서도 인생 '리셋'이 가능하다고 착각하는 것을 말한다. 리셋증후군이란 용어는 1997년 일본 고베시에서 컴퓨터 게임중독이었던 중학교 학생이 초등학생을 토막살인한 사건이 공개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최근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국내 MZ세대 사이에서도 알고 지낸 인맥들을 정리하는 '인맥다이어트' 등이 유행하고 있는데, 이 또한 리셋증후군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은 휴대폰을 바꿀 때마다 주기적으로 연락처를 변경하거나 정리한다. 리셋증후군을 겪고 있는 사람들도 한순간에 연락처나 SNS 계정을 삭제하고 주변 인간관계를 정리한다는 점에서 이와 유사한 공통점을 보인다.
인간관계에서 상대방과 조금이라도 갈등이 형성되면 잠적해버리는 '리셋'을 반복적으로 선택하는 사람이라면 리셋증후군을 의심해봐야 한다. 직장이나 거주지를 옮기는 등 다양한 이유로 인간관계를 정리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리셋 증후군 환자는 최근 증가하고 있다. 고대안암병원 정신건강의학과 한규만 교수는 "질환이 아니기 때문에 진단과 관련된 통계나 공식적인 유병률을 알 순 없지만 최근 임상 현장에서 리셋증후군과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환자가 눈에 띄게 많이 보인다"고 말했다.
◇평소 SNS 몰입하는 사람, 리셋증후군 발병 위험 높아
그렇다면 이들이 한순간에 '인생 리셋'을 결심하게 된 이유가 무얼까. 과도한 SNS 등 온라인 활동은 리셋 증후군의 원인이 될 수 있다. 한규만 교수는 "SNS, 채팅, 게임 등 온라인 활동 증가가 리셋증후군 발병에 영향을 많이 미쳤다"며 "특히 온라인 커뮤니티 등 온라인에서 장시간 활동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러한 생활방식은 대면접촉을 통한 관계 형성을 잊게 만들고, 혼란을 느끼게 하며 인터넷 환경처럼 현실관계도 쉽게 끝내버릴 수 있다고 착각을 유도한다"고 말했다. 현실과 다른 디지털 세계의 가장 큰 특징은 '일시적'이라는 점이다. 현실 세계는 과거의 일이 현재까지 계속 이어지는 연속성이란 특징이 있다. 그러나 디지털 세계에선 기기의 '온·오프(On Off)' SNS의 '로그인 로그아웃 (Login, Logout)' 처럼 일시적인 활동이 가능해지기 때문에 그만큼 ‘리셋’도 손쉽다.
리셋증후군의 등장은 과거에 비해 가벼운 인간관계를 추구하는 최근 모습이 반영된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가천대 심리학과 최혜만 교수는 "한국 문화 역시 개인주의화 돼가고 있고, 많은 사람이 온라인을 통해 넓고 얕은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며 "그러다 보니 조금이라도 나와 상대방이 맞지 않으면 갈등이나 어려움을 극복하고, 그 과정에서 감정 소모하는 걸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리셋증후군이 유독 잘 나타나는 사람도 평소 SNS로 넓고 얕은 관계를 형성하며 SNS를 과다 사용하는 사람에게 잘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언팔(언팔로우), 차단 기능이 활성화돼있는 SNS는 리셋증후군 환자들의 '리셋 활동'을 촉발한다. 그 외에 평소 우울증 등 기저질환이 있거나 회피 성향이 있다면 리셋증후군을 겪을 위험이 높다고 볼 수 있다. 한규만 교수는 "우울증, 불안장애와 같은 정서장애가 있거나 회피형 사람이라면 심리적으로 고통스러운 상황을 굉장히 회피하고 싶어 한다"며 "이외에도 사회성이 결여된 사람 혹은 과도한 인터넷 활동으로 사회성이 퇴화한 사람 등에 리셋증후군이 잘 나타날 수 있다"고 말했다.
◇ 온라인 활동 줄이려는 노력 필요해
리셋을 반복적으로 하는 습관은 일상생활에도 악영향을 준다. 리셋 증후군인 사람은 현실과 가상 세계를 구분하지 못한다. 그래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열심히 하던 일도 중간에 갑자기 그만두고, 인간관계가 삐걱거리면 쉽사리 친구 관계를 끊는다. 최혜만 교수는 "리셋이 반복되면 문제해결 능력, 갈등조정 능력 발달에 어려움이 찾아올 것"이라며 "대인관계 형성도 잘 못하게 돼 은둔형 외토리처럼 지내게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일부는 리셋증후군이 폭행, 절도, 살인 같은 심각한 범죄로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범죄를 저질러도 자신의 삶에 리셋 버튼만 누르면 자신이 저지른 악행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된다고 착각한다. 죄책감도 느끼지 못한다. 실제 평소 자동차 게임을 통해 운전실력을 획득했다고 착각한 초등학생이 엄마 차를 빌려 나가 차량 10대를 들이받은 사건도 있었다.
리셋 증후군의 위험에서 벗어나려면 온라인 활동을 줄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최혜만 교수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진짜 사람을 만나야 한다"며 "온라인상에서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최소화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한규만 교수는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의 균형을 잘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며 "증상이 심각한 정도라면 정신건강의학과를 내원해 진료받아보고, 정서장애 등 기저질환이 있다면 동시에 병행치료를 받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강수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