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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성인이 된 자폐 스펙트럼 당사자는 세계를 어떻게 볼까?
자폐 스펙트럼의 새로운 발견
『자폐 스펙트럼과 하이퍼월드』는 미국 뉴욕을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는 역사사회학자 이케가미 에이코가 2017년에 출간한 저작으로, 성인 자폐 스펙트럼 당사자들이 가상공간에서 아바타가 되어 소통하는 모습, 더 나아가 그들의 심오한 정신 세계를 “버추얼 에스노그래피”(연구자 스스로 아바타 또는 디지털 페르소나가 되어 가상공간에서 참여관찰을 수행하는 연구 방법론) 방법으로 기술한 책이다.
이 책에서 생생하게 그려진 성인 자폐 스펙트럼 당사자들의 모습은 ‘자폐증’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을 보기좋게 뒤집어엎는다. 가상공간 속에서 그들은 스스로의 독특한 감각과 지각 체험, 슬픔이나 기쁨 등 다양한 감정, 소수자로서의 어려움 등을 정확한 언어로 표현하면서 서로 공감한다. 저자의 이 연구는, 2019년 일본 공영방송(NHK)에서 2부작 다큐멘터리 〈자폐증 아바타의 세계〉로 제작, 방영되었다. 물리적 공간에서는 어려움이 있지만 가상 공간에서는 활발하게 소통하고 교류하는 자폐 스펙트럼 당사자들의 모습이 전파를 타면서 일본에서도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지금까지 자폐 스펙트럼에 관한 담론의 대부분은 당사자보다는 주위 사람들의 관점에 입각해 있고, 특히 어린이의 양육과 교육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를테면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까?”,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학생은 어떤 교육 방식이 적합할까?”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아이를 어떻게 사회에 적응시킬까?” 등과 같이 자폐 스펙트럼을 어린이의 발달 장애로 인식하고 양육과 교육의 주체인 부모나 교사의 역할과 의무와 고충에 무게를 두어 왔다. 성인이 된 당사자의 생각이나 경험 자체에 대한 질문은 상대적으로 잘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답을 얻기가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다.
21세기 이후 자신의 내면세계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당사자들이 나타나면서 “자폐 스펙트럼”에 대한 뿌리 깊은 오해나 편견을 바로잡을 길이 열린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폐증”이 커뮤니케이션 능력의 결여이자 사회성 장애라는 인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저자는 가상공간에서 활동하는 성인 자폐 스펙트럼 당사자들과 직접 교류하면서 “자폐 스펙트럼인은 의사소통이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하다”는 편견이 잘못 되었다고 주장한다. 가상공간에서 그들은 자유롭게 의사소통할 뿐 아니라, 다양한 주제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오락과 사교에 시간을 쓰며 공감과 지지를 서로 확인한다. 숙련된 연구자가 가상공간에서 성인이 된 당사자들과 직접 교류하면서 그들의 내면세계를 객관적으로 관찰, 기술한 이 책은 기존 연구와 담론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폐 스펙트럼에 대해 이야기한다.
👩🏫 저자 소개
이케가미 에이코
역사사회학자, 문화사회학자.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오차노미즈 여자대학 국문과를 졸업하고 일본경제신문사에 근무했다. 이후 미국으로 유학하여 1989년에 하버드대 사회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예일대 사회학 준교수로 일했다. 현재 뉴욕에 거주하며 뉴스쿨The New School of Social Research 사회학과 역사학 부문 월터 에버스탯Walter A. Eberstadt 교수로 재직하며 영어와 일본어로 활발한 강연 및 저작 활동을 펼치고 있다. 2005년에 출간한 Bonds of Civility: Aesthetic Networks and the Political Origins of Japanese Culture가 미국아시아학협회 존 홀 저작상, 미국사회학회의 최고문화사회학상(매리 더글러스상), 정치사회학상 등을 수상하여 화제가 되었다. 2007년부터 가상공간과 발달장애에 관한 연구에 집중했고 2011년에 건강과 공중위생 분야에서 권위 있는 로버트 우드 존슨 재단에서 수여하는 보건정책 연구자상을 수상했다. 최근에는 일본 에도시대의 장기적인 사회 변화와 현대의 디지털 문화를 역사사회학적 관점에서 비교 연구하며 다수의 책을 출간했다.
📜 목차
역자 서문 ─ 성인이 된 자폐 스펙트럼 당사자는 세계를 어떻게 볼까 9
자폐 스펙트럼 당사자의 내면 세계에 대한 객관적인 기록
가상공간을 생각하는 새로운 관점, 신경다양성
프롤로그 18
고기능 자폐 스펙트럼 당사자인 존과의 만남
아바타로 만난 자폐 스펙트럼 당사자들
제1장 자폐증과의 만남 ─ ‘가상 뇌’로의 여행 27
자폐증은 뇌의 불가사의함으로 이끄는 문
자폐 스펙트럼 당사자가 경험하는 지각의 특징
소수파가 다수파 문화에 맞추는 것, 이문화 적응과 비슷하다
자폐증은 최고의 거울이다
가상 세계에서 자신과 만나는 사람들 40
‘세컨드라이프’라는 가상공간
가상 세계의 아바타들 ─ 성장하는 분신들
문명을 창조하는 가상의 힘
아바타로 철학하는 법
가상 세계의 현장감과 일본 전통 문예
버추얼 에스노그래피, 모든 일의 시작 59
가상 연구소 ‘라 사쿠라’의 탄생
‘가상공간의 마더 테레사’, 젠틀 헤런과의 만남
가상 세계에 모이는 자폐 스펙트럼 당사자들
성인 자폐 스펙트럼 당사자는 세계를 어떻게 인식할까
자폐증 연구의 새로운 과제
대화를 나누는 자폐 스펙트럼 아바타들 ─ 가상공간 속 자조 그룹에서 안전하게 연결되기
“아바타는 모두 자폐증적이다”
과도한 정보를 뺄셈하는 세계
지각 과민과 정보의 압축
신경다양성(뉴로다이버시티)의 시대
제2장 자폐증의 사회사 ─ 카테고리가 세상을 어떻게 바꾸었는가 99
자폐증이라는 카테고리의 발달 101
자폐증 역사의 중요성
카테고리의 영향
미국에서의 자폐증의 역사
자폐증의 등장 110
‘자폐증’의 등장과 냉장고 엄마
냉장고 엄마 이론에 대한 의문
자폐증은 스펙트럼
‘자폐증’의 커밍아웃 120
한발 늦게 시작된 자폐증 소수자 운동 ─ 미국의 움직임
템플 그랜딘의 등장
자폐증을 개성으로 활용한 그랜딘
진화한 그랜딘
자폐증 당사자들의 자서전 출판
할리우드의 공헌 139
영화 〈레인맨〉의 등장
더스틴 호프먼의 연기
〈레인맨〉 현상
부모들을 불안하게 한 자폐증 원인설 148
자폐증 유행병설의 영향
예방접종 원인설의 공포
자폐증 ‘대유행’을 뒤집어엎은 사회학적 연구
발언하고 행동하는 부모와 시민단체 158
미국 시민단체의 전통
자폐증 연구에 개입하는 부모 단체 ─ ‘지금 자폐증을 치료하자 재단’
전미 규모의 ‘발언하는 자폐증 재단’ ─ 발족과 과제
헤지펀드를 통해 쌓은 부를 활용한 ‘사이먼스 재단’ ─ 유전자 연구의 발전과 과제
컴퓨터와 뇌신경과학 시대의 신경다양성 171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자폐증 당사자들
인터넷과 뇌신경과학의 발전
신경다양성의 철학과 ‘괴짜’ 문화
제3장 뇌 속 세계의 과잉 185
가상공간 속 자폐 스펙트럼 아바타들
자폐증적 경험에 대해 생각하다 187
자폐 스펙트럼 아바타의 다양성
결여인가, 과잉인가
자폐증적 경험이란 무엇인가
신체적인 마음, 마음적인 신체
자폐증 세계의 감각 199
‘나의 언어로’ ─자 폐증의 자연 언어를 찾아서
신체화해 발화하는 것의 어려움
언어와 자폐증의 불가사의한 관계
음악이야말로 언어 ─ 데릭 파라비치니의 사례
자폐 스펙트럼 당사자 운동의 어려움 ─ 청각장애인과의 차이
자폐 스펙트럼 당사자 마거릿
명상의 마음과 자폐증의 마음
다른 별에서 온 외교관
자폐증 자조 그룹에 모이는 아바타들 220
동지들의 허심탄회한 대화
불쾌한 골짜기? 특별 대우? ─ 당사자들의 현실적 괴로움
매주 한 차례, 2시간 동안의 만남
사회자 애니스는 다리를 놓는 사람
명석한 두뇌, 무거운 몸의 우디
가상공간에 몰두하는 캐런(동시에 샐리이자 조지프)
고기능이기 때문에 더 힘든 래디언트
그룹 회합의 장점
아바타가 말하는 자폐증 체험 249
서로 공감하는 아바타들
타인의 마음을 읽을 수 없는 것은 피차 마찬가지
규칙을 대하는 태도
빈말과 솔직함 ─ NT와의 차이
감각 과민과 감각 정보의 과잉
과잉 부하 때문에 컨트롤 불능에 빠지는 멜트다운
예측 불가능성에 대한 불안
무리하지 않는 것이 제일인가
스스로를 알고, 차이를 안다
아름다운 공감각의 세계
뇌의 과잉 발달과 편집
강렬한 하이퍼월드를 사는 사람들
에필로그 311
날치의 비상을 좆아 ─연고가 없는 자유 공간에서 활기를 띠는 아바타들
풍랑 속 배 위에서 흔들리는 관찰자
미국에서의 언어적, 문화적 소수자의 체험
존과의 재회
미주 331
참고문헌 343
📖 책 속으로
자폐증에 관한 담론의 대부분이 당사자보다는 주변 사람들의 관점에 입각해 있다. 예를 들어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아이를 어떻게 키우면 좋을까’, 혹은 ‘학교는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학생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등 양육과 교육의 주체인 부모나 교사의 의무나 고충에 초점을 맞춘 질문이 자폐증 관련 사회적 담론의 중요한 축이다. [...] 당사자의 생각이나 경험에 대한 질문은 상대적으로 잘 던져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실제로 해답을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여겨졌다.
--- p.10
당사자들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내면세계를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자폐증에 관한 뿌리 깊은 오해나 편견을 정정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은 사실이다.
--- p.11
본문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신경다양성이라는 개념에는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사람들을 장애인이 아니라 사회적 소수자로 자리매김하자는 실천적 주장이 담겨 있다.
--- p.12
신경다양성이라는 개념은 인터넷과 가상공간이라는 점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자폐 스펙트럼 당사자들은 물리적 공간보다 가상공간이 감각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훨씬 생활하기 편한 정보 환경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렇게 느끼는 것이 과연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사람뿐일까.
--- p.13
그런데 내가 가상공간에서 조우한 자폐 스펙트럼 당사자들이 들려주는 내면세계는, 일반적 이미지와는 오히려 정반대였다. 뇌 속에서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듯한 강렬한 체험을 하면서, 과도한 정보를 과잉한 채로 수용하는 ‘하이퍼월드hyper-world’를 경험하는 사람이 많았다. 자폐 스펙트럼 당사자 아바타들은 가상공간에서 정확한 언어로, 스스로의 놀라운 감각?지각 경험, 심적 체험, ‘느끼는 법’과 ‘보는 법’의 소수파로서 곤란했던 체험을 표현하고 공감하며 서로를 지지하고 있었다. 자폐증이 커뮤니케이션 능력의 결여이자 사회성 장애로 여겨져왔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 p.24~25
나는 신경회로적으로는 소위 ‘정형발달인’이라는 다수파에 속하지만, 언어적 문화적으로는 소수자로서 미국 사회에서 생활한다. 그런 입장에서 자폐 스펙트럼 당사자들이 주장하는 ‘뉴로다이버시티neurodiversity(신경다양성)’라는 개념에 공감한다. 뉴로다이버시티란 뇌의 작용 방식에는 다양성이 있다고 보는 생각을 반영한 개념으로, 이렇게 인간의 신경회로가 다양하기 때문에 사회 전체적으로 창조성이 생긴다고 본다.
--- p.38
디지털 세계의 아바타는 자신의 분신이다. 하지만 가상 세계에서 만나는 다른 ‘주민’의 언어나 행동에 촉발되어 오프라인의 자신으로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행동을 한다. 보통 때와는 전혀 다른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내가 아바타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아바타가 혼자 새로운 생명으로 점점 자라나는 느낌을 받는다.
--- p.45
아바타가 되어 가상공간에서 날개를 펼치는 사람들 중에는 현실 사회에서는 다양한 형태로 자신을 구속하는 카테고리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사람이 많았다. [...] 사회적인 호칭과 카테고리가 마치 단단한 껍데기처럼 그 가능성을 막고 있다. 장애인 혹은 자폐증이라는 카테고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가상공간에서 전혀 다른 모습의 아바타가 되어 의외의 자신을 발견하고 싶은 사람도 많은 것이다.
--- p.49
버추얼 에스노그래피는 새로운 분야다. 방법론이 새로울 뿐 아니라, SNS에서 세컨드라이프, 온라인 게임에 이르기까지 연구 대상도 폭넓다. 그래서 예비 조사 이후, 세컨드라이프를 사용하는 방법이나 팀을 이루어 조사하는 방법을 학생들에게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다양한 그룹이나 행사에 파견하기로 했다.
--- p.60
무엇보다 가상 세계에서 활동하는 자폐 스펙트럼 당사자들이 자폐증과 관계된 건물로 모이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자폐 스펙트럼 당사자들도, 모처럼 꿈과도 같은 가상 세계에 온 만큼 자폐증 이외의 토픽이나 오락에 시간을 쓰고 싶어 한다. 나라도 당연히 그럴 것이다. 다만, 아바타의 겉모습으로는 현실 세계에서는 자폐증이라는 것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세컨드라이프 속 바나 댄스클럽에서 만난 아바타들이 실제로는 자폐 스펙트럼 당사자였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 교류가 깊어진 뒤에야 알 수 있다.
--- p.69
‘성인’ 자폐 스펙트럼 당사자가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대한 정보는 아직 부족하다. 일반적으로 자폐증은 어린이의 발달장애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은 듯하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어린이는 언젠가는 성인이 된다. 인간의 일생을 생각한다면 어린이 시절이 짧고, 성인의 시간이 훨씬 긴 것이다.
--- p.72
심리학이나 정신의학 분야에서의 자폐증 연구는 아직 어린이들 사례가 중심이다. 이는 원래 자폐증이 유아의 발달장애로서 알려진 역사와도 관계가 있다. [...] 하지만 자폐증은, 성인이 되어 일정 방향으로 뇌가 발달된 후에 ‘고칠 수 있는’ 성질의 증상이 아니다. 뇌의 신경회로에 ‘개성’이 있기 때문이다.
--- p.73
다행히도 컴퓨터 채팅을 매개로 하여, 더 나아가 아바타라는 필터를 통하면, 그런 불안감이 덜 조장된다. 익숙한 환경인 자기 집에서 로그인하기 때문에, 불안감을 주는 불필요한 잡음도 차단할 수 있다. 갑자기 악수나 허그를 하자며 다가오는 일도 없다. 디지털이라는 필터가 자신과 타인 사이에 불필요한 정보를 줄이고, 거리를 유지하면서 교류할 수 있게 한다. 안전하다는 감각이 있기 때문에, 타인과의 거리를 줄일 수 있는 것이다.
--- p.79
가상공간에서는 왜, 적지 않은 장면에서, 배려와 공감의 언어가 오갈 수 있는 것일까? 우리가 중요한 무엇인가를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폐증과 디지털 세계의 결합에는 수수께끼가 많다.
--- p.82
사회 적응이나 의사소통에 명백히 장애가 있는 자폐증이지만, 컴퓨터를 통해 자신에게 편한 커뮤니케이션 조건을 컨트롤할 수 있게 되면서 타인과 교류가 가능해지는 경우도 많다. 더 나아가 가상 세계에서는 아바타를 사용해서 주변 환경까지 조절하면서 커뮤니케이션을 하기 때문에, 불안이나 지각 이상을 상당한 정도로 컨트롤할 수 있다. 자신을 대신하는 아바타를 통해 교류함으로써 현장감을 느끼면서도 안전하게 타인과 교제할 수 있는 것이다.
--- p.84
세컨드라이프에서는 의도치 않게 오가는 정보의 범위가 좁기 때문에 대화에 집중할 수 있다. 이 뺄셈의 가상 사회에서 모든 아바타는 시선이 한정적이라는 면에서 자폐증적이다. 자폐증 그룹의 아바타들과 대화를 하면서, 이 뺄셈이야말로 자폐 스펙트럼인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조건임을 알게 되었다. 가상공간에서 덧셈만이 매력은 아니다. 뺄셈의 가상 사회에서 나누는 대화에도 그 나름대로의 매력과 집중력이 있다.
--- p.89
자폐 스펙트럼 아바타들은 채팅을 선호한다. 음성과는 달리, 언어 내용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인데, 그뿐만은 아니다. 음성 커뮤니케이션에서는 언어 이외의 뉘앙스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음성의 톤이나 크기,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 말을 꺼내는가 등 자폐 스펙트럼 당사자가 좀처럼 파악하기 어려운 애매한 정보를 해석할 필요가 추가된다. 그에 비해 채팅은 적절한 타이밍에 정확하게 자기 기분을 전달할 수 있다. 불필요한 잡무로 뇌를 괴롭힐 필요가 없다.
--- p.91
최근에는 자폐 스펙트럼인 사람들의 뇌신경 구조에 다양성이 있다는 점이 확인된 뒤, 이를 자폐증적인 사람의 개성, 혹은 일종의 경향으로 존중하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것이 신경다양성(뉴로다이버시티neurodiversity)이라는 개념의 기본적인 주장이다. 한 나라에 독자적인 문화를 가진 소수자들이 각각의 문화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인정해달라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하다.
--- p.95
자폐증 증상은 정형적으로 발달한 사람들과 함께 생활할 때에는 장애라고 받아들여지지만, 그와 동시에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는 뇌의 개성이라고 한다면, 장애에 대한 ‘지원’을 요구하는 한편 개성에 대해서는 ‘존중’을 요구하는 사고방식도 자연스럽다. 다른 소수자 운동보다 한발 늦었지만, 자폐 스펙트럼 역시 소수자의 특징으로서 존중해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생기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 p.122~123
그녀는 지금도 보통 사람의 세계가 익숙하지 않다. 특히 복잡하거나 미묘한 감정, 질투, 장난 등 늘 변하는 인간이라는 기계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한다. 그녀는 자신의 지성을 십분 활용해 몇 년이나 노력한 끝에, 인간은 이럴 때에는 이렇게 행동한다는 방대한 라이브러리를 머릿속에 구축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에 근거해서 타인과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 p.129
자폐증은 개성에 지나지 않으며, 인류가 만약 자폐증적인 뇌의 작용을 잃어버린다면 대단히 귀중한 가치를 잃어버리는 것이라는, 경험에서 우러난 그녀의 주장은 정말 설득력이 있었다.
--- p.133
〈레인맨〉 현상에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 아바타 토머스가 탄식했듯이,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가 자폐증, 특히 ‘아스퍼거’라는 말을 듣는 순간 〈레인맨〉을 떠올리고, 놀라운 계산 능력이나 기억력 등 천재적인 재능이 있지는 않은가 생각한다.
--- p.145
그들은 거리낌없이 바닥을 뒹구는 등의 반복 행동을 하거나, 서로의 반복 행동에서 취향을 알아내어 작은 선물을 교환하기도 했다. 자폐증 특유의 반복 행동은 정형발달인에게는 강한 이질감을 주곤 하지만, 싱클레어 등에게는 상대를 이해하고 커뮤니케이션하는 계기를 제공하는, 서로를 이어주는 가교였다.
--- p.174
아만다는 말을 거의 할 수 없는 중증 자폐 스펙트럼인 데다가, 몇 가지 신체장애와 질병이 있어서 일상생활에서 도움이 필요하다. 몸을 흔들고 손을 휘적대는 등 마치 의례처럼 반복적인 신체 표현을 강하게 하기 때문에, 어디를 보아도 캐너형의 고전적인 자폐 스펙트럼이다. 하지만 그녀는 블로거로서는 수다쟁이였다. 그 무렵 그녀는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자폐 스펙트럼 특유의 반복 행동으로만 보이는 신체 표현이 자신에게는 자연스러운 언어, 즉 커뮤니케이션의 한 방법이라고 주장하는 동영상을 유튜브에 업로드했다.
--- p.187
가상공간에서 당사자들과 이야기하면서, 나는 점차 정형발달인과 비정형발달인의 관점이 어떻게 다른지 감을 잡게 되었다. 같은 것을 보고 들어도 서로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정보의 의미를 동일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는 단순히 정신세계가 다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더 근본적으로 신체감각을 포함해 인지, 지각의 세계를 관통하는 차이 때문일 수도 있다. 자폐 스펙트럼은 마음의 문제만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신체적인 문제인 것이다.
--- p.190
마거릿의 말에 따르면, “자폐증 증상이 더 심할 때에 감각이 전체적으로 민감해진다. 특정 감각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감각이 예민해진다”. 마거릿의 뇌 속 세계는 정형발달인은 쉽게 알 수 없는, 강렬한 감각 과잉의 태풍이 늘 도사리는 하이퍼월드였다.
--- p.214
흔치 않은 능력을 가진 자폐 스펙트럼 당사자에 대한 존경은 거의 사회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런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에 대한 존경은 자폐증에 대한 사회적 이해를 얻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종류의 감명 역시 일종의 특별 대우다. 그런 사람들에 대한 존경은 자폐 스펙트럼 당사자 중에서도 특별한 종류의 사람들에 대한 경의일 뿐이지,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사람 전체에 대한 존엄성, 말하자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대한 인정은 아니다. 특별 대우는 ‘다름’ 속에 순위를 매기는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 p.225
자폐증의 경우, 언어나 지능이 뒤떨어지지 않으면 정신의학적으로 ‘고기능’으로 분류되지만, 이것이 사회에서 고기능으로 적응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지성이 풍부하고 교양 있는 그녀 같은 사람도 컨디션이 좋을 때는 괜찮지만, 실은 심한 감각 과민이 있다. 무리해서 사회적 요구에 맞추려 하면 갑자기 멜트다운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 p.244
놀라울 정도의 후각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나는 감기나 인플루엔자에 걸린 사람을 냄새로 바로 알 수 있어”라고 어떤 아바타가 말했다. 강아지를 훈련해 병에 걸린 사람을 판명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는데, 하며 모두 놀란 참인데, 다른 아바타가 “나는 동물 냄새에 예민해. 쓰레기통 속에 쥐가 살고 있는 불결한 레스토랑은 냄새로 바로 알 수 있기 때문에 가지 않아”라고 말했다.
--- p.272
손을 휘적휘적대거나 몸을 흔드는 등 신체 표현으로서의 반복 행동은, 정형발달인의 눈에는 기괴하게 보인다. 하지만 래디언트는, 그런 것이야말로 오히려 자폐증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긍정적인 측면이라고 생각한다.
--- p.281~282
가상공간에서 만난 자폐 스펙트럼 당사자들은 놀라움으로 가득 찬 하이퍼월드의 심오한 세계로 나를 안내해주었다. 무엇보다 나는 그 뇌 속 세계의 깊은 연못 옆에 잠시 동안 서 있었을 뿐이었는데도, 아주 먼 곳까지 여행했다는 감각이 있다. 자폐 스펙트럼 당사자의 느낌이나 사물을 보는 법은 내가 세상을 느끼는 방법과 정말로 다르다. 그럼에도, 내게도 부분적으로는 그들과 닮은 느낌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내 주변 사람들을 보는 눈이 달라지는 경험도 했다.
--- p.310
🖋 출판사 서평
하이퍼월드 속의 자폐 스펙트럼 당사자, 뺄셈의 세계 속의 아바타
많은 “성인 자폐 스펙트럼 당사자”들이 현실 세계에선 사회 적응이나 의사소통에 장애나 불편함을 겪지만, 컴퓨터를 통한 가상공간에서는 비교적 편하게 소통할 수 있다. 컴퓨터 앞에 앉는 물리적 조건과 환경을 스스로 선택하거나 만들 수 있기 때문에 타인과의 교류에서 불편함을 덜 느낀다. 아바타를 통해 교류함으로써 불안감이나 지각 이상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고, 타인과의 만남에 대한 현장감도 느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인터넷 문화는 ‘자폐증적 문화’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메타-정보의 홍수라고 할 수 있는 현실과는 달리 “세컨드라이프”와 같은 가상공간에선 오가는 정보의 범위를 한정시켜 대화에 집중하거나 느슨하게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불필요한 정보가 뇌를 괴롭힐 일이 없는 셈이다.
저자가 만난 많은 자폐 스펙트럼 당사자들이 들려주는 내면세계는 일반적인 이미지와는 정반대인 경우가 많았다. 즉 뇌 속에선 폭풍우가 몰아치는 듯한 강렬한 체험을 하고, 과도한 정보를 과잉한 채로 수용하는 “하이퍼월드hyper-world”인 것인데, 이런 상태에선 지나치게 민감하게 지각하고 지나치게 정보를 많이 수용하여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대응할 타이밍을 통치기 쉽다. 하지만 아바타의 세계(이 세계는 대체로 익숙하고 정돈된 자신의 집에서 구현된다)에선 불안감을 주는 불필요한 잡음을 차단하고, 눈에 보이는 세계를 줄이고, 타인과의 실제 접촉을 피할 수 있고, 안전하다는 감각을 유지할 수 있어 타인과의 거리를 줄이고 안전하게 교류할 수 있다. 가상공간은 이러한 “뺄셈의 세계”를 훌륭히 제공한다.
신경다양성 사회 속의 소수자로서의 자폐 스펙트럼 당사자들
저자는 자폐 스펙트럼 당사자들을 “장애인”으로 보지 말고 신경다양성(neurodiversity) 사회의 소수자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폐 스펙트럼 증상은 질병이 아니라 뇌신경구조의 다양성에 의한 것이며, 이러한 뇌신경구조의 다양성을 개인의 개성이나 다양한 경향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자폐 스펙트럼 당사자는 정상인과 구분되는 장애인이라기 보다는, 뇌신경구조가 발달된 형태가 대다수와는 다른 “비정형발달인”이다. 신경다양성에 대한 배려가 있는 사회에선 자폐 스펙트럼 당사자-비정형발달인의 자폐 성향은 개성일 뿐이며, 가상공간과 같은 특정한 조건에선 얼마든지 그 개성이 충분히 표현될 수 있다.
신경다양성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인다면, 자폐 스펙트럼은 장애라기 보다는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는 뇌의 개성이다. 뇌가 정형적으로 발달한 사람들과 함께 생활할 때에는 어려움이 많은 만큼 이에 대한 배려도 필요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개성 그대로 존중하고 지원할 이유도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장애인으로서 보호받고 배려받는 발달장애인이 아니라 사회적 소수자로서 존중받으며 살아가는 자폐 스펙트럼 당사자 운동이 가능한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운동을 한 주류 사회의 성소수자나 사회적 약자, 소수민족들의 소수자 운동과 비슷하다고 보고 있다.
2022년에 방영된 인기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영화 [레인맨](1988), 드라마 [굿닥터](2013) 등에 이어 한국에 “자폐 스펙트럼 장애”에 대한 이해와 인식의 폭을 넓힌 계기였다. 드라마나 영화 등에서 그려진 자폐 스펙트럼 당사자들은 놀라운 계산 능력이나 기억력 등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실제로 천재로 분류되는 정형발달인이 소수인 것처럼, 범상치 않은 암기력이나 표현 능력을 가진 자폐 스펙트럼 당사자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이런 드라마나 영화가 자폐 스펙트럼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긍정적으로 확산시키는 데에 일조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자폐 스펙트럼은 천재적 능력을 숨기고 있다”는 오해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많은 “정형발달인”들이 자폐 스펙트럼 당사자들에게 천재적인 능력을 기대하고, 범상치 않은 능력이 없다고 하면 실망하거나 혐오를 표현하기도 한다. 저자는 자폐 스펙트럼 당사자 전체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저마다 개성을 지닌 사회적 소수자로 살아가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신경다양성이라는 렌즈로 보는 인간의 다채로운 세계
저자는 “가상공간에서 만난 자폐 스펙트럼 당사자들은 놀라움으로 가득 찬 하이퍼월드의 심오한 세계로 나를 안내해주었다. 무엇보다 나는 그 뇌 속 세계의 깊은 연못 옆에 잠시 서 있었을 뿐이었는데도, 아주 먼 곳까지 여행했다는 감각이 있다. 자폐 스펙트럼 당사자의 느낌이 사물을 보는 법은 내가 세상을 느끼는 방법과 정말로 다르다. 그럼에도, 내게도 부분적으로는 그들과 닮은 느낌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내 주변 사람들을 보는 눈이 달라지는 경험도 했다”고 고백한다 (310쪽). 자폐 스펙트럼은 그 자체로 개성이며 인류가 자폐증적인 뇌의 작용을 잃어버린다면 대단히 귀중한 가치를 잃어버리는 것(133쪽)이라는 자폐 스펙트럼 당사자 활동가 그랜딘의 말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이 책은 자폐 스펙트럼 당사자들이 장애인이 아니라 사물을 보는 방식이나 스타일이 다른 사회적 소수자임을 밝히고, 자폐 스펙트럼에 대한 장애와 비장애의 고정관념을 넘어서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그리하여 신경다양성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보는 인간의 다채로운 정신세계를 그려내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