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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10일 오늘의 역사
2023년 전남 순천에서 세계 최대 크기의 희귀산삼이 채굴.
한국전통심마니협회에 따르면 등산객 A(57)씨가 지난해 전남 순천군과 화순군의 경계 산지에서 가로 112cm, 세로 80c, 무게 415g의 희귀산삼을 발견했다.
협회는 국내 산삼과 비교해 특색이 있다고 판단하고 충북 첨단원예센터 연구진과 충북대 원예과학과 백기엽 교수팀에 성분 분석을 의뢰했다. 분석 결과 인삼의 사포닌 성분 중 항암 작용이 가장 뛰어난 물질인 Rg3 함량이 높게 나왔다. 협회는 이 산삼이 세계 최대 크기이며, 1천여년 전 백제와 통일신라시대에 나타난 산삼과 닮은 형태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 산삼의 감정가는 6억8천만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2023년 그리스 '마지막 국왕'콘스탄티노스 2세 사망
2023년 미국 캘리포니아 사상최악의 폭우 최소 16명 사망 25000여명 대피
2023년 인도네시아 암본 인근 해상서 7.6 강진 잘생
2022년 전남산림자원연구소는 완도 섬 지역에서 발견한 미기록종을 '완도술꽃나무'로 명명하고 국내 학술지인 한국식물분류학회에 공식 발표
2016년 영국 가수 데이빗 보위(70세) 세상 떠남
2015년 경기 의정부 대봉그린아파트에 불 4명 사망 128명 부상 289기구 피해
2010년 존엄사 논란 김(金)할머니 201일 만에 별세
2009년 6월 국내 최초로 대법원에서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하라’는 판결을 받은 ‘김할머니’(78)가 인공호흡기를 뗀 지 201일만인 2010년 1월 10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서 별세했다.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 지로는 328일 만이다.
김 할머니는 2008년 2월 병원에서 폐암 조직 검사를 받다가 예상치 못한 과다 출혈로 뇌 손상을 입어 식물인간(PVS) 상태에 빠졌다. 이후 가족측은 ‘기계장치로 수명을 연장하지 말라’는 것이 어머니의 평소 뜻이었다며 같은 해 5월 소송 인공호흡기를 제거해달라는 소송을 냈고, 약 1년 만에 ‘인공호흡기를 떼라’는 대법원의 최종 판결을 받아 지난해 6월 23일 호흡기를 제거했었다.
김 할머니는 2009년 6월 23일 인공호흡기를 제거한 이후 세브란스병원 15층의 한 병실에서 자발호흡을 유지해왔었다. 호흡기를 제거하면 3시간을 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의료진의 예상과 달리 김 할머니는 해를 넘겨 200여일간 스스로 숨을 쉬며 생존했다.
2009년 류수환 전 국회의원 별세
류수환(柳壽桓·코맥스화학 명예회장) 전 국회의원이 2009년 1월 10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78세. 고인은 부산수산대를 나와 1980년 민주정의당 창당발기인으로 참여, 11대 민정당 전국구 의원을 지낸 뒤 대한중공업 노조위원장, 영가학원재단 이사장, 경북체육회 고문, 민정당 창당발기인, 동해펄프 사장, 한나라당 국책자문위원, 코멕스화학㈜ 대표이사 등을 역임했다.
2005년 기상청 계절의 정의 다시 내림
하루 평균기온 5도 이하는 겨울 20도 이상은 여름, 그 사이가 봄과 가을. 1920년대에 비해 1990년대는 겨울이 한 달 정도 짧아졌고 봄과 여름이 그만큼 길어짐
2003년 북한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
2002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추상화, 남아공서 발견됐다고 AP통신 보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7만여 년전의 추상화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에서 290여km 떨어진 인도양 연안의 블로보스 동굴에서 발견됐다고 AP가 2002년 1월 10일 보도했다. 지금까지 가장 오래된 추상화는 프랑스의 여러 동굴들에서 발견된 3만5천년 전쯤으로 추정되는 것들이었는데, 이번 발견은 인류 추상화의 기원(起源)을 3만5천년 정도 더 앞당긴 것으로 평가된다.
이 추상화는 철광석의 일종인 `오커(ocher)`의 표면을 평평하게 한 다음 날카로운 도구를 사용해 균등한 간격으로 대각선 여러 개를 긋고 다시 반대방향으로 대각선을 그어 마름모꼴과 삼각형을 표현한 것이다. 동굴에서는 또 8000여개의 적토 조각이 발견됐는데, 철광석 형태인 이들 적토는 10만년 미만의 석기시대 지층에서 자주 발견되는 것으로 몸치장이나 장식을 위한 안료로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2000년 미국 타임워너-인터넷그룹 AOL의 합병으로 세계최대 미디어 업체 `AOL 타임워너` 탄생
세계 최대의 미디어-오락 그룹인 타임 워너와 대형 인터넷 그룹인 아메리카 온라인(AOL)이 2000년 1월 10일 사상최대인 3500억달러 규모의 주식 교환 방식으로 합병키로 합의했다. 이날 합병으로 탄생한 새 미디어 그룹은 매출액이 300억달러가 넘는 초대형 그룹이 됐다.
양사의 최고 경영진은 이날 `동등한 자격의 합병`이라고 자랑했지만, `AOL 타임워너`의 지분구조를 보면 AOL이 타임워너를 사들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AOL이 55%의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날 합병은 인터넷 회사가 기존 대형 미디어를 인수했다는 점에서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다. 인터넷 회사는 언제나 인수대상이었기 때문이다. `AOL 타임워너`의 탄생은 양사가 인터넷 등 뉴미디어 장악을 위해 끊임없이 고민했던 문제들이 해결됐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었다.
서비스 포털업체 AOL은 늘 콘텐츠가 부족했고, 반대로 잡지, TV, 음반 등 콘텐츠가 풍부한 타임워너는 야후나 AOL과 같은 포털업체가 없어 도약하는데 늘 좌절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미국 연방거래위원회(FTC)는 12월 14일 11개월 만에 만장일치로 합병을 승인했다
1998년 강감찬 장군 표준영정(장우성 그림) 도난
1994년 한국남극점탐험대 1,400여km를 걸어서 44일 만에 남극점 정복에 성공
“우리는 해냈습니다. 여기가 남극점입니다.” 한국인이 마침내 지구의 마지막 극지 남극점에 태극기를 꽂았다. 중간보급과 단 하루의 휴식도 없는 미증유의 대기록을 세워 한국인의 강인한 의지와 체력을 온세계에 입증했다. 주인공은 허영호, 김승환, 유재춘, 홍성택 등 4명의 한국남극점 탐험대였다. 이들은 1994년 1월 11일 오전6시30분쯤(현지시각 10일 오전6시30분) 남위90도 남극점에 도달, 1천4백여㎞의 대장정을 성공리에 끝냈다.
탐험대는 1993년 11월 20일 서울을 출발, 25일 오전 5시쯤(현지시각 24일) 극점탐험의 출발점인 남극대륙 패트리어트 힐에 도착하여 29일 오전2시쯤 장정에 돌입, 44일간이라는 기록으로 극점 정복에 성공했다.
한국탐험대는 개썰매나 스노모빌등의 도움을 받지 않고 걸어서 극점까지 갔으며, 중간보급을 전혀 받지 않았다. 1911년 노르웨이의 아문센 탐험대가 인류최초로 남극점을 정복한 이래 남극점에 선 나라는 많지만 도보탐험에 성공한 나라는 영국, 이탈리아, 일본 등 3개국 뿐이었다.
1994년 삼성전관, 세계두번째로 와이드TV용 평면 브라운관 개발
1991년 `재일 한국인의 법적지위와 처우에 관한 각서` 체결
이상옥 외무장관과 나카야마 다로 일본 외무장관이 1991년 1월 10일, 1992년말까지 재일 한국인의 지문날인제를 폐지키로 하는 것을 골자로 한 `재일 한국인의 법적지위와 처우에 관한 각서`에 서명, 교환했다. 각서는 재일교포 3세 후손에게 영주권을 자동으로 부여하고 강제퇴거사유를 국사범에 한정했으며 재입국허가기간을 최대 5년으로 연장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이 합의로 일본에 영주하는 다른 외국인도 지문날인을 하지 않게 됐다. 하지만 비영주 외국인에 대한 지문날인은 계속 유지되어 국제연합 인권위원회로부터 시정 권고를 받기도 했다. 1955년부터 실시된 지문날인제도는 외국인에게만 정기적으로 지문날인을 강요함으로 외국인의 인권을 부당하게 억압하는 제도라며 그동안 세계각국으로부터 비난받아왔다.
1989년 재불화가 이응로 사망
재불화가 이응로 옹이 1989년 1월 10일 파리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1904년 충남 홍성에서 출생한 이옹은 20세때 상경, 김규진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웠다.
그림을 배운지 얼마 되지 않아 선전(鮮展)에서 입선(1924) 화단에 데뷔하나 그는 1936년 일본으로 유학, 송림계월(松林桂月)에게서 사사하다가 광복과 함께 귀국했다. 1958년 파리로 진출해 활동하던 그는 1965년 제8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 동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명예상을 수상,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그는 파리생활 40년 동안 동양적인 색채가 강한 개성있는 그림으로 파리화단에 충격을 주며 독보적인 작품활동을 해왔다.
1967년 동베를린간첩단사건으로 재독 작곡가 윤이상 등과 함께 옥고를 치렀고, 1977년에는 백건우-윤정희부부 납치사건에 연루되어 민족분단의 아픔을 직접 체험하기도 했다
1985년 다니엘 오르테가, 니카라과 대통령에 취임
1984년 북한 남북한-미국 3자회담 제의
1984년 리영희, 강만길, 조승혁 국가보안법 위반 구속
1980년 충주 다목적댐 기공
1978년 박동선사건을 처리하기 위한 한미법무회의 개최
1977년 서울의 한 박물관에서 고려초조대장경인본 발견
1975년 구미대교 개통
1973년 조윤형 김상현 조연하 국회의원 3명 뇌물수수혐의로 구속
실제로는 10월 유신을 비난하고 망명한 김대중 계 정치인에 대한 정치적 탄압
1971년 디자이너 샤넬 사망
20세기 패션의 대명사 가브리엘 샤넬이 1970년 1월 10일 8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패션 혁명가였다. 모조보석을 귀부인의 목에 걸게하고 남자옷과 여자옷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장례식에서나 쓰는 검정옷을 처음으로 일상화시켰다.
1883년 8월19일 프랑스 르와르 강변마을 소뮈르에서 행상인의 딸로 태어나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란 샤넬은 그나마 12살때 언니와 함께 고아원에 맡겨졌다. 고아원 시절의 검정 유니폼과 베이지색 복도, 성당의 중후하고 화려한 장식들은 감수성 강한 그녀의 뇌리에 깊이 각인돼 후에 샤넬 패션의 기본색상을 이뤘다.
1915년 그는 파리에 ‘샤넬’ 디자인 부티크를 개설했다. 샤넬은 남녀 양성적이고 단순화된 독특한 스타일을 세련되게 표현했다.
그러나 1939년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 중 샤넬은 독일 군인을 사랑하게 되어 전쟁 후 스위스에 잠적하면서 1954년 회사가 문을 닫았다. 15년 만인 71세의 나이로 다시 파리에 부티크를 연 샤넬은 그곳에서 그 유명한 장식끈을 단 트위트 투피스를 만들었고 이 투피스는 코코샤넬의 명성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여성들을 위해 기발하고 독창적이며 단아한 스타일을 창조해 낸 디자이너 샤넬. 살아 있을 당시 신화적인 인물로 칭송을 받았으며 미디어라는 용어가 널리 쓰이기도 전에 미디어의 총애를 받았고, 사후에도 샤넬의 신화는 계속되고 있다.
1966년 샤스트리 인도 수상이 소련 타시켄트에서 사망
1965년 수필가 전혜린 사망
1965년 1월 10일 번역문학가이자 수필가인 전혜린이 31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평남 순천에서 태어나 서울대학 법과대에 입학한 전혜린은 수학이 0점이었지만 다른 과목이 워낙 출중해 입학됐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두뇌가 뛰어났다.
대학 입학 후 법대에 흥미를 잃고 문리대를 기웃거리며 문학의 세계로 빠진 전혜린은 1955년 독일에서 유학하면서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1959년 귀국해 서울대학 법과대 강사를 거쳐 성균관대 교수가 되며 안정된 삶을 갖게 됐지만 1960년대의 한국적 상황은 그녀의 감성을 흔들어 놓았다.
전후 한국 젊은 세대들의 감수성의 한 축을 대표했던 그녀의 산문집으로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가 남아있으며, 루이저 린제의 ‘생의 한가운데’,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 등 다수의 독일 문학작품을 번역했다.
1964년 파나마 운하지대서 파나마인 반미폭동에 미국 경찰의 발포로 200여명 사상
1964년 1월 10일 파나마에서 파나마 반미폭동이 발생했다. 파나마 시위자들과 미국 및 운하지대경찰간의 충돌은 미국 학생들이 운하 지역 내에서 성조기의 게양을 제한시킨 파나마의 조처에 항의 데모를 벌인 후에 격화됐다.
그러나 미군의 파나마 주둔에 점증하는 분노가 이번 폭력의 주요한 이유였다. 많은 파나마인들은 파나마가 운하에 대하여 더 많은 통제권을 행사하기를 원했다. 이번 충돌로 양국 간의 국교가 단절되기에 이르자, 존슨 미국대통령은 파나마 사태의 평화적 수습을 위해 11일 토마스 만 미국무차관보와 사이러스 반스 육군장관을 보내 로베르토 치아리 파나마 대통령과 회담을 가졌다.
이들이 회담하는 가운데 미군의 발포로 또다시 충돌이 벌어졌다. 이틀간의 폭동으로 17명의 파나마인과 3명의 미군이 사망했고 부상자는 3백명에 이르렀다. 이후 미국과 파나마 양국은 4월 5일 화해에 합의한 후 외교관계를 재정립하고 분쟁원인 해결안을 강구하기로 했다.
1963년 공화당 발기대회
1962년 문화재위원회 설치, 문화재보호법 공포
1962년 전 검찰국장 위청룡 사건
1962년 군내반혁명사건으로 장도영에 사형선고
1962년 페루, 눈사태로 3,000여명 사망
1961년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회)의 모태인 한국경제협의회 발족
1960년 흑산도 해상에서 해안경비정 701호가 중국무장어선에 피격.
1959년 충북선 철도 개통
1957년 제1차 금융통화운영위원회 개최
1956년 엘비스 프레슬리 히트곡 `브레이크 호텔` 녹음 시작
1951년 미국 작가 싱클레어 루이스 사망
1951년 한국전쟁 중 국군 37도선 이남으로 후퇴
1950년 애치슨라인 발표
애치슨라인은 미국의 안전보장을 위한 태평양방위선으로 한국을 배제하고 알래스카-일본 오키나와-대만-필리핀으로 함으로써 한국전쟁이 일어난 한 요인으로 작용
1950년 현대건설(현대자동차-현대토건사 합병) 설립
1949년 독일 지리학자 드리갈스키 사망
1946년 제1회 유엔총회 런던에서 개최
1941년 독일, 소련이 신우호협정 체결
1937년 국내 첫 어린이 신문 소년조선일보 창간
1931년 조선어연구회가 조선어학회로 개칭
1929년 에르제의 만화 `소련의 탱탱`첫회가 벨기에 잡지에 게재
1926년 조선일보에 연재됐던 한국최초의 신문연재만화 `멍텅구리 헛물켜기`, 영화로 제작돼 조선극장에서 개봉
1922년 와세다대학 건립한 일본의 정치가 오쿠마 시게노부 사망
1920년 국제연맹 발족
1920년 1월 10일 국제평화기구이자 국제연합의 전신인 국제연맹이 설립됐다. 국제연맹은 제1차 세계대전 후 연합국이 중심이 되어 국제평화 유지, 국제협력을 증진시키기 위해 탄생했다.
1918년 1월 토머스 윌슨 미국 대통령이 `평화를 위한 14개 조항`을 발표하면서 구체화되었고,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서 연맹의 규약을 정했다.
국제연맹의 주요업무는 집단안보, 개방외교, 무기감축에 있었으며 본부는 스위스의 제네바에 두었다. 설립당시의 가맹국은 42개국이었고 추가로 가입을 원하는 국가는 군비축소와 국제의무 준수를 조건으로 총회의 2/3이상이 되면 다수결로 가입이 가능했다. 주요기관은 총회 이사회 사무국이 있었고, 관련기관은 상설국제사법재판소와 국제노동기구가 있었다. 초창기 10년 동안 국제연맹은 효과적으로 운영되어졌으나 연맹의 가장 중요한 임무인 전쟁 방지 기능이 약하였고, 문제해결의 방식이 만장일치제였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다. 국제연맹은 제2차세계 대전이 일어남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해체됐다.
1913년 티베트 독립선언
1910년 소련 최초의 최고 수석 발레리나 울라노바 출생
1906년 통감부 통신관리국 설치
1901년 미국 텍사스주 대유전(大油田) 발견
1894년 전라도 고부군민, 전봉준 영도하에 고부관아 점령
1894년 1월 10일 1,000여명의 동학교도와 농민이 전라도 고부군에서 흰수건을 머리에 동여매고 몽둥이, 죽창을 들고 폐정개혁 조목을 내걸며 노도와 같은 형세로 관아에 밀어닥쳤다. 이들은 무기를 탈취하고 불법으로 징수한 세곡을 모두 빈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1876년 개항 이후 일본의 경제적 침투로 인해 농민의 생활이 억압당하고 탐관오리의 횡포가 심해지고 있을 무렵,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농민들에게 온갖 탐학을 더하였다. 이를 견디다 못해 동학의 고부접주 녹두장군 전봉준을 선두로 고부군민은 마침내 울분을 터뜨렸다. 이날의 고부 봉기에서 시작해 그해 10월 금구싸움으로 마무리되는 갑오농민전쟁 또는 동학농민운동은 근대를 향한 조선 민중의 몸부림가운데 가장 찬란하고 처절한 장면이었다. 이 농민전쟁의 비극적 마무리로 결국 조선은 그 뒤 식민화와 뒤틀린 근대화를 겪게 됐다. 이 운동의 한 가운데 있던 사람이 전봉준이었다.
동학농민운동은 조선왕조의 농업 산업 수공업 신분제도 등 하부구조에서 봉건적 구성의 붕괴가 바로 사회의식에 반영되어 실학의 발생과 평민의식의 대두를 보게 되면서부터라 할 수 있다. 특히 그 규모와 이념적인 면에서 농민봉기로 보지 않고 정치개혁을 외친 혁명으로 간주되었으며, 또 농민들이 궐기하여 부정과 외세에 항거한 농민운동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1880년 스위스의 광대 그로크 출생
1863년 세계최초의 런던지하철 개통
세계최초의 지하철이 영국 런던에서 1863년 1월 10일 개통됐다. 팔링턴 스트리트와 비셥스 로드의 패딩턴을 잇는 6km 구간의 이 첫 지하철은 증기기관차였다. 지하철 상태는 매우 열악해 터널 천정은 지상도로에서 수인치 두께 밖에 안되었고 매연과 증기를 뽑아내기 위해 여기저기 통풍구가 뚫렸으며 때로는 가옥 밑을 통과하기도 했다.
패딩턴으로부터 팔링턴街까지 메트로폴리탄선 제1구역을 건설하는 데만 3년이 소요됐다. 패딩턴역에서 가진 개막식에는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글래드스턴이 첫 번째 열차를 탔다. 에스컬레이터로 역에 들어가고 빠져 나올 수 있게 하자는 비쇼의 제안은 그 뒤에 실현되었다.
유럽 대륙에서 처음으로 지하철이 들어선 도시는 헝가리의 부다페스트(1896)였다. 뒤이어 1898년에는 오스트리아의 빈에, 1900년에는 프랑스의 파리에 그리고 1902년과 1906년에는 독일의 베를린과 함부르크에 차례로 지하철이 들어섰다. 미국에서는 1901년 보스턴에 첫 지하철이 생겼고 뉴욕 지하철은 1904년에 개통됐다. 아시아에서는 1927년 일본 동경에 첫 지하철이 개통됐다. 한국의 첫 지하철은 1971년에 착공해 1974년 8월15일 개통됐다.
1835년 일본 메이지시대의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 출생
1808년 러시아 작가 마푸 출생
1778년 생물 분류법의 기초를 다진 스웨덴 식물학자 린네 사망
스웨덴의 식물학자 카를 폰 린네가 1778년 1월 10일 웁살라에서 사망했다. 린네의 가장 큰 업적은 생물 분류법의 기초를 다진 점에 있다. 그가 8천가지의 식물과 4천1백62종의 동물을 분류하고, 이름을 부여한 학명은 오늘날까지도 생물 분류학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생물 분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린네는 1707년 스웨덴의 로스홀트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과학자의 재능을 보인 린네는 웁살라대학에서 공부했고 네덜란드에서 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742년부터 웁살라대학의 식물학 교수 겸 의학 교수로 근무하며 분류학과 식물학의 체계를 잡은 공로로 1761년 스웨덴 최초의 귀족 과학자 칭호를 수여했다. 이때부터 그의 이름은 귀족을 상징하는 카를 폰 린네로 불렀다.
린네는 식물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수집가로도 활약했다.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수집한 수많은 식물과 곤충 그리고 광물의 표본은 박물관을 만들어 보존했다. 린네가 남긴 연구자료와 소장품은 모두 스물 여섯 상자나 되었고 도서는 3천여 권이나 되었다.
1668년 터키 이즈미라에 지진 발생, 2만여 명 사망
1597(조선 선조 30) 정유재란 일어남
1400(조선 정종 2) 집현전을 보문각으로 이름 바꿈
1234년 중국 금나라 멸망
BC49 시저 루비콘 강을 건넘